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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6/07 21:34:52
Name Bar Sur
Subject [글] 1985 제니스 조플린
  - 1985 제니스 조플린


  친구들은 그녀를 "조플린"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말할 때는 언제나 말라 비틀어진 양파 껍질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칙칙하게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같은 반 남자 녀석들은 교실에서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일부러 그녀 주변을 배회하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돈츄노~" 하고 짤막한 가사를 불러댔다.

  나도 지금은 그녀의 본명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 시절에 그녀를 별명으로 부른 적이 없지만, 그녀는 어느 샌가 내게서도 '조플린'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상 속에 녹아든 소년들의 추억, 그리고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사소한 이 시대 조플린의 비극. 나쁘지 않군. 하고 내가 말했다. "돈츄노~"하고 조플린이 절규하듯 노래한다.


  그 당시 그녀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정확히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녀는 옆에서 아이들이 자신을 따라하면 견고하게 입을 다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다. 여자 아이들은 종종 남자 아이들에게 경고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 말뿐인 경고에 그만 둘 녀석들이 아니었다.

  그녀가 잘 입을 열지 않다가도, 국어 시간에 어쩔 수 없이 차례가 되어 시나 소설의 본문을 읽을라치면 어김없이 코러스처럼 돼지 멱을 따는 듯한 남자애들의 목소리가 튀어나와 지독한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남자 중에서 오로지 나만큼은 반의 반장이자 선생님께 총애받는 학급위원으로서 언제나 그녀를 놀리는 친구들을 말리고 그녀를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라는 건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중학교 이후로 반장 투표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도서부장은 매년 저절로 맡겨졌지만. 더군다나 그녀를 감싸준다는 건 더더욱 무리였다. 다만 나는 그 당시에 조플린의 음악에 슬쩍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그녀의 목소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가 그 나이 때의 남자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놀림감이 될만한 좋은 "먹잇감"이기도 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듬해 학년이 바뀌면서 다른 반으로 갈라질 때까지, 나는 그녀를 놀리는 데 가담한 적은 없었다. 특별히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말따나마 그건 그저 사소한 놀이었을 뿐이다. 그것 때문에 그녀가 비관해서 자살을 했다든가, 그녀의 인생이 잘못되어버렸다든가 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한, 나는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 누군가의 입에는 사소한 술안주로 그녀의 이야기가 회자될 것이다.


  하지만 조플린,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들이 너와 네 목소리의 이야기를 하는 걸 넌 아니? "돈츄노?"


  아마도 누군가는 그 당시의 우리들의 모습에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위해 분노한다는 건 어딘지 온당치 못한 일처럼 여겨졌다. 상식이나 인정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뭔가의 흐름이 잘못된 것이다. 그녀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그것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놀리는 것을 멈춰주고 남자 아이들을 반성하도록 만들고 싶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많은 것들이 어긋나 있다.


  이봐, 조플린. 네 목소리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 만약 네가 수줍게라도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나는 혼자서라도 미친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고 앵콜을 외쳤을지도 몰라. 많은 것이 어긋나 있어도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 넌 이제와서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몰라. 난 네 팬이야. 네 목소리에는 분명 그런 가치가 있다구. 안 그래? 우리의 1985 제니스 조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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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용
04/06/07 22:19
수정 아이콘
와....잼있게 잘 읽었습니다..
총알이 모자라.
04/06/07 22:30
수정 아이콘
최고의 가수, 최고의 찬사...그러나 서글픈 그녀의 죽음
04/06/07 22:40
수정 아이콘
턴테이블의 바늘 끝에서 노래하는 1967 제니스 조플린과 교실에서 본의 아니게 시와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1985 제니스 조플린은 많은 혼란을 가져 올 수 밖에 없겠죠. 아무리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더라도 그 꽉 짜여진 구조와 부조리한 상황들이 현실에 등장하다면 낯설어 할 것처럼. 더구나 1985의 '나'라면 더욱 그럴지도 모릅니다. 결국 어긋나 있던건 1985의 '나'와 그 '나'들이 모인 '우리'였을지 모르겠네요. 1985 제니스 조플린이 노래를 했다면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어긋났을지 모르겠다는 이상한 생각도 해 봅니다. "돈츄노"라고 놀려대는 1985의 '나'에게, 그리고 진지하게 "돈츄노"라고 묻는 지금의 '나'에게 1985 제니스 조플린은 1967 제니스 조플린의 입을 빌어 그 질문을 조용히 되돌려 주고 있는지도 모르지요."돈츄노".(음... 이 허접한 댓글이란...--;)
calmlikeabomb
04/06/08 12:31
수정 아이콘
85년에 친구를 '조플린'이라고 놀렸다니, 특이한 반이였군요.
음악을 찾아듣는 사람들만 모였어야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런 학생들이라면 '조플린'을 조롱이 아니라 찬사로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목소리 이야기를 하니 문득 박경림양이 생각나는군요.
박경림양이 음악을 하지 않고 방송인으로 사는 건,
대한민국 익스트림 음악계의 손실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타고난 데쓰 보컬리스트 박경림양이 더이상 자신의 소질을 낭비하지 말기를...
04/06/08 12:42
수정 아이콘
언제나 그렇듯이 제 글을 실화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라고 해도 별로 관계없기는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굳이 덧붙이자면 어떤 훌륭한 것도 잘 알지 못하면 불현듯 어디선간 튀어나온 조롱의 매개가 되기도 하는 법이죠. 특히나 학교에는 그런 것을 부각시키는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서투른 지식만으로도 말입니다. 한 반에 한 두명 정도는 반드시 있죠. 그렇다고 제가 별로 그런 아이들을 싫어하는 건 또 아닙니다만. (후략)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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