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킬라시온 : 과잉살육
최연성의 최전성기를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를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사람마다 의견은 다르겠지만, 나라면 주저하지 않고 ‘유린(蹂躪)’을 들겠다.
홀로 압도적이었으며, 홀로 화려했으며, 홀로 강했다.
우리는 그러한 평을 듣는 것이 마땅한 선수를 세 명 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 네 사람을 한데 모아 부른다. 그러나 최연성은 유린이란 이름으로서 ‘황제’ 임요환, ‘천재’ 이윤열, ‘마에스트로’ 마재윤과 구분된다. 최연성은 한 번의 게임에서 한 번의 승리를 거두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승부를 가른 조그마한 차이를 더욱 더 크고 넓은 것으로 억지로 찢어내어 자부할만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려고 들었다.
그 유린의 결과는, 스타크래프트란 게임의 파악과 이해를 거부하는 장관(壯觀). 하늘을 뒤덮는 레이쓰, 크립을 짓밟는 탱크 부대, 프로토스 진영을 누비는 온리 벌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은 상대의 전의마저도 부숴버린다.
불붙기 시작한 최연성을 막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는 것이다.
4강 직전, 프로리그의 일전에서 인파이터 변은종을 상대로 벌인 또 한 번의 아니킬라시온 - 전투병력으로서의 고스트 운용 - 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전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최연성의 승리를 기꺼워한 사람들이든,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든 기어를 올리기 시작한 최연성은 말 그대로의 괴물(Monster)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한 번 그 행군을 가로막는데 성공했던 투신은 철저하리만치 보복당하여 패퇴했다.
지난 가을, 전설을 지켜내기 위해 이 괴물을 상대로 최후까지 분투했던 영웅은, 시대에 괴물을 풀어놓은 장본인의 손에 물러났다.
오영종도 다를 것은 없다. 사실 이 So1의 16강에서 최연성을 상대로 내준 오영종의 승부야말로 최연성의 기어가 다시 오르기 시작한 단초가 되었지 않은가.
마지막 무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설의 왕과 그 군세(軍勢).
사제의 손에 전설은 다시 한 번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가을의 전설과 영광의 길(Royal Road)이 하나로 이어질 것인가.
역습의 칸나에
「그 역사 전체를 조감해 보아도, 로마 제국이 이런 참패를 맛본 것은 이 칸나에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 한니발 전쟁」
스크린에 시선을 못 박은 채 임요환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관중들을 덮친 것은 가공할만한 충격이었다. 이에 관중들은 완전히 침묵하거나 혹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두 가지의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자랑하는 장엄한 물량의 포화는 프렐류드도 시작하지 못한 채, 적의 맹검은 녹턴으로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울린다.
- 이게 뭐지?
최연성은 자문했다.
그는 믿지 못했거나 믿지 않았으리라.
이미 자신이 한 번 철저하게 짓밟아 놓았던 풋내기 챌린저(Challenger)가, 지금 이 순간 최연성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는 최연성 그를 번제로, 다시 한 번 죽음의 신이 강림했다는 것을.
최연성이 베였다.
그 경기를 눈앞에서 보고 있던 관객들과, 최연성의 스테이지를 가늠한 주훈 감독과 서형석 코치, 결승에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린 임요환, 그리그 다른 누구보다도 최연성 그 자신 - 이 모든 사람들이 최연성이 완벽하게 당했다는 이 사실을 납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실로 짧으면서도 길었다.
- 4강 2주차 최연성 VS 오영종 in R-Point.
최연성의 스승인 임요환은 프로토스 군단을 몇 번이고 이곳에서 섬멸했다. 이 맵, R-Point는 신참자 박지호에서부터 황제의 숙적 영웅에 이르는 프로토스들이 모두 임요환에게 무릎을 꿇은 제국의 성지였으며, 프로토스의 사지(死地)였다.
오영종은 바로 이곳에서 최연성을 번제로 삼았다. R-Point가 황제의 성지일 뿐 아니라, 질럿 공장장 오영종에게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부여한 사신의 성지이기도 하다고 말하려는 듯이. 분명 16강에서 오영종은 이 R-Point에서 온리 다크템플러로 저그의 대부 홍진호를 침묵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습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다크템플러는 기습의 유닛이라는 패러다임을 무너뜨림으로서 다시 한 번 기습으로 승화시킨, 이론의 여지가 없는 오영종 최고의 걸작.
그러나 이번 상대는 최연성이었다.
기동력의 저그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방어의 테란이며, 테란 중에서도 방어의 극한을 선보이는 초(超) 테란 최연성이며, 오영종의 다크템플러를 알고 있는 간웅 최연성이었다.
- 그렇다.
사실, 알고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패인이었을지도 몰랐다.
오영종의 다크템플러, 최연성이 그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을 리는 없다. PGR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최근의 재평가들과 국본(國本) 정명훈에게서 일렁이는 최연성의 아우라가 증명하듯, 최연성은 그 스승 임요환에 뒤지지 않는, 어떤 면에서는 청출어람의 간웅(姦雄)이다.
그러나 오영종은 간웅 최연성이 이미 온리 다크 : 그 비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파고들었다. 알고 있으므로, 막을 수 있다 - 그렇게 판단했을 최연성의 안일함을 베었다.
최연성의 본진 코앞에 건설한 전진 게이트웨이.
이것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변수였으며, 따라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스파이더 마인을 통하여 다크템플러를 방어하려 했던 최연성은 이 게이트웨이를 통해 가공할만한 속도로 들이닥치는 다크템플러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최연성은 오영종의 다크템플러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오영종은 말했다.
경기 시작 직전까지만 해도 최연성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지막 프로리그에서 변은종을 상대로 작렬시킨 고스트 운용으로 이미 기세는 오를 대로 올랐고, 비록 여전히 적은 연습 시간이었으나 임요환보다는 하루가 더 많았다. 그러므로 질 수 없다 - 최연성은 그렇게 말했다. 질 리가 없다고.
그래서 최연성이다.
설령 불리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다른 실마리를 찾아내고 말을 끼워 맞춰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만들어진 여유에 자신의 힘에 대한 자부심을 겹쳐 쌓아 스스로를 위광(僞光)으로 덮어 출진한다. 마침내 왕좌를 노리는 적들이 그 위광에 압도되어 패퇴하는 순간, 거짓의 위광은 군림의 증거로 거듭난다.
그러나 오영종이다.
이미 리그의 시작과 함께 최연성을 지명한 배짱. FD와 서지훈이라는 난적을 상대로 내보인 침착함과 통찰력.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움직임은, 하루 40게임에 이르는 연습을 바탕으로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꿰뚫는 간결하고 냉철한 궤적을 그린다.
그렇기에 결론은, 온리 다크.
검은 일직선이 최연성의 위광을 범하며 양단하면서, 최연성의 메카닉 심포니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강렬한 역습은 최연성 뿐 아니라 임요환까지도 전율시켰다. 임요환은 이미 세 달 전, 배틀넷에서의 우연한 기회에 오영종의 온리 다크와 맞서 패퇴한 바 있었다. 물론 그 때는 이 신참자가 4강이라는 자리까지 올라와 단 한 명뿐인 제자와 맞서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알고도 막기 힘든 전략이었다. 연성이가 아니라 나라도 틀림없이 당했을 것이다.”
- 2005년 10월 28일, 임요환, 1경기를 평가하며
글쎄, 임요환은 1경기를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최연성에게 온리 다크를 언급해두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4년 전, 적들의 허를 가차 없이 찌름으로써 군림하던, 자신의 모습을 오영종에게서 발견하고 전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연성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랬을 것이다. 오영종에 대한 누군가의 감상이 그에게 중요했을까. 그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오영종이 가른 검은 궤적이 최연성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그 사실 하나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단 한 번의 굴욕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남자가 아니었던가.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를.
맹공의 투신(鬪神)에게는 맹공으로, 급습의 사신(死神)에게는 급습으로, 그럼으로써 굴욕에는 굴욕을.
- 4강 2주차 최연성 VS 오영종 in Neo Forte.
제 2경기 네오 포르테.
최연성은 다섯 시, 오영종은 가로놓인 일곱 시에서 시작한다. 최연성의 보복은 그야말로 받은 그대로의 되갚음이었다. 오영종이 R-Point에서 건설한 전진 게이트웨이의 위치, 바로 그 자리에 최연성은 전진 팩토리를 건설한다.
그러나 최연성의 손상된 자긍심에도, 분노에도, 오영종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연습이 그에게 가르친 가능성을 기억하여 그대로 수행했다. 최연성의 전진 팩토리, 이미 오영종이 거친 수많은 연습 가운데 그 가짓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영종은 한 기의 드라군을 보내 팩토리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그를 확인했다.
전진 팩토리의 취소.
대 FD용 2게이트 사업 드라군들에 의한 배럭스의 파괴.
팩토리 증설 타이밍의 지체는 곧 오영종으로의 주도권 이전을 의미했고, 오영종은 11시 멀티를 확보하면서 캐리어까지 띄운 후 최연성을 다시 한 번 압도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연성의 2연패였다.
최연성은 핀치에 몰렸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는 무언가와 맞닥뜨렸다.
젊은 프로토스의 끝을 모르고 치솟는 기세.
2 : 0, 물러설 자리조차 없는 핀치에 몰린 테란 황실의 일원.
그리고 그 앞에 놓인
R.O.V.
그로부터 겨우 1주일 전.
기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제국의 부활을 알리는 장대한 서곡의 재현. 그렇다. 분명 임요환이 지나갔던 길.
마치 운명과도 같이, 단 한 명뿐인 약속된 황위계승자 - 최연성은 그 스승이 지나간 낡은 왕도(王道)와 맞닥뜨린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할 테란이 나타날 것이다
「한 사내 관문 지키니 만 명도 뚫지 못한다(一夫當關 萬夫莫開)」
- 이백, 「촉도난(蜀道難)」
그는 황제의 세례를 받았으며, 황실의 약속된 일원으로서 전란의 판도에 등장했다.
동양 시절. 전대의 군림자이며, 물량의 대명사였던 이윤열을 물량으로 꺾어내는 특급 신인의 모습은 사람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4U시절. 제국의 건설자이며, 상징이며, 최강 전력이었던 임요환이 극도의 부진에 시달리고 있을 때. 최연성은 팀 리그라는 잔혹한 무대에 섰다. 그는 단 한 사람으로서 성벽이었다. 그를 넘어서는 것만이 모든 팀의 목표였다.
T1 시절. 믿을 수 없는 물량을 뿜어내기에 사기꾼(Cheater)이라고 불렀고, 사람의 플레이 같지가 않다고 해서 괴물(Monster)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최연성의 앞에 지금 오영종이 있다.
최연성을 압도하고 있는 오영종이 있다.
4강 2주차 제 3경기, 최연성 VS 오영종 in R.O.V는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시작했다. 앞으로 1패면 최연성이 패퇴한다. 황실의 두 번째 내전은 전설의 부활과 함께 무산된다.
황실의 첫 번째 내전이 벌어진 2004년의 가을. EVER 스타리그의 마지막 4강을 구성한 멤버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한측에는 '영웅' 박정석과 '괴물' 최연성이 있었다. 가을의 전설을 잇는 프로토스의 희망 - 영웅 박정석은 마침내 스타리그 우승이라는 마지막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괴물 최연성을 상대해야 했다.
다른 한측에는 '폭풍' 홍진호와 '황제' 임요환이 있었다. 몇 년을 싸우면서도 여전히 시퍼렇게 날이 선 최고의 맞수들. 홍진호에게 우승이라는 오랜 숙원이 있었다면, 임요환에게는 가을의 전설을 넘어선다는 비원이 있었다. EVER 2004는 가장 화려한 선수들의 가장 절박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끝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박정석의 분투는 프로토스의 희망이라는 그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가을의 전설, 그 마지막 수호자다운 싸움이었다. 그러나 최연성은 결국 박정석을 무너뜨렸다. 영웅의 부활은 저 UZOO까지 미루어졌다.
임요환과 홍진호의 싸움은 충격적이었다. 놀랄 만큼 정교하고, 믿기 힘들만큼 냉철하게 임요환은 홍진호를 단칼에 베었다. 그것은 모두가 기대한 '왕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철저하고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무너진 전설. 무너진 임진록. 무너진 낭만. 잔해와도 같은 마지막 무대에서 스승과 제자는 사상 처음으로 조우한다. 그리고 최연성, 몰래멀티라는 한끝의 차이로 스승을 제압한다.
스승을 꺾어내고서 최연성은 침묵했다.
프로토스를, 임요환을, 그럼으로써 가을의 전설을 무너뜨린 영광스러운 순간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었다.
그로부터 1년.
한쪽에는 '스피릿' 박지호와 '황제' 임요환이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임요환은 박지호를 베었다. 지금 최연성의 스승은 다시 한 번 결승에서 기다리고 있다. 단 한 사람의 제자를 상대로 한 승리도, 패배도, 이번에는 의연히 받아들여 작년의 빚을 갚을 것임을 공언한 임요환이.
다른 한 쪽에는 지금 '괴물' 최연성과 '사신' 오영종이 있다. 이제 모든 것은 최연성의 손에 달렸다. 최연성이 패배한다면, 임요환은 다시 한 번 가을의 전설에 도전하리라. 최연성이 승리한다면, 사제는 이번에야말로 상대의 승리를 축하해줄 수 있는 승부를 겨루게 되리라.
2 : 0의 핀치. 그리고 R.O.V. 불과 한 주 전 임요환이 지나간 왕도.
최연성은 임요환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가야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와 승부를 겨루어야 했다.
전설은 다시 한 번 그의 손에 정복되어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스승과 진정한 검극을 벌여야 한다.
R.O.V.
일찍이 최연성이 오영종의 양익 질럿 난입을 간단히 봉쇄해내며 '건방진 지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 전장. 또한 오영종으로서는 이번 리그 가장 좋지 않은 전적을 기록하고 있는 최악의 전장.
그 때문이었을까? 2 : 0으로 앞서는 가운데, 오영종은 최연성의 본진 입구를 봉쇄하는 전진 게이트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최연성은 기민하게 대처한다. 그가 보여준 수비는 방어의 대가라는 그 명성 그대로의 것이었다.
난입한 첫 질럿이 네 기의 SCV를 사냥하는 가운데에서도, 질럿들이 일사분란하게 갈라져 서플라이를 파괴하는 가운데에서도, 최연성은 한 기 벙커와 SCV 블로킹을 통해 막아내고 또 막아냈다.
그 가운데 오영종의 드라군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미네랄 뒤편에서 드라군의 포격이 시작되고, 테란 본진을 장악한 질럿들이 드라군을 엄호한다. 반면 최연성의 병력은 머린 뿐인 절망적인 상황. 그러나 최연성은 방어의 대가다. 방어의 극의는 결국 방어 끝에 치고 나가는 타이밍에 있는 법이다. 과연 최연성은 그 때까지 모은 머린들과 SCV 전기를 이끌고 나아가는 과감한 판단으로 프로토스 전병력을 제압하고 전진 게이트마저 파괴시킨다.
그럼에도 오영종은 GG를 치지 않는다. 최연성의 앞마당에 다시 게이트웨이를, 로보틱스를, 대놓고 건설한다. 사실 최연성의 철벽 디펜스가 빛난 시점에서 어차피 기울어진 승부였다. 해설진들의 연달은 감탄 속에서 최연성은 차근차근 탱크와 벌쳐를 모아 오영종의 병력을 밀어내고, 벌쳐를 오영종의 본진에 난입시키면서 게임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최연성은 다시 한 번 속으로 이를 갈았으리라. 이겨도, 져도 오영종의 페이스에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최연성은 완벽하게 막아냈지만, 그럼에도 이 승부는 오영종의 것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최연성이 인정하는 플레이어는 단 두 사람뿐이다. 한 명은 임요환이고, 다른 한 명은 이윤열이다. 최연성은 그 두 사람 이외의 상대에게 거둔 패배는 모두 '불의의 일격'인 것처럼 표현했다.
그리고 OSL 4강, 이만한 무대에서 최연성에게 그 '불의의 일격'을 날린 상대가 이전에도 딱 한 사람 있었다. 질레트배, 맹습의 투신, 박성준이다. 당시 최연성이 패배하던 때 스코어는 3:2. 풀세트 접전.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경기를 최연성의 완패, 투신의 쾌거로 기억한다. 하나는 위에서도 말했듯 임요환과 이윤열 이외에는 좀처럼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특유의 고자세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경기 내용에 있어서 시종일관 박성준이 주도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경기에서는 최연성의 불꽃을 파악하고 중앙에서 한타이밍 먼저 쌈싸먹었고, 2경기에서는 스타포트 전략을 완전히 꿰뚫어버렸다. 3, 4경기에서의 박성준의 패배에 관해서라면, 한 스갤러의 평가가 이보다 정확할 수 없다. '실컷 자기 할 것 다해보다가 안 뚫리니까 그냥 gg치더라.'
그 때까지의 상대전적은 최연성이 6:0으로 앞섰다. 그러나 이 날 이후 투신 박성준은 최연성의 숙적이 되었고, 훗날 신한은행 리그에서 최연성의 가혹한 보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박성준은 여전히 최연성을 상대로 무언가 앞서고 있는 플레이어로 여겨졌다.
지금 오영종의 플레이는, 어렴풋이 박성준의 그 조롱기어린 맹공과 겹친다.
최연성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한다. 오영종이 낸 패는 방어의 대가, 역전의 대가 최연성을 상대로 던진 3경기서의 50%의 도박수다. 다전제에서 단 한 경기를 얕본 젊은 신예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다전제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는 플레이가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이미 박지호를 상대로 임요환이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그 위험성을 안고 3경기에서 도박성 플레이를 한 오영종은 4경기 혹은 5경기에 공략 불가능한 필살기를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오영종은, 3경기를 버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3경기가 아니라, 제 4경기였을지도. 오영종이 짠 판에는 16강의 패배마저 하나의 복선으로 깔려있을지 모른다. 이미 확정된 진출. 자존심을 접어둔 채 오영종은 '최연성의 방어'를 재어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볼 수조차 없는 다크템플러, 초극단의 전진 게이트웨이는 최연성의 절대 방어를 무너뜨리기 위한 오영종의 결론이었을까.
질레트의 투신, So1의 오영종. 급습의 사신과 맹습의 투신이 최연성의 머릿속에서 오버랩된다. MSL의 패자, 2001년 이래 처음으로 가을의 전설을 무너뜨린 자, 패왕 최연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린 로열로더.
그리고 거기에 그 스승 임요환의 잔상이 더하여 어른거린다.
허를 찌르는 온리 다크, 양익으로 파고드는 질럿, 숨김 전진 게이트를 통한 엇박자 타이밍. 실로 치밀하기 이를 데 없는 전략의 향연. 로열로더를 지망하는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한 운영.
임요환의 노련함. 박성준의 패기. 그 끝에는 오영종이 만드는 가을의 전설.
최연성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앞은 틀림없이 위험하다고. 이번 리그, 최연성이 815에서 치르는 경기는 이번이 처음. 게다가 이 815, 오영종이 시종일관 승리를 확신한 전장. 사신 오영종은 일체의 허세도 없이, 일심의 동요도 없이, 준비해 온 그대로 검게 베어 들어오리라.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임요환이 이미 그 길을 지나가 마지막 무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승리할지도 모른다.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던 간에 이번에야말로 깨끗하게 두 사람의 결승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임요환이 마지막 무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 사람뿐인 황제의 제자. 패왕 최연성은 가슴을 당당하게 편 채 일찍이 스승이 이루어냈던 대역전극을 재현하기 위하여 전장 815에 들어섰다.
다 자신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