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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5/10 02:03:45
Name Bar Sur
Subject [글] 캥거루 공장 견학 (2)
 
  꼬박 8시간 트럭은 달렸다. 중간에 1시간 정도 도로 변에 멈추어서서 책을 읽기도 했지만, 그리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게다가 캥거루 공장에 가는 건 나 역시 처음이라, 길을 확인하고 시계를 확인하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딕시 칙스 같은 최근의 컨츄리 뮤직을 줄창 듣다가, 조금 지겨워져서 가지고 있던 비치 보이스의 곡을 틀었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서도 사용되었던 Good Vibrations을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어떤 악몽을 꾼 다음의 아침이라도 이 노래라면 기분이 한결 가벼워 질 것이다. 반대로 좋은 꿈을 꾸었다면 어느 파티에서 춤을 추는 것보다 서서히 기분이 고양되겠지. 불행히도 한국에서라면 차 안에서 이 노래를 듣다가 흥겨움에 온 몸을 들썩이다 대형 사고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목 뒷덜미가 서늘해진다.

  오후 3시. 나는 캥거루 공장으로 통하는 '문'에 도착했다.

  "암호는?"

  중공군의 군복을 입은 뚱보 캥거루가 물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모자에는 붉은 별이 달려있고, 녹색 군복이 불룩 튀어나온 뱃살을 쌈을 싸는 상추처럼 감싸고 있다. 그는 아마도 공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이 통로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모양이다. 대뜸 반말을 하는 것이 아니꼽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남을 하대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거부감도 없는 듯 보인다. 즉, 척 보기에 불쾌한 녀석을 불쾌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하나하나 의식하다가는 끝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상대가 철저하게 자기본위로 살아가는 캥거루라면야 고민할 수록 이쪽만 손해보는 장사다.

  나는 내 방 안의 쓰레기와 먼지를 쓸어다 버릴 때처럼, 쓸데없는 반항심을 단념하고 녀석이 원하는데로 암호를 말했다. 발음에 유의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주머니를 함부로 열지 않는 자가 너를 높은 계단으로 이끌 것이다."

  "흐음, 조금 다른데?" 그는 손에 든 종이 쪼가리를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인생 자체가 무감동한 녀석이다.

  아무튼 '조금 다르다'는 건 무슨 뜻인가? 전보가 잘못 쓰여진 게 아니었던 건지, 아니면 이 녀석이 전보가 틀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건지. 어쩔 수 없이 나는 가방에서 책갈피 대신으로 사용하고 있던 전보 쪽지를 찾았다. 공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읽고 있었던 존 그리샴의 '톱니바퀴'. 오늘은 날씨가 좋은 탓에 읽던 도중에 잠이 들어버렸지만 쪽지는 책의 중간 정도에 적당히 끼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어 머리 속으로 두 번, 세 번 미리 연습을 한 뒤에 또박또박 띄어쓰기에 신경쓰며 해당 부분을 읽었다.

  "주 머니 를 함부로 열지않는 자 가 너 를 높은계단 으로 이 끌것 이다."

  "어ㅡ, 음, 이번엔 확실하군. OK, 좋은 시간 보내라구."

  무슨 유흥가 포주 같은 말투로군. 나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혀를 찼다.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하고 캥거루가 가시돋은 말투로 물어왔다. 제길, 이 캥거루는 귀도 좋은 모양이군. 나는 캥기는 속내를 감추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왜 귀찮게 암호 같은 걸 쓰는 겁니까? 어차피 견학이 허가되면 신분만 증명할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내가 그렇게 묻자, 그 캥거루는 나를 지그시 올려다 본다. "어차피 신분증 따위는 그쪽의 체계아닌가? 그런 것 불쾌해서 이쪽에서까지 통용될 턱이 없지. 애당초 인간의 신분증을 캥거루에게 보여준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겠나? 쯧쯧."하고 혀를 차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도 말문이 막혀서 그에게 목례로 인사를 하고 나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공장으로 통하는 터널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문득 내 발소리가 굉장히 가깝게 들리기도 하고 반대로 아주 먼 곳까지 날아가버린 듯한 기분도 든다. 소리의 원근감이 무뎌졌다기보다도, 소리 자체가 조용히 출렁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오직 내 발소리 뿐이다. 원래는 백색이었을 불빛은 터널 안에서는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주변 모두가 바다 속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는 사람(물고기도)도 나 뿐이고, 멈춰있는 사람도 없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오기는 한다. 기분 좋게 목덜미를 스치고 '안녕.'이라고 말하며 나와는 반대방향으로 흘러간다. 절대 뒤돌아보는 일이 없다. 매정한 녀석들이군.

  터널은 정말이지 길었다. 왠지 쓸데없이 길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었다. 1시간은 가뿐히 넘는 시간 동안을 줄곧 걸어가던 중에, 한 번은 뒤로 돌아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이를 짐작해 봤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멀리에서 하나의 '점'으로만 존재하는 그것은 도저히 '시작점'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거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 역시 나와 같이 어딘론가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게는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아주 의욕적으로 말이야. 만일 그렇다면 나는 안심하고 걸음을 옮길 수 있다.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거나 앞으로를 불안해할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30분 정도를 더 걸었다. 아무도 터널이 얼마나 긴지, 얼머나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이제와서는 후회해도 별 소용이 없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비스듬한 벽쪽으로 다가가서 앉은 뒤에, 가방에서 스낵과 물, 인스턴트 커피, 계란, 그리고 소형 가스버너를 꺼냈다. 스낵을 먹으며 계란을 넣어 물을 끓이고 또 커피를 만들었다. 그리고 꽤 유유자적하게 식사를 했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이 낯선 곳, 색다른 공기 속에서 차분하게 음식을 먹고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터널의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지만 몸이 훈훈해지자 한결 터널에 대한 불만이나 걱정 같은 것들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불현듯 '이 길로 쭈욱 따라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라기보다도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나그네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귀신들만 지나는 길로 걸어다니다가 어딘가로 끌려가 버리면 원래의 세계로는 돌아올 수 없다든가 하는 이야기. 어딘가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귀신과 캥거루는 명백하게 다르지. 아아, 너무 다르다. 이 근본적인 차이점이 나를 허탈할 정도로 안도하게 만들었다. 캥거루 공장에 끌려가서 돌아올 수 없게 된 사람의 이야기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그 1호가 된다면 무서운 괴담이라기보다 냉소만을 불러일으키는 얼빠진 블랙유머가 되어버리겠지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나는 터널에 대한 한가지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이 터널이 정말로 '쓸데없이' 길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맘에 드는 것들도 있다. 특히나 터널에 그려져 있는 캥거루들의 벽화. 처음에는 몰랐지만 대충 5m정도를 간격으로 두고 불규칙한 크기로 터널과 함께 계속해서 그려져 있었다. 사람도, 캥거루도, 어떤 동물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려져 있는 것은 오직 풍경들 뿐이다. 어떤 것은 고층 빌딩, 어떤 것은 바다, 산,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대 유적, 야구 경기장도 있었고, 초승달처럼 생긴 섬도 있었다. 붓으로 그린 모양인데 터치가 대담하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것도 있고, 이게 정말 실재하는 것을 그린 것일까 의문이 드는 그림도 있다. 각도와 거리에 따라 무슨 그림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다가도 아주 우연찮게 마음 속의 심상이 맞아 떨어졌을 때, 그 형태가 강렬하게 각인되는 그런 그림들이다. 정말 캥거루들이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캥거루들은 그 그림들을 '가프와 카푸카의 거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결국 누가 그린 건지도, '가프와 카푸카의 거리'라는게 무슨 뜻인지도 그들은 모른다고 하니 새삼 캥거루들의 '캥거루스러움'에 화가 치솟는 이야기다.

  
  멀리에서 터널의 불빛과는 전혀 다른 빛이 하나의 점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보였을 시점으로부터 20분을 더 걸었을 때, 나는 비로소 터널을 빠져나와 캥거루들의 공장이 있는 황토색 분지 지형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정말이지 이곳은 불순한 의미가 완벽하게 제거 되어버린 '황토색의 분지'였다.



  [아아, 기나긴 가프와 카프카의 거리를 지나 황토색의 분지, 그곳에 캥거루들의 공장이 있다네ㅡ.]
  
  한 물 가버린 유행가의 가사처럼,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혼탁해진 귓가로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ps. 죄송합니다. 글이 길어져버렸군요. 흠, 길게 쓸 수록 끈기가 떨어지는 소재라고 생각해서 짧게 완결을 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네요. 부득이하게 다음 'PgR21의 누군가에게' 12번째 편지 역시 캥거루 공장 견학으로 대체합니다.(공장 견학은 대체 언제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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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10 02:19
수정 아이콘
name find : bar sur
요즘.. 학교 야자를 마치고 나서 항상 찾게 되는 bar sur님의 글..
Thanks... Bar Sur
04/05/11 08:46
수정 아이콘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전 켕거루 공장 보다는... 고양이 공장이 있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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