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4/05/30 14:56:51
Name Bar Sur
Subject [글] 토막 (4)
  - 고추냉이 대담


  고추냉이 씨의 악행은 요즘들어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요즘 세상엔 공공연힌 비밀이라는 것조차 없어서 누가 무슨 짓을 했다 하면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는 것이다. 하긴, 고추냉이 씨가 하고 다니는 일들은 정말이지 대담하고 상식이 없었다. 그는 정부와 경찰이 하는 일에는 죄다 훼방을 놓았다. 공공기자재나 국가 소유의 물건들에 역한 소변을 끼얹어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건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맘에 안드는 사람을 습격하기도 하는데, 그에게 직접 습격당한 사람은 재기불능에 이르는 것이다.

  벌써 5명 째 친구가 나에게 '고추냉이 씨를 조심해.'하고 충고를 주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고추냉이 씨의 습격을 받기에 가장 적합한 사냥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봐, 자넨 수염 기르고 있지? 깎아버리라구. 고추냉이 씨는 수염를 극도로 싫어한데. 게다가 잘 씻지도 않는다며?"

  이봐, 내가 수염을 기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잘 씻지도 않는다는 건 근거도 없는 헛소문이야. 누가 그런 소문을 낸거야? 도대체가 설사 그게 진실과 가깝다고 할지라도 그런 소문을 믿으면 정말이지 곤란합니다요.


  오늘은 어머니에게까지 전화가 와서 "고추냉이 씨를 조심하려무나. 내가 고추냉이 씨라면 널 그냥 지나치진 않을 거야."라고 걱정인지 위협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지레 겁을 먹거나 하진 않았다. 고추냉이 따위 올려면 오라지. 대체 그런 녀석이 뭐란 말이야. 다들 떠들석해져선.


  이를테면 효용의 문제다. 그가 저지르는 못된 짓이 외부에서 다시금 커다란 효용성을 가진다. 그것은 분명 나와는 구분되는 그의 역량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나는 고추냉이 씨에게 습격 따윈 받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내게 짧은 대화를 원했을 뿐이다. 그점에서 운이 좋은 건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건 분명 문제이긴 하지만.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교지에 투고할 에세이를 적고 있었다. 제목은 "칸트를 통해 바라본 동양철학 내면의 이성주의에 대한 면밀한 고찰" 맙소사. 이런 글은 설사 교지에 실린다고 해도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찢어서 휴지 대용으로 쓸지도 모르지. 우리 학교 교지의 종이는 꽤 고급이다. 다시 한 번, 맙소사!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고추냉이 씨는 내 글을 한 번 쭉 살피더니, "고추냉이를 먹을 때"의 표정을 지으며 한심스러워해다.

  "이봐, 이런 짓을 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지 않겠어? 자고로 글이라는 건 타인의 마음에서 재생되지 않으면 아무 효용도 없는 거라고. 이런 화창한 날에 이런 글을 적고 있는 건 쓸모없는 작자가 되는 첫걸음이야. 곰팡내가 다 나는군. 자자, 빨리 일어나서 나랑 같이 '모로모로'라도 하러가지 않겠어?"

  "'모로모로'라...."  

  "그래. 즐거운 일이지. 일단은 효용성이 있지.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말야. 무엇보다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다구."

  나는 약간 고민했다. 마지막 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린다.

  "음, 어쩌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안 되겠는 걸."

  "왜?"

  "일단 이것부터 다 쓰고 다시 생각해 보든지 해야겠어. 아무튼 지금으로선 무리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구."

  "크아, 조선시대도 아니고 갑자기 빌어먹을 서생놈 흉내로구만. 알았어. 하지만 그 글을 다 쓰고 나면 다시 오지. 그 때까지는 대답을 준비해 놓으라고."

  "왜 하필 나야? 함께 할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있잖아?"

  "수염을 기르고 잘 씻지도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헛소문이라니까 그러네. 요즘 세상엔 근거 없는 소문에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곤 하는 법이다. 어이, 웃을 일이 아냐.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갔다. 그는 아마 내가 승락하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를 위해 어딘가에서 혼자 '모로모로'에 열중할지도 모른다. 음, 그 책임을 제게 묻는 것도 곤란합니다만.  


  어차피 세상엔 '모로모로'를 하는 고추냉이 씨도 있고, 나처럼 앉아서 펜을 휘갈기며 칸트를 모독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있어서는 고추냉이 씨와 함께 "모로모로" 따위의 일을 하느니 아무런 효용도 없는 글을 쓰는 편이 낫다. 분명 그렇다.


  응? 근데 모로모로란 게 정확히 뭐지? 그걸 묻는 걸 깜박했군.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i_random
04/05/30 15:33
수정 아이콘
저도 모로모로가 궁금하군요.
초콜렛
04/05/30 16:21
수정 아이콘
'모로모로'란 로모 LC-A 카메라 2대를 반대로 조립해서 합체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효용성이 있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지만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다는 속설은 뻥이라는군요.(대체 뭔말인지. -_- )
아케미
04/05/30 20:57
수정 아이콘
1편부터 찾아보았습니다. 역시 느낌이 좋더군요.
…그런데 어째 어렵습니다ㅠㅠ 가볍게 읽으라고 하시지만, 캥거루 공장 견학보다도 더 어려운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얼까요?
모로모로가 저도 궁금합니다. 좌우지간 글 잘 읽었습니다.
04/05/30 22:00
수정 아이콘
멋지군요....
미츠하시
04/05/30 23:39
수정 아이콘
느낌으로 읽으려 합니다. 도무지 해석할 방법이 없네요. 느낌은 좋아요. 어려운것인지 뭔가 숨어 있는 뜻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느낌은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일런트Baby
04/05/31 09:13
수정 아이콘
자연속의 생물들과 인간의 대화 속에는 무언가를 찾으라는건가,,
고등학생으로서 보면 볼수록 어려워지네요,,
김대도
04/05/31 14:27
수정 아이콘
역시 단편은 '중국행 슬로보트'와 '빵가게 습격사건'이....--;
김대도
04/05/31 14:30
수정 아이콘
긴~ 머리 휘날리며 눈동자를 크게 뜨면~~~~ 천년의 긴세월도 한순간에의 꿈이라네.
전설처럼 살아온 영원한여인 천년여왕!
과거를 슬퍼말고 우주끝까지.. 우주끝가지 지켜다오.
날아라 날아라 썬드버드호 비추어라 비추어라 천년여왕아.
아~ 천년여왕!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890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한국의 보컬리스트 [122] Timeless6032 04/05/31 6032 0
4889 [노래추천] 마치 동화같은 노래 한 곡 추천합니다 [15] 베르커드3230 04/05/31 3230 0
4888 [야구이야기]꾀돌이의....은퇴? [23] KilleR3164 04/05/31 3164 0
4887 [100% 실화]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의 2:2팀플이야기(1) [27] AmaranthJH4930 04/05/31 4930 0
4886 황당한 일을 당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분들을 위하여... [14] lovehis6405 04/05/31 6405 0
4885 neogame-i 상위랭커 종족분포. [53] Debugging...6293 04/05/31 6293 0
4884 [장편] 희망을 받는 사나이 Vol. #23 [16] 막군3472 04/05/31 3472 0
4883 [잡담] 가끔 이유없이 가슴이 두근거릴때..? [18] 안전제일3775 04/05/31 3775 0
4881 왠지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19] 탱크교향곡3210 04/05/31 3210 0
4880 고장난 모래시계 [11] 미츠하시3036 04/05/31 3036 0
4879 [잡담]퇴물,먹튀 [27] 전장의안개4474 04/05/31 4474 0
4878 [장편] 희망을 받는 사나이 Vol. #22 [12] 막군3292 04/05/31 3292 0
4876 무엇인가를 만든다는것은........... [6] estrolls3557 04/05/31 3557 0
4874 themarine..fly high..! [4] 귀족테란김정3386 04/05/30 3386 0
4873 화창한 여름을 기다리는 분들을 위하여... [15] lovehis4942 04/05/30 4942 0
4872 임기응변에 가장 능한 프로게이머를 꼽으라면? [84] 마인드컨트롤8310 04/05/30 8310 0
4871 스타와 관련없는 넉두리.... [4] 아름다운안티3007 04/05/30 3007 0
4869 [글] 토막 (4) [8] Bar Sur3276 04/05/30 3276 0
4868 [장편] 희망을 받는 사나이 Vol. #21 [21] 막군3488 04/05/30 3488 0
4867 이제 빌드에 이름을 주자!!! [16] 하늘사랑4413 04/05/30 4413 0
4866 선택의 순간들.. [4] 억울하면강해3042 04/05/30 3042 0
4865 주간 PGR 리뷰 - 2004년 5월 30일 [24] 주간 PGR 리뷰3487 04/05/30 3487 0
4864 지금 Daum에서는 [15] 유이6514 04/05/30 6514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