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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6/01 19:51:39
Name Bar Sur
Subject [글] 청소기

  그들이 나를 소환하기 위한 통지를 미리 보냈었고, 나는 약간은 겁을 내면서도 날짜와 장소, 교통편을 잘 확인하고 정확한 시간을 맞추어 그곳에 도착했다. 신분을 확인하고 간단한 절차를 거쳤다. 창구의 미녀 접수원이 그래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넬 여유 없이 나는 곧장 딱딱한 인상의 갖가지 기계와 장치들로 꾸며진 널찍한 밀실로 안내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요컨데, 이를테면.

  
  그들이 내게 A를 요구하면 나는 A를 하면 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누구라도 할 수 있고, 힘들지도 않다.

  머리를 쓸 일도 없다. 그저 의식이 파도처럼 출렁일 뿐이다. 가끔씩 절벽을 향해 내닫을 때도 있지만, 그 때마다 그들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조신하게 수면을 낮추는 것이다. 그것 또한 놀라운 재능이다. 과연 그렇다. 그들은 다만 절벽위에 잘 보이는 등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추어 내 의식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도록 한다. 깜빡, 깜빡, 깜빡.

  A는 A, B는 B. C는 D? 아뇨. C는 C. 자, 이제 빙글 돌아서, 왈왈!!


  새로 구입한 청소기 같군, 하고 나는 그 쉬운 단어 4개를 떠듬거리듯 겨우 떠올려 조합했다. 극도로 간결하고, 조용하고, 주도면밀하다. 놀랄 정도로 자동화되어 있었다. 이미 편견이나 이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여기에서 하는 일은 분명 여러모로 옳고 또 편한 일인 것이다.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까요."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일이다. 아무리 국가라는 게 국민을 감각적으로 만족시켜주는 경우가 드물다고 할지라도 이미 국가로서 정형화된 부분만큼은 충실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까지 부정할 수 있다면 혁명을 일으키거나 이민을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자동차 공장의 부품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시 다음 곳으로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과정을 거쳐 넘겨졌다. 도중에 어떤 결함이 생겨나면 이번엔 아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세밀한 검사를 거친다. 정확히 몇 개의 과정이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저 그런 것이 있었다. 이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7시간 동안 나는 새롭운 구조로 재형성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다 빨아 들였다. 더 이상은 없다구. 깨끗해. 청소기는 만족한 듯 미소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창구의 미녀 접수원이 모세가 바다를 가를 때의 신성을 드러내듯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수고비를 건넸다. 대단해. 하지만 이집트 병사들이 건너오는 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럼 바다를 가른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녀의 미소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나는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사실과 그녀의 미소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차마 웃을 기운이 없는 나는 담담하게 고개만을 끄덕이고 그 봉투를 받아들었다.

  묵직한 봉투 때문에 안을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몰래 비축해 뒀던 기운까지 그 놀람으로 다 날아가버렸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 예산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이를테면 경비인 셈이다. 경우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든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라고 그녀가 말한다.


  나는 처참한 몰골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육체적으로 피곤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뭐랄까, 피폐해져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의식이 평소보다 늘어지거나 경직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말라버리는 것이다. 탄성을 잃어버린다. 원형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런 일에 익숙해져버리면 언행도 거칠어지고, 신경질적이 되고, 피부도 푸석푸석해지고 말 것이다. 지독한 일이다. 이런 일을 여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도 지독한 자들이다. 적어도 이런 일을 의무적으로 여성에게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남녀를 가른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적합>을 다루는데 있어서 성별은 그 중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 남녀는 공평의 관계 이전에 공존의 관계가 아니었던가. 분명 그렇다.

  
  1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멈춰섰다. 35차례 녹색 버스가 지나가고 148번 버스가 23번 지나가는 동안 903-1번 버스는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명백하게 말해서 버림받은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버스기사도, 어느 누군가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인간은 이런 실수도 하는 법이다. 결국 나는 집 근처와는 약간 틀어진 노선의 버스를 타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어느 때보다 인상적이고 이질적이다. 저 멀리의 빌딩이 비틀거리며 달려가는 것 같기도 하고 가로수들이 손을 흔들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천천히 나는 회복했다. 하지만 나 혼자서만으로는 안된다. 배가 고프다.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돌릴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한 열량만으로는 또 안 된다. 무언가 관능적이고 자극적인 식사를 하고 싶었다. 내 몸 안에 끊어진 의식과 감각을 연결해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럼 여기서 질문, 결국 나는 무엇을 먹었을까요?

  10초 드리겠습니다 10, 9, 8, 7, 6, 5, 4, 3, 2, 1. 자, 지금 바로 대답해주세요..... 라고 해도 별로 대답할 생각이 들지 않는 이상한 글이 되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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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Walker
04/06/01 20:02
수정 아이콘
삼겹살과 소주요.. 이유는 예비군 훈련 다녀온 이야기 같아서..;;
관능적이고 자극적인 음식인가에 대해서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秀SOO수
04/06/01 20:29
수정 아이콘
흠...ABC 초콜릿..을...
슬픈비
04/06/01 21:31
수정 아이콘
된장국에 밥말아먹었겠죠..
세상에서 배고플때 가장 그리운 음식은 된장국에 자~알 말은 밥이더군요..흑..배고파..ㅠ_ㅠ
미츠하시
04/06/02 01:25
수정 아이콘
삼각김밥...
04/06/02 03:57
수정 아이콘
라면....
In.Nocturne
04/06/02 10:20
수정 아이콘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女...(퍽~)
Return Of The N.ex.T
04/06/02 16:45
수정 아이콘
굶었다...
멋진벼리~
04/06/02 20:55
수정 아이콘
크윽 5분동안 고민했는데 ㅠㅠ 군대이야기인가.. 혹시 신체검사...
으악 미녀는 왜있는거야...
//daywalker님 부럽습니다. 아직은 제가 현역이라 그런걸까요?
역시나 삶의경험이란건 무서운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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