2005년 10월 21일 So1배 스타리그 A조 테란 임요환 대 프로토스 박지호 경기
프롤로그 가장 훌륭했던 스타리그 에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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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트 815,.. "근성“
2세트 네오포르테... “해법”
3세트 라이드오브발키리 “무리수”
4세트 알포인트 “타이밍”
5세트 다시 815 "무아지경"
#1세트 815 "근성“
임요환 테란 1시 Vs. 박지호 프로토스 11시
박지호 승
“두 선수 첫경기부터 엄청나네요” 김태형
임요환을 황제로 만들어 준 건 드랍십이다. 1, 5경기가 치러지는 전장 815가 흥미로운 건 그래서다. 815는 소형 유닛만 본진 입구를 나갈 수 있는 이른바 조건형 반섬맵으로, 하늘을 넘나드는 기동성이 필수다. 빠르게 드랍십을 뽑아야 하는 테란으로선 선택지가 몇 가지로 추려진다. 빠르게 찌를 것인가. 섬을 옮겨가며 확장에 치중할 것인가.
전성기의 황제였다면 분명 찌르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반 임요환은 두텁게 벽을 친다. 전술의 명수 이상으로 물량 수비까지도 온전한 올라운더로 진화하느냐가 새시대 그의 과제다. 가까운 섬 지역 두 곳에 확장을 가져가고 제국을 건설한다. 비록 막혔지만, 레이스 찌르기로 점수를 착실히 따낸다.
박지호는 7시 확장을 빠르게 확보했다. 상대가 잽을 날릴 때, 그는 질럿 다수를 상대 진영 앞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임요환은 가뜩이나 좁은 입구를 굳게 닫고 대비한 뒤다. 그때 박지호의 표정이 비친다. 긴장으로 아무 색 없이 굳어있다. 이 큰 무대에서 황제를 맞닥뜨렸다는 것. 그 위엄과 권위에 짓눌린 것도 없지 않으리라. 박지호는 이번 경기 내내 전장의 테란 병력 외에도 중압감이라는 적과도 싸우고 있다. 관중들의 반응은 임요환 쪽에 기울어져 있는 듯 보인다. 박지호는 지금 호랑이 입에 들어온 기분을 느끼고 있다.
오랫동안 버티고 있던 임요환이 드디어 판단을 내린다. 임요환 본진 앞마당에 상대 병력의 발이 묶여 있다는 걸 보고서다. 드랍십 5기에 골리앗 다수를 싣고 상대 스타팅 멀티를 향한다. 임요환의 판단이 옳았다. 병력이 몰린 탓에 수비는 텅텅 비었다. 그야말로 승부수. 박지호는 긴급히 병력을 뒤로 물렸다.
이날 게임에서 임요환의 드랍십은 전성기에 보여준 견제 용도가 아니라 묵직하게 밀어 붙이는 한방이다. 드디어 전장다운 전장이 펼쳐진다. 임요환이 벼리고 벼렸던 승부수다. 더구나 자신이 선택한 전장이기도 하다. 박지호가 버텨보지만, 결국 7시 멀티는 박살난다.
임요환이 승기를 잡아갈 때 정작 박지호의 판단이 빛난다. 우악스럽게 지키려던 박지호가 멀티를 순순히 버리고 회군한 것. 수중에 들어온 재산을 순순히 놓아버리다니, 박지호의 패착이라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점에서 아이러니다. 정작 박지호의 표정이 풀린 건 이때부터였다.
박지호는 지금 주먹을 맞대면서 적의 수와 수준까지도 읽어나가고 있다. 임요환이 묵직한 한방에 의존하다 보니 기동성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박지호가 큰 그림을 그린다. 그는 큰 섬을 옮겨다니며 거대한 보급망을 잇는다. 임요환이 7시 멀티에서 남은 건물들까지 불을 지를 때 박지호는 가볍게 4시 멀티로 옮겨가 있었다. 상대는 노련한 황제다.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것만을 밟아나가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싸움은 피하고 한없이 가벼워져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박지호는 깨달았다.
흔히 비효율적인 전투와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상징되는 박지호의 스타일을 ‘꼬라박’이라고 부른다. 그의 플레이가 희화되면서 흔히 간과되어온 사실은 애초에 그 물량은 체계적이고도 발 빠른 확장 덕분이라는 점이다.
제갈량이 훌륭한 전술가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진짜 탁월함은 피폐해진 촉을 수습해서 중과부적으로 보였던 상대에 맞서 대군을 조직해낸 역량에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제갈량을 신묘하다고 묘사할 때, 실제 역사인 정사는 제갈량과 관련해 행정가로서의 업적에 더 비중을 둔다. 박지호의 역량도 그와 비슷할지 모른다. 박지호는 무식한 돌격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 물량으로 보건대 보급과 병참에 탁월한 행정가다. 박지호는 대군을 추슬러 임요환의 제국으로 나아간다.
커다란 전장에서 적금처럼 쌓아놓은 캐리어의 기동성이 빛을 발한다. 짧은 동선만을 타고 이동하면서 상대의 섬 확장을 두드린다. 드랍십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점수를 착실히 쌓았지만, 캐리어는 적의 급소를 직격한다.
마지막은 질럿과 하이템플러 다수가 장식한다. 상대 진영까지 올라가서 캐리어와 합류한다. 물량이 터져나온다. 천하의 황제도 사이오닉스톰으로 압박해오는 상대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첫 게임이 박지호의 손 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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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알려진대로다. 2005년 10월 2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메가웹스테이션에서 열린 So1배 스타리그(온게임넷 주최 온세통신 후원) 4강 A조 경기. 테란 임요환이 프로토스 박지호를 3 대 2로 눌렀다. 5판3선승제에서 2패 뒤 3연승을 거둔 리버스스윕(Reverse Sweep)이었다.
두 차례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을 거머쥔 황제 임요환은 So1배가 시작하던 무렵에 전성기는 이미 지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전년도 리그인 에버2004배에서 결승전에 올라 준우승했으나 객관적인 실력은 같은 테란 중에서도 최연성, 이윤열에 밀린다는 평가가 다수였다. 물량과 수비력을 기본기로 둔 무결점 올라운더가 패권을 쥐는 시대에 여전히 임요환은 견제와 찌르기의 명수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그런 임요환이 So1 스타리그 8강서 물량으로 한때 그의 천적으로 불리던 프로토스 박정석을 2:0으로 이긴 게 의미심장했다. 박정석은 2002년 스카이배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황제를 꺾고 우승(3:1)한 선수다. 우승 당시 박정석은 소수 유닛 효율을 중시하던 프로토스의 전략 패러다임을 물량으로 전환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박정석은 전술과 날카로운 찌르기로 상징되는 임요환을 물량으로 그야말로 압도했다. 물량의 시대가 열렸고, 황제를 최고 실력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로부터 3년 뒤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임요환이 박정석을 힘싸움으로 밀어낸 것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물량이라는 약점을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전략과 마이크로 컨트롤의 명수 그 이상을 요구받는 시대, 임요환은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점이 그 명민한 황제의 변화를 통해서 여실해졌다. 그렇다. 임요환은 스타일리스트에서 올라운더로 진화하고 있었다.
한 가지 더 인상적인 점. 물량의 달인 최연성이 같은 대회 8강서 저그 박성준을 상대로 1경기 벙커링과 2경기 본진 플레이를 통해 속도를 끌어올려 압도했다. 이는 견제와 쉼없는 압박으로 대표되는 임요환을 떠올리게끔 했다. 임요환과 최연성이 바뀐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스타일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이때부턴 최적화만 있을 뿐이다. 올라운더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했다. 스타일리스트들이 몰락하고, 오늘날까지의 스타판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경향성이다.
박지호와 임요환이 맞붙은 So1 스타리그 4강 A조(B조는 최연성과 오영종) 스타리그 역대급 명승부로 기억된다. 임요환은 위기를 벗어나 노련함으로 대역전을 거둔다. 이날 4강전의 평균 시청률은 1.40%였다. 당시 역대 E스포츠 최고 평균시청률 기록이다. 임요환 쪽에 기울어진 경기였다. 스타리그 최고의 스타인 임요환이 좋은 성적을 거둬야 리그도 흥행하기 때문일 터. 4강 이전의 승부들도 임요환이 부활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많은 이들이 임요환을 응원했다. 4강전. 임요환을 위한 무대에서 그와 맞섰던 신예 선수는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패배했다. 지금도 박지호를 말할 때 임요환과의 4강전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임요환 팬이 더 많다보니, 박지호는 명승부를 빛낸 조연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이는 그 게임의 의미를 너무 좁게 본 것이다. 당시 박지호의 패배는 한 개별 프로게이머의 결승 좌절 이상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리그에 있어서 어떤 주도권의 변화가 이날의 패배를 기준으로 확연해졌다. 그 무렵 바로 강점과 약점이 공존하는 스타일리스트의 시대는 확실히 종언을 고했다. 물량과 운영, 컨트롤까지 약점 없는 토탈 패키지 시대로 주도권이 완벽하게 넘어갔다. 박지호는 마재윤과의 성전을 치르는 강민과 더불어 올라운더 경향에 맞선 스타일리스트였다.
개별 게이머 차원에서 스타일리스트의 시대는 전년도 리그인 에버2004를 기점으로 퇴조했다. So1배(2005년) 이듬해인 2006년엔 본격적으로 물량, 컨트롤과 견제, 수비, 정찰 등 모든 면에서 약점 없는 플레이를 펼쳐야 승리를 거두는 올라운더의 시대가 왔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물량에서 밀리지 않던 임요환이 보여주는 변화상이다.
임요환이 스스로 명민한 게이머였기에 올라운더 트렌드에 빨리 올라탄 것으로 볼 수 있다. 테란은 상대방을 찌르면서 동시에 확장까지 가져가는 공수 병행과 앞마당 확장 등 최적화라는 키워드를 가장 빨리 깨치고 적응하면서 시대의 패권을 쥔 종족이다. 이러한 흐름은 이윤열과 최연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확고해졌다. 임요환도 그런 변화를 착실히 따랐다.
올라운더 시대의 도래는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2000년대 중반 들면서 저그도 올라운더 시대에 올라탄다. 마재윤은 안정적인 물량과 확장을 기반으로 한 다수 해처리 운영을 통해 약점없는 플레이를 했다. So1 반년 뒤 치러졌던 메이저대회 MSL(프링글스 MSL 시즌1)에선 올라운더 마재윤이 누구보다 뚜렷한 스타일리스트 강민을 물 흐르듯이 압살했던 건 이렇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스타일리스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토탈 패키지, 올라운더를 넘어서지 못하는 시대로 넘아간 것이다.
올라운드와 맞설설 수 있는 건 같은 체급의 올라운더다. 탁월한 물량으로만 알려졌던 신예 김택용이 컨트롤과 견제까지도 완벽하게 해내면서, 즉 토탈패키지로 진화한 뒤에야 프로토스가 마재윤을 넘어선 사실은 과연 의미심장하다.
박지호는 그 무렵 올라운더로의 흐름을 마지막까지 거부했던 유형이었다, 무식할 정도의 물량 일변도로 자신의 색을 분명히 했고, 스타일리스트의 시대를 끝내려는 이들과 맞섰던 당랑거철이었다. 그는 저무는 시대의 마지막 주자였다. 그는 때론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인 운영을 해서 ‘꼬라박’ 혹은 ‘스피릿’으로 불리는 스타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해 스타리그 4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략들을 변주하면서도 토너먼트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론 기본유닛 그중에서도 질럿을 중심으로 한 압박과 힘싸움에 특화돼 있었다. 한 줄로 뛰어가는 질럿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었다. 그는 때론 손해를 보면서도 그러한 스타일을 이어갔다.다른 이들과는 차별화된 명승부를 만들어냈고, 여전히 그 승부들은 뇌리에 남아 있다.
한 줄 질럿은 최적화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런 고집스러운 플레이로 이긴 승부까지도 그르칠 때, 누군가를 사로잡은 채로 가파른 방향으로 쓸어가는 정신의 이상한 작용이란 도대체 무엇이냐고,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플레이에 매달린 것일까. 우리가 어떠한 경향성에 붙들리는 것은 왜인가. 스타에도 신이 있다면 스타일리스트의 플레이에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이다. 상대를 압도하겠다며 모험수를 두다니, 턱없는 타이밍에 조바심을 내다니. 미세하나마 우위를 차지했다면 실수를 줄이는 것이 정수일 텐데. 그렇게 신이 떠났고. 승패로만 정리된 차가운 결과표를 남겼다.
승부란 신의 눈에는 명백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질문을 품은 채로 살았다. 왜 어떤 스타일리스트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번뜩이는 불빛에 이끌리며, 그 명명하는 것들을 쫓는 것인지, 어째서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스타일로 쏠려버리는 것인지. 기어이 내 안의 경향성에 붙들려 턱없는 악수를 두고 마는 것인지.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불빛을 따르는 스타일리스트의 감정이란 무엇인지. 나는 궁금했다.
그리하여 갑작스러운 충동에 휘말린 승부사의 감정을 더듬어 가본다. 악수의 충동과 실수의 진창 속에서 성내며 후회하되, 다시 돌아간대도 자기 확신만을 부여잡은 채로 덤벼들어야 하는 스타일리스트의 숙명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