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의 네메시스는 LCS EU에서 뛰지 않은 미드라이너 가운데 가장 유망한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휴머노이드, 라르센, 아베다게 등의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거론되는 신성이었죠. (당시 팬들 사이에서는 보통 휴머노이드가 네메시스보다 조금 더 높은 평가를 받긴 했습니다.)
LCS에서 자리를 얻지 못해 스페인의 MAD 라이언즈에서 1년여간 활약하면서 팬들의 눈도장을 찍었고, 자국 대회 결승에서의 카사딘 펜타킬로 본인의 이름을 알립니다. 솔로랭크에서도 유명한 선수였죠. 이어지는 2019년 LEC 개막 시즌, 캡스가 떠난 프나틱의 새로운 미드라이너라는 중책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전임자인 캡스에 비하면 네메시스의 실력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거기에 롤드컵 준우승 이후 지친 다른 프나틱 선수들의 부진까지 겹쳐져, 프나틱은 실망스러운 스프링 스플릿 성적표를 받아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네메시스는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스프링 플레이오프에서 리산드라 픽으로 대표되는 팀플레이 위주의 경기를 펼쳤으나 부진한 모습이었고, 번뜩이는 캐리력을 갖췄던 캡스와 비교되며 쓴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서머 스플릿 네메시스는 훨씬 개선된 기량을 선보였고, '1대1로는 유럽 어느 미드라이너보다도 강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스프링 때에 비해 팀도 네메시스에게 캐리 롤을 더 많이 맡겼고, 보란듯이 성과를 냈습니다. - 그 와중에 좁은 챔프폭(트페, 코르키)이 많이 지적받기도 했지만, 이 부분은 그냥 통하는 픽은 당분간 계속 써보는 프나틱의 팀 성향에 기인한 점이 크다고 생각되어, 좀 억울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졍규시즌이 끝나고 포스트시즌에 접어들면서 네메시스의 역량은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G2와의 두 차례 풀세트 접전에서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스플라이스와의 선발전 최종전에서는 3경기 모두를 캐리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상대를 찍어눌렀습니다.
(참고로 위 표정은 그룹 스테이지 최종전에서 RNG를 잡아내고 8강에 진출한 직후의 표정입니다)
그리고 롤드컵에서, 네메시스는 첫 롤드컵에 온 신인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안정적인 경기력으로 팀을 죽음의 조에서 8강으로 이끌었습니다. 프나틱의 다른 선수들 폼이 저점과 고점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사실상 네메시스가 홀로 팀의 중심을 잡아줬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롤드컵 이전에 레클레스가 네메시스를 두고 '어떤 베테랑 선수들보다도 베테랑답다'고 표현한 것이 정확한 평가였다고 할 수 있겠죠.
팀의 탑-바텀 사이드 라인이 쉽게 게임을 풀어간 경기가 적고, 미드에 충분한 자원 투자를 받지도 못했는데도 묵묵히 제 몫을 해 냈다는 점에서 더욱 빛나는 활약이었습니다.
매 경기 준수한 기량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그룹 스테이지 6경기 내내 트페 밴을 뽑아내면서 팀에 밴픽에서의 우위도 안겨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베이가같은 조커픽을 꺼내들어 상당한 숙련도를 보여줬음은 덤입니다. 결국 RNG는 최종전에서 트페에다가 베이가까지 밴해야만 했고 밴픽이 꼬여버렸죠.
캡스와 네메시스의 결정적인 차이는 아무래도 성격, 성향입니다. 캡스는 쾌활하고, 인게임에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같은 선수죠. 던지는 게임도 많지만 그만큼 고점에서의 캐리력은 최고입니다. 그에 반해 네메시스는 표정 변화가 없는 포커 페이스로 유명하고, 과묵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플레이가 감정에 쉽게 휩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캡스에 비해 고점은 낮을지 몰라도 저점은 더 높고, 비교적 플레이에 기복이 적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교이고, 그렇다고 해서 네메시스가 소심하다거나 말수가 적은 타입은 전혀 아니긴 합니다. 새로운 팀에 적응하던 스프링때는 그런 인상이 조금 있었는데, 개인 방송이나 서머 스플릿 팀에서 찍은 영상들을 보면 의외로 유머 감각도 있고 장난기가 충만해 의외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네요. 가끔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기 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점점 빛을 발하고 있는 네메시스의 또 다른 재능은 샷콜링에서의 기여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재능이 캡스를 제외한 다른 유럽의 신예 미드라이너들(특히 휴머노이드)과 네메시스를 차별화하는 가장 중요한 강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프나틱의 2주차 SKT전 오프더레코드(위의 영상) 중, 바론에서 상대 레드까지 SKT를 추격해 2킬을 따내는 장면에서 오더를 한 선수가 네메시스였습니다. 추격하는 과정에서 힐리생이 '이거 우리 너무 오바하는것(too much) 같은데?' 하고 콜하고 빠질 기미를 보이는데, 네메시스가 '오버하는거 아니야. 날 믿어봐' 라며 계속 추격하라는 콜을 하고, 힐리생을 포함한 다른 선수들이 다 그 콜에 수긍하고 쫓아가 결국 이득을 따내죠.
서머 스플릿 이후 프나틱의 보이스 영상을 보고 들으면 네메시스는 교전 상황에서 가장 활발히 샷콜링을 하는 선수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팀의 다른 베테랑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그 샷콜링을 수용하죠. 기본적으로 침착하면서도, 필요한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자기 목소리를 냅니다. 단편적인 오프더레코드만 듣고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공개되는 영상으로만 판단하면 프나틱에서 게임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고 샷콜링하는 선수가 네메시스입니다.
프나틱에서 힐리생이나 브위포같은 선수들의 이니시에이팅 판단이 다소 본능적이고 감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점에서 네메시스의 존재는 팀에 필요한 냉정함과 침착함을 채워주는 꼭 필요한 역할입니다. 이 점에서 개인의 역량과 무관하게 캡스보다 네메시스가 프나틱에 더 어울리는 미드라이너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물론 캡스는 프나틱을 이끌고 이미 롤드컵 준우승을 달성한 선수이니, 이렇게 말하기는 좀 섣부르긴 합니다.
프나틱이 이번 롤드컵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2주차의 반전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룹스테이지 전체를 평균적으로 보면 실수도 많았고 스노우볼을 만드는 과정이나 굴리는 과정이나 둘 다 매끄럽지 못했던 장면들이 꽤 있었습니다.
다만 프나틱이 만약 4강, 결승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다면 아마 그 가운데에는 네메시스의 활약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퍼포먼스로 판단하자면, 프나틱이 롤드컵 우승팀이 된다면 MVP를 수상할 선수는 네메시스니까요.
롤드컵 조편성이 나온 직후의 개인방송에서 네메시스가 한 말이 있습니다. '레클레스가 이번에는 우지를 이길거야. 왜냐하면 이번에는 내가 있으니까' 그 말 그대로 네메시스는 레클레스-프나틱의 우지-RNG 잔혹사를 끊어냈고 이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미 페이커, 샤오후라는 만만찮은 상대들과 겨루었고, 이제 8강전에서는 도인비를 상대하게 됩니다. 그 고비를 뚫고 올라가도 다음 차례에는 쵸비나 루키를 맞라인에서 상대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그 상대들에게도 자신의 실력과 천재성을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또 다른 유럽의 월드클래스 미드라이너가 탄생하는 과정을 라이브로 지켜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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