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M < 3 >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는 가풍에 따라 분방하게 자라났고, 하늘 아래 무서울 것이 없는 천둥벌거숭이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형제가 살던 땅에 기근이 찾아와, 고민 끝에 형은 고향을 등지고 머나먼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끝까지 고향에 남기로 했습니다.
머나먼 나라에 도착한 형은 고풍스런 몸짓, 화려한 삶, 방대한 학문과 세련된 칼솜씨를 익혔고
고향에 남은 동생은 점점 힘겨워지는 생활 속에서도 끝끝내 예전과 같이 꼿꼿한 삶을 고집했습니다.
그리하여 형은 머나먼 나라의 이름난 기사가 되었지만 동생은 벽촌의 시골뜨기 건달로 남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제 · 1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中
소위 양산형(量産形) 테란의 시대를 열어 제친 것이 최연성임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다. 최연성은 이른바 '적극적 방어'라 명명된 개념을 창조하여 빠른 자원 선점과 뒤따르는 방어 위주의 스타일을 고안해냈으며 그 천재성에 기반한 폭넓은 빌드 조립을 그 수단으로 삼았다. 최연성에 의해 이전까지의 공격 수법은 대부분이 간파되었고, 그 사실을 간과한 적들은 경악스러울 정도의 최적화된 방어에 맞닥뜨린 뒤 자멸해갔다. '테란 제국' T1의 테란 라인은 최연성을 중심으로 갖가지 최적화 빌드를 짜 나갔으며 그 결과물들은 집대성되어 하나의 매뉴얼처럼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제국의 검술 교본인 셈인데, 그 경이로운 합리성과 독해의 용이성으로 인해 이는 엄청난 속도로 테란 전체에 퍼져 나갔다.
프로리그와 개인리그를 가리지 않고 테란이 넘쳐났으며, 그들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자원/방어 위주의 최적화 플레이를 구사했다. 이 사태에 대해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꼈고, 그렇게 정형화된 빌드-패턴의 숙달을 통해 찍혀 나오다시피 하는 테란들이 그다지 약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는 공포마저 느꼈다.
이처럼 제국의 교본이 양성한 테란들이 구름처럼 일어났으나, 어쨌든 간에 가장 완벽하게 제국의 검을 이해하고 사용했던 것은 제국의 테란들이었다. 물론 그를 가장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던 이는 최연성일 것이며 그 누구도 그보다 제국의 검을 잘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국은 감히 최연성에 버금간다 말할만한 재능을 하나 더 꼽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순수한 제국 출신은 아니었다. 그는 G.O에서 왔다. 만일 그가 끝내 G.O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서지훈의 뒤를 잇는 G.O테란은 변형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전상욱이다.
일찍이 FD를 대적하기 위해 프로토스는 박지호와 오영종을 일깨워야 했다. 그 때 그들은 전설의 바람을 타고 프로토스가 짜낼 수 있는 극한을 내보임으로써 서지훈을, 이병민을, 최연성과 임요환을 물리쳐냈다.
그러나 이후 최연성의 수비형은 FD 시절의 그것에서 몇 차원을 뛰어 올랐으며 테란은 그 거듭된 발전의 결과물로써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을 무장시켰다. 그렇게 양성된 전력들은 최연성의 오리지널을 창조해낼 수는 없었을지라도 구사할 수는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을지라도 사용할 수는 있었다.
엔트리 공백에 시달리던 팀들에게 있어서 급속으로 성장하는 양산형 테란은 실로 매혹적이었다. 프로리그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기존의 주전들로는 그 모든 게임을 채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몇몇 팀들에게는 빠르게 충원할 수 있는 전력이 간절했다. 양산형 테란은 분명히 그 해답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흐름에는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시작점도, 중간점도, 그 모두를 연결하는 과정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결과로만 본다면 프로토스는 쏟아져 나오는 수십 명의 최연성과 대적해야 하는 셈이 되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전황은 사방에서 불리해지고 있었다. 설령 마법의 가을이 일 년 내내 이어진다 해도 그 모든 전장에 새로운 전설들을 일깨워낼 수 없으리란 건 자명했다.
궁지에 몰린 프로토스는 장고 끝에 우울한 답을 떠올려냈다.
전설로 올라설 수 없다면 나락에 떨어지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 결단이 있은 뒤, 이른바 양산형 프로토스라 불리는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산형 프로토스는 안티-양산형 테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양산형 테란과의 전투에서 양산형 프로토스는 옵저버를 생략하고 더욱 빠르게 물량을 폭발시킬 수 있다. 어떻게? 매뉴얼을 따를 뿐인 양산형 테란이 마인을 심을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옵저버를 뽑을 필요조차도 없으니까.
양산형 테란은 획일화된 플레이로 변수를 제거하고, 최소의 이득을 지켜나감으로써 승리를 챙긴다. 그렇다면 이쪽도 어차피 적이 나서서 없애주는 변수 따위 생각지 않고 더 잘 먹고 더 잘 뽑는 기본기만 연마해서 눌러버리면 된다. 그 발상이 양산형 프로토스의 핵심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양산형 테란을 사냥하는 것이었고, 그 노림수들도 양산형 테란의 움직임에 완벽하게 맞춰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임무'는 그들의 '용도'라는 단어로도 치환 가능하리라. 그 쓰임새가 다한 뒤, 양산형 테란의 광풍이 가라앉은 뒤의 미래는 그들에게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서는 박정석과 강민, 박용욱, 저마다의 색으로 찬란한 반란의 주인이었던 선배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과 가장 닮을 꼴을 찾으라면 그것은 차라리 양산형 테란, 그들의 유일한 적들이었다. 테란과 닮아버린 프로토스 - 그 얼토당토않은 이름이 그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송병구는 그들 중 가장 지독하게 몸부림치던 프로토스였다. 빛나는 이름 신(新) 3대, 한 때 그렇게 불렸지만 이미 나머지 두 사람과는 걷는 길이 너무도 동떨어져버렸다.
그는 낙오되고 말았다.
오늘 · 1
「영웅의 시대는 끝났네, 위글라프.」
-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베오울프≫ 中
박정석을 꺾은 뒤 송병구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송병구의 상승세가 완전히 만인의 궤를 벗어난 돌발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감독들이 이미 2007 최고의 시즌을 보낼 선수로서 송병구를 점찍었고, 그 빈틈없는 기본기는 이미 꽤 오래 전부터 프로토스에게 기대를 품게 한 바 있었다.
변형태와의 일전을 치르기에 앞서, 이미 송병구는 마재윤을 조롱한 조커(Joker) - 이성은에게 그 장쾌한 토막 전설의 시작을 안겨주고 MSL의 결승에 진출한 참이었다. 이제 이름난 테란전으로 변형태마저 잡아낸다면 저 강민 이래 최초로 양대 리그 우승을, 그것도 동시에 노리는 프로토스가 되는 것이다.
송병구의 이 '오늘'을, 과연 누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가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2004년은 아직 전설과 낭만이 허락된 시간이었다. 황제와 폭풍이 칼을 맞댔다. 이윤열과 최연성이 겨루었다. 조용호며 변은종, 박성준 같은 저그들이 리그를 누볐으며, 그 무엇보다, 3대 프로토스라 불렸던 이들이 꿋꿋이 그 수라장에서 프로토스를 이끌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저마다의 무용담 하나쯤은 - 때로는 수십 개를 - 간직한 거인들이 시대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송병구는 맨손의 신참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송병구를 바라보며 짓는 미소는 결코 비웃음은 아니었으되 모진 세월의 풍파를 지나온 노병이 새파란 신병을 보며 짓곤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 회한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묻어나는 미소를 마주할 때마다 송병구는 한편으로는 덜컥 내려앉는 가슴을 붙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솟아오르는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그 거인들이 바로 이 세계를 건설한 장본인들인 것이다.
한 때는 상금 헌터라 불리며 어두운 PC방을 전전하던 사람들이, 숱한 인연의 도움을 받고, 기회를 붙들고 위기를 넘어서서, 마침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계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그 세월의 와중에 누군가는 지쳐 주저앉았고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지만 누군가는 마침내 끝까지 버텨 이곳에 남았다.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이들이었다. 이제 송병구는 그를 향해 아련한 미소를 짓는 영웅들과 함께할 것이며, 이 세계에 빛이 더할 수 있도록 싸워나갈 것이었다. 그 사실이 송병구의 가슴에 벅차오르는 기대감을 쉼 없이 불어넣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 송병구는 어느덧 신 3대 프로토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신참자들 가운데 위명을 드날리고 있었다.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의 이야기로만 느껴졌던 프로토스의 세 별 - 그들의 이름을 송병구가 이어받고 있었다. 꿈은 겨우 일 년 만에 현실로서 그에게 다가왔다. 송병구는 당당하게 그 꿈을 붙잡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곁에서 신 3대의 다른 두 사람도 막 발을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송병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것이 - 전설과 낭만의 시대가 남긴, 장엄하고 화려하며, 애틋한 최후였다.
전설의 리그 So1. 그들 신 3대가 초대받은 자리는, 그들 영웅들의 마지막 잔치였던 것이다.
그 뒤, 송병구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나락의 밑바닥에서 헤맨 뒤 가까스로 이곳에 돌아왔다. 그시련으로 연마한 칼을 내찔러, 낭만 시대의 마지막 별, 찬란한 3대의 '영웅'을 꿰뚫었다.
송병구는 자신을 향해 무너지던 그의 마지막 속삭임을 기억하지 못했다.
송병구는 쓰러지는 영웅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던 낭만 시대의 관중들을 기억했다.
- 올라가기 위해 쓰려뜨렸을 뿐이다.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답이 돌아오지 않은 자기변호를 이어가면서,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던 관중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무력함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송병구는, 너무나 무신경하게 돌격해오는 광전사에 맞섰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4강 A조 1경기 송병구 VS 변형태 in 몬티홀.
변형태 VS 송병구의 이전 전적 - 1:4로 송병구 우세.
그러나 승리한 4전 중 3전을 815에서 치렀다. 송병구 자신이 주창한 「선·스타팅 멀티 확보」이후 테플전에서 프로토스가 뚜렷한 강세를 보였던 전장이다. 더욱이 변형태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이전까지의 상대 전적 따위 그다지 큰 압박감도 받지 않을 것이다. 변형태와 같은 타입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맞붙건 간에 까다롭다. 후에 누군가는 변형태를 일컬어 '변수형 게이머의 대표격'이라 치켜세웠는데, 이는 어떤 게임 성향 따위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변수라는 이야기다. 패배할거라 예상되는 승부도 뒤집어내고, 포기해도 좋을 게임에 끝끝내 달라붙고, 또 한창 기세를 올리다가 엉뚱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다가 어이없이 지기도 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일단 키보드에 '내 앞길 막는 놈 다 죽인다' 같은 험악한 글귀를 써놓는 시점에서 평범하다는 범주에서는 실격이다.
분명 송병구의 운영은 경지에 올랐다. 무난하지만 약점이 없는 송병구의 플레이를 두고, 혹자는 '날카로운 날과 예봉이 없는 거대한 바위를 무엇으로 꺾을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지며 찬탄했다. 실로 적절한 비유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변형태라면 뚱한 표정을 짓고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바위가 아니고, 바위는 꺾는 게 아니다.」
사람은 바위가 아니기에 언제나 그 경도를 똑같이 유지할 수 없고, 바위는 꺾는 것이 아니라 내찔러 쪼개고 박살내는 것이다.
1경기 몬티홀. 변형태 5시, 송병구 11시.
송병구의 노게이트 더블 넥서스에 대해 변형태는 노배럭 더블로 응수한다.
더 잘 째고 잘 먹고 잘 뽑는 놈이 이긴다. 그 심플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송병구는 뒤이어 12시를 가져가면서 5게이트를 건설하며 물량을 폭발시킬 준비에 돌입한다.
- 틀렸다.
변형태는 그런 송병구의 선택을 비웃듯이, 늑대 무리 같은 다수 벌쳐를 몰아서 12시로 짓쳐들었다.
- 싸움은 선빵치는 놈이 이기는 거야.
12시에는 방어 병력이 전무했다. 송병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양산형 테란의 시대가 시작한 이래, 그들의 테플전에는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각자 만반의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교전을 삼가자. 먹고 먹고 먹어서, '정정당당하게' 중앙에서 크게 싸워 승패를 가르자.
의례적으로 셔틀 리버를 날리고, 슬쩍 압박 모션도 취해준다. 그러면 상대도 약속한 것처럼 매너 있게 대응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공허한 예의범절이다.
물론 가끔씩 예의란 걸 모르는 무도한 작자들도 있다. 스캔 러시로 싸닥션을 날리는 무개념 중딩이 대표적일 것이며, 이 변형태 또한 그런 무례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노배럭 더블 이후 투팩에서 마인 속업 벌쳐를 모으다니, 그야말로 동네 양아치나 할 법한 짓이다.
그러나 송병구는 변형태가 그런 부류란 것을 몰랐단 말인가?
야만스런 광전사, 앞 뒤 안 가리고 물고 늘어지는 광견, 예절이라는 걸 모르는 무뢰한. 그런 평가들을 자랑스레 두르고 다니는 변형태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무례함이었고, 그렇다면 적어도 벌쳐가 타고 들어올 수 있는 경로에 프로브 한 두 기는 가져다 놓았어야 했다.
하지만 송병구는 그를 잊고 말았다
무슨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12시의 프로브는 전멸을 면치 못했고, 몇 기 벌쳐는 본진까지 뛰어 들어와 분탕질을 해댔다.
다행히 세련된 심시티 덕분에 본진에서는 큰 피해 없이 벌쳐들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난리 통에 허둥대는 중에 몇 기의 드라군이 마인을 밟고 터져나가는 것까지는 막을 순 없었다. 아울러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변형태는 테란인 주제에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공격형 저그의 패러독스를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변형태의 파상 공세가 곧바로 시작되었다.
네 기에서 여섯 기에 이르는 탱크와 다수 벌쳐로 구성된 전력이 몬티홀의 세 갈래 길을 번갈아가며 두들겨왔다. 송병구의 드라군들이 본진에서 세 갈래 길을 오가며 안간힘을 썼지만 아홉 시와 열두 시가 차례로 깨져나가는 것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전장의 주인공은 탱크보다 다수 벌쳐였고 그것이 변형태의 파상 공세에 가공할만한 속도감을 더했다.
그 광포한 연속 공격에, 결국 송병구는 견디지 못하고 이 4강전 첫 번째 GG를 선언했다.
어제 · 2
「큰바람 불고 구름 높이 오르니
위풍을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네
용맹한 인걸들로 사방을 지켜 태평천하를 이룩하리」
- 한고조 유방
양산형 프로토스의 하나로 전락한 신 3대가 택한 방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앞선 이들을 뒤쫓는 것이었다. 송병구는 닥치는 대로 배우고 받아들이려 했다. 그 끊임없는 향상심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여기서 밀려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본래부터도 좋은 기본기를 가지고 있었다 평가되던 송병구였던 데다 발견되는 자신의 약점이란 약점 모두를 배움으로써 메우고자 했으니 그 결과물이 완전무결에 가까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무렵 송병구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여러 '스승'들을 모셨으며 심지어 그 스승들 가운데는 '팀플의 신'으로 불리는 팀플 커맨더 이창훈도 끼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송병구가 이창훈에게 배우려 했던 것은 팀플 저그 특유의 병력을 돌려 치는 움직임이었다는데 이창훈 입장에서야 프로토스가 팀플 저그의 노하우를 배우겠다는 게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창훈은 매우 귀찮아했으나 송병구는 집요하게 매달렸고 결국 몇 가지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송병구는 훗날 실제로 이를 병력 운용에 반영하여 테란들을 농락하는데 사용했으니, 절치부심한 송병구의 성장 그 근간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부단한 절차탁마가 있었음에도 양산형 테란들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얼뜨게 제국 검을 흉내 내는 루키들이야 이미 송병구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 구사가 몸에 익은 베테랑들 상대로는 신생 송병구로서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3-3-200의 메카닉 화력에는 효율성과 파괴력이 있었던 것이다. 송병구에게는 확실한 마침점이 필요했고, 송병구는 그를 보다 오래 전의 프로토스들에게서 찾아냈다. 캐리어였다.
시행착오 끝에 송병구는 마침내 양산형 테란과의 대규모 지상전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가운데 캐리어를 띄워 마무리하는 패턴을 완성시켰다. 온갖 배움으로 향상시킨 뛰어난 기본기로 초중반의 싸움에서 테란을 수세에 몰아넣고 안정적인 캐리어 확보로 후반을 마무리. 그 성과가 있은 후로는 그 어떤 양산형 테란도 송병구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지금 여기, 극한을 완성한 양산형 프로토스가 있었고, 그 완성의 순간 그는 더 이상 양산형이 아니게 되었다.
저 혁명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단 한 명의 프로토스가 지금 여기에 있었다.
- 저런 미친 놈.
전상욱이란 이름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남겨지는 순간, 많은 이들이 입에 이 말을 올렸으리라.
이건 뭐 황당한 수준을 넘어서, 그냥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테란이 이전에도 없었던 건 아니다. 그 무렵은 곧 스타일리스트들의 시대였고, 임요환을 필두로 기행을 저지르는 테란들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전상욱은 도가 지나쳤다.
전상욱이 '공공의 적', '삼지안(三之眼)'이라 불리던 박경락을 때려잡겠답시고 내놓은 전략은 '묻지나 파뱃'이었던 것이다. 줄달아 달려오는 파이어뱃과, 어이없어 하다가 점점 밀리는 전황에 굳어가는 박경락의 얼굴, 그리고 결국 터져 나온 GG.
K.U.F(Kingdom Under Fire)에서 온 천재가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똑똑히 남기는 순간이었다. 그게 전상욱이었다.
2006년 초, 그 전상욱이 별다른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로 남긴 짧은 카피는 일부 사람들로 하여 다시금
- 저런 미친 놈
이라는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가까우면 벙커링, 멀면 더블컴.」
저그를 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 에 대한 전상욱의 대답.
빌드오더를 통한 이득의 선점. 그리고 그를 지켜나감으로써 따라오는 승리. 전상욱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리라. 그것이 최연성 이래 수많은 양산형 테란을 만들어낸 진리였으니까, 어쩌면 T1 4테란의 일원이었던 전상욱으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다만 약간의 장난기를 덧붙여 과묵한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게 말했을 뿐이리라.
헌데 그것이 핵심을 찌르고 말았다. 그 카피의 간결함과 합리성이 당대 테란의 단조로운 게임 양상과 더불어 그 단조로운 움직임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저그의 상황에 맞물리면서 뜨끔한 조롱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T1의 테란들은 다시금 악의 축이 되었고, 저그는 그 악의 축을 물리칠 위대한 거장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 누구도 전상욱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었다. 첫 번의 '미친 놈'이 겁도 모르고 날뛰는 신예 테란을 향한 비웃음 섞인 욕지기였다면, 두 번째의 '미친 놈'은 당대 최강으로 내닫는 테란을 향한 두려움과 한탄이 섞인 욕설이었다.
전상욱은 T1으로 이적하기 전이나 후나 서지훈을 '사부'라 부르며 따라다녔다고 한다. 본래 KUF에서 이름을 날렸던 전상욱인만큼 스타크래프트로의 종목 전환은 결코 쉬언 선택은 아니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G.O테란의 핵인 서지훈이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제로 전상욱의 플레이에서 엿보이는 숨막히는 치밀함은 서지훈의 그것과도 많이 닮았다. 하지만 전상욱은 서지훈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미친 짓을 가끔씩 저지르는 분방함 또한 가지고 있었고, G.O에 있을 때는 때때로 그런 악동 같은 짓을 저질러 보는 사람들을 당황시키곤 했다.
그것이 - T1의 테란이 된 이후로는 깨끗하게 없어졌다. 벙커링조차도 자원 선점과 방어적 주도권 확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아래 수행했고, 새롭게 개발된 최적화 빌드를 가장 먼저 구사하고 손에 넣었으며,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움직임들을 없앴다. 대부분의 양산형 테란들이 어렴풋이 이해할 뿐인 최연성의 전략 기조를 전상욱은 마음껏 주무를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게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진영수, 이윤열, 변형태. 그 이외에도 마재윤의 시대 대항마라 할 만한 테란은 몇 명인가 더 뽑을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마재윤의 신화를 위협했다' 말할만한 테란은 그 뿐일 것이다. G.O의 거친 신예는 2005년 테란의 중심, '제국'으로 떠났고, 거기서 감히 최연성에 견줄만한 거물이 되었다. 빌드 싸움에 능란하며 중반의 굳히기 운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 종족을 가리지 않고 씹어 먹는 고승률 보유자. 그것이 제국의 칼, SKT 4테란의 일원으로 이름을 날린 전상욱Midas가 선택한 모습이었다.
오늘 · 2
「내일만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보고 사는 놈한테 죽는다.」
- 이정범 감독,《아저씨》中
- DAUM 스타리그 S1 4강 A조 2경기 송병구 VS 변형태 in 히치하이커.
변형태 11시, 송병구 5시.
히치하이커를 줄곧 껄끄럽게 여겨왔다던 송병구다. 이영호와는 다르니까, 아마도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일 것이다. 과연, 송병구가 시도한 것은 초 전진 게이트, 그것도 7프로브 째에 올리는, 말 그대로 혼을 실어 날리는 급습이었다.
'선빵치는 놈이 이긴다'. 짐짓 거만하게 들려온 변형태의 말을 되갚아주고 싶었던 것일까.
일단은 '운영의 송병구'의 이미지를 깨뜨린 비장의 한 수가 되는가 싶었는데, 무정하게도 변형태는 심시티로 입구를 막아버렸다.
이런 게 어디 있느냐, 항의라도 하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나 이미 상황이 급박했다.
1경기에 두들겨 맞은 것으로 변형태가 어떤 위인인가 하는 것은 충분히 다시 떠올려냈다. 혼신의 전진 게이트가 막혔으니 최악의 경우 저 무개념 중딩 마냥 곧바로 스캔 찍고 일군과 함께 뛰쳐 올라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송병구는 최전선을 빠르게 포기하고 후방 멀티 확보와 함께 캐논 건설을 통한 스캔 러쉬 방어에 돌입한다.
그러나 변형태는 한 번 인내했다.
바위를 쪼개기 위해서는 한 곳만을 놀려 파고들어야 한다. 그가 꺼내든 건 다시 한 번 투팩이었고, 송병구가 그 투팩의 선발대를 마주할 즈음 송병구의 본진에서는 의미 없는 게이트만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배신, 배신, 배신의 연속이었다. 이렇게까지 예측을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참으리라 생각했더니 달려 나왔고, 달려오리라 생각했더니 참아낸다. 이 변형태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테란의 움직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이 무뢰한은 닳고 닳은 최연성의 매뉴얼조차 한 번 읽어보기나 했을지 의심스러웠다.
- 그러니까 버서커(Berserker), 변방의 테란일테지.
송병구는 경멸하고 치를 떨면서도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막 생산된 리버에 승부를 걸었다.
송병구의 리버가 보여준 활약은 실로 눈부셨다. 게이트에서 기어 나오는 드라군과 질럿은 몸으로 마인을 제거하고 터져나갈 뿐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가운데, 송병구의 리버는 홀로 테란의 메카닉 군단에 대항했다.
아슬아슬한 붉은 체력을 유지하면서 절묘한 타이밍이 셔틀에 타고 내리는 그 컨트롤은 한 때 시스템적 사기 스킬이었던 '슈팅 리버'의 그것에 비할만한 것이었다. 송병구의 본진을 누비던 벌쳐가 어느새 조금씩 모습을 감추어갔고, 특명을 받고 날아온 레이쓰도 소수의 캐논에 막혀 쉽사리 파고들지 못했다.
실로 기적적으로, 송병구는 변형태의 공세를 막아냈다.
하지만 그 리버에 바쳐진 찬탄도 잠시 뿐이었다.
변형태는 곧바로 탱크 드랍을 통해 송병구의 희망줄이었던 멀티 언덕을 점거했다. 송병구는 견디지 못한 채 두 번째 GG를 선언하고 말았다.
마재윤의 곁에서 변형태는 '신'에게 도전하는 수많은 테란들의 모습을 보았고 언젠가는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은 길을 걷겠노라 다짐했으며, 마침내 두 번의 도전 끝에 마재윤을 쓰러뜨렸다.
변주곡 : 영웅(Eroica).
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를, 박정석을 떠올릴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4강을 앞서 준비하면서 변형태는 다시금 그 이름을 필요로 했다.
16강에서 변형태는 박정석을 상대로 투팩을 시도했고 완전히 분쇄 당했다. 현란한 드라군 드라이브의 뒤를 이어 리버와 템플러 콤보에 일꾼을 사냥 당했고 캐리어까지 보고 말았다. '라이벌 되어 달라'며 박정석을 지명한 것은 자신이었기에 뭐라 불만을 말할 상황이 아님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워낙에 화려하게 즈려 밟힌 것이 억울하여 인터뷰에서 볼멘소리까지 하고 말았다. 물론 직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지만.
여하튼, 그처럼 쉽게 회심의 일격이 막힌 이유는 무엇일까. 변형태 자신의 칼날이 무뎠던 것이라면, 송병구에게 시도한다 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올 것이 뻔했다. 어쩌면 더 처참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송병구는 이미 박정석을 꺾고 올라왔고, 이름을 떨쳤던 영웅의 검이 이 새로운 역사에는 더 이상 미치지 못하는 구시대의 유물임을 증명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자신의 투팩은 그 구시대의 유물조차 이겨내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더 암담해진다.
그렇다고 '리틀 몬스터'처럼 극초반을 노려보자니 두 번 이상 통할 자신이 없고, 일반적인 양산형식 운영을 하자니 송병구의 그 유려한 운영 능력이 껄끄럽다. 이래저래, '테란전 최강'의 타이틀을 가진 프로토스를 상대하는 것인 만큼 그 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구시대의 유물', 그 표현에 넘어갈 수 없는 위화감이 있었다.
왜 자신의 투팩은 그 구시대의 유물조차 이겨내지 못했는가.
왜 박정석은 그렇게 쉽게 그 회심의 일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박정석의 움직임은 마치 익숙한 악보를 따라가는 듯 했다. 그건 분명 그의 몸에 익은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그는 알고 있었고, 완벽하게 해냈다.
그건.
변형태는 그때서야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그와 함께 자신이 찾던 답을 알아냈다. 그토록 간단한 답을 어째서 떠올리지 못했는지, 자괴감마저 느꼈다.
구시대의 유물 '조차'가 아니었다.
구시대의 유물이니까,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