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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2/17 00:08:17
Name 한니발
Subject RE So1 <3> 下
  왕들의 성역(聖域)

「그는 여러 번 죽었고,
   여러 번 다시 일어섰다.
   위대한 인간은 자부심 속에서
   살인적인 사람들을 마주하고
   숨결을 억누르는 것에 조롱의 눈길을 던진다.」  
- W.B. 예이츠, 「죽음」


  0.



  임진록.
  그들의 결투가 고유명사가 될 만큼, 홍진호와 임요환은 희대의 라이벌이라고 불렸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상대전적 25 : 26.
  50여 번의 싸움을 치러냈으며, 결승에서 맞붙은 것만 세 번. 한 사람은 수많은 우승을 차지하며 초대의 군림자로 불렸지만, 다른 한 사람은 우승을 눈앞에 두고 쓴 잔을 몇 번이고 들이켜야만 했다.

  - 모든 영광을 손에 넣은 남자와, 모든 영광 앞에서 고배를 마신 남자.
  그렇게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음에도.



  1.

  저그의 모든 것은 작은 라바에서 시작된다. 모든 유닛을 깨워내는 라바야말로 단 하나의 시작점, 그렇기에 저그는 매 순간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다.
  드론 혹은 그 외의 것.
  이 단순한 양자택일에서 모든 저그가 갈려나온 것이다.

  그 선택에서 홍진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맹공, 맹공, 맹공. 그는 모든 전투에 있어서 일말의 여력(餘力)도 남기지 않으며, 내일의 부(富)를 바라기 보다는 오늘의 전승(戰勝)을 바란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상대를 강제적으로 전장으로 끌어내어, 용서 없이 시종일관 몰아치고또 몰아쳐 결코 주도권을 놓치는 법이 없는 전술.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무모하다.
  막히기 시작하는 순간, 바람은 차츰 잦아들 수밖에 없다. 홍진호의 바람은 후일을 기약하는 법이 없다. 그의 폭풍은 다름 아니라 내일을 담보로 몰아친다. 공격이 성공하면 승리, 실패하면 패배로의 직결이라는, 너무나도 위험한 전쟁이다.



  2.

  최근에 소위 ‘날빌’이라고 불리는 그 모든 것들은, 흔히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승리로의 일회용 수단으로 평가받는다. 만들기도 어려울뿐더러, 성공하면 쉽게 승리를 가져가는 대신에 실패하면 결과는 매우 어렵게 이어진다. 그렇기에 이것들은 ‘변칙’이다.
  그러나 임요환에 한해서는 그것들 모두가 ‘정석’이었다.
  종족불문.
  전장불문.
  시일불문.
  누가 상대라도,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마찬가지였다.

  터뜨리는 한 발 한 발이 모두 허를 찌르는 영격.
  동시에 그 한 발 한 발이 모두 터무니없는 위험을 동반하는 양날의 검.
  혹자는 그가 너무나도 쉽게 승리를 가져가려 한다고 비판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지나치게 가벼운 게임을 한다고 평가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정점에서 군림하며, 손에 넣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이기에 게임의 승패는 그에게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영광의 정점을 달리던 그 순간부터 단 한 사람의 1.5세대가 된 오늘까지 계속해서 그 위험들을 건너왔다. 그에게는 한 순간의 권태도 한 순간의 퇴락도 없었다.
  그 무모한 행군의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그가 이길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3.

  일군의 지휘관이 전방에 서는 것은 기본적인 금기(禁忌)다.
  지휘관의 역할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지, 병사들과 총칼을 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은 후방에서 전장을 살피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족하고 넘친다. 지휘관이 몸을 사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승리를 위해 위험과 변수를 피하는 안정성의 추구는,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임요환과 홍진호는 틀림없이 지휘관으로서는 실격이다.
  군대의 주인임에도 병사들의 최선봉에 서서 한 줄기 군세를 끌고 전장의 한 가운데로 파고든다.
  쏟아지는 흉탄과 칼날을 털끝의 차이로 피해나가며 사방을 메운 적병의 파도를 헤친다.
  수백의 위험이 엄습해오더라도 단 한 번, 단 한 치의 칼끝이 적장의 목에 닿을 것을 의심치 않고 달려 나간다.



  4.

   - 모든 영광을 손에 넣은 남자와, 모든 영광 앞에서 고배를 마신 남자.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 닮았다.
  두 사람 모두 다른 그 누구보다 많은 위험을 무릅쓰며, 두 사람 모두 다른 그 누구보다도 앞서서 달려간다.
  두 사람 모두 필기로서 전장의 한 가운데로 달려 나간다. 그들은 각자의 군대 가장 선두에 서서 전장의 정중앙에서 가장 먼저 격돌한다. 싸우기도 전에 상대가 그곳에 있을 것임을 서로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웃으며 함께 낡아온 칼날을 맞대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자신 있는 전쟁의 방식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들을 수많은 저그와 테란들의 정점에 군림하게 만들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들, 왕들의 싸움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러므로 그들을,「하늘의 왕(天王)」이라고 불렀다.






  5.

  언제 어디서 맞붙더라도, 양군의 최전방이 맞붙는 중앙. 격전의 한 가운데. 그곳만이 두 명의 천왕이 승부를 겨룰 단 하나의 콜로세움. 만용, 무모, 불합리, 그리고 왕좌의 긍지로 점철된 왕들의 성역(聖域).
  박지호는 그곳에 발을 내딛었다.
  그는 기략 - 기만전술의 모든 것을 읽었고, FD로 다져진 최연성 흉내의 한계도 읽어냈다.
  그로써 그는 임요환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왕의 싸움을 벌여 황제를, 천왕을 굴복시키려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가장 무모하지만 가장 자신다운 싸움을 벌이는 전장.
  꼬라박에서 스피릿 프로토스로. 일개 검투사에서 일군의 사령관으로 성숙한 박지호라도 결코 서툴게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장소.
  박지호는 오로지 자신감으로 왕들의 성역에 올라서려 했다.

  임요환은 잠시 손을 멈춘다.
  이미 박정석과의 일전에서 그는 옛 방식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었다.
  그렇지만, 몇 년이 시간이 지나고, 몇 번이고 새로이 검을 고쳐 쥐었음에도,
  SlayerS_BoxeR - 오랜 전란이 키워낸 그 무명(武名)에는, 다른 세 사람의 왕들과 벌였던 싸움의 나날들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SlayerS_'BoxeR'

「구름과 안개에 가릴지언정 제국의 태양은 지지 않는다.」


  커맨드 센터를 방패로, SCV를 창으로, 시즈 탱크가 불을 뿜었다.
  스피릿 - 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탱크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던 박지호의 드라군 6기는 그대로 녹아내렸다. 임요환은 ‘후각’에 따라,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단번에 탱크들을 걷고 벌쳐들을 내몰아 박지호의 기지 코앞에 라인을 건설했다.
  아직까지도 이 박지호의 무모한 돌격은 이해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룡점정의 순간에 다시 ‘꼬라박’ 기질이 튀어나왔던 것일까.
  어쨌거나 그 한 번의 무모한 판단.
  메가웹 스테이션의 인파와 해설진, 옵저버, 그 경기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 가운데, 단 한 명 - 어쩌면 두 명 - 만이 의심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마침내 그 한 번으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첫 번째의 무모한 공격이 불러일으킨 손해. 그러나 박지호는 이미 이 R.O.V.에서의 승부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가장 박지호다운 스타일, 끊임없이 파고드는 질럿과 드라군, 박지호식 스피릿이 그에게 결승으로의 활로를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지호는 곧바로 프로브를 동반한 드라군 위주의 병력을 몰아 앞마당 앞의 탱크라인을 무너뜨렸다. 병력이 증원되지 않은 네 기의 탱크는 순식간에 스러져나갔다. 임요환은 서플라이 바리케이트를 건설하며 방어를 공고히 했다.
  스타게이트의 건설을 보류한 대가는 순수 게이트웨이 병력의 포화 - 스피릿의 토대.
  그 기세에 눌린 것일까. 임요환은 그의 대 프로토스전의 진가인 타이밍 러쉬 대신에 아홉시 미네랄 지역에 두 번째 멀티를 가져간다.
  그로써 아홉 시 지역이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다. 박지호는 드라군과 셔틀 질럿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아홉 시에 공습을 감행했다. 언덕에 걸쳐 내려오는 프로토스 병력에 대해 불과 서너 기의 탱크는 누가 봐도 백척간두의 상황이었고, 박지호는 그 안일한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그 위태로운 방어라인은 두 번 모두 한끗의 차이로 박지호의 맹공을 막아냈다.
  그럼에도 박지호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스피릿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퍼즐조각, 아비터 트리뷰널을 건설했다. 아비터가 등장하고 스피릿이 완성되면 이병민이 그랬듯 임요환의 기갑부대 역시 스테이지 위에서 꺾어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비터 트리뷰널을 확인한 순간, 임요환은 미뤄두었던 세 번째의 무장을 빼들었다.
  그의 기략은 적의 등 뒤를 노리는 비검.
  FD는 그를 가리는 방패.
  그리고 그의 세 번째 무장은, 한끗의 빈틈, 단 한순간을 내찌르는 예리한 레이피어(rapier)였다.

  박지호는 잘 참아냈다. 임요환의 탱크가 네 번째의 넥서스를 포격할 때까지는.
  하지만 임요환이 탱크를 걷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순간 그 참을성은 한계에 달했다. 아비터의 합류를 불과 20여 초 남기고, 스테이지의 위에 서 있는 기갑군단에게 달려들었다.
  박지호에게는 갈림길이 있었고, 그는 스피릿 프로토스의 우화(羽化)를 통하여 프로토스의 신성(新星) 사령관이 되는 길을 선택했었다. 그러나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결승으로의 활로를 코앞에 둔 채 그는 참을성의 부족함을 드러내며 옛 방식으로 돌아가 버렸다.
  스피릿도, 꼬라박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
  미완의 스피릿.



  4경기 R-Point.
  So1에서 한 번도 임요환을 배신하지 않았던 그의 영지(領地).
  박지호는 1, 2경기의 흐름을 돌려놓으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흐름을 재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임요환의 기략을 무너뜨리고, 그로써 웅크린 임요환을 리버로 뒤흔들어 두 경기를 연속으로 따냈던 그 승리의 흐름을 다시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3경기, 기략을 간파당하고도 임요환은 박지호의 한조각 빈틈을 내찔렀다. 박지호는 그 변화를 알아챘어야 했다. 임요환의 FD에 대하여 박지호의 리버는 제 역할을 다했다. SCV를 몰아대며, 열 기 가까이를 잡아냈다.
  그러나 임요환은 아직 R.O.V.의 레이피어를 집어넣지 않았다. 무모함을 외치는 해설진을 뒤로하고, 설마 저 병력으로 진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박지호와 관객들의 예상을 뒤로하고, 임요환은 리버가 물러남과 때를 같이하여 한 번을 찔렀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제국령에서의 임요환의 타이밍은 이미 사리(事理)를 넘고 있었다.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스코어일 뿐, 1경기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황제 is not give up.
  라이드 오브 발키리즈. 끝난 승부와 다름없었던 스테이지에서 임요환이 승리한 뒤 등장한, 스케치북에 휘갈긴 어설픈 문법의 치어풀.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잊혀졌던 제국의 기(旗)로서, 휘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그 때야말로, 잠들었던 가을의 전설이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의 귀환
  
  「……그들이 내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전설’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들은 그 전설의 Boxer가 맞느냐 라는 얘기를 가장 많이 했다.」
- 임요환, 「나만큼 미쳐봐」


  5경기를 앞두고 엄재경 해설은 스타크래프트 판에서 가장 많은 업적을 세운 선수 가운데 하나로 임요환을 꼽았다. 그러나 그 커다란 업적을 감안하고서라도 임요환이란 선수가 팬들에게 받는 사랑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는 임요환의 승리도, 패배도, 다른 그 누구보다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라고 - 3경기 R.O.V.의 박지호처럼, 임요환이라는 거목(巨木)으로부터 얻어내는 승리를 앞두고 많은 선수들이 이상할 정도로 도발적인 플레이를 보인다고 - 그는 말했다.
  본좌란 말이 등장한 이래 임요환은 그 첫 번째 군림자로 불렸다.
  등장한 이래, 그는 그 홀로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전설이었다. 또한 그럼으로써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WCG에 모인 전 세계의 참가자들은 설령 다른 모두에게 패할지라도 단 한 사람 - SlayerS_BoxeR를 꺾는다면 상관없다고 공언하며 다니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냥 이기는 것만으로는 그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런 생각이 어느새 게이머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2002년, 은빛 영웅의 비상을 마지막으로 임요환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 그는 숱하게 패했고 끊임없이 미끄러졌다. 수많은 강자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포스트 임요환은 등장하지 않았고, 아직까지 남아 장대한 극(劇)을 이어가고 있는 임요환을 두고 사람들이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최강이 아닐지라도 최고는 단 한 사람.
  황제(Kaiser)는 그렇게 6년을 모든 이의 정점에서 군림했다.
  박지호가 R.O.V.에서 벌이려고 한 싸움의 방식, 그리고 그 조급함. 그 모두가 흐릿하게 비치는 초대의 전설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환희와 긴장에 의한 것이었을까.

  5경기 - 다시 한 번 815.
  임요환 11시, 박지호 7시. 마지막 게임의 시작.
  임요환은 8배럭으로 시작.
  - 박지호, 다시 한 번 그것을 간파한다. 이제는 그 역시 앞선 승리를 ‘재현’하려는 것을 그만두었다. 빠른 스타팅 멀티 대신, 본진 플레이의 리버를 선택한다. 이에, 임요환은 투팩 골리앗으로 응수한다. 사람들은 임요환이 5차전, 815에서 두 번째 비검을 들고 왔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첫 4강, 첫 5차전임에도 박지호는 임요환의 급습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허를 보이면 찔러오는 그 스타일을 박지호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리버는 SCV 두 기를 잡아낸 채 그대로 산화했다. 애당초 골리앗 체제를 상대로는 무리한 공격이었다. 속업을 비롯한 비용을 생각할 때, 그 실패는 승부의 축을 다시 임요환에게로 기울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임요환의 첫 골리앗 드랍 역시, 박지호의 능란한 대처에 의해 분쇄된다.
  결국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프로토스의 멀티 - 1차전을 박지호에게로 가져왔던 도망자 프로토스의 기반이 닦여나갔다.

  다시 전투를 시작한 것은, 아니나 다를까 박지호였다. 그것도 가장 박지호스러운 방식의 맹공이었다.
  땅으로 내달리는 것은 815의 입구를 드나들 수 있는 유닛 중 가장 강력한 대규모의 질럿. 하늘로 날아드는 것은 세 기의 리버. 하늘과 땅, 양익에서의 협공. 그러나 어설픈 리버의 타이밍이 이 완벽에 가까운 맹공을 무위로 돌렸다.
  빠르게 치솟은 기세는 사그라지는 것도 빠르다.
  필사의 힘을 다하곤 있었지만, 박지호는 이 시점에서 이미 한계였던 것일까. 그 뒤로도 박지호는 몇 번이고 순수 질럿들만으로 임요환의 본진을 공략하려고 한다. 한줄로 내달리는 질럿 - 박지호의 심벌. 물량이라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또한 지극히 순수한, 패기만만했던 자신을 되살리려는 듯이 질럿들은 질주했다. 그러나 그들의 앞을 막아선 테란의 바리케이드 앞에, 질럿들은 한 번도 임요환의 진영을 밟지 못한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쫓고, 쫓기는 진흙탕 싸움.
  그러나 아까와는 달랐다. 마침내 박지호가 지치고 지쳤을 때, 그제서야 임요환은 품속의 비검을 빼내들었다.
  공교롭게도 이 또한 다시 한 번 레이쓰였다.

  중앙 성벽의 멀티를 공략하는 박지호의 캐리어들.
  그리고 일찌감치 그 캐리어의 움직임을 파악했던 임요환은 준비해두었던 레이쓰들을 출진시킨다. 더군다나 박지호는 옵저버를 대동하지 않는 초보적 미스를 범했다.
  보이지 않는 레이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박지호의 수단은 사이오닉 스톰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이오닉 스톰을 뿌려댈 때마다 레이쓰들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흩어졌고 마침내 캐리어들은 섬멸 당했다.
  금방이라도 손에 쥘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우승컵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나가듯, 스러져나가는 캐리어들과 함께 사라져갔다.

  박지호는 이후 커세어를 통해 임요환의 레이쓰들을 섬멸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승부의 축은 임요환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맵 전역에 걸쳐 골리앗과 터렛으로 구성된 캐리어 포위망 - 815에 건설된 제국.
  북방 신화의 여전사를 의미하는 그 이름처럼, 발키리들은 미사일을 흩뿌리며 왕의 귀환을 노래했다.

  마침내 마지막 하나의 캐리어까지 산화함과 함께
  박지호는 GG를 선언하며 짧았던 첫 대망(大望)을 마쳤다.









  전설에 도전하는 자

  이 날의 역전극은 가공할만한 후폭풍을 일으켰다.
  마지막 승리와 함께 하늘을 향해 주먹을 뻗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임요환이 주훈 감독과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는 동안 경기장 내에는 첫 가을의 전설이 시작되었던 날 - 2001 SKY - 이 그랬듯 관중들이 승리자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번에는 전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전설에 도전하는 자를 위한 연호였다.
  또한 당시 주요 4대 스타크래프트 포털(파이터포럼, 우주, 스갤, PGR)이 과다한 접속량으로 동시 마비되어, 길게는 수 시간에 걸쳐 이어졌으며 네이버 검색순위에는 10위권 내에 임요환, 온게임넷, 박지호, So1, 파이터포럼 등이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
  임요환의 팬카페에는 3000여 개의 글이 새로 올라왔으며 360여 명의 신규 가입자, 그리고 3만 이상의 회원이 방문하여 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시작이었다. 임요환은 이미 몇 번이고 패주했던 길을 또다시 되짚어 오르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군세를 뒤로 한 채 왕의 낡은 검은 하늘을 향했다.
  전설은 이 퇴락을 모르는 도전자와의 승부를 또다시 목전에 두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혹시.
  실은 프로토스야말로, 가을의 전설이라 불린 임요환 - 그에 대한 도전자였던 것은 아닐까.

  - So1 <4>에서 계속




  So1 <3>~<5>는 각각 상하로 나뉘어 올라갑니다. 본래는 상하로 나눌 필요가 없이 글 하나에 다 올라갔는데, 이미지를 포함하고 나니 글들이 계속 잘리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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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망내
11/02/17 00:16
수정 아이콘
이런 글을 읽고 추천을 안 할 수가 없죠.
잘 보고 있습니다.
다리기
11/02/17 00:23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올라오는 퀄리티 있는 연재물!
王天君
11/02/17 00:40
수정 아이콘
사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소설적 구성이군요. 이 글을 통해서 당시 임요환의 승리가 얼마나 극적이었는지 실감합니다.
글과 함께 과거를 다시 음미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남자친구다
11/02/17 01:16
수정 아이콘
그 때 영상 하나 붙여봅니다 흐흐

http://pann.nate.com/video/151914456
11/02/17 01:48
수정 아이콘
정말재밌게 읽고있습니다 ㅠ 정말 오랜만에 보는 감동과 재미가 함께 있는 글이네요
honestjsh
11/02/17 10:01
수정 아이콘
다시 보는데 소름이 돋으면서 눈물이 핑도네요..T_T아....
임요환선수 팬이라는걸 깜빡하고 지내왔었는데...
두유매니아
11/02/17 10:27
수정 아이콘
이야 대박 ㅜㅜ
서주현
11/02/17 11:47
수정 아이콘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 스타는 0:2 3set 전진투배럭 실패부터...
오직 임요환이기에 가능했던 대역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11/02/17 14:40
수정 아이콘
진짜 SO1만큼 16강부터 결승까지 완벽했던 리그는 흔치않은듯.... 특히 4강전 그분의 리버스스윕은 ㅠㅠ
파일롯토
11/02/17 15:56
수정 아이콘
어우 소름돋네요.
4강전을 라이브로 보았다는것만으로 영원한황제의 팬이될수밖에...
겨울愛
11/02/17 19:42
수정 아이콘
SO1 4강 3경기 전진 투배럭은 필살기였다기 보다는 박지호 선수를 흔들기 위한 임요환 선수의 심리전이었다고 봅니다.
그 증거로 전진 투배럭은 보통 BBS 인데 SBB 빌드를 썼었죠. 물론 엄청나게 큰 위기가 한차례 있는 심리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박지호 선수의
초반 빌드를 사업 투겟 드라군으로 가게 만들고, 두-세번의 위기를 넘기면서 이기게 됐으니 임요환 선수가 정말 승부사이긴 한것 같아요.
그냥 무난하게 갔을 경우 기세를 탄 박지호선수(+프로토스ㅠㅠ) 를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해 던진 승부수였는데 그 한판으로 박지호 선수에게
역풍이 불게 됐죠.
PoeticWolf
11/02/17 20:12
수정 아이콘
담글 어서어서 올려주세욧! 그때 경기들 막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손 놓은지 꽤 된 스타1을 해보고도 싶어지고요~ (혹시 찾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헤나투
11/02/18 01:48
수정 아이콘
마지막 사진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夢[Yume]
11/02/20 09:56
수정 아이콘
마지막 산화해가는 캐리어,,, 그분에게 쏟아지는 환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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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61 RE So1 <4> 上 [2] 한니발8280 11/02/18 828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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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58 RE So1 <3> 下 [15] 한니발14453 11/02/17 1445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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