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멍청이다. 이 명제는 분명 참이다. 적어도 내가 남성이라는 표본으로 따지자면 그렇다.
고교를 갓 졸업한 시절, 우리는 몇 가지 친구에게 지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가령, '나는 동정 졸업했지 짜샤'라든가, 야, 너는 서울 10대대학 밖이냐? 몰랐지~~라든가. 하지만 전자는 증명할 도리가 없고(어떤 아이들은 인터넷에 에로한 수영복 사진을 올려두고 인체 조형 투시를 통해 생물학적 지식을 물어 진실을 밝히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첨단 IT시대의 야동이 보급된 세대에게는 난이도를 따지기도 민망한 초보자 코스임에 틀림없었다.) 후자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렇다면 보통 '누가 더 쎈가'라는 이야기도 나올 법 한데, 갓 스물언저리의 남자들에게 있어서 '강함'을 재는것은 좀 유치한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누가 짱이네, 누가 더 쎄네 하던 아이들은 억지로 '그런건 사내에게 중요한게 아니지.'라며 샹크스적 쿨한 간지를 뿜으려 애썼지만, 실제로 그네들의 무력은 엄백호나 샹크스에게 시비를 털던 산적 1 정도쯤이니까 우스울 뿐이다. 결국 우리는 재수, 혹은 대학입학 직전에 친구들사이에서 절대 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바로 '겜 못하는 소리는 못 참아'였다.
당시만 해도 고3 수능이 끝나면 학교는 3교시정도, 영화관람센터로 변하고는 했는데 우리반은 유독 스타리그를 즐겨봤다. 우리때는 '스타'와 '카오스'가 공존하고, 그 사이에 틈새시장으로 서든어택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서든어택은 반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진 자가 있었으니 그는 곧 황모씨라는 체구가 작은 친구였다. 그는 정말 어이가 없을 만큼 서든어택을 잘 했는데, 당시 서든어택 전체랭킹의 700위인가 하는 '랭커' 였으니 말 다했다 싶다. (이 친구의 위에 700명이 있다는 사실도 내겐 신세계였다.) 아무튼 이 친구와 피시방에 가면 남들 다 소총들때 권총쥐고 37킬 10데스 같은 스코어를 찍는 괴물이다보니 서든어택은 자연스레 우리의 '경쟁종목'에서는 빠져있었다. 바키아빠같은 압도적인 최강자, 그는 경외의 대상이며 또한 '우리편'으로 만들고 싶었던 제갈량급 삼고초려가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카오스의 경우, 5:5게임이다보니 구멍이 워낙 컸다. 게다가 스타에 비해서 경험자가 적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들만의 리그로 존재했다. 카오스는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워낙 큰 데다 지금의 롤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멘붕을 시키는 키보드 배틀의 숙련을 요구했던 게임이었다. 반 친구끼리 같은 팀이 된다 해도 까이기 시작하면 분쇄기에 들어간 명세표마냥 멘탈이 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오스가 몇몇 아이들의 우정을 단 40여분만에 전생에 칼부림으로 맞선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신겐 급 원수로, 혹은 못하는 친구가 잘하는 친구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체험하게 하기도 하는 그런 게임이다보니 자연스레 반 내에서 일부세력권을 넓히지 못한 채 유지되고 있었다.
가장 다수의 아이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종목은 바로 스타였다. 당시 스타리그는 딱 06-07시즌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 06-07시즌이란 스타리그에 있어서 무안단물 임요환 이후 가장 크게 폭발한 시즌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다들 스타를 적당히 해 본적은 있어도 진짜 잘하는 사람은 없었고 끽해야 iccup D-C사이의 사람들끼리 투닥거리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무슨토스,무슨테란 ,무슨저그 같은 별명을 붙이며 서로를 평가했는데, 때때로 '넌 내한테 안되' 소리를 들으면 바로 피시방 직행이었다. 스타크래프트의 강함은 곧 사내의 자존심이었다. 여자를 아는건 증명할 수 없고, 대학입학여부는 우리를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게 했지만 스타크래프트는 아주 깔끔했다.위너 테익스 올-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상대의 본진에 점 하나 남기지 말라.
나 역시 이러한 전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금 생각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을만한 일이었다. 사건 전날, 친구와 나는 '피파온라인'이라는 변방의 게임을 심심풀이삼아 했고, 그 옆에서 스타를 하던 친구는 나의 승전보를 다음날 학교에서 소문을 내었다. 문제는 거기서 진 친구가 '게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그러한 소문을 참지 못하고 멱살을 잡으며 일기토를 신청한 것이다. 주먹질로 번질 뻔한 우리의 고함소리와 분노는 이내 친구들의 중재로 적당한 전장을 맞이하게되었다. '야, 스타로 붙어 XX'.
스무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의 비장한 얼굴. 피시방 사장님께 문자로 스무명정도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하였다. 학교에 있는 세 시간동안 양 진영으로 갈린 우린 각종 전략을 준비했다. '죽어도 질 수 없다. 는 마음은 서로에게 강렬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내가 운동이나 공부나 돈 뭐 이런건 몰라도 겜 못한다 소리 들으면 못참는다는 어린 남자의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룰은 아주 심플했다. 5판해서 3판이기는 놈의 승리. 맵은 로템, 아카디아3, 파이썬. 세가지 중 각자 번갈아가며 원하는 전장을 고를 수 있음. 마지막 전장은 '파이썬'으로. 그리고, 서로 약 열명씩 붙은 친구들중, 패배자는 승자그룹의 겜방비를 전액 부담하는것.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았다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비장한 각오를 품고 피시방에 들어섰다. 열명의 겜방비를 대충 계산하면 3만원이 넘는 돈이 깨질것이다. 그리고 그 돈보다도 커다란 불명예. 겨우내내 패배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그 굴욕. 당장에 몇 시간뒤 누가 비릿한 웃음으로 겜도 못하는 빙구시키 너도 나름 쫌 했지만 나한텐 안되~ 라고 말할 승자의 권한! 그 쾌락! 서로 같은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패배를 맞이하느니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말할 만큼 우리는 진지하게 피시방에 앉아 세팅을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흥미진진하게 관전을 하거나, 알아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필살의 가위바위보는 나의 패배였다.
첫 전장은 그 애가 고른 로스트-템플. 잊혀진 사원이라고 번역되는 '테란을 위한 전장'이었다. 나의 주 종족은 저그였고, 그 친구는 테란이었으니 당연한 선택이다. 로스트템플(이하 로템) 에서는 중앙지역이 다양한 건물 때문에 넓은 전장을 활용하기가 까다롭고, 앞마당 입구가 좁거나 언덕과 붙어있어 테란의 수비가 용이한 전장이었다. 더구나 드랍십을 이용한 언덕탱크와 터렛-벙커를 통한 공중유닛 분쇄, 커맨드센터 띄우기를 통한 섬 멀티의 편의성등은 저그에게 여러가지 선택지를 요구했다. 동실력이라면 분명 저그가 테란을 잡기 매우 까다로운 전장이었다.
다만 그 때 스타리그와 프로리그에서는 '유일한 저그'가 모든 테란을 잡아먹는 시대였다. 즉, 비록 저그가 힘든 전장이라 할 지라도 저그가 테란을 잡을 무기는 충분히 벼려져있었고 난 그것을 충실하게 실행할 수 있다면 승산은 있었다. 저그의 삼신기- 3해처리, 레어트라이던트, 디파일러는 테란들에게 있어서 공포 그 자체였는데, 그들이 테란 제국의 역사를 통해 날카롭게 갈아온 투배럭, 더블커맨드, 3탱크진출 등을 전부 잡아먹을 수 있는 저그의 유연성과 기동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배럭은 3해처리의 저글링과 소수 성큰에 막히며, 더블커맨드는 아차하면 저글링 난입으로 게임이 박살나거나 혹은 3해처리의 확장성을 막지 못하고 더블병력진출때에 이미 중원을 빼앗겨 제대로 된 전투를 이끌지 못하는 상황은 심심찮게 벌어졌다. 포인트는, 내가 프로게이머가 아니라는 점과 상대도 프로게이머가 아닌 배틀넷 초보만 방을 전전하는 허접이었다는 점이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뒤로하고, 게임은 시작되었다. 5-4-3-2-1. 환하게 밝혀진 나의 전장은 로스트템플의 7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뮤탈리스크만 제때 띄운다면 언덕 견제를 막을 수 있고, 앞마당 해처리에 이은 3해처리로 테란의 초반 마린메딕 압박을 성큰으로 봉쇄하는데에도 편의성이 보장된 자리.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내가 택한 것은 12앞마당 11풀 14 3해처리로 시작하는 당시 정석과도 같은 플레이였다. 다만 이 플레이에는 몇 가지 초반의 위험성을 피해야만 했는데, 첫 scv가 앞마당 건설을 방해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6시에 간 오버로드는 텅 빈 미네랄만을 보고 천천히 2시로 방향을 돌렸다. 12시 아니면 2시. scv는 아직 오지않았고, 나는 아홉번째 드론을 미리 앞마당 미네랄 뒤켠 구석에 숨겼다. 이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는데, 테란의 scv가 앞마당 견제를 할 때에는 '스포닝 풀'이 늦는걸 확인하고, 앞마당으로 나갈 드론의 움직임을 캐치해서 따라가는게 정석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프로게이머는 아니지만 이정도 소양은 갖춘 플레이어 들이었고, 나는 그 빈틈을 캐치해야했다. 앞마당이 늦어지면 첫 성큰이 늦어지고 그렇게 되면 아차 하는 순간 2배럭에서 나온 1부대 마린메딕에 허무하게 게임이 찢어질 수 있다. 예상대로 그 친구는 늦은 정찰을 했고, 난 scv가 언덕에 올라서자마자 생긴 300의 미네랄로 재빠르게 앞마당을 올렸다.
이후 무난하게 스포닝풀을 올리고 3해처리를 위해 드론을 뺐다. 그제서야 SCV는 뒤늦게 3해처리를 쫒았으나 이미 거의 펼쳐진 앞마당과 곧 튀어나오는 저글링에 정리되며 3해처리를 오래 방해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2시에 도착한 오버로드는 역시나 텅 빈 전장위에 둥둥 떠 있었다. 12시다. 나는 저글링 한마리를 적의 본진에 보냈으나 마린에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12시의 전장은 언덕과 앞마당이 떨어져있어서, 앞마당을 먼저 보았어야했는데 실수였다. 다시 한마리를 앞마당으로 보내보았으나 이미 마린이 앞쪽에서 정찰을 끊기위해 서 있었고 저글링은 케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눌러논 오버로드를 미리 3기의 마린이 대기하며 점사해, 드론을 펌핑하다 재빠르게 오버로드를 뺐지만 공중에서 터지고 말았다. 정찰을 잘 막았으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막힌 오버로드에 드론타이밍이 늦어졌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성큰 3개와 레어를 올렸다. 3해처리의 중요한 '드론타이밍'이 늦어짐으로서, 나의 3해처리는 전체적으로 조금 느려진 걸음걸이를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초보자가 할 수 있는 큰 실수를 불러 일으켰다. 저그는 레어와 스파이어의 타이밍이 매우 중요한데, 레어가 터지자마자 스파이어를 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스파이어는 해처리와 같은 빌드타임을 가졌고, 스파이어가 조금만 느리다면 적의 마린메딕 진출을 막을 수도 없고 빠른 드랍십을 커버할 수도 없다. 더불어 터렛공사가 완성된다면? 프로도 아닌 사람의 뮤탈리스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뮤탈'이 컨트롤을 통해 3신기중하나,-레어트라이던트의 강력한 한쪽 창날을 구성한다지만, 그것은 프로수준의 이야기- 허접 저그와 허접테란에게 있어서 마린메딕의 효용성은 뮤탈을 압도하며, 러커는 마린메딕을 학살할 수 있는 힘의관계를 그대로 갖고있었다. 드론을 빨리 충원할 수 없더라도 스파이어를 올리며 조금씩 드론을 채웠어야했는데, 나는 '괜찮을 것이다'라는 믿음에 드론을 한타이밍 펌핑했다. 스파이어가 늦어지는 본진위로 띠로링-띵 띠로롱- 하고 스캔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그 친구가 전략을 들고 온 것인지, 아니면 즉흥적인 빌드의 변화였는지는 모르겠다. 무난히 드론수를 충원하고 9뮤탈을 뽑아 상대 본진으로 향했다. 3배럭 1팩토리가 있었고, 스타포트가 이미 완성되어있었다. 그리고 터렛은 본진에 약 6개이상. 터렛 한두개를 깼지만 컨트롤이 안타까운 수준이라 뮤탈도 2마리를 잃었다. 그대로 돌려 앞마당쪽을 빙 돌았다. 그리고 본진에서 다시 뮤탈을 눌렀다. 그 때였다. 본진 미니맵에 빨간색 네모가 빛나기 시작했다. 재빨리 본진을 보자, 드랍십에서 내린 7마린 1메딕이 스팀팩을 빨고 미친듯이 미네랄의 위치로 달려들고있었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드론을 쫙 긁어 앞마당 미네랄에 광클릭했지만, 한부대가 넘는 드론은 결국 반 이상이 궤멸당했다. 앞마당과 본진에서 남은 라바로 다급히 저글링을 찍고 있는 저글링을 언덕으로 보냈다. 그 사이, 러커를 개발하고 있던 히드라 리스크 덴의 체력이 주황색으로 깎였다. 앞마당을 견제하기 위한 뮤탈도 먼 거리를 돌아오고있었다. 러커가 깨지면 게임이 매우 힘들어진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뮤탈을 a로 본진에 찍어두고 저글링을 컨트롤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패착으로 이어졌다.
뮤탈리스크가 가로지른 방향에는 약 1부대 반 가량의 마린메딕이있었다. 나는 뮤탈이 그 위를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고, 저글링과 갓 나온 뮤탈로 겨우 마린메딕을 정리했을 즈음에 무언가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니맵 어디에도 내 뮤탈이 없다. 당황스러워 하는 내게 곧 1탱크가 추가된 마린메딕이 앞마당을 조이기 시작했다. 뿌드득-하고 이가 갈렸다. 조금 늦은 스파이어가 드랍십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었고, 한 번의 드론펌핑이 저글링을 모자라게했다. 러커가 완성되었지만 이미 변태하는 사이에 앞마당은 갈려없어졌다. 언덕에서 러커가 최후의 발악을 해 보았지만 탱크는 사정없이 스캔이 떨어진 그 위로 포격을 감행했다. 게임을 구경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gg를 차마 누를 수가 없었는데 상대의 채팅이 화면 옆에 올라왔다. '안나가고 뭐하냐 빙구야' 아랫배 깊은 곳으로 부터 울화가 치밀었다. 작은 방심이 게임을 그르쳤다. 의기양양해하는 맞은편 자리의 친구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우리의 전장은 주먹의 세계가 아닌 바로 이 스타크래프트였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흥분을 콜라를 사서 벌컥벌컥 들이켜 겨우 가라앉혔다. 아직 1패일 뿐이다.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면 된다. 최후에 이기면 되는 것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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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billy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01-2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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