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문
사실 게임을 감상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감상문을 직접 쓰는 건 별로 안 좋아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는 한은요. 귀찮잖습니까.
하지만 이번에 나온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가 (안 좋은 쪽으로) 화제도 좀 있고, 제 나름으로 걸었던 기대도 많이 여기에 표현을 했다 보니 본편 플레이에 대한 감상문도 마무리로 적어 올리는 게 맞지 않겠나 싶어 제가 느낀 점들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제가 체험판을 해보면서 느낀 점들은
https://pgr21.com/?b=6&n=60937 이쪽에 적은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언급했던 것들은 이번 감상문에선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굳이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전투가 재밌다느니, 그래픽 효과가 썩었다느니 하는 것들요.
그리고 한 가지 앞서서 밝히겠습니다. 메타크리틱이나 게임스팟을 가보면 유저 평에서 주로 비판 혹은 비난하는 주된 요소가 ‘어설프고 웃기는 애니메이션, 못생긴 지구인 놈들, 넘치는 버그’입니다만, 이들도 일부러 파고들진 않겠습니다.
일단 제가 눈이 싸구려 3류라서 애니메이션과 버그를 꼼꼼히 가려보지 못하는 탓이 제일 크고 (그렇다고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들을 무턱대고 평가한다면, 그거야말로 남이 하는 말을 생각 없이 받아쓰는 것밖에 안 되잖습니까?) 또 이런 요소들은 지금까지 RPG 장르에서는 +알파 삼아서 가산점 혹은 감점을 약간만 준다면 모를까, 평가의 중심을 이룬 적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와서 이 게임만 유독 애니메이션이 뭐시깽이 뭐시깽이 논하면서 그걸 근거로 작품의 점수를 매기려 든다면, 그건 절대로 공정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말하면 최근 들어서 “포장까지 잘 된 명작”들이 계속 나온 게 매스 이펙트에는 악재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갓겜들이 새로운 시대의 기준이 되어버린 거겠죠)
출시 직후에 다른 게임사이트에서 리뷰를 두어 편 읽기도 했지만, 역시 크게 참고하진 않았습니다. 여기에 제가 적어 올리는 건, 먼저 쓴 리뷰어들 말이 맞냐 틀렸냐가 아니라, 제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실제로 무엇을 느꼈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해서, 항간의 비평도 끊고, 앞서 찾아낸 요소들도 잠깐 머리에서 지우고, 되도록 열린 마음으로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나머지 본편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나름 행복회로도 태워가면서 이 게임의 모든 재미를 찾아주기로 마음먹고 덤볐으니, 빠심으로 눈에 콩깍지 씌운 경우만 빼면 이 이상 게임에 호감을 갖고 플레이하기도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게임은 이 기대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해줄까요?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몇 가지 “잘못 포장된” 요소만 빼고 나면, 충분히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숨은 맛집인가요?
아니더군요.
..........T_T
..........그렇습니다. 저는 개돼지였습니다.
진심으로 이 게임이 내용 면에서 갓겜이 돼서 남부럽지 않은 게임 생활을 보내게 해줄 줄 알았고 그러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바이오웨어가 절 팔았어요!
#파이리
장점이 없는 게임은 아닙니다. 또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잘못돼서, 이 게임은 쓰레기다! 하고 낙인을 찍을 수준도 아닙니다. (차라리 그랬으면 속이 덜 썩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신줄 놓고 하하하하 하면서 다 까면 되니까)
하지만,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아무리 팬심으로 봐도 용서가 안 되는 치명적인 단점이 너무 많은 게임이었습니다.
똑같이 ‘재미없다’고 평하더라도 애초부터 좋은 점이 없는 맛대가리 없는 게임과, 좋은 점도 분명히 있되 단점이 재미를 다 깎아먹고 몰입을 망치는, 향이 고약한 게임은 다르잖습니까?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후자입니다.
둘 중에서 뭐가 더 나쁠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2. 산문의 기본이 문장이고, 희곡의 기본이 대사이거늘
제일 먼저 지적해야 될 단점은 게임 속의 문장이, 등장인물의 대사가, 좋게 말해서 많이 소탈하고, 나쁘게 말하면 도무지 격식을 못 차린다는 겁니다. 딱 잘라 말할 수 있는데,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인터넷 잡문하고 비교해도 문장에 들이는 성의가 비슷할 지경입니다.
초반에는 티가 안 나요. 마주치는 상황도 아직 다양하지 않고, 화제나 대화도 심도 있는 수준까진 안 내려갔으니까. 어지간한 표준말 나치가 아니라면 프롤로그 미션에서 휙 지나간 'go south'에 다짜고짜 불편함부터 느낀 경우는 설마 없겠죠. 저도 이 때는 저런 대사가 주인공의 고유한 말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게임 초반에 나오는 사막 행성을 벗어나고, 게임이 점점 판이 커지는데도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기회만 되면 비유와 줄임말을 남발하며, 소위 ‘현대 미국식 짧은 문법’을 구사한다는 건 꽤 이상하지 않나요.
더구나 전에는 이런 식의 구어체를 함부로 남발한 적이 없었던, 나름의 격식을 지키던 게임 시리즈에서요. (여기서 격식을 지켰다는 건 영어의 평균 문법을 대체로 지키고 지나친 구어체와 문어체를 지양했다는 소리입니다. 바른말 고운말을 쓴다는 뜻이 아니에요. 잭이 무슨 어휘들을 쓰고 다녔는지 기억합시다)
왜 go wrong이 아니라 go south여야만 합니까? 왜 나오는 사람마다 이런 비유법을 시도 때도 없이 쓰는 건가요? fail 같은 더 쉽고, 짧고, 정확한 말은 22세기 지구에선 죽었습니까? 그리고 왜 장면마다 등장인물들이 시를 못 써서 안달입니까? 아, 갓댐 포에트리!
(행여라도 2819년 드립은 치지 맙시다. 2185년에 지구를 떠나서 634년 동안 동면을 했으니 여기 나오는 밀키웨이 출신들은 누구든 22세기의 연장선에서 사고와 학습을 했다고 봐야 됩니다.)
그리고 ‘she's wanna pregnant baby’라고요? ‘she's gonna father me’라고요? 처음 보고 내 눈이 잘못됐나 싶어서 로드하고 또 봤는데 대략 오가는 대화 문법이 다 저렇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게임은 매스 이펙트입니까, 아니면 GTA입니까? 이게 그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들어라’ 그건가요? 욕쟁이 잭도, 아니 GTA의 트레버도 이런 식으로는 말을 안 하던 것 같던데요? 아니면 제가 토익 700점도 안 되는 무식쟁이라 이게 사실은 오랫동안 지켜져 온 맞는 문법인데 혼자만 못 알아보는 겁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알지도 못하고 비판한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시나리오는 제가 본 게 맞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매스 이펙트 3보다도 성의가 없습니다. 아니, 3편은 RPG의 관점에서 디자인에 결점이 있었고 그 때문에 욕을 먹었지, 문장에 들인 성의 면에서는 안드로메다와는 비할 수도 없을 만큼 공을 들인 작품입니다. 지금 이 비교 자체가 3편에 대한 실례입니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물로 보지 마!’가 깬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새 시대의 문물인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를 하세요! 드래곤볼은 번역이지만, 이 게임은 원어입니다!
구어체와 비유법과 줄임말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거칠거나, 가볍고 소탈하거나, 성급하고 경솔한 인물이 작품 속에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성격에 어울리는 말투를 써주는 편이 더 느낌도 살고 좋겠죠. 리암이나 피비처럼요.
그런데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그러니까 수만 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이민단의 인솔 교수 탠이나, 경력이 풍부한 군사 전문가 사리사 같은 인물까지.....
더구나 지금 말한 인물들은 플레이 내내 데리고 다니는 동료가 아니기 때문에 말 한 마디가 곧 인물의 개성이 되는데 말이죠.....
......소위 ‘현대인 문법’을 내뱉을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는 건 굉장히 깨는 노릇이더군요. 신기한 게, 정작 리암은 짧은 말투를 나름 덜 씁니다. 멋있는 영국 발음까지 더해져서, 말하는 것만 듣고 있으면 리암이 지구인 중에서 두 번째로 똑똑하고 품위 있는 양반인 줄 알겠더군요. (첫 번째는 이미지 깰 기회도 없이 시작부터 귀천하신 라이더 시니어입니다)
어쩌면 작가가 작품의, 혹은 세계관의 전체적인 말투가 어느 형태일지 안드로메다를 통해서 규정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죠. 서부극이라면 무슨 작품을 봐도 널리 쓰이는 말투나 독특한 표현들이 있듯이, 자기 작품에서는 격의 없는 편한 말투를 평균 대화 분위기로 설정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랬으면요, 먼저 작가는 다른 무엇보다 매스 이펙트 전작을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작의 존재를 존중했어야 합니다. 그게 맞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초속력(hyperspeed), 방열판(thermal clip)처럼 기존에 정확히 정립된 세계관 속의 용어까지 무시하고, FTL이 어쩌고, 앰뮤니션이 저쩌고 하는 현실 지구의 용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일관되게 남발하더군요. 매스 이펙트 3에서도 ‘간혹’ 용어 혼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간혹이었고, 그나마 그 정도 일으킨 용어 혼란 가지고도 팬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드로메다는 왜 이렇습니까? 신작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전작 설정집 한 권 볼 만큼의 성의도 없습니까?
이럴 거면 스타워즈에 나오는 무기도 앞으로 '라이트세이버'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빔사~벨'이라고 합시다. 같은 EA 프랜차이즈인데 그러면 딱 되겠네요.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시작 시점은 2185년, 그러니까 셰퍼드가 한참 나사로 연구실에서 퍼자고 있던 시기와 겹칩니다. 매스 이펙트 1, 2 시대에는 누구 한 명도 함부로 쓰지 않은 언어를 안드로메다에서는 10만 명의 밀키웨이 이민단이 단체로 마구 쓰고 있다니. 안드로메다 이니셔티브의 인선 및 교육 수준을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 첫인상만 좋은 인물들
어떤 리뷰에서, 안드로메다의 단점 중 하나로 ‘이야기가 엉성하고 밋밋하다’라는 점을 꼽더군요. 제 생각에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가 엉성하고 밋밋하다는 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이야기나 각본 자체가 아니라, 좀 다른 데 있는 것 같아요.
그 중 한 가지 주요 원인은 바로 인물입니다. 우선, 인성이 혼란스럽습니다. 입체적이란 소리가 아니라, 이 사람의 평소 됨됨이가 어떻게 돼있는지를 모르겠단 소립니다. 게임에서 보이는 보통 때의 모습들이 첫인상을, 혹은 첫인상이 기존에 알려졌던 정보를 배신하는 모습을 자꾸 보여서 이게 뭣이냐 소리가 나오게 만들어요.
동료들만 봐도 당장 답 나옵니다. 광기와 발랄함의 화신일 줄 알았던 피비는 알고 보니 파티 중에서 제일 냉철합니다. 광기요?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말투는 가볍고 활발합니다만...... 앞서서 이 게임 평균 말투가 어떤지 말씀을 드렸죠? 티 안 납니다. 난폭한 야만전사인 줄 알았던 드랙 영감님은 알고 보니 늙은이는 한물갔어~ 늙은이라고 얕보지 마라~ 하는 그냥 보통 크로건 할아버지였습니다. (물론 ‘보통 크로건’한테 기대할 만한 ‘보통 난폭함’은 있습니다만, 그 정도 성질머리도 없으면 크로건이 아니죠)
우아하고 도도한 용병이라던 베트라는 아주 첫등장부터 능글능글하게 청탁비리를 하시더만요. 고뇌하는 민족투사를 컨셉으로 잡은 것 같은 원주민 동료 자알도, 알고 보니 그냥 보편타당한 코스모폴리탄의 마음을 가진 정의덕후 가족덕후일 뿐이었습니다. 밀키웨이에서 온 외계인에 대한 호기심도 없고, 경계심도 없습니다. 아바타에 나오는 네이티리도 자알보다는 훨씬 사람 같단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주선 선실에서 가죽 소파를 질질 밀고 다니며 아햏햏을 보여주던 영국 흑형 리암과 아사리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걸 작중 여러 번 행동으로 강조하는 코라 아지매만이 어느 정도 일관된 ‘그 사람의 평소 됨됨이’란 걸 보여주더군요. 그런데 리암도 허당끼가 좀 있는 걸 빼면, 평소에는 달리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있을 때에만 개드립이 나오는 무난한 사나이였습니다. 가끔 말장난은 치지만 먼저 무슨 사건을 일으키는 성격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뼛속까지 군바리인 코라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 이게 안드로메다의 인물들이 표현하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첫인상은 다양한데, 막상 같이 다녀보면 알맹이는 다들 비슷비슷해요. 다들 일관성도 없고, 다들 필요할 때마다 개념이 넘치고, 다들 필요할 때마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으며, 다들 필요할 때마다 적당히 능구렁이 짓도 하고, 심지어 인품 밑바탕에 깔린 가치관까지도 다들 비슷비슷합니다. 그 피비가 비원이던 고대 유물까지 포기하면서 미워하는 옛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을 보면서는 10초 동안 감동하고 나머지 10초 동안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나머지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어서요.
이건 조연들도 몇몇 축복받은 예외를 빼면 다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대장급은 책임감이 투철한 놈들밖에 없고, 공동체 지도자는 강직하고 정신적 지주는 현명하죠. 개중에 조금, 정말 아주 조금 고유한 성격이 있는 사람도 중요한 순간엔 그딴 개성 다 접어버리고 보편타당한 정론만을 입에 올립니다. 등장인물의 역할과 성비를 논하면서 SJW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제가 보기엔 이미 완결되고 출시한 작품이란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쪽, 개성 없음과 성의 없음이 훨씬 더 큰 문제입니다.
인물이 개성이 있고 그게 자연스러우며 개인의 매력으로도 승화가 됐으면 남자든 여자든 그렇게까지 큰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보면 어느 누구 하나 개성도 매력도 없이, 제작자 머릿속에서 나오는 허울 좋은 말만 앞다퉈서 떠들어대고 앉았으니 스토리가 그렇게 밋밋한 겁니다. 인물이 작품 속에서 대화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인물에 제작자가 빙의해서 플레이어한테 직통으로 떠들어대고 있으니 스토리텔링이 그렇게 처참한 겁니다.
플레이어도 제작자 귀에 대고 직통으로 쌍욕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런 게으르고 쓸모없는 덩키야! 안 익었잖아! 네 개똥철학에 관심 없으니까 창작을 하라고! 아 Fxxk me.....
인물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자기만의 개성은 과거사와 전투 캐릭터 스킬 구성뿐입니다. (하긴 이런 것까지 다함께 공유했으면 그거 완전 파이널 판타지 8........) 덕분에 충성도 임무 맵이 다양했던 건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초기 동료 구성은 좀 빈약하고 밋밋할 소지가 컸습니다. 그도 그럴 게, 여기 나오는 밀키웨이 출신들은 어찌 됐든간에 안드로메다로 다 같이 탐험을 온, 넓게 잡으면 한 배를 탄 동료인 셈이거든요. 같은 목표 아래 일부러 찾아와서 뭉친 집단이니, 당연히 목적도 배경도 전혀 다른 사람들을 임시로 끌어다 모은 집단보다는 사람의 개성 폭이 작을 수밖에요. 예. 노르망디 스쿼드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드로메다는 오히려 전작보다 훨씬 인물 하나하나를 다양하고, 입체적이고, 그러면서도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을 만큼 강한 개성을 담아서 설정을 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재미를 위해서요.
사실, 예고편만 보면 진짜로 그렇게 해낸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있는 거라곤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소리만 하는 똑같은 사람들이 온 게임에 한 다발이더군요. A 캐릭터가 웃을 상황이면 B 캐릭터도 웃고, B 캐릭터가 빡치고 고함칠 상황이면 C 캐릭터도 빡치고 고함칩니다.
7명의 본캐와 부캐들만 있으니 무슨 퀘스트가 나와도 복잡한 토론이 오가고 의사소통 과정이 있겠습니까. 게임 초반에 파티원 6명이 모여서 티격태격했던 건, 그냥 전작의 분위기 맛 쬐끔만 보여주는 속임수입니다.
본캐 부캐 이야기를 하니 생각나는 건데, 매스 이펙트의 주연들은 보면 TRPG에서 이제 막 초보티를 벗은 팀이 굴리는 PC 그룹과도 굉장히 닮았습니다. 딱 게임에서 추구하는 목표에 맞춰야 되니까 설정도 성격도 비슷비슷하고, 개중에 개성이라고 집어넣은 것들은 오만 자극적인 단어로 치장이 돼있다는 점이 그렇죠.
막상 개성에서 기인할 법한 약점(특히 인품에 관한)은 ‘이 캐릭터는 완전 멋있으므로 그런 거 없으셈 빼애액!’으로 우겨서 없애버리며, 그 때문에 실제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개성이고 뭐고 없이 다들 플레이어(작가)의 의식세계를 대변하거나, 아니면 똑같은 소리만 하는 앵무새 집단이 된다는 것, 그러다 개성이 너무 과하게 안 보이면 캐릭터가 죽어서 묻힐 것 같으니까 타이밍 빤히 노려서 한두 번 생뚱한 소리를 한다는 것까지도 보고 있으면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안드로메다 작가 중에는 설정놀이에 과하게 취한 너드가 분명히 한 명 섞인 것 같아요.
혹은 질이 아주 나쁜 연예인 팬픽 작가가 있거나.
저보고 안드로메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등장인물을 꼽으라면, 일단 템페스트 승무원은 절대 안 뽑을 겁니다. 차라리 시드 닉스나 레예스 비달, 모샤이 같은 주변 인물들이 훨씬 나았어요. 잠깐 나오는 사람들이 개성적이고, 인상적이고 살아있는 사람 같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더라고요. 퀘스트도 이런 조연들이 깊이 얽히는 것들이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정확히는 길게 고정 출연을 못하니 뒤죽박죽 메리 수 같은 꼴을 보일 기회도 없었던 것뿐이겠지만요.
4. 필요 이상으로 신비한 악역들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에는 크게 두 반동 집단이 나옵니다. 하나는 작품에서 ‘켓(kett)’이라고 불리는 뽕 맞은 폭력 광신도 집단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 번도 게임에서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절대로 그 목적이 보편적인 지구인의 도덕이나 패스파인더의 목표와는 일치하지 않을 것임을 막연하게 암시한 ‘후원자들(benefactors)’입니다.
먼저 후원자들은 빼죠. 아직 나오지도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악역까진 아닐 수도 있고요. 로봇 집단 ‘후예들(remnants)’도 있지만 얘들도 그냥 프로그램된 로봇일 뿐이라 이야기에 자발적으로 개입하진 않습니다. 아직은요.
남은 악역은 켓입니다. 이들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악역이자, 시작부터 화려하게 등장해서 이야기 끝날 때까지 게임을 쥐고 흔드는 현재 유일한 거대 악역입니다.
이는 ‘정체를 모르는 적’에서 시작해서 단서를 더듬어가던 1, 2편보다는 시작부터 이놈들이 여러분의 원쑤입니다 여러분! 하고 보여준 3편의 구조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그러면요. 켓이 가지는 역할만큼 그 위상도 3편의 리퍼와 유사한 형태를 갖춰주는 게 더 몰입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위상의 ‘수준’까지 동등하게 요구하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리퍼는 개체 하나가 우주선 하나와 크기가 맞먹는 초거대 종족이고, 켓은 그냥 사람 크기에 사람같이 생긴 종족이니 인상부터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왜 나쁜 짓을 하는지, 궁극적인 목표가 뭔지, 그리고 그 목표를 시행할 어느 정도까지의 능력이 현재 있는지, 또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정확히 어떤 식으로 나쁜 영향을 주는지, 이 중에 몇 개쯤은 대충이라도 좋으니 가르쳐줘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게 위기감을 주는 중요한 근거잖아요.
예, 다 좋습니다. 켓이 온 우주의 지성 가진 종족에게 뽕을 놓고자 한다는 건 알았습니다. 뽕 맞은 사람은 괴물이 된다는 것도, 알겠어요. 그러면 왜 그렇게 뽕에 집착하는 겁니까? 사람을 괴물 약쟁이로 만들어서, 뭘 어쩌려는 겁니까? 그렇게 해야 할 필연한 이유가 있나요? 우주를 그냥 정복한다거나, 파괴한다거나, 보니까 목표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약쟁이 만드는 것 말고 어떻게 그 목표를 수행할 건가요? 수행할 수 있나요?
그러고 보면 약쟁이 집단들이 그렇게 벌벌 떨 만큼 세보이지도 않던데 말이죠. 이뭐 개척촌의 자경단도 슬럼가의 폭력배들도 무장 수준만 충분하면 격퇴가 되고, 함대 클래스가 와도 전술만 잘 짜면 지상요격이 된다 하고, 얘들 아무리 봐도 리퍼나 콜렉터급의 종족재해로는 안 보이거든요. 얘들, 진짜로 우주의 위기 맞습니까? 차라리 암흑공간에 떠다니는 우주 암초가 더 위험해보이던 건 제 눈의 착각입니까?
집정관이니 프리무스니 지네들끼리 이름 붙인 거를 보면 얼핏 로마 원로원이나 군단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막상 또 그 밑에 쫄다구들 이름 보면 선택받은 자라느니 세례 받은 자라느니, 딱 봐도 사이비 종교스럽게 부르고 있더만요. 게임 후반에는 ‘사명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정관과 프리무스가 서로 알력을 빚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럼 켓이 하는 이 모든 짓들은 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건가요? 그럼 그걸 시킨 교주 비슷한 놈은 또 누구죠? 걔는 목적이 뭐고 그건 또 은하계에 무슨 일을 한대요?
명색이 게임의 유일한, 그리고 최악의 악역인데 막상 이런 정보가 게임에서 뭐 하나 제대로 나오는 게 없습니다. 이래놓고 게임 마지막에 ‘우주를 말살할 무기인 메리디안을 내가 먹었으셈!’이라고 악역이 악을 써대고, 그걸 본 주인공이 ‘안돼 호옹이’ 하고 절규를 하니, 모니터 밖에 있는 플레이어는 봐도 그냥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저걸로 또 뭘 어쩐다는 거냐고.’
끝판까지 가도 유일하게 확인되는 정보는 ‘행성의 기후도 바꾸는 문명의 소산이니까 장악한 물건의 크기가 크다면 그래, 우주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지,’ ‘메리디안은 생명을 만드는 것이 당초 목적인 기계니까, 반대로 생명을 부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겠지’ 이 정도의 논리적인 사고에서 도출하는 일종의 결론뿐이지, 실제로 눈으로 본 건 뭐 하나 있지도 않거든요. 차라리 코덱스를 한 페이지 추가했다거나, 아예 데스스타처럼 행성 하나 박살내는 걸 컷신으로 보여줬으면 와 닿는 게 있을 텐데. (이런 걸 시네마틱 눈뽕으로 만들어 뿌리라고!)
행여라도 그 메리디안의 역가동으로 인해 그 때까지 라이더가 장악한 후예들의 모노리스가 한 번에 폭주를 했다거나, 그래서 거주 행성들이 일시에 기후가 나빠지고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나와줬다거나 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게임 최고의 명장면 하나 뽑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거 없더군요.
더구나 앞서 말했지만, 켓이 그 전까지 주력하던 활동은 우주를 멸망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납치해서 우주 약쟁이로 만드는 거였죠. 뜬금없이 막판에 무슨 성전을 하느니 말살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겁니까? 애초에 메리디안은 생명을 만드는 물건이라면서요. 그냥 니들이 좋아하는 약쟁이를 그걸로 만들어 이놈들아.
만약 신비주의가 무력을 가진 무기라면, 지구인 중에 이들을 상대할 자는 오직 잘나가던 시절의 서태지나 파트리크 쥐스킨트밖에 없을 겁니다. 확실합니다.
그렇게 욕먹은 매스 이펙트 3가 오히려 악역의 묘사 면에서는 훨씬 멋지고, 알기도 쉬웠어요. 리퍼는 최종 목적이 우주를 살아가는 생명의 ‘수확,’ 그걸 통한 온 우주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비전으로 나와도 있었고, 당연히 그 결과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거든요. 아, 다 죽는구나. 혹은 아, 다 잡아먹히는구나.
그걸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리퍼는 아주 대놓고 보여줬습니다. 소버린 1개체와 휘하의 게스 전투기만으로도 지구 최정예 전력인 SSV 베이징, 서울, 런던을 한 번에 몰살할 수 있다는 걸 1편에서 증명했고, 3편에선 그 리퍼 개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시작부터 온 우주를 박살냈습니다. 아무 것도 못한 군인들이 무력하게 도망하는 장면과 민간인들이, 어린 한 소년이 리퍼의 무차별 폭격에 개죽음당하는 장면을 오프닝으로 떡하니 보여줬죠.
매스 이펙트 3가 뒤로 갈수록 실망스러운 행태만 보여도 플레이어가 게임 붙잡고 있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기서 생긴 분노와 복수도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아 리퍼 xxx들 터자 죽여버린다.
하지만 안드로메다의 켓은 이런 진부한 신파극조차도 연출을 못 해냈습니다.
왜 자기들이 나쁜지, 혹은 자기들이 얼마나 나쁜지. 혹은 관점을 달리 해서, 자신들이 어떤 비전을 갖고 있고, 자신들이 ‘정당한지 아닌지, 어떻게 정당한지, 왜 정당한지’도 전혀 피력하지 못했습니다.
왜, 멋있는 악역도 생각해보니 있음직하잖아요? 실은 굉장히 좋은 놈들이고, 나름의 정당한 논리가 있는 집단이 악역으로 나왔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켓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한 마디도 한 게 없으니까요.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더 질이 나쁩니다. 피력을 할 기회가 있어도 얘들은 대화할 생각조차 안 했거든요. 등장하자마자 대놓고 ‘네가 이해하지 못할 말은 하지도 않겠다’라는 하지하의 화법만을 들이밀고 자빠졌죠.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대화란 걸 안 하더군요.
정신승리에 취했고 말이 안 통하며 아주 못된 꼬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꼬마들의 특징은, 의외로 무해하다는 점입니다. 켓이 이렇습니다. 악역으로 나왔지만, 심지어 지구인을 침략도 했지만 정작 플레이하는 저는 위기감이 안 드네요.
5. 결론을 위한 대화들
게임 속의 문장은 성의가 없습니다. 인물은 종잡을 수 없지만, 상황에 따라 생각하는 건 대체로 비슷비슷합니다. 악역은 왜 악역인지부터 모르겠습니다. 그냥 쟤들이 쏘길래 나도 쐈어요.
중간에 훌륭했던 순간들도 분명히 있기는 했지만, 대략 종합하면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스토리텔링은 수준이 이랬습니다. 이런 엉성한 요소를 가지고 십수 시간짜리 이야기를 구성했어요. 아니, 구성해야 했어요. 억지로요.
그러니 대화도 옛날처럼 물 흐르듯이 흘러갈 리가 없습니다. 그냥 첫마디부터 나는 너에게 무엇을 시키고 싶다는 티를 내면서, 그런데 그거만 말하면 너무 빨리 대사가 끊겨서 심심하니까, 중간에 다른 말을 좀 섞어서 하다가, 후다닥 결론 말하고 물어봅니다. ‘자, 대답해. 뭐라고 할래?’ 이게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퀘스트 시작 장면의 평균 대화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주요 퀘스트 중 하나인 ‘튜리언 이민선 찾기’입니다.
‘정체불명의 외계인 우주선을 발견했다’는 원주민 종족의 연락을 받고, 주인공이 해당 지역을 조사하러 갑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선 아직 주인공도, 원주민 종족도 정확한 정보를 확보를 못 했거든요. 주인공은 원주민이 봤다는 우주선이 정확히 뭔지 모르는 거고, 원주민 종족은 자기들이 본 외계인이 누군지 모르는 거니까요. 정말 게임 속에서 ‘정체불명의 외계인이 누구인지’ 처음에는 아무 힌트도 나온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당 지역에 가서, 라이더가 물어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봤습니까?’ 원주민이 말했습니다. ‘회색이고 뾰족한 생김새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라이더가 갑자기 대답합니다. ‘튜리언이로군!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니, 잠깐만요? 이것 보세요?
회색에 뾰족한 건 튜리언인가요? 그럼 털 달리고 두 발로 걷는 건 지구인입니까? 애초에 안드로메다에는 게임에 등장한 종족 말고는 다른 원주민 종족이 없는 겁니까? 그래서 사람같이 생겼는데 게임 속 원주민이 아니면 그건 모조리 다 밀키웨이에서 온 겁니까? 무슨 결론이 그렇습니까?
뭐 사실, 안드로메다에 종족 다양성이 극단적으로 부족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게임 맨 마지막에 끝판왕의 자뻑에서 암시가 되긴 합니다만, (‘우리들 켓은 지금까지도 수천 종의 종족을 승화시켰다아아아악!’) 그건 어디까지나 후반 이야기죠. 그 전까지는 확실한 정보가 나오지도 않았거든요.
밀키웨이의 종족 구성을 한번 떠올려보자고요. 거기 은하계를 차지하던 그 수많은 종족들 말입니다. 아사리 살라리언 튜리언 지구인 크로건 바타리언 쿼리언 게스 볼루스 라크나이 보르차 기타등등. 안드로메다에도 그만큼 다양한 지성 종족이, 게임에 등장을 했든 안 했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적어도 밀키웨이 출신이라면 해보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런 정보도 없이, 모든 사고의 과정을 뛰어넘어서, 회색에 뾰족하다는 딱 두 마디 단어만 가지고 튜리언이라는 결론을 뽑아내다니. 도대체 무슨 사고 과정을 거치면 이런 결론이 불쑥 튀어나오는 겁니까?
하긴 생각해보면 결론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는 대충 나오죠.
퀘스트 제목이 튜리언 이민선 찾기거든!
그러니 거기 있는 건 튜리언일 수밖에 없는 거야!
혹시 퀘스트 중에 반드시 튜리언인 베트라가 같이 가야 했다면 그래도 지금보단 이야기가 훨씬 매끄러웠을 겁니다. ‘완전 당신처럼 생겼어!’라고 원주민이 베트라를 가리키면 그만이니까요. 혹은 라이더가 이렇게 말해줘도 됐을지 모르죠. ‘음, 내가 아는 종족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모르니 일단은 가보고 확인해보겠습니다.’
그 외에도 질문을 좀 더 해본다든지, 스캔 데이터가 있느냐고 물어본다든지, 그림을 좀 그려달라고 한다든지, 하여간에 정상적인 판단력과 신중함을 갖춘 사람이 할 법한 판단 유보와 질문과 확인 절차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꼭 그렇게 결론을 서둘러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장면이 게임에서 지겹도록 나옵니다. 툭하면 중간 논리를 뛰어넘고, 정보를 잘라먹고, 결론만 쑥쑥 뽑혀 나와요. 게임의 목적지에 스토리텔링이 질질 끌려다닙니다.
하긴 이야기가 있으려면 인물과, 배경과, 사건이 (혹은 동기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에서 확실하게 정립된 건 안드로메다란 배경 하나뿐이니 어쩌겠습니까.
6. 그래도 기본은 보여주는 RPG
앞서는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 주된 문제들을 나열했습니다. 다들 스토리텔링에 관여하는 문제들인데다, 상태가 하도 심각해서 이쪽을 먼저 지적을 안 하고는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말재주가 어눌하니 주절주절 퍼지른 말도 많아서, 여기까지만 보면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가 엄청난 개똥망 게임이란 인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막상 플레이를 해보면 영 아무 장점도 없이 단점만 있는 게임까진 또 아니더란 게 제 소감입니다.
일단은요.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최대 장점은 전투입니다. 전투는 정말 훌륭합니다. 전투만 생각해도, 사실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기본 점수는 먹고 들어가야 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다른 게시물에서 이야기했으니 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작품이 자랑할 수 있는 장점은 ‘RPG의 기본은 보여줬다’는 게 되겠습니다. 마냥 탄탄해서 이것만은 갓겜급이다 하는 수준은 아니고, 그냥 뭐 ‘일단 합격점은 아슬아슬하게 받겠다’ 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단점에 비하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 눈물 나게 고마운 수준입니다.
RPG의 요소를 논할 때, 중심을 이루는 단계까지 파고들면 반드시 나오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레벨 아이템 자동전투는 아니고....... 탐험, 사건, 선택입니다. (포럼의 논의 심도에 따라서는 더 구체적인 표현을 써서 던전, 퀘스트, 규칙이라고도 합니다. 혹시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을 딴 데서 보신다면 그 사람은 진골 회귀주의자일 수도 있어요.)
여기서 말한 사건이란 쉽게 말하면 퀘스트입니다. (아, 위에 말했구나) 스토리텔링과는 떨어질 수 없는 요소이다 보니 안드로메다에선 영 인상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부분을 빼놓고 본다면, 디자인이란 관점에서 안드로메다의 사건 요소는 요즘 나오는 RPG의 정도는 지켰다는 게 소감입니다.
딱 알맞아요.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게 ‘이놈들 시키는 거 다 하고 나면 이 지역 답사는 다 하겠네’ 하는 정도만큼 뿌려줍니다. 동선 범위가 넓기 때문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도 좋고, 그만큼 탐험 요소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렇게 탐험을 하다가 보면 누가 일부러 안 시켜도 필드 내 숨겨진 요소도 찾고, 필드 보스도 만나게 되죠. 플레이의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뭣보다 양이 너무 많지 않습니다. 퀘스트 목록 길어지는 거 싫어하는 사람은 이 점이 나름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안드로메다의 서브 퀘스트는 탐험과는 연계가 잘 됐는데, 그 자체의 이야기가 빈약하고 선택과 결과 요소와도 연계가 많이 안 됐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몇 가지 경우를 빼면 필드 엑스트라들이 주는 퀘스트는 그냥 스카이림 같은 막대기 물어오기 스타일이더군요.
그런데 스카이림 아니 엘더스크롤은 원래 탐험에 초점이 맞춰진 게임이니 서브 퀘스트가 ‘어차피 거기 갈 건데, 가는 김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렇게 나와도 크게 재미를 안 해치는 반면,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경우에는 이 퀘스트가 이유로 작용을 해서 비로소 마을 밖으로 나가고, 탐험을 시작하는 거거든요. 기왕에 탐험의 동기가 됐으니 선택의 기회도 줬으면 더 재미있을 텐데 싶습니다.
이마트로 심부름 나가는 거 싫어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안드로메다의 서브 퀘스트도 싫어할 겁니다.
사족이지만 필드 보스는 재미있었습니다. 엄폐물을 무시하는 공격, 엄폐물을 넘어가는 공격, 반대로 엄폐를 꼭 해야 하는 연사공격을 쓰는데, 덕분에 숨었다가 나왔다가 아주 정신없게 잘 싸웠습니다. 총알 잡아먹는 피돼지인 게 좀 아쉽더라고요. 돌격소총을 원래는 매톡과 발키리를 애용한 편인데, 순전히 필드보스 때문에 레버넌트로 갈아탔습니다.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탐험 요소는,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소감이 복잡합니다. 먼저 필드 경치가 멋지고, 노매드 덕분에 시원하게 달릴 수도 있고, 6WD 모드와 점프젯 덕분에 정해진 길에도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재미 요소입니다.
특히 정해진 길을 마음대로 벗어나도 된다는 점이 전작과 비교하면 아주 마음에 드는 점이더군요. 나만의 길, 나만의 방법으로 가도 목적지에 아무튼 도착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하늘에서 적진 위로 떨어져도 되고, 절벽을 타고 옆에서 들이받아도 되고. 간만에 모로윈드 고스트펜스 넘어가던 그 기분을 느낀 것 같습니다.
다만 모노리스 퀘스트를 끝내지 않으면 야외 활동이 힘들어서 내내 차 운전석에 갇혀 있어야 되는 곳이 여러 번 나온 점이 아쉬웠습니다. 일단 어떻든 행성에 도착하면 그놈의 기후부터 손 좀 보고 시작해야 되는 거니까요. 결국 필드 탐험의 절반 정도는 계속 노매드에 갇혀있었던 것 같습니다.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에서 말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기억도 안 나는 것하곤 대조적이네요.
던전이 참 애매한데..... 일단 구성이 다양합니다. 그래도 좀 평범한 곳부터 낭떠러지를 사이에 두고 총격전을 벌이는 곳,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 되는 곳, 퍼즐을 푸는 곳, 포탑을 뚫고 지나가는 곳, AI한테 해킹시켜놓고 거점 방어하는 곳, 제한 시간 내에 강행돌파를 하거나, 시설 해체하는 곳 등. 노력의 흔적이 보이고 답파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배경이 완전 똑같습니다. 거의 예외 없이 켓 기지 아니면 고대 문명의 지하 유적입니다. 더구나 켓 기지는 그래도 지상에 있으니 바깥 날씨 따라 분위기가 좀 변하기라도 하지, 지하유적은 안에 들어가면 바깥이고 뭐고도 없잖아요. 다 똑같이 생겼지. 사실은 다양한 던전을 답파하고 있는데, 왔던 곳에 또 온 것만 같습니다. 하다못해 배경 색이라도 좀 다르게 해주거나, 내부에 나무가 좀 자라서 운치라도 더해준다거나 했으면 좀 덜 지루했을 것 같네요.
7. 아쉬운 상실의 가치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할 RPG 요소는 선택입니다. 1편부터 2편까지, 꾸준히 게임을 관통해온 주요 콘텐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전작의 요소들을 꾸준히 말아먹는 가운데, 이 게임이 그나마 끝까지 붙잡으려던 요소이기도 합니다.
RPG에서 선택이란 게 꼭 대화 지문의 선택지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캐릭터 육성, 아이템 관리, 탐험의 동선 같은 것도 넓게 보면 선택의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RPG에서는 어떻게든 선택을 했을 때, 거기에 따르는 변화와 기회비용도 같이 정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르를 하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그런 인과 관계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되지’라는 건 RPG의 요소로 치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는 동안에는 저것은 할 수 없어!’ 그래서 RPG의 선택은 때로 그냥 선택이 아니라, ‘선택과 결과’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지금 이 개념이 친숙해서 그게 뭐가 대단한데? 하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실은 이게 바로 현대 비디오게임이 다함께 누리고 있는 RPG의 유산입니다. RPG 장르 자체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고, 위상도 인기도 옛날만 못하지만, 대신 RPG의 선택과 결과 개념은 다른 장르 어디에나 침투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지요)
앞서서 설명충 노릇을 한 이유는, 매스 이펙트의 경우 선택의 대상으로 주로 서사를 다뤄 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RPG가 흔히 고르는 선택의 대상이 서사이긴 합니다. 디아블로 같은 경우를 빼면요) 대화에서 지문으로 다른 선택지를 주고, 선택지에 따라 다른 결말이 따르며, 이 결말은 때로 싸움이 나거나 말거나 하는 명백한 차이를 만들거나, 나머지 플레이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깁니다. 그 말은 서사가 가진 ‘차이’의 양이 플레이의 질에 영향을 준다는 소리도 됩니다.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이 점에서만큼은 3편보다 조금 낫습니다. 일단 서사가 이어지는 전작이 없으니 전작에 발목 잡히는 것도 없고, 플레이 도중에 내가 행한 결과 역시 눈에 보이고 피부로 어떻게든 느껴지는 정도는 돼줍니다. 다만 선명한 수준까진 아닙니다. 1편과 2편이 보여줬던 드라마의 선명함과 다양함을 생각하면 그저 아쉽네요.
의외로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선택 콘텐츠는 주인공의 성격입니다. 매번 대화마다 톤 휠 선택지를 통해서 말투(와 그 바탕이 되는 성격)를 선택하는데, 꾸준히 선택을 하다 보면 이게 하나의 성격이 돼서, 같은 상황이어도 주인공의 대사가 달라지는 경우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단 자주 나오더군요. 호크나 인퀴지터보다 라이더의 고유 대사가 더 많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안가라 족과 처음으로 조우했을 때, 별도의 선택지 없이도 그 때까지 쌓은 성격에 따라 라이더가 알아서 다른 대사를 내놓습니다. 폭력배 보스에게 정보를 캐낼 때에도 라이더가 그 때까지의 성격에 맞는 다른 반응을 보여줍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에 따라 퀵 액션이 뜨고 안 뜨고가 갈리기도 하네요. 이 부분은 감탄했습니다.
특정한 퀘스트나 전투가 있고 없고 하는 것도 톤 휠 시스템과 연계가 좀 더 됐더라면, 저는 다른 걸 다 제쳐놓고라도 이것 때문에 RPG로서 대단히 후한 점수를 줬을 겁니다. 그런 거 일절 없었지만요.
선택과 결과의 연속성도 어느 정도 갖춰져 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특성 비슷한 걸 고르는 줄 알았던 선택지가 나중에 보니 새로운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든가, 퀘스트 수행 중에 안 싸워도 될 걸 시비를 걸어서 굳이 총격전을 일으킨다든가, 이후 플레이의 흐름에도 새로운 영향을 준다든가, 동료와 생각 없이 하는 대화 중에, 플레이 초반에 했던 결정이 언급된다든가 하는 점이 흐뭇한 장면들이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말한 것만으로도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최소한 면죄부를 받을 자격은 있습니다.
중반을 넘어가면 후속작과 연계해서 결과를 보여줄 거라는 제작진의 암시가 팍팍 들어간 큼직한 선택도 종종 나옵니다. 매스 이펙트 1, 2가 그랬던 것처럼 안드로메다도 비슷한 수법을 써먹고 싶은가보죠. 한 행성의 지배자가 누가 될지에 개입하기도 하고, 밀키웨이 최초의 우주 약쟁이로 어떤 종족을 선출할지 고르기도 합니다.
뭐, 본작이 이래서는 후속작도 본작의 암시도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들긴 하지만요.
아무튼 이렇게 선택의 기회가 게임에서 주어지긴 하지만, 이 기회가 전작처럼 많이 주어지지 않은 점은 우선 아쉽습니다. 다만 따지고 보면 이건 디자인의 문제보다는 게임 규모의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예. 이제 와서 처음 언급하는 거지만, 이 게임은 규모가 작고, 플레이 시간도 매우 짧습니다. 파도 파도 할 게 나오는 요즘 오픈월드 게임도 아니고, DLC가 붙고 또 붙던 매스 이펙트 2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것도 덧붙여 말하지만 너무 아쉽습니다. (끼어드는 이야기지만 필드도 이 게임에 나오는 게 너무 적습니다! 다 합쳐서 8군데, 그나마도 자유롭게 탐사 가능한 곳이 5군데밖에 안 된다는 건 좀 심합니다. 그 중에 3곳이 척박한 황무지면 더요)
그리고 선택의 요소에서 이 게임에 갖는 또 한 가지 작은 아쉬움은, 크게 잃는 것이 생기는 선택도 게임에서 보여줬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겁니다. 특히 전작의 막 나갔음을 기억해보면 더 그러네요.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때로는 선택에 치르는 대가의 소중함이 그 선택을 더 중요하게 만들기도 하고, 얻는 것의 가치를 더하기도 하잖습니까?
그런데 안드로메다는 전작에서 뭐를 그렇게 데었는지, 전작까지는 있었던 치명적인 선택의 장면을 이번 작품에선 다 빼버렸네요. 동료도 뭘 어쩌든지 다 살고, 이야기 속에서 라이더가 겪는 부침도 있긴 한데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게임 도중에도 늘 그랬고, 엔딩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드로메다는 제가 해본 게 맞다면 시리즈 최초로 배드 엔딩도, 레니게이드 엔딩도 없이 해피 엔딩만 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료의 운명의 경우, 앞서 언급한 인물의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제작자가 동료 캐릭터에 과도한 애정을 품은 탓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간혹 듭니다. ‘우리 이쁜 캐릭터님이 이런 데서 죽을 리가 없다느으응!’ 그냥 저만의 의심이길 바랍시다.)
엔딩의 가짓수가 게임의 완성도를 결정하진 않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긴, RGB 엔딩이 세 개 있어서 뒷골 잡게 만드는 것보다는 큰 문제 없는 엔딩이 한 개 있는 편이 낫긴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위안이 되네요.
8. 그 외 자잘한 점들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제작 콘텐츠는 후반용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버리는 콘텐츠인 줄 알았습니다. 왜 수제작한 무기는 상자에서 까고 가게에서 사는 무기보다 후진 것밖에 없습니까? 대신 후반에 다다르면 무기 도면에 각종 고급 옵션을 더해서 비로소 ‘화력은 떨어지지만, 활용 능력이 더 뛰어난 커스텀 무기’ 같은 걸 만들어 다닐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요. 그 후반용 콘텐츠를 위해서 초반부터 재료 수집을 하고 다니라 시키는 건 좀 괴상한 노릇 아닙니까? 몇몇 희귀 원소는 꾸준히 모아놔야 빠듯하게 쓸 수준으로 모이던데 말입니다. 이거 심보가 너무 심하지 않나요. 와우에서 군단 대장 도면이 지금까지 나온 모든 금속 주괴를 백 개씩 잡아먹는다면 와우저들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소모품 요소는 재미있는 변화였습니다. 스킬구성과 맞추고, 상황과 맞추고 하면서 총알 바꿔 쓰는 재미가 후반까지 꾸준히 이어진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단지 후반 가면 이번작도 코브라 로켓런처와 디스럽터로 게임 정크 벅크 한다는 게 조금 아쉬웠습니다. 뭐가 됐든 일단 실드부터 깨고 봐야 되고, 뭐가 됐든 일단 실드만 깨지면 나머지는 쉬우니까요. 그래도 매스 이펙트 2에서는 하빈저 때문에 인센더리나 소이탄에 투자할 이유가 있었는데.
스캐너는 생각보단 덜 남발해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뇌내AI와 더불어 이야기 속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썰렁했습니다. 그냥 스캐너 슥슥 AI 불라불라 오키도키 분석끝! 바이오웨어는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 2를 똑바로 만들 생각이 있다면, 반드시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을 해봤으면 합니다.
9. 총평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예고편이 처음 나왔을 때, 저는 이 게임에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온 로데론이 아서스의 이름을 속삭이듯이.
객관적인 근거는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RPG가 원래 예고편으로 수집할 수 있는 정보가 다른 장르에 비하면 더 적은 장르이기도 하지요. (탐험, 사건, 선택, 서사. RPG를 재미있게 만드는 진짜배기 요소들은 동영상만 보면 모릅니다. 하나같이 게임을 붙들고 직접 해봐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간만에 보는 우주 RPG다! 안드로메다다! (우와 개념 찾으러 가자!) 신세계다! 크로건이다! 신기하다! ......예고편에서 암시했던 대로만 나왔어도, 전작의 반만큼만 완성도를 갖췄어도, 전작만큼의 성의를 보였다면, 다른 게임 부럽지 않게 두고두고 파고들 수 있는, 훌륭하고, 재미있고, 동시에 장대한 게임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매스 이팩트 안드로메다는 예고편 동영상보다 못한 게임이었고, 재미있는 부분만큼 재미없는 부분이 넘쳐났으며, 훌륭하지도 않고 장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시리즈 전작만큼의 성의도 없습니다. 비주얼을 말아먹고 외적인 문제가 있었어도 내용 면에서 실속이 있었으면 제가 영혼의 실드를 쳐주고자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설마 내용까지 이토록 실망스러운 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최악의 게임은 아닙니다. 이것만도 못한 게임도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단점으로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장점도 있습니다. 전투처럼요.
사실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매우 뛰어난 TPS 요소가 있는 게임입니다.
트라이얼 소감문에 밝힌 바 있지만, 적의 구성과 전장의 활용성, 무기의 다양함, 버그가 좀 있긴 하지만 충분히 감수해도 될 만큼 잘 짜인 전술AI까지, 매스 이팩트 안드로메다의 슈팅 요소는 정말로 재미있고, 빠르고, 치열하고, 훌륭했습니다.
만약 이 게임이 매스 이펙트 시리즈가 아니었다면, 혹은 차라리 기존 팬들의 비난을 받더라도 좋으니 RPG이기를 포기하고, 스토리텔링 요소도 과감하게 줄이거나 쳐내고, 오픈 월드 TPS로서 이 게임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픈 월드도 좋은 점이었습니다. 탁 트인 사막을, 푸른 산맥을, 얼어붙은 빙판을 노매드로 내달리는 것도 재미있었고, 하늘치처럼 떠다니는 필드 보스를 멀리서 발견하면서 환호를 지르고 로봇 사냥이다! 하고 외치면서 돌진하는 것도 가슴 벅찬 경험이었습니다. (전투도 그렇고 차지 스킬도 그렇고 지금 이 체험도 그렇고, 어째 파이널 판타지 15이 예고편에서 빵빵 때린 장면들이 FF15보다는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에서 실제 플레이로 구현됐네요)
지루한 사전 작업이 필요했지만, 내가 쓸 물건 내 손으로 만든다는 것도 개척자 플레이에 어울리는 컨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 따져보더라도, 냉정하게 말해서 매스 이펙트에 무작정 낮은 점수를 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스 이펙트는 역시 RPG 시리즈이고, 안드로메다는 RPG로서 존재하는 작품입니다. 제작자도 그렇게 만들었음을 여러 차례 공언했고, 오리진에도 RPG로 분명히 구분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RPG가 플레이하기에는 너무 치명적인 단점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클래식 RPG처럼 플레이어가 알아서 찾아먹는 서사도 아니고, MMORPG처럼 그냥 스킵, 스킵만 해도 플레이에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자기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스토리텔링조차 수습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RPG로서 기능하는 게임의 요소는 지켜냈지만, 그것도 플레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게임의 재미를 멱살 잡고 캐리하는 탄탄함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
RPG의 기본을 무너뜨려 놓고는 눈 돌아가는 시네마틱에만 급급했던 매스 이펙트 3와, 슈팅 RPG의 튼실한 케이크 위에 스토리텔링 똥을 푸짐하게 데코레이션한 이번 안드로메다를 비교했을 때, 저는 이제 둘 중 뭐가 더 나쁜 게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기준만 가지고 이 게임에 점수를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4~7점, 평균 쳐서 6점을 주겠습니다.
4점은 실망스러운 스토리텔링과 그 때문에 무너진 RPG 체험에 가중치를 줘서 매긴 좀 더 짠 점수입니다. 7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 내내 보여준 훌륭한 액션과 탐험의 폭풍 하드캐리를 감안해서 줄 수 있는 제 나름의 최고 점수입니다. 이 경우, 제 스스로 ‘매스 이펙트는 더는 RPG가 아닙니다’ 하고 인정하는 꼴이 되니 그것 나름대로 서글픈 일이 되겠군요.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왜냐면 서문에 맨 처음 밝힌 바대로, 지금까지 제가 이 게임을 감상하면서, 이 글을 쓰면서 계속해서 언급을 피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애니메이션, 모델링, 버그, 지저분한 그래픽. 이들이 장점 아닌 단점에 속하는 건 분명한 것 같지만, 게임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줬는지는 제 안목으로는 역시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어림짐작이지만 앞서 매긴 제 모든 점수에서 1점을 추가로 깎고자 합니다.
제 점수는 : 5 / 10
추천도 : 비추천 (사유 : 장점은 있지만 스토리 때문에 정작 RPG 체험이 재미없음)
비교 평가 및 추천 대상
RPG 팬이라면 -> 티러니 하세요.
SF 팬이라면 -> 아스트로니어 하세요.
슈팅 팬이라면 -> 둠 하세요. 둠에 어설픈 RPG 따위는 없습니다. 찢고 죽이세요.
RPG 팬이고 슈팅 팬인데 또 SF 팬이라면 -> 같이 사이버펑크 2077이나 기다립시다.
애니메이션... -> 섬란 카구라 하세요. 니어 오토마타 하세요. @ㅏ이돌마스터 하세요.
캐릭터가... -> 섬란 카구라 하세요. 니어 오토마타 하세요. @ㅏ이돌마스터 하세요.
일부러 아름다운 캐릭터를 노려 만든 게임을 두고 다른 게임을 뒤적이지 마세요.
매스 이펙트 팬이라서.... -> 보강패치 나오고 DLC 나오고 75% 세일하면 그 때 사세요.
바이오웨어 게임을.... -> 지금이 탈덕할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는 돈을 버리고 싶다! ->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세요.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게임은 누가 사라고 -> 사지 마세요.
종합하면.... ->
[여러분 젤다 하세요. 돈만 많았으면 저도 젤다했지 이거 안 했습니다.]
10. 여담들
- 소소하게 배신감 느끼는 거 추가로 하나. ‘남매를 번갈아서 플레이할 수 있다’고 제작진이 밝혔잖아요. 저는 이게 진짜로 마음대로 남매를 바꿔가면서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막판에 레벨1 동생 놈이(혹은 누나 놈이) 레벨1 딱총 들고 레벨1 켓들을 쏴잡는 장면이 잠깐 나오고 만다는 뜻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바이오웨어가 나를 팔았어!
- 톤 휠도 그렇고, 뭔가에 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는 가만 보면 매스 이펙트보다는 드래곤 에이지에 더 가까운 디자인을 쓴 것 같습니다. 한편 우주선 타고 다니는 느낌이나 몇몇 인물 작명, 필드 분위기는 구공화국 온라인을 생각나게 하네요. 그래서 이건 매스 이펙트 시리즈의 후속작이라기보다, 어쩌면 바이오웨어의 각 디자인을 하나로 합쳐서 만든 일종의 통합 프로젝트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똑바로만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코브라는 나오는데 케인은 안 나왔습니다. 너무 슬픕니다. 케인만 있으면 아키텍트 그 xx놈도 한 방인데.
- 자동 방열 레버넌트는 갓입니다. 최고도 최강도 아니지만, 이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 무슨 적이 나와도 반드시 쉽게 간단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건 매스 이펙트의 스태프 오브 더 램입니다.] 저 말고도 호구가 계시다면, 다들 레버넌트 하나 만드시고 오그먼트로 자동 방열 장치를 다세요.
- 한 가지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에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있다면 향후에 패치를 통한 콘텐츠 보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일 겁니다. 선례가 있거든요. 같은 제작사의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도 원래 출시 직후에는 RPG쪽 요소가 영 좋지 못했습니다. 농담 아니고 안드로메다와 비교해도 그나마 겨우 조금 나은 수준이었습니다. (아, 문장의 격식은 DAI 쪽이 비교도 못 하게 성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패치로 대사도 싸그리 갈아치우고, 선택지도 보강하고, 장면도 추가하고, 하더니 게임이 확 살더군요. (대신 꿀빨던 빌드 몇 개가 너프먹고 관짝에 들어가더군요) MEA도 1.04인지 뭔지 패치로 보강을 하겠다고 밝힌 것 같으니 제작사가 이 게임을 꼭 버린단 보장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 단지 큰 기대는 걸기 어려울 겁니다. 왜냐면 인퀴지션 때는 지금과는 딴판으로 사람들의 호평이 이어졌거든요. 그 별로였던 초기 스토리텔링에도 사람들은 껌뻑 죽어 넘어갔습니다. (그 때는 비주얼이 그렇게 대단했던가? 모르겠습니다.) 패치 이후요? 이미 갓겜이 돼버렸는데 호평이고 뭐고가 어딨습니까. 나온 지 두 달도 되기 전에 고티를 몇 갠진 모르지만 줄줄이 받아가서는 홈페이지에 몇날 며칠을 두고 떵떵거리더군요. 요는, DAI는 갓패치도 있었지만 그 전부터, 시작부터 이미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는 겁니다.
- 반면에 MEA는 시작부터 망하고 들어가는 모양이 나왔잖아요. 오만 사람들이 이 게임 까기 바쁩니다. (이거 올리면서 메타크리틱을 한번 훔쳐봤는데, 1점 행진이 아주 끝내주네요.....) 이런 게임에 과연 정성들인 패치를 내놓고 싶을까요. 비난의 중심에 서 있는 애니메이션이나 모델링이라면 마케팅 차원에서 다급하게 패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중심 콘텐츠에까지 얼마나 손을 써줄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회사가 관짝에 들어가지만 않아도 다행일 텐데요. 이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오웨어가 MEA에 드에급 갓패치를 내놓는다면, 그 덕분에 MEA가 남에게 추천할 만큼 재미있는 게임이 된다면, 그 땐 제가 매스 이펙트가 아니라 바이오웨어에 10점을 줄 겁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예약구매는 안 할 겁니다.
-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에서 가장 인상 깊은 행성은 하발이었습니다. 다른 은하계에 있는 외계 행성의 정글, 수목에 뒤덮인 고대 유적’이라는 로망을 게임에서 가장 잘 실현한 배경이었습니다. 기후가 다르긴 했지만 펠루시아나 잿빛 골짜기도 생각나고 좋더라고요. 게임이 규모가 좀 더 크고 내실이 있었으면 이런 곳도 더 많아졌을 텐데.
- 퀵 액션은 또 다른 선택 콘텐츠입니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매스 이펙트 2, 3의 경우에 액션 뜨면 무조건 버튼 누르고 보는 사람들이 있던데, 안드로메다에서는 조금 더 신중해지면 그만큼 재미있을 겁니다.
- 3회차를 하게 되면 리암 이 넘이 템페스트에서 영화를 틀어주는 장면이 나오나 안 나오나 한 번 더 찾아볼 겁니다. 왜 영화를 다운받아달라 해놓고 안 틀어줘......
- 그리고 3회차를 하면, 이번에야말로 남캐로 레예스 비달 관련 퀘스트를 꼭 해봐야겠습니다. 꼭 보고 싶은 딥♂다크♂한 이벤트가 있네요.
- 사실 트라이얼 소감문에 제일 먼저 이걸 적었어야 하는데 깜빡 잊고 안 적은 게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해온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어떤 단점보다 깊게 저를 빡치게 만든, 이 게임의 마지막 단점이 하나 있어요.
[이 게임, 퀵세이브가 없습니다!]
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