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라운드, 풀 라운드를 뛰며 체력이 빠질 때로 빠져버린 박서는, 그 박서의 주먹은 아직도 날카로울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양쪽 눈은 시퍼렇게 멍들어 시야는 뿌옇고 현실인지 꿈인지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반 쯤 정신이 나가 있을 것이다. 난 누구이며, 또 여긴 어딘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의문 때문에 미친놈처럼 자문한다. 솔직히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 다만 현재 내게 걸쳐진 글러브와 팬츠 때문에 내가 권투선수임을 그제야 자각하게 될 것이다. 공이 울리고 시합은 재개됐지만 1초가 천년 같이 느껴진다. 그 때 남은 건 정신력뿐이다.
ⓒ데일리 e스포츠
내가 미치도록 응원한 박서 한 명이 있었다. 실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 맞다. 그 박서의 닉네임은 ‘Slayer’(무법자)다. 그는 ‘풀라운드’를 링에서 뛰고도 지칠 줄 모른다. 그 근성 덕에 챔피언의 자리에도 많이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욕심이 가득했던 ‘배고픈’ 박서다.
사람들은 ‘무법자 박서’에게 기대와 큰 함성을 많이 보내주었다. 때로는 슬럼프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나와 같은 팬들의 힘이 컸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링을
잠시 떠나 수습코치의 길을 걷고 있다. 어떠한 은퇴식도, 선수로서 이별의 말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링에 당장 오르지 않는다면서 이제 그의 복귀전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제 그에 대한 향수는 버려야 한다고 한다. 한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게 물었다.
후배 : 형님 아직도 무법자 박서 응원하세요?
나 : 응. 그럼! 나야! 늘 영원히 응원해야지~
후배 : 역시 형님!
나 : 헤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이내 내가 입을 다시 열었다.
나 : ‘무법자 형’이 공식 은퇴언급이 있기 전까진 믿어줘야지… 그게 팬의 모습이야. 설령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건 그 때 가서 수고했다고 어깨 두드려 주면 되고, 돌아오면 또 좋은 거고… 그런 거지 뭐
후배 : 저도 동감해요 형님
내 마음은 이렇다.
형의 행보가 이러면 좋고, 저러면 싫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고, 존경한다.
이제 내 이야기를 할까한다. 나도 형을 따라 권투가 좋고, 링이 좋아 이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난 형과는 달리 풋내기 박서다. 수상 경험도 전무하고 몇 년째 체육관에서 스파링만 뛰고 있다. 해서 사람들은 이제 그만 꿈을 접으라 한다. 그럴 때마다 난 생각한다. 어차피 복싱이란 정신력 싸움이다. 장기전을 가면 몽롱해지는 건 늙으나 젊으나 똑같다. 물론 나이에 따라서 회복력은 다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2차적 문제다. 영화 속 록키가 인정받고, 또 타이슨이 인정받는 것은 한 시대를 풍미해서가 아닌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법자 형이 다시 시작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의 주먹이 날카로울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날카롭고 아니하고를 떠나 도전은 소중하며, 무엇보다 난 그를 믿는다는 게 중요하다. 나 또한 늦게 시작하는 리스크는 얼마나 클지 알고 있다. 그러니 제발 빨리 쇼부 보고 다른 일 찾으란 말은 하지마라. 내 링네임 ‘티어스’ 그리고 그의 링네임 ‘슬레이어’ 이 둘의 인생 앞에 또 다른 박서 군단이 몰려오고 있다.
Written by Love.of.Te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