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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2/05/26 01:35:10 |
Name |
王天君 |
File #1 |
1337689911_1.jpg (197.9 KB), Download : 17 |
Subject |
기록 앞에 무너진 자, 기록 위에 서다. |
송병구의 오랜 팬으로서, 그의 과거를 돌이켜보자니 뭔가 참 웃음이 나온다. 찌질했던 초창기까지 굳이 갈 필요도 없이, 한참 주가를 올리던 전성기 시절만 하더라도 더럽게 답답하고 속상한 시절의 연속이었다. 왜 1등 한번을 못하는가? 왜 또 했다하면 하필 그게 이벤트 전인가? 끝내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사라져 간 비운의 어떤 사내가 자꾸 연상되는 게 싫었다. 비극은 한명으로 충분하지... 세상 모두가 1등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사람이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운'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는 사람은 마땅히 그 기대치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결코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마지막 한 발자국을 앞에 두고 미끄러져 버리는 그는 오히려 배신자에 가까웠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그와 맞선 상대방들보다도, 그가 택한 선택과 그를 둘러싼 악조건에 대한 핑계보다도, 나중에는 그 자신을 향한 비난만이 앞서는 그 안타까움이란.
그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염원이 마침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풀리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 나에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우승했으면 이제 끝? 그럼 우승을 서너번씩 하고 있는 그대의 라이벌들에게 처지는 듯한 이 막연한 열등감을 어떻게 하라고? 난 내가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멋모르는 이들의 폄하에 훼손당할 만큼 어딘가 약해보이는 그가 싫었다. 난 속물스러운 팬이라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알아주면 그만이라고 그치지 못한다. 송병구는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왜 좋아하는지, 얼마나 훌륭한 선수인지 하나라도 더 많은 증거를 들이세우고 싶은 선수니까. 스타를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명함을 들이밀면 와... 대단한 선수네 하고 납득할만한 업적을 더 세워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100승째를 기록하는 순간, 나는 속으로 조용히 환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그만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그토록 커리어 상으로 내세울 게 없어 팬들을 헛헛하게 만들던 그 선수가 동시대 그 어느 강자와 라이벌들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달성해냈다. 한 리그에서 백번 이긴다라. 말이 쉽지, 10년을 내려온 스타리그 역사상 여태까지 딱 두명밖에 돌파한 적이 없는 귀하디 귀한 기록. 최고의 임요환과 최고의 저그 홍진호 말고는 아무도 이룬 적이 없는 기록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프로토스의 한자리를 송병구가 마침내 채워넣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을 울리던 박정석도,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던 강민도, 입을 벌어지게 한 김택용도 손을 뻗지 못했던 그 자리에 올라와 있는 유일한 프로토스로서, 수백명의 게이머들을 통틀어 최초이자 최후의 프로토스로서 말이다.
서로간의 우열을 가리고, 수많은 재능 가운데에서 자신을 각인시키는 것은 특별한 그 무언가를 사람들의 뇌리에 남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고르고 골라 낸 옥석 가운데에서 게이머들은 더욱 더 빛날 것을 요구받는다. 더 환하고 눈부시게, 남들에게 없는 진하고 강렬한 빛을 뿜으며 상대의 빛을 삼키고 자신의 가치를 알려야 한다. 극한까지 정제된 그 수많은 보석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더 영롱하고 광채를 내뿜는 몇몇 보석들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송병구는 이 같은 묘사가 어울리는 선수는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 굳이 다른 게이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송병구와 비교를 한 이유가 있다.
번쩍이는 황금이나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처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화려함 없이도 송병구는 그만의 광채를 묵묵히 내뿜어왔다. 때로는 다른 빛에 가려, 혹은 그림자에 가리어 그의 빛이 그 생기를 잃고 희미하게 나오던 때도 더러는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은은하게, 청아한 자신만의 빛을 잃은 적이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기고 지면서를 반복하면서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가 채워넣은 100이라는 숫자 앞에서 나는 진주의 기품을 느낀다. 이 대기록의 결정을 맺기까지 그가 참아온 인고의 세월, 그 안에서 버텨온 바깥에서의 흔들림, 그 흔들림 속에서도 끝끝내 품어온 그만의 빛은 마침내 고귀한 보석으로 화해 형태를 이루었다.
앞서서 두 손바닥 자욱을 남겼던 두 거장은 이미 다른 세계로 떠난지 오래. 허물어져 가는 이 세계를 가장 오랫동안 버텨온 기둥의 하나로서 송병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법이라면, 송병구야말로 온게임넷 최강의, 최고의 프로토스로 불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동안 쉼없이 얼굴을 내비추고 잠시라도, 혹은 오랫동안 설레고 기대하게 만들어주었던 송병구의 진득함, 꾸준함 앞에 이렇게 몇 글자로나마 경의를 표한다. 최후의 결전에서 번번이 함께 고배를 마셨지만, 한편으로는 그대 덕에 기쁨의 축배를 100잔이나 마실 수 있었으니까.
그가 자신의 손도장을 남기는 순간, 단순히 한 게이머의 팬이 아니라 스타크래프트 게임과 스타리그의 팬으로서 테란, 저그, 프로토스의 역사가 완성되는 듯한 감동마저 느꼈다. 화룡정점을 찍지 못한 자들이 가장 많이 쌓고, 가장 오래 지탱해온 이 기묘한 세계의 숙명 속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 은은한 빛을 볼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리고 이 스러질 줄 모르던 인간의 저력이 다른 세계 다른 놀이판 위에서 또 다른 인간의 아름다움을 피워나가는 뿌리가 되기를.
* 피지알에 송병구 선수 100승 축하 글이 없어서 경기 보기 전에는 송병구 선수가 진 줄 알았습니다. 이제 정말 스1은 저무는 태양인가봐요.
* 하필 찾은 사진이 또 저렇게 후줄근하게 나온 사진이라서 좀 속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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