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햇수로 3년 전, 2008년 11월의 첫 날에 펼쳐진 인크루트 스타리그 결승전의 두 주인공은 오늘 펼쳐질 스타리그 결승전의 주인공들과 같습니다. 바로, 프로토스의 총사령관 송병구와 테러리스트 정명훈 선수입니다. 오늘 있을 결승전을 맞이하여, 두 선수가 펼쳤던 그 뜨거웠던 승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숱한 화제와 뜨거운 열기 속에 펼쳐진 인크루트 스타리그 결승전. 이 두 선수의 대결은 단지 두 선수의 대결만은 아니었습니다.
송병구와 정명훈의 뒤에는 각각 당시 최고의 라이벌 팀이었던 삼성전자 칸과 SK T1 이 있었고,
송병구에게는 프로토스 가을의 전설 완성, 정명훈에게는 테란의 진 로얄로더 완성의 대결이었으며,
정명훈의 뒤에는 5번의 결승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은 최연성이 있었고,
송병구의 뒤에는 5번의 결승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한 홍진호가 있었습니다.
1경기. 추풍령.
착한 송병구, 착하지 않다.
보통, 송병구 선수의 이미지라는 것은 '착한' 선수였습니다. 착하게 정말 잘하고, 강력하죠. 하지만 착해서 탈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꼼'수 같은것에 약한 모습, 많이 보여줬습니다.
게다가, 택리쌍에게 차례로 패하며 3회의 준우승에 머물렀던 송병구로서는, 결승전이란 어렵사리 올라온 자리가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악몽과도 같은 준우승의 한을 기필코 풀어야만 하는 너무도 소중한 자리였고요.
그만큼, 송병구는 가장 확실하고 믿음직한 방법을 선택하리라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죠. 송병구는 날빌 같은거 안 써. 걱정 마. 작전을 준비한 SK 의 벤치에서도, 맞은편의 정명훈 선수도, 관중석도, 중계진도. 다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때문에, 제 1경기의 극초반. 화면의 작은 점의 움직임에,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의 두 눈이 크게 떠졌습니다.
"응!?"
(송병구의 착하지 않은 프로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송병구의 전진 게이트가 정명훈 선수의 앞마당 지역에 소환되고, 그래도 정명훈 선수는 비교적 일찍 전진 게이트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이건 계산 밖의 상황이었죠. 다전제 초반에 노림수를 걸고, 상대를 흔들고, 당황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정명훈 선수의 몫이었으니까요. 송병구 선수의 프로브가 타이밍좋게 게이트웨이로 입구를 막아버리고, 질럿이 한기 한기 본진으로 난입하면서 정명훈 선수는 크게 흔들립니다. 마린 컨트롤이 꼬이고, SCV 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습니다. 그리고,
(송병구의 착하지 않은 프로브 2)
기세를 눌러 버리기 위한 송병구의 프로브 러쉬가 들어갑니다. 뒤이은 드라군의 등장, 정명훈 의 GG. 다전제 첫 승부에서 완벽한 기세 싸움을 승리하며, '결승에 오른 송병구' 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2경기. 메두사.
송병구, 멱살을 쥐고 흔들다
프로토스가 조금 유리하다고 여겨지던 맵, 메두사. 송병구 선수는 초반 질럿, 드라군으로 압박을 가하며, 엄옹의 표현대로 정명훈 선수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듯' 기를 눌러 놓습니다.
(송병구의 자신감 있는 초반 압박)
이후 송병구 선수의 다크템플러 드랍이 어느 정도 효율을 발휘하지만, 정명훈 선수가 잘 막아낸 이후, 양 선수는 메두사의 중앙에서 치열한 힘싸움을 벌입니다. 기어코 정명훈 선수의 파상공세를 막아 낸 송병구 선수가, 물량을 폭발시키면서, 자리잡고 있던 정명훈 선수의 대규모 병력을 궤멸시키며 GG를 받아냅니다.
(최종 힘싸움의 압도적인 승리)
이로써 송병구 선수는 그토록 바래왔던 우승에 단 한 걸음 남겨두게 되지요.
3경기. 왕의 귀환.
국본의 귀환
압도적인 기세로 두 경기를 연속으로 잡아내며, 송병구 선수가 거의 우승컵을 거머쥔 듯한 분위기와 함께 3경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2:0 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결코 송병구 선수가 여유로운 상태는 아니었죠. 왜냐 하면, 단 한 경기만 내주더라도 송병구 선수의 멘탈은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앞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매 경기는 살얼음판과 같았습니다. 왕의 귀환에서. 송병구 선수의 팬들은 지긋지긋한 준우승의 저주를 떨쳐 버리기 위해, 3:0 의 압도적 스코어를 간절히 원했죠. 하지만 송병구 선수의 첫 리버가 무력하게 제압당하면서 결승전의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무력하게 제압된 송병구의 리버)
결국 우세를 놓치지 않은 정명훈 선수가 송병구 선수의 앞마당에 대한 조이기 라인을 수성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송병구 선수는 참 치기 싫은 GG 를 치게 됩니다. 그리고, 송병구 선수와, 송병구 선수를 응원하는 대부분의 팬들의 마음속에는, 불편한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죠.
4경기. 플라즈마.
정명훈의 칼날, 송병구를 베어버리다
컨셉맵 플라즈마에서 4경기가 펼쳐집니다. 송병구 선수로서는 어떻게든 이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짓고 싶었을 테고, 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이상 물러난다면, 아니,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너무도 싫을 정도로, 송병구 선수는 도무지 더 물러날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송병구 선수는 이미 흔들려 있었습니다. 그 곳에 더이상 '한 경기만 따면 되는' 송병구는 없고, '한 경기를 따라붙은' 정명훈만 있었죠. 그 상황에, 너무도 예리한 칼 같은 정명훈 선수의 전략이 정확하게 재단되어, 송병구 선수의 심장부에 파고듭니다.
(완벽하게 준비된 벌쳐드랍)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전략에 송병구 선수는 손쓸 방도도 없이 무너지고, 정신없이 우왕좌왕합니다. 그리고 하릴없이 GG. 경기 직후 송병구 선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버렸고, 경기장은 붉게 달아올랐죠.
(창백해진 송병구의 표정)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믿기 힘든 일에, 누군가는 말을 잃고, 누군가는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란스러움은, 물론 정명훈 선수에 대한 응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송병구 선수의 준우승라는 흥미 쪽이 더 본질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더이상 무엇도 예상할 수 없게 되었으며, 승부는 단 한경기, 추풍령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분위기가 달아오른 T1 응원단)
5경기. 추풍령.
인크루트 스타리그는 결국 5경기, 모든 것을 한 세트로 결정짓는 최종전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서로가 마찬가지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절대 같을 수 없었죠. 두 경기를 따라붙는 정명훈 선수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송병구 선수는 말 그대로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기댈 곳도 없고, 믿을 것도 없는 상황. 결국, 이 암울함 속에서 자신을 구해줄 손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두 손 뿐이었습니다.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송병구 선수의 프로브가 빠르게 정명훈 선수의 본진으로 달려 나갑니다.
나비 효과
그리고 이 때,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 나옵니다. 정명훈 선수의 SCV 가 입구를 틀어막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송병구 선수의 프로브가 빈틈을 찾아서 정명훈 선수의 본진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죠. 이 때, 송병구 선수가 프로브 정찰에 실패했다면, 눌려 있던 기세를 펴지 못하고 불안함 속에 그대로 위축되어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프로브가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개스 러쉬를 성공하면서, 정명훈 선수가 준비했을 칼날 같은 전략전술을 흔들어 버립니다.
(프로브 정찰 성공!)
반면, 정명훈 선수는 송병구 선수의 본진을 정찰하는 데 실패합니다. 송병구 선수는 투 프로브를 아낌없이 투자해서 입구를 완벽하게 막아세우고, 질럿을 추가시키며 SCV 정찰을 차단하죠.
(SCV 정찰 실패.)
이로 인해 정명훈 선수는 상대 테크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빠른 앞마당을 선택하는데, 이마저도 효자 프로브가 빠른 타이밍에 정찰해내죠. 양쪽 일꾼의 정찰 실패와 성공. 미묘한 노이즈였지만, 경기 양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눈이 가리운 정명훈 선수는 송병구 선수의 리버/다크를 생각하고 본진과 앞마당에 터렛과 스캔으로 완벽한 대응을 세우지만, 송병구 선수는 안정적인 트리플넥으로 정명훈 선수의 빠른 확장에 대응해버립니다. 송병구 선수의 자신감은 정명훈 선수의 초반 원탱크를 잡아주는 성과로 나타나죠.
테크가 늦은 정명훈 선수가 드랍쉽을 활용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 하에 송병구 선수는 파일런으로 자신의 문을 철저히 틀어막아 버립니다. 정명훈 벌처는 갈곳 없이 방황하고, 송병구 선수는 안정적으로 성장하죠. 불안감 속에 정명훈 선수는 가진 병력으로 빠른 진출을 선택합니다. 탱크 10여기로 추풍령의 중앙에 이를 악물고 자리잡은 정명훈 선수. 그러나 물량 구축에 성공한 송병구 선수가 질럿의 발업과 함께 돌격, 테란의 중앙 병력을 완벽하게 궤멸시킴으로써 경기를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옵니다.
(중앙 힘싸움에서 대승을 거두는 송병구)
...하지만 사실 경기는 지금부터였다 랄까요.
우승을 향해서 몸이 달아오른 송병구 선수가 정명훈 선수를 무너뜨리기 위해 병력을 쏟아붓습니다. 사실상 거의 끝났다 싶을 장면에 송병구 선수의 팬들은 환호하고 열광했죠. 그러나 정명훈 선수는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대표하는 벌쳐로 송병구 선수를 흔들며, 미칠 듯한 수비력으로 송병구 선수의 파상공세를 수비함과 동시에 9시 몰래 멀티를 성공하죠. 그 수비력과, 그 몰래 멀티는, 바로 전성기 최연성 선수의 그것이었습니다.
(거의 밀리는 정명훈. 그러나 방어에 성공.)
(최연성표 몰래 멀티.)
송병구 선수의 팬들은 '이제 그만 GG좀 쳐라, 쳐라' 를 수백번은 되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갈 듯 넘어갈 듯 넘어지지 않으며, 참 질리게도 GG를 치지 않는 정명훈 선수는 다시금 수비 라인을 형성하고 경기를 이어 나갑니다. 엄재경 해설의 말 대로 우승에 근접한 송병구 선수가 잠시 정신이 혼미한 것인지, 정명훈 선수의 벌쳐가 나는 듯이 송병구 선수의 멀티를 순회하며 프로브들을 줄여주고, 9시의 몰래 멀티는 정말 운명의 장난처럼 발견되지 않으면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애간장을 녹여 버렸죠. 그 사이, 몰래 멀티를 바탕을 정명훈 선수는 본진에 벙력을 숨겨 가며 모으고, 그렇게 모은 대규모 병력을 진출시킵니다. 어느 새,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수준까지 반전되어버린 경기로, 정명훈 선수의 팬들에게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죠. 바로 그 순간. 이 마지막 교전은 동영상으로 감상하시죠.
우승.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하이템플러가 정명훈 선수의 병력 위에 천지 스톰을 작렬시키며, 모든 우려와 가능성을 한 방에 몰락시켜 버립니다. 스타크래프트에서 가장 화려한 기술이, 스타리그 결승 5경기라는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펼쳐진, 최고의 명장면 중의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나오지 않던 정명훈 선수의 GG.
(우승자, 송병구의 표정.)
촉촉한 눈시울로 미소지으며, 어금니로 혀를 살짝 깨무는 송병구 선수의 표정. 그 때, 송병구 선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심한 압박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기 자신마저 이겨낸 승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슴 깊이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팀원들은 전부 몰려나와 샴페인을 뿌리며 승리를 축하했고, 송병구의 팬들 또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 감동적인 승리를 만끽했죠. 이로써, 송병구는 가을의 전설을 완성했으며, SK 텔레콤에 대한 삼성전자 칸의 자존심을 세웠고, 지긋지긋했던 준우승의 한을 깨끗하게 털어내 버렸습니다.
(송병구, 우승! 사진출처 - 포모스)
오늘, 31번의 스타리그 사상 최초로 이 두 선수의 결승전 리매치업이 성사되었습니다. 결승전의 분위기는 당시와 비슷하기도, 사뭇 다르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오랫 동안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이슈들, 논란들, 화젯거리들을 만들어 내는 송병구 선수. 유난스레 지축을 뒤흔드는 수많은 팬들의 함성을 끌고 다니는 이유는, 그러한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우리의 마음에 들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두 선수의 멋진 결승전을 기대합니다.
Th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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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기에서 전진 게이트웨이에 대한 정명훈 선수의 대응이 너무 형편없었던 것을 제외하면, 정말 흥미로웠던 결승전이였죠.
아마 송병구 선수가 인크루트 스타리그에서 우승해서 콩라인에서 탈출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송병구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밌게도 오늘은 반대로 정명훈선수가 콩라인 탈출을 시도하는 입장이네요. 누가 이기든 멋진 경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