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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5/16 03:30:21
Name Bar Sur
Subject [글] 캥거루 공장 견학 (完)
  "캥거루라." 가벼운 중얼거림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래. 캥거루."
  목감기에 걸려있던 내 목소리가 내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쓰레기 뭉치가 목구멍에 걸려서 내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채로 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물을 마셨지만 조금도 개운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캥거루들에게 공장이 있단 말이지? 그리고 거기로 견학 간다고?"
  그녀는 언뜻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세련되게 정돈한 가느다란 눈썹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나는 그녀 앞에서 흔들리는 커피향을 통해 투영되는 그녀의 혼란을 느낄 수 있었다.

  "응. 그들은 책만드는 걸 좋아하고, 또 돈도 필요하니까. 공장은 1972년에 세워졌어. 이를테면 캥거루들에게 그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만한 업적이야. 지금도 여전히 기능하고 있지. 캥거루들의 자립과 생존에도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렸어. 캥거루들을 위해 공장이 있는 건지, 공장을 위해 캥거루들이 있는 건지 모르게 되어버린 거야. 난 그걸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거야."

  대체 왜 이런 맥빠진 설명을 하는 걸까? 내 목소리는 구부러진 커피 스푼처럼 기묘하게 굴절되어 있다. 이런 설명이 소용이 있을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그녀를 더 몰아붙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사무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가 억누르고 있던 부분을 자극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쥐어짜는 음성으로 망설임 없이 나를 찔렀다.

  "자긴 항상 그래. 자기 생각만 하지. 이번에도 뭐야, 캥거루 공장에 가겠다구? 혼자서? 마지막에 와서 통보만 하면 그걸로 다야?"
  
  "그래.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이 순간 위기를 넘기기 위한 방편으로 그녀가 납득할 수 없는 내 사정만을 이야기하다가는 분명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누군가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너무나 슬퍼할 그 누군가에게 너는 끔찍하게 살해당할 것이다ㅡ, 라는 근거없는 강박관념이 나를 짓눌렀다.  

  "솔직히 말해봐. 이젠 나랑 같이 있는 것조차 싫은 거지?"

  "아니야." 무겁게 대꾸하는 내 목소리는 여전히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냥 헤어지자고 하면 되잖아. 캥거루 공장이라니, 갑자기 그건 무슨 얼빠진 소리야?"

  "말했잖아. 네가 싫어진 건 아냐. 단순한 우연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거기에 정말 거기에 가보고 싶어졌고, 그 사이에 이곳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어져 버린 것 뿐이야."

  그 순간, 그녀의 한쪽 모퉁이가 깨어져 나갔다. 아니, 그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깨어져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파편에 살짝 상처입었지만, 깨어져나간 그녀의 일부는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다. 나는 어렴풋이 그렇게 되리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는 결국에는 도망치는 것 뿐이야.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너라는 작자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런 것 뿐이야. 결국에는 평생 혼자서만, 뭘 할지도 모르면서 살아가야하는 얼치기라구."

  "그 말이 맞아."라고 내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 정말 내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건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니었나? 그녀가 나를 떠나가는 순간의 기억만이 빗물에 젖은 것처럼 흐려져, 명쾌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왜곡된 테러리즘의 잔해 위에서 나는 그대로 밤을 지새고, 다음 날 캥거루 공장으로 출발했다.

  
  
  황토색의 분지 위에서 나는 그녀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녀는 나름의 기품이 있고, 새침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오른쪽 눈에는 쌍꺼플이 있었고, 왼쪽눈에는 없었다. 왼쪽 손바닥과 엄지발가락에는 과거에 티눈을 제거한 흔적이 남아있고, 반면에 오른쪽에는 발바닥의 중앙에 쌀알만한 흔적만이 남아있다. 거들은 갑갑해하면서도 브레지어는 갑갑해 하지 않았다. 그로테스크한 표현이지만 만약 그녀를 반으로 갈라 놓고, 누군가에게 나머니 반을 그리게 한다면 그녀는 결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일방과 쌍방의 존재와 부재가 초현실적으로 교차하는 콧수염과 턱수염의 미묘한 관계처럼 그녀의 비대칭성은 비밀스럽게 나를 자극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곳곳에 흩뿌려진 그 '~같다'들의 속에 나의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이 집약되어 천천히 소멸해간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지만, 그건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그녀가 캥거루 공장을 믿지 않았어도 캥거루 공장은 실재하듯이 그녀가 내 마음을 믿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좋아한다. 다만 그 마음은 '우리의 거리'에서 실종되어 버린 그녀를 향해 표현할 방향과 방법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가프와 카푸카의 거리'를 방황할 뿐이다. 세계는 그것을 '비극'이라 부르지 좋아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조금의 비극성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건 오히려 어떤 의미로 일상 속의 사소한 진실에 가깝다. 나는 어찌보면 아주 사소한 것에 이끌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 둘 잃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유형의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누군가를 잃고, 그 만큼 방향성을 획득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리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캥거루 공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긴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버거워진 가방을 땅바닥에 잠시 내려놓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지금껏 제대로 된 공장을 본 기억이라고는 맥주 공장 밖에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건 견학이라고 부를 수 없는, 좀 더 노골적으로 교육적인 의도를 드러낸 소풍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지만 소풍으로 초등학생에게 맥주 공장을 보여주는 건 지금 생각해봐도 대담한 시도였다. 아니면 초등학생의 미숙한 욕구를 얕잡아 보고 있었던 걸까. 견학 코스에 시음이 끼여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일이다.

  캥거루들의 공장에 한발한발 다가갈수록 나는 그 당시 맥주 공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둘은 조금도 닮은 것 같지 않다. 그 때의 기억이 정갈하고 세련된 서사적 느낌와 함께 잘 조여진 나사처럼 적당한 규격과 적당한 긴장감으로 어우러진 하나의 이미지였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황토색의 투박한 접시 위에 Monterey Jack 치즈를 거대한 크기로 솜씨좋게 잘라놓은 것 같은 오직 단 한 장의 풍경이다. 그 상아색 표면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과거의 기억은 퇴색하고 현재의 현실감 역시 옅어진다. 저 거대한 치즈 같은 공장 안에서 캥거루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곳에서는 상상력의 방향과 범위까지도 제한당하는 것 같다.


  공장을 10m 앞두었을 때, 누군가가 공장 쪽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정말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느릿느릿'이라기보다 '느긋느긋'에 가까울 정도로 일정하게 느린 속도를 유지하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다름아닌 캥거루였다. 하긴 캥거루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캥거루인 것과 그가 느리게 걸어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냥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걸로만 보인다. 일단 나 역시 그 캥거루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편이 그 캥거루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나은 방향임이 분명하다.


  그 젊은 캥거루는 캐주얼한 느낌의 싸구려 양복을 입고 있었다. 왠지 나는 그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딱히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애초에 나는 캥거루들의 생김새의 차이점을 조금도 구분할 수 없으니 말이다. 직감적으로 그가 젊은 캥거루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아!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제가 이곳 공장의 매니저인 '껍질'이라고 합니다. 이야,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니아니, 이런 말은 무례하군요. 아무튼 조금 놀랐습니다. 배웅이 늦은 것도 사과드리겠습니다. 자, 저를 따라 오시죠."

  올줄 몰랐다는 말을 하며 과장된 손짓으로 너스레를 떠는 것이 과연 그 역시 과연 캥거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의 느린 걸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몸동작과 말투다.

  그런데 그것과는 관계없이, 내가 아는 바로 캥거루들은 원래 자신들의 이름을 따로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매니저에게 이름이 있다는 건 그가 다른 캥거루들과 차별되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캥거루들에게는 계층이나 계급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는 캥거루들에게는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들에게 그 만큼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딱딱하게 말하자면 동등한 교환의 댓가이고, 부드럽게 말하자면 공동체라고 하는 마음의 교류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의 명예직함처럼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껍질'이라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어찌보면 지도 위에 딱딱한 활자로 기입된 '지명'이나 '지표'와도 비슷해 보인다. '껍질' 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무언가를 열심히 씹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입 안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이유없이 고장난 신호등 따위가 떠오른다.

  게다가 그를 향해 "껍질 씨"라고 부르는 건 'Hello, NEW YORK.'나 '서울시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따위의 말을 곱씹는 느낌이 든다. 그런 말에 익숙해지는 것과, 그런 자신을 상상해보는 건 왠지 무섭다.

  "한국에서 오셨다구요? 아아, 한국에도 저희 공장이 크게 기여하고 있죠. 물론 아시고 계시겠지만요. 특히 러시아의 거북이 공장과의 관계를 끊은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거북이들 따위, 상종할 부류가 못 됩니다. 물 속에서 젖지 않는 종이로 책을 만든다니,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답니까? 물 속에서 책을 읽는 게 흔한 일인가요? 그런 식의 투자는 한심한 노릇이죠. 쯧쯧. 물론 아시고 계시겠지만요."

  "아니, 그건 잘 모릅니다만."

  "아! 그러세요? 음음, 뭐, 하긴 거북이 공장이야 관심의 대상조차 안되는 거겠죠." 그는 내 대답에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답에 당황한 건지, 언뜻 종잡기 힘든 표정과 말투를 내비쳤다.

  공장은 이렇다할 소음도 없이 굉장히 조용했고, 멀리에서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아색 표면과 회색 바닥 역시 한 점의 오물도 없이 깨끗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설마 나 혼자의 견학 때문에 미리 이런 준비를 해놓았을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뭐, 청결함을 유지하는 건 이곳 공정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요." 내가 놀라워하자, '껍질' 씨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그는 입구의 '책 읽는 캥거루' 동상 앞에 서서 나에게 공장의 설립 과정을 이런 저런 일화들을 통해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그 이야기들은 '책 읽는 캥거루' 동상이 짓고 있는 표정만큼이나 지루한 이야기들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나를 안내하며 많은 말들을 쏟아냈지만, 그럼에도 나를 이곳에 올 수 있게 해준 모종의 '캠페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내가 보낸 20달러가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래'가 끝나고 나면 결코 그것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캥거루적인 방식 중에서도 그것은 꽤 현명한 판단이었다. 나 역시 생색내듯 20달러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말 많은 캥거루 청년은 분명 그런 부분에 까지 미리 생각이 미쳐 이런저런 대처를 준비해 놓고 있겠지.

  나는 차분한 마음으로 견학에만 신경을 쏟기로 했다.

  우리는 공단의 중앙 가장 커다란 사각 치즈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안은 큼지막한 3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 중 2곳은 작업복을 입은 캥거루들에 의해 붐비고 있었지만 한곳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첫번째로 우리가 들어선 거대한 홀이 그곳이었다. 최초에 이곳에 들어섰을 때 '껍질' 씨가 한껏 자부심을 담아 말했다.

  "이 건물 전체가 유기적으로 1, 2차 공정이 이루어지는 '장갑'관입니다. 여기에서는 '통합적 실체'에서 각종 자재들을 공급받고, 분류하고, 조립하는 곳입니다. 사실상 전체 공정의 80%의 과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유지상태가 좋은 책이든, 그렇지 않은 책이든, 주인이 없고 파손된 책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들은 잘 버려지지도 않거든요. 다만 '잠들어 있는' 거죠. 우리는 그들의 잠을 깨우고, 그들의 공백을 메꾼 뒤에 새로운 세상으로 내보냅니다."

  홀 안에는 오로지 커다란 시계와 거대한 지도들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어렴풋이 나는 그것들이 '껍질' 씨가 말한 '통합적 실체'라는 것에 다가가는 도구 같은 것이 아닐까를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들을 전위적인 예술품처럼 그저 공간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런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죠. 캥거루들마다 좋아하는 장르나 분야가 달라서 선호하는 시계와 지도도 다르기 마련이어서 자연스럽게 분업이 되더군요. 결코 한 분야에만 집착한다든가, 할당된 개인 작업이 미진해서 자재가 부족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들은 저희의 자랑이거든요. 이런 것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려서는 안되기 때문에 특허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건 좀 아쉽지만 뭐, 어차피 남들이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껍질" 씨가 말했다.

  그를 따라 2번째, 3번째 작업장으로 이동해 갔다. 나는 그곳에서 작업복을 입고 있는 캥거루들을 처음 보았다.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개개인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하지만 '껍질' 씨는 한 명 한 명의 역할을 구분하고 그들에게 자질구레한 지시를 내릴 정도로 그들을 완벽하게 구별해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 캥거루가 그와 같이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캥거루들끼리도 가끔씩 헛갈리기도 하죠.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작업을 할 수 있는 겁니까?"

  "글쎄요. 그렇군요. 흐음, 하지만 그런 걸 일일히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 걸요? 정말이지 그렇군요. 잊어버리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금방 잊어버리는 거죠. 불편함을 능가하는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거죠. 어쩌면 그들 자신에게 대립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개인과 개인이 공장의 역할에서 호환성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이름이 없고 '자기'만 있는 그들 개인과 개인은 절대 호환되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들에게는 외부의 시선이라는 것 조차 없습니다. 타인에게 제단될 필요가 없는 거죠. '껍질'은 있어도 언젠가 제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겁니다. 그의 이름이 '껍질'이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그렇게 불편하거나 슬픈 일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보다 슬픈 일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사실 나는 멀리에서 다가오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만약 아르마니를 입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하나를 고민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아르마니를 입을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르마니를 입고 있지 않다. 그건 그가 비록 지나치게 말이 많고 캥거루적인 습성에 물들어 있음에도, 한 편으로 현명하기 때문이다. 그 총명한 눈으로 아르마니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으리라고 하는 세계의 진실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캥거루에게는 아르마니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비단 그것은 캥거루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르마니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아르마니를 입을 수 있다고 해서 그들 누구나가 아르마니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재력이라는 건 아르마니를 입을 수 있는 수많은 자격 가운데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 우리가 경계해야할 비극의 한 가지 유형인 것이다.

  
  우리는 '장갑'관의 견학을 모두 마쳤다. 2시간이 좀 넘게 걸렸고 식사 시간에 가까워졌다. 많은 캥거루들이 자리를 떠나 식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어쩐지 조금은 제각각인 것처럼 보인다.

  "식사부터 하시죠. '주머니'관이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껍질'이자, 젋은 캥거루인 그가 말했다.


  "'주머니'관에서는 마지막 공정이 이루어집니다. 이건 하청을 하는 것이지만, 다른 곳에서 특수하게 제작된 책의 표지를 받아서 '장갑'관을 지나온 책들에 크기에 맞게 붙여넣죠. 번거롭기는 하지만 금박으로 책의 제목과 저자를 붙여넣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그것은 오늘 그가 보여준 가장 간편한 감정이었지만, 나는 그리 간편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 사이에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나는 바닥에 흘린 물을 다시 컵안으로 담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결심이 약해진 건 아니지만, 어떤 확신이라 부를 것이 내 안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주머니'관에는 가지 않겠습니다."하고 내가 말했다.

  "예? 정말 그러실 건가요? 주머니 관도 꽤 재미있습니다. 사실 조금 얼빠진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무능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그 친구들도 역시 무척이나 그들의 일에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보지는 않겠습니다. 그게 나을 것 같군요."

  "기껏 먼 걸음 하셨는데.........." 그가 정말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왠지 미안한 짓을 해버린 것 같았지만, 그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다.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오늘은 메뉴가 특별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저녁 식사로 거대한 Monterey Jack 치즈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내일이면 나는 다시 이곳을 떠날 것이다. 나는 '주머니관'의 이야기를 들으며 LA에서 만난 노캥거루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결코 그 때문에 견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곳이 싫어진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고, 이런 곳 역시 좋아한다. 여기에 내가 있어도 그리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한한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것 뿐이다. 돌아가서는 하루 정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을 잘 것이다. 그런 다음엔 천천히 책을 읽고 음반매장에 들러 새로 CD를 구입해 하루 종일 듣게 될 것이다.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목욕도 할 것이다. 아마 저녁쯤에는 구멍이 뚫인 치즈도 실컷 먹고 싶어질 것 같다. 그리고 날씨가 좋게 되면 그녀에게 연락을 하자. 동물원의 캥거루들을 함께 보러 가자고.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보며 함께 소리칠 것이다.

  "역시 오길 잘 한 것 같아."
  



ps. 일단 급한 마음에 타협했지만 진짜 마음에 안드네요. 전체적인 조율도 안 맞고 내용을 완벽하게 아우르지 못한 것 같아, 이런 걸 억지로라도 완결지어 보여드린다는 게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연재 대신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쓰던거였는데, 마음이 불편해서라도 나중에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할 것 같네요. 다음부터는 'PgR21의 누군가에게'로 돌아갑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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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16 04:30
수정 아이콘
고양이 공장은 달의 병원에 있지요.
초콜렛
04/05/16 05:1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잠도 안오고 일하기도 싫고. 그러다가 그냥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완결편이네요....(난-_-감) 그래서 검색해서 1편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필력이 좋으십니다.(부-_-럽) 1편의 댓글 중에 누군가 하루키팬픽아니냐고 했는데 저도 제목만 보고는 하루키를 연상했습니다. 하지만 읽고 보니 확실히 하루키의 느낌은 아니네요. 아. 그리고 바닐라 스카이 ost, 저도 미친듯이 좋아하는 앨범 중에 하나예요.
04/05/16 06:42
수정 아이콘
역시 보길 잘 한 것 같아요!!
아케미
04/05/16 13:05
수정 아이콘
지금까지 잘 읽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소설 좋아합니다. ^^
주머니관도 상당히 궁금하지만 뭐… 캥거루 공장의 나머지는 제 상상에 맡겨야겠네요. 계속될 편지도 기대합니다!
안전제일
04/05/16 14:22
수정 아이콘
완결편에 댓글을 달고싶어서 지금까지 꾸욱 참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일일히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 걸요? 정말이지 그렇군요. 잊어버리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금방 잊어버리는 거죠. 불편함을 능가하는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거죠. 어쩌면 그들 자신에게 대립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개인과 개인이 공장의 역할에서 호환성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이름이 없고 '자기'만 있는 그들 개인과 개인은 절대 호환되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들에게는 외부의 시선이라는 것 조차 없습니다. 타인에게 제단될 필요가 없는 거죠. '껍질'은 있어도 언젠가 제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겁니다. 그의 이름이 '껍질'이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그렇게 불편하거나 슬픈 일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보다 슬픈 일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굉장히 슬프군요..의도하신 바대로 읽지 못한것 같아서 아쉽습니다만..
굉장히 슬픈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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