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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5/12 14:13:56
Name Kai
Subject [테란 이야기] Ghost ~ Endless Sorrow

  『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

  고장난 턴 테이블이 레코드의 같은 부분을 반복하듯 어둠속에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

  작은 흐느낌은 어느새 울부짖음이 되어 허공에 메아리쳤지만 주위는 여전히 울음소리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

  한동안 계속된 흐느낌. 조금씩 잦아들며 희미해지던 목소리의 흔적을 짓밟듯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큭, 큭큭, 크크큭……. 아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핫!』

  그녀는 웃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용서를 빌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우스웠기 때문에…….

  『아하하하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핫!』

  그녀는 울었다.
  스스로를 비웃으며 괴로워하는 자신이 너무도 비참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붕괴시켜가는 광소.
  그리고 주위는 여전히 어둠.


                                                            Terran Story
                                                            Ghost - Endless Sorrow




  『전멸을 바라는 것은 누구?(Somebody called for an exterminator?)』

  나직한 중얼거림이 전장의 공기를 한순간에 싸늘하게 만들었다.
  시즈모드를 하고 있던 아클라이트 시즈탱크(Arclite Siege Tank)들은 갑자기 들어온 핵미사일 경고에 당황한 듯, 급히 시즈모드를 풀고서 기동을 준비하는 한편 컴셋 스테이션(Comsat Station)에서 전해지는 위성 영상에 잡혔을지도 모를 고스트의 존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핵미사일이 자신들이 시즈모드를 하고 있던 자리를 공격할 것이라 생각하고서 허접지겁 자신의 본진 쪽으로 내달리던 3개 대대 분량의 기갑병력은 자신들이 도망친 위치로 정확하게 떨어진 핵미사일 한 발에 의해 단어 그대로 '산화'해버렸다.
  
  핵폭발의 잔향이 가라앉을 무렵, 폭발의 영향권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구릉 위에서 한 명의 고스트(Ghost)가 클로킹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고스트 보고한다.(Ghost Reporting.) 핵미사일에 의해 적 기갑대의 전멸을 확인, 아군 기갑대의 전진루트가 확보되었다.』
  ― HQ 응답한다. 위성 스캔을 통해 공격 결과를 확인했다. 곧 진격을 시작하겠다. 적 기갑대의 공격작전이 끝났으므로 기지로의 귀환을 명한다. 5분 후에 드랍쉽을 보내겠다. 이상.
  『알았다.』

  기지와의 교신을 마친 고스트 병사는 자신이 둘러쓰고 있던 오큘라(Ocular)라고 불리는 시각 보조장치를 벗었다. 그러자 긴 흑발을 뒤로 올려 묶은 여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아…….』

  그녀의 이름은 사츠키.
  코프룰루 섹터에서 작전 중인 수많은 UED의 장군들 중 Elky라는 장군의 휘하에 있는 고스트였다.
  방금 전의 핵미사일 유도를 맡은 것도 그녀였는데, 높은 전과를 세웠음에도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

  그녀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피로 물든 손…….』

  핏자국은 한방울도 없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손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기분탓만이 아닌, 고스트 요원들이라면 모두가 겪고 있는 정신 분열 현상의 일종이었다.
  피투성이의 손바닥 위로 찢겨진 살점 조각이나 물컹한 내장들이 만져진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을 느꼈다.

  『우, 우욱……. 우웨에에엑…….』

  사츠키는 아무것도 먹지않아 걸쭉할뿐인 위액을 땅 위로 쏟았다.
  더이상 쏟아낼 위액조차 나오지 않을 때 즈음해서야 토악질은 멈추었고, 힘든 전투를 끝낸 뒤보다 더 기진맥진해진 그녀는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허탈한 웃음.
  위선적인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

  고스트.
  테란 연방의 사이언 연구소에 의해 그 능력이 개발된 그들은, 사실 스팀팩보다 더 중독효과가 강한 약물과 유전자 개조, 사이버네틱스 기술 등이 접목된 "만들어진 인간"들이다.

  덕분에 레이쓰 전투기와 같은 클로킹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테란에게 있어서 가장 음습하고, 가장 강력한 파괴공작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들의 두뇌는 강력한 정신 에너지의 지속적인 사용으로 인해 반미치광이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인 공격성향억제제의 투여를 통해 전장에서의 활용을 하다가 약물의 부작용으로 신체가 무너지면 폐기되는, 드러그 러너(Drug Runner : 빠른 속도를 위해 약물을 사용하여 궁극적으로는 폐인이 되는 육상선수)와 같은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츠키 역시 다른 고스트와 마찬가지로 정신 붕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작전 능력은 연방의 어느 고스트 요원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기에 상부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었다.

  ******

  『…….』

  잠시 후, 도착한 드랍쉽에 타고서 기지에 복귀하는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늘로 99회를 채운 그녀의 핵 미사일 유도는 분명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언제나 역설적 죄악감을 갖게 만드는 "대량학살"이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언제나 그녀는 꿈꾼다.
  전장에서 자신을 찾아내어 죽여주기를…….

  '차라리 사라져버린다면…….'

  자살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의 안식 ― 죽음을 얻지 못한 것이다.

  '나는…….'

  무언가 생각을 하려 했지만 쏟아져오는 피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

  그녀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12살 때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죽인 사람은 자신보다 네 살 어린 여자아이였다.

  적 세력의 장군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그의 딸을 죽이는 첫 임무. 임무는 성공적이었고, 그녀는 그때부터 뛰어난 고스트 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자신이 죽인 소녀의 얼굴이, 붉은 피가, 총의 차가운 감촉이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안식을 바라고 있다.

  ******

  ……………….
  ………….
  …….
  .
  끝없이 몰려드는 저그의 물결.
  이미 주 병력은 멀리 떨어진 멀티 기지로 대부분 옮겨간 후였고, 본진에 남아있는 것은 건물과 유즈리하 뿐이었다.

  『끝인가…….』

  클로킹 상태로 몰려드는 저글링과 히드라리스크를 지켜보던 유즈리하의 눈에 커맨드 센터와 그 옆에 연결된 핵 사일로가 들어왔다. 이미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그녀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핵 발사 암호를 입력했다.

  『전멸을 바라는 것은 누구?』

  '전멸을 바라는 것은, 종말을 바라는 것은 바로 나.'

  주위를 뒤덮은 저그의 무리.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핵 미사일을 조준해버린 그녀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는 여기 있어.(I'm here.)』

  천천히 그녀의 정신이 붕괴해간다. 집중이 풀리자 클로킹 기능이 상실되고, 커맨드 센터를 공격하던 저그 무리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와 반대로 그녀의 시선은 천천히 하늘로 향했다.
  최종 궤도에 돌입한 핵 미사일이 마치 유성과 같이 날아오는 것이 그녀의 동공에 비쳤다.

  『이젠 편해지겠지. 마침내(Finally)…….』

  사츠키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찢어 헤치는 저글링의 발톱도, 내장을 꿰뚫는 히드라리스크의 등뼈도 이상할 정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몇 초 후, 온 세상이 밝아지며 마지막 그녀의 시각에 남은 잔상은 그녀가 처음으로 죽였던 소녀의 얼굴이었다.

  ******

  『아아, 본네뜨랑! 본진과 맞바꿔서 저그의 주병력을 핵 한방에 섬멸!』
  『이건 본네뜨랑 선수가 판단을 잘 했죠! 이미 자신의 병력은 멀티로 이동했기 때문에 병력이 없는 저그는 이제 끝이에요!』
  『아, GG나왔습니다!』

  전용줄 캐스터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핵미사일이 정확히 저그의 병력을 박살내는 것을 외치기가 무섭게 엄박사와 김조교가 거들었다.
  기가 스테이션에 모인 본네뜨랑의 팬들은 그 광경에 환성을 올렸고, 결국 병력이 남지 않은 저그는 GG를 선언했다.

  『엄박사님, 이번 경기 정리 부탁합니다.』
  『네, 그러니까 이번 경기는…….』

  해설진들이 경기 정리 멘트를 하는 사이 다음 경기를 위한 세팅이 시작되었지만 승리했다는 본네뜨랑의 컴퓨터 화면에 띄워져 있는 고스트의 흔적은 미묘한 존재감을 가진 채 그렇게 계속 화면에 비춰지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

  프로리그의 베르뜨랑 선수가 핵 세발 날린거 VOD로 보고 필 받아서 끄적여봤습니다.

  요샌 점점 고테크 유닛들도 자주 보이는 느낌이군요.(핵에, 아비터에, 디파일러에) 으음, 좋은 현상 ㅇㅁㅇ!

  자세히 보시면 폭X혈전의 패러디가 있습니다. ㅇㅁㅇ

  플토 이야기(질럿)나 저그 이야기(저글링), 크리터 이야기(카카루)도 써보고 싶네요.

  뭐, 어쨌거나 이만...




종막을 향한 햇살 속
너무나 눈부시기에 내일이 보이지 않네
뒤돌아본 그대는 시간을 넘어 바라보고 있어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 그대로

- FINALE / L'Arc~En~C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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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12 14:49
수정 아이콘
멋지네요 ....
항상 이런글을 볼때마다 멋지다는 말밖에는...
밖에 내리고 있는 비처럼 멋지네요
강은희
04/05/12 15:42
수정 아이콘
하마사키 아유미 노래중 Endless Sorrow 가 있죠. 참 좋아하는 노랜데;
(뜬금없이)마지막 대사는 라르크엔시엘 노래가사중 일부분인가요?-_-;
04/05/12 16:57
수정 아이콘
일상에서는 나오지 않는... 전투 중, 극한 상황에서 나오는 감성... 존재를 부정하면서 존재를 확실히 하려는 순간... 오히려 지옥과 같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이 손쉬울지도...
crazygal
04/05/12 16:57
수정 아이콘
저도 멋지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코멘트의 중복화를 막기 위해..
좋으네요..
04/05/12 17:45
수정 아이콘
참..대단하세요..이런글 볼때마다 느끼는것이지만 상상력이 정말 좋으시신거 같애요~^^
임마라고하지
04/05/12 20:24
수정 아이콘
멋진 상상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베르트랑선수의 경기...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뜨랑선수, 대테란전에 이기는걸 오랜만에 본듯 합니다.
관리자
04/05/12 20:53
수정 아이콘
칭찬에 관한 코멘트는 얼마든지 중복이 가능합니다. ^^
04/05/13 06:17
수정 아이콘
후... 정말 좋은 글 입니다.
안개사용자
04/05/13 09:33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이 글 속에서 낯익은(?) 이름을 보니 반갑네요.
본네뜨.. 아니 베르트랑 화이팅입니다.^^
In.Nocturne
04/05/28 15:00
수정 아이콘
너무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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