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흐 앗 딘 유스프 이븐 아이유브. 통칭 살라딘.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레반트 일대의 패권을 확립한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쇠퇴를 틈타 기독교인들의 영역을 잠식해나갔다.
예루살렘 왕국의 남부 도시 아스칼론 점령을 시작으로 트리폴리 백작령을 함락, 여기에 더하여 기독교 반군을 제압하기까지.
이제 한 줌도 안 되는 안티오키아 공국만 무너뜨린다면 시리아 땅에는 오로지 아이유브 가문의 깃발만이 흩날리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안티오키아 공국을 겨냥하여 다마스쿠스를 출발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던 살라딘.
하지만 그는 도중에 말머리를 틀어 룸 술탄국의 영토에 해당하는 아르메니아 일대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룸 술탄국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가 살라딘에게 한 장의 서한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믿음의 형제로서 아우가 형에게 청하옵나니, 부디 이 땅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벌하는데 힘을 보태주시옵소서.]
로마와의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터진 십자군과 내부 반란을 당장 진압할 여력이 없으니, 자신에게 힘을 보태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대가로서 킬리지 아르슬란 2세가 내건 것은 수니 이슬람 세계에서 종주국으로서의 살라딘의 우위를 인정하겠다는 것.
살라딘으로서는 적잖이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과거 자신의 주군 가문이었던 장기 가문 시절부터 끊임없이 대립해오던 상대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겠다는 말이었으니까.
살라딘은 킬리지 아르슬란 2세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휘하의 2만이 넘는 대병력이 아르메니아로 진입하였다.
"지난 날, 로마의 마누엘과 예루살렘의 보두앵은 나에게 참으로 위협적인 상대들이었다."
과거 자신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여러 적수들을 떠올리며, 살라딘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되도록이면 이 땅에서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영예로운 싸움을 벌일만한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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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조력 덕택에 마침내 솀하카 땅을 손에 넣은 타마르.
이로서 한 번 분위기를 타기 시작한 조지아의 확장이 연달아 이뤄집니다.
[조지아의 여왕 타마르 : 초원에서 조지아로 이어지는 길목에 야만인들을 막아세울 굳건한 요새를 세우겠다. 이를 위한 전쟁이노라.]
타마르가 이끄는 조지아의 병력이 거침없이 초원을 휘젓습니다.
하지만 동쪽 투르키스탄 방면 부족들과의 분쟁을 끝마치고 돌아오고 있는 쿠만 인들의 본대.
과연 과감하게 초원으로 나아가길 선택한 타마르 휘하 조지아 군대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한편, 아직까지 황가의 방계로만 알려져 있는 알렉시오스 2세의 명망이 높아짐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의 칙사가 찾아옵니다.
[안드로니코스 1세 : 그대, 알렉시오스를 로마의 사령관 직에 임명하고자 한다. 받아들이겠는가?]
[알렉시오스 2세 : 송구하오나, 소신은 아직 그와 같은 중책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령관이 되지 않겠냐는 안드로니코스 1세의 제안에, 알렉시오스 2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의 뜻을 밝힙니다.
찬탈자를 위해 군을 이끌고 싶지 않음은 물론, 당장 트레비존드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얼마 후, 조지아와 쿠만 인들 사이의 전쟁을 지켜보던 알렉시오스 2세는 일이 기묘하게 돌아감을 확인합니다.
[알렉시오스 2세 : 다행히 부인에게 운이 따라주었군. 본대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면 승패를 장담하지 못했을텐데.]
다짜고짜 조지아의 병력을 휩쓸어버릴 것만 같았던 쿠만 인의 본대가 조지아 군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서쪽으로 횅하니 지나갑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상관 없는 똥땅을 지키기보다는 부유한 다뉴브 강 일대의 영토가 더 중요하다는 의중을 보여주는 움직임이네요.
덕분에, 앞으로 평생 손절할 수 없는 타마르 코인이 떡락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알렉시오스 2세였습니다.
이윽고, 그간 잘나가는 마누라의 뒤를 봐주는데 집중했던 알렉시오스 2세가 드디어 본인의 세력 확장을 위해 칼을 뽑아듭니다.
상대는 지난 화에서 타마르와 힘을 합쳐서 박살내준 바가 있는 에르주름의 베이, 나스레딘.
[알렉시오스 2세 : 언제까지고 기둥서방 노릇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타마르의 힘이 커지는 것도 좋지만, 그에 맞춰 나도 체급을 키워야...]
사실 현 상황에서, 킬리지 아르슬란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나스레딘을 공격하는 것은 여러모로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쓸데없는 훼방을 놓을지도 모르는 콘스탄티노플의 찬탈자는 다소간의 체면이나 차리기 위해 약체인 세르비아를 공격했고,
[안드로니코스 1세 : ...이젠 여기밖에 없다. 이 전쟁조차 승리하지 못하면 짐의 안위가 위험해진다.]
[세르비아의 왕 네마냐 : 큭... 우리로서는 도저히 저들을 막을 방도가 없다...]
나스레딘의 반란을 진압해야 할 킬리지 아르슬란 2세는 별 상관도 없는 카톨릭 교황으로부터 난데없이 십자군을 두들겨맞았기 때문이죠.
[교황 레오 10세 : Deus Vult! 신앙의 형제들이여, 모두 아나톨리아로 향하라!]
[룸 술탄국의 술탄 '정화자' 킬리지 아르슬란 2세 : 아니, 저 자들은 예루살렘은 내버려두고 왜 이곳에 십자군을 끌고 온단 말인가?!]
그야말로 무주공산.
싸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알렉시오스 2세는 수적인 우위를 확보하고자 유대인들에게 자금을 빌려 투르크 용병단을 고용합니다.
[투르크 용병단의 대장 : 헤헤, 저희에게 급료만 제대로 주신다면 목숨 바쳐 싸워드리겠습니다, 스트라테고스 나리.]
[알렉시오스 2세 : 다른 용병단은 지나치게 급료가 비싸니 어쩔 수 없이 저들을 고용하기는 한다만 영...]
이렇게 자신이 모든 상황에서 우위에 있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친 알렉시오스 2세는, 진군을 명합니다.
[알렉시오스 2세 : 진군하라! 저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빠르게 적을 섬멸하여 이 싸움을 끝내자!]
서전에서의 가벼운 승리, 이어서 알렉시오스 2세는 목표했던 과거 트레비존드 총독부의 요충지, 테오도시오폴리스를 노립니다.
이때까지는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최초에 수립했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결과가 목전에 다다랐으니까요.
그러나 흐름은, 누군가의 출현으로 삽시간에 뒤집히고 맙니다.
[알렉시오스 2세 : 사, 살라딘이라고?! 다마스쿠스에 있어야 할 그 자가 왜?! 왜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살라딘의 병력이 투르크 용병대가 담당하고 있던 후방을 타격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알렉시오스 2세의 머릿속은 하얘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티오키아 공국을 칠 것으로 알려진 살라딘이 느닷없이 여기에 나타날 것이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투르크 용병대는 압도적으로 강한 적 앞에 순식간에 괴멸, 뒤늦게 구원을 간 알렉시오스 2세의 병력 또한 큰 패배를 입고 퇴각합니다.
이 와중에,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자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두르며 활로를 뚫던 알렉시오스 2세 앞을 누군가가 막아세우게 되니...
"오래간만입니다, 폐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폐하... 라고? 네 놈이 그걸 어찌..."
"소인, 지금은 돌아가신 폐하의 모후, 마리아 님의 시종 노릇을 한때나마 했었던 아이마르라 하옵니다. 용케 지금껏 살아남으셨군요, 폐하."
"그리한가."
알렉시오스 2세는 가만히, 아이마르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왠지,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 것도 같습니다.
"여기서 옛 정을 빌어 길을 비켜달라고 한들, 들어줄 턱이 없겠지. 칼을 들어라."
[알렉시오스 2세 : 그대는 황제로서의 나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이이니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돌아가라.]
[아카르의 시장 아이마르 : 자비를 베풀어주심에... 쿨럭!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결투의 끝에, 알렉시오스 2세는 아이마르를 패퇴시키고 포위망을 빠져나갑니다.
위의 두 스샷은 Holy Fury DLC에서 기본 메카니즘에서부터 많은 부분이 뜯어고쳐진 결투 시스템입니다.
이전에도 결투 시스템은 있었습니다만, 결과가 무력이나 개인 전투실력과는 정반대로 나오는 경우도 많아 유저들 사이에 불만이 좀 있었죠.
게다가 결투 자체도, 삶의 방향을 전쟁(Battle)으로 선택하지 않는 이상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한 경우가 많아서 로망이고 뭐고 없었고요.
<아이반호> 같은 중세 기사도 문학에서나 나올법한 일기토 따위는 상상하기 힘들었던게 기존의 크루세이더 킹즈 2였습니다.
덕분에 많은 유저들이 왕좌의 게임 모드를 시작으로 결투 시스템을 모딩해서 만들었고, 여러 거대 모드에 통합되기도 했는데요.
이번 DLC에서는 이런 아쉬운 부분이 일신되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스샷에서와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와 적 캐릭터 간 일기토가 벌어지는 이벤트의 발생 빈도가 높아졌고,
(첫번째 선택지는 용기 특성으로 선택 가능한 결투 직행 선택지인데, 두번째 선택지로 골라도 결투가 이뤄집니다.)
두 번째 스샷의 붉은 박스 내부에서와 같이, 결투를 벌이고 난 이후에 RPG 마냥 경험치가 쌓이는 메카니즘도 도입되었습니다.
왕좌의 게임 모드에서 결투를 계속 벌이다보면 단계별로 무력과 개인전투능력 수치가 올라가는 시스템이 있는데, 그걸 참고했네요.
이 경험치는 아래의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렉시오스 2세 : 이번 싸움으로 칼을 쓰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스샷을 자세히 보시면 얼굴에 피가 튀어 있는데, 결투 직후에는 얼굴에 잔뜩 피가 튄 포트레잇이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이 부분도 Holy Fury DLC에 추가된 요소로, 저는 이 부분에 굉장히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킹리갓리 그 자체입니다. 진짜로요.
어쨌든 일기토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패배를 모면할 수는 없었던 알렉시오스 2세는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경험을 합니다.
[알렉시오스 2세 : 원담의 목을 베었다!...가 아니라,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전술 트레잇 가운데 최고라 할 수 있는 사기 트레잇, <물러서지 않는(Unyielding)>을 배웠습니다.
...이 정도면 농담이 아니라 한 번쯤은 좌절해봐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한 번의 회전에서 대패, 이로서 알렉시오스 2세에게 전쟁을 지속할 여력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던 알렉시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2세 :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나스레딘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그의 항복을 받아낼 수만 있다면...!!]
척후를 통해 반란의 수괴, 나스레딘의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곧장 그가 이끄는 병력이 주둔 중인 장소로 돌격합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에서 닥치고 돌격을 선택해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잡았듯, 그런 로또가 한 번은 터지지 않을까 기대하고요.
그렇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살라딘이었습니다.
[아이유브의 술탄 살라딘 : 그대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아주 과감한 판단이었어.
짐 또한 과거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보두앵에게 당한 적이 없었다면 크게 한 방 먹을 뻔했군.]
살라딘은 지난 날, 불과 수천의 병력으로 수만의 대군을 향해 과감히 돌격을 펼쳤던 문둥왕 보두앵에게 크게 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궁지에 몰린 알렉시오스 2세가 무슨 선택을 할 지 그 수를 꿰고 있었고, 그에 맞춰 훌륭한 대응을 선보여 적을 패퇴시킵니다.
최후의 돌격이 살라딘의 노련한 병력 운용에 의해 가로막힌 알렉시오스 2세.
말을 멈춰세운 채, 그 위에서 허망하게 단단한 방진을 구축한 적 진영을 바라본 그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맙니다.
"...아바마마께서는 과거, 살라딘이야말로 로마 최대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지. 역시나, 그 말대로구나."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쓰고도 성과를 내지 못한 알렉시오스 2세는 결국, 이번 싸움을 단념합니다.
[아이유브의 술탄 살라딘 : 훌륭한 싸움이었네. 단 한 끝 차이였어.]
[알렉시오스 2세 : 지금의 이 굴욕을 반드시 기억할 것입니다. 술탄이시여.]
항복을 하면서 보니까, 나스레딘은 지난 싸움으로 행동 불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만약 싸움에서 승리할 수만 있었다면 나스레딘을 높은 확률로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겁니다. 아쉽네요.
간발의 차이이기는 했지만, 정세의 빈틈을 노리고 과감한 선택을 했던 알렉시오스 2세의 큰 그림은 결국 찢겨져 나갔습니다.
*
찬탈자, 킬리지 아르슬란 2세의 뒤를 이어 살라딘이라는 큰 적을 만난 알렉시오스 2세.
하지만 그가 거둔 성과는, 그가 대적해야 할 상대에 비한다면 여전히 미미하기만 할 뿐입니다.
알렉시오스 2세는 과연 어디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