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e스포츠 관련 기사에서 보여주는 여러 언행들을 보면 저는 정치면을 보는 것인지 e스포츠면을 보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감히 짐작하건대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지시는 분도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정치라는 것은 사람 사는 곳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것이죠. 굳이 예를 들어서 설명하지 않더라도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사람의 공개된 행동은 물론,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인 의미가 아예 없는 행동은 찾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정치라는 말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면'에 e스포츠 기사들의 언행을 비유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기사들 속에서, 바로 이 판에서 청춘을 바치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여 가며 이 판을 만들어 오고, 기록을 쌓아 온 이들, 바로 얼마 전까지 찬양 혹은 전설로 추앙하던 선수들, 그런 '영예로운' 이들조차 자신들의 스탠스를 위해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거나, 엄포를 놓고 위협하는 광경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는 박성준 선수가 공개적으로 스타크래프트 2 리그에 나가겠다고 했고, 어제는 이윤열 선수가 스타크래프트 2 리그 참전을 공표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게임뉴스 게시판이나 유머게시판 등에 올라온 몇 개의 기사들을 보면 - 특히 이윤열 선수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 종목 변경 선수에 대한 말들이 아주 가관입니다. 기사 제목에서부터 '영예로운 프로게이머에서 상금사냥꾼으로'라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후배 선수들의 귀감이 되야할 선배로서 명예로운 퇴진이 아니라 상금과 함께 기득권을 챙기겠다는 의지로 전향했다는 측면에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라는 식으로 종목 전환에 대한 의의를 깎아내릴 뿐만 아니라 마치 이윤열 선수를 기득권과 상금에 굶주린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니, '억대 연봉 받는 역대 최다 우승기록 선수'가 다른 종목에 도전하는 걸 깎아내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고작 '상금과 기득권'입니까. 앞뒤가 안 맞는 헛소리에 정말 우습기 짝이 없더군요.
거기에 올해 들어 뜬금없이 e스포츠 팬들의 정서를 거스르는(* 보충설명 참조) '이영호 황제론'을 미는 어떤 언론사에서는 임요환 선수도 스타크래프트 2로 종목을 전환할 것이 유력시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물론 뒷 이야기를 아는 그들 입장에서는 소문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임요환이 26개월동안 총대신 마우스를 잡도록 배려(?)한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임요환은 e스포츠산업 발전의 일등공신인 동시에 최고 수혜자다. 임요환으로선 눈앞에 실리만을 좇아 e스포츠계를 포기하기 어려운 이유다.', '임요환이 새 황제등극을 꿈꾸는 이영호를 비롯해 10년 이상 어린 후배들의 기량이 밀려 출전 기회를 거의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비춰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임요환 선수가 종목 변경을 할까봐 노심초사할 뿐만 아니라 임요환 선수의 위상을 초라하게 만들지 못해 안달인 상황이지요.
뭐 어쨌거나. 지금 제가 예를 든 언론들의 행동을 보면, 종목 변경을 했거나, 종목 변경을 하려고 하는 선수들을 '배신자' 취급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단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언론들에게 과연 존재하는지 대단히 의문입니다.
우선 -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 이미 종목 변경한 선수들은 최근 계약만료된 이후 게임단과 합의하에 재계약을 안 했거나, 이미 예전에 계약만료가 되어 자유 신분인 상태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고 새로운 종목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2가 이슈가 되기 전에 프로게이머를 그만둔 전 프로게이머들 역시 마찬가지죠. 자. 만일 그들의 종목변경 행동이 언론들이 말하는 '배신행위'의 뉘앙스와 조금이라도 비슷하려면 종목 변경한 선수들이 이미 맺고 있는 계약을 파기하는 등의 위반사항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계약이 만료되어서 팀을 떠났고. 그 다음에 자유로운 신분에서 스타크래프트 2라는 새 종목에 도전하는 것이죠. 자. 공적으로 그들의 신분은 새 종목에 도전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게 '비난을 면치 못할 일' 입니까?
예. 백번 양보해서 기분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지금의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체제를 수호하고 싶어하는 쪽에서는요. 하지만 기분상의 문제는 기분상의 문제일 뿐 단지 자신들이 계속 밀고 있는 쪽과 다른 쪽에 갔다는 이유로 논리도 뭣도 없이 '후배들을 저버렸다'는 식으로 배신자처럼 간주하는 것은 어떻게든 까댈 거리를 찾는 키보드 워리어들이 떠드는 태도지 언론에서 문제를 취급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종목 변경 선수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공적으로 신분상의 문제가 없는데도 배신행위처럼 매도하는 것은 사실을 기반으로 삼아야 할 언론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막무가내로 비난을 일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며, 이건 제가 보기엔 자신들의 정치적 스탠스를 위해 언론의 본령을 내팽개치기로 작정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무엇보다, 제가 보기엔 배신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종목 변경한 선수나 종목 변경을 하려고 하는 선수들이 아니라 바로 그런 선수들에게 할 소리 못할 소리 가리지 않는 언론들 자신입니다. 종목 변경이라는 사실을 앞두고 그들이 쏟아내는 '영예로운 프로게이머에서 상금 사냥꾼으로' 등등의 말을 쏟아내는 그들이 과연 얼마나 프로게이머를 영예롭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의심되기 때문입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지금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 선수들만큼 대한민국 e스포츠계에서, 아니, 전 세계의 e스포츠계에서 영예로운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데 과연 그들이 영예롭게 대접을 해주긴 했는지 보겠습니다.
이윤열 선수야 이미 위에서 말했으니 임요환 선수의 예를 들어 보죠. 과거에, 임요환 선수가 제대하고 나서도 자신에 대해 각계각층의 주목이 쏟아지고 과도한 이슈만들기가 집중되자. 임요환 선수는 인터뷰에서 '(내가) e스포츠의 아이콘이라고 불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지금의 나는 명성만 남았다. 조금 섭섭하기는 하지만 전체판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의 e스포츠 판은 제 2의 임요환을 키우기보다는 있는 임요환을 계속 활용하는 것 같다.'라는 소리를 했지요. 하지만 올해까지도 임요환 선수는 e스포츠를 상징하는 위상으로 활용되어 언론사 인터뷰, 게임위 자문위원, 승부조작 사건 때의 인터뷰, 심지어는 열애 소식까지도 활용되며 그는 여러 곳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e스포츠 언론이나 협회에서는 여전히 e스포츠 최고의 뉴스메이커 중 하나로서, '있는 임요환'을 계속 활용하는 데에만 힘썼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써먹던 '있는 임요환'의 종목 변경 소문이 나니까 '총 대신 마우스 잡고 복무하게 해줬는데' 운운하면서 '한국 e스포츠의 10년 아성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외면하면서까지 임요환이 스타크2로 전향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식으로 소문을 무마시키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영예로운 프로게이머'에 대한 대접일까요. 아니면 자기들 밥그릇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니 어떻게든 메우려고 데굴데굴거리는 것일까요? 저는 아무리 봐도 전자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e스포츠의 미래도, 선수들의 권익도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지금의 체제 수호에만 열을 올리는 목소리를 내는 '진짜 배신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e스포츠 선수들에 대한 '영예'를 만들어줬고 이 판의 존속을 위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e스포츠라는 판과 그 선수들의 영예를 만든 것은 선수들을 위시해 그 게임과 경기에 돈과 시간과 열정과 진심을 들인 사람들이죠. 그런데 권리도 무엇도 없이 저작권자의 한 마디에 뿌리부터 흔들리는 판을 만들어 놓았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는 자들은 되레 지금껏 이 판의 진정한 영예를 만들어 온 사람들까지도 헌신짝 취급하기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2를 죄악시하다가 안 되니 종목 변경을 하는 선수들마저 죄악시하는 것이 과연 e스포츠를 위한 것일까요? 팬들을 위한 것일까요? 선수들을 위한 것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들이 이런 행동으로 위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이고 자신들의 밥그릇이죠.
사적인 가치만 취할 의무만 있는 집단이 사적인 가치에 충실하거나 고객을 생각 안 할 때가 있더라도 그게 얄미울 때가 있는 법인데, 공적인 가치를 취할 의무가 있는 집단이 팬들은 안중에도 없이 사적인 가치만 골라 취하려고만 하고 그로 인해 이 판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자신은 무엇 하나 하지 않으려 하고 그저 무언가를 손에 쥐고 땡깡을 부리던 '어른애'가 이젠 그 '무언가'마저 하나 둘 빠져나가니 '영예'마저 내팽개치고 칭얼대는 소리가 거의 악다구니 수준으로 심해지고 있어. 정신이 사나운 요즘입니다.
- The xian -
* 보충설명: '이영호 황제론'이 e스포츠 팬들의 정서를 거스른다는 것은 e스포츠 팬들이 이영호 선수가 강자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커뮤니티에서 e스포츠 팬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황제'는 임요환 선수의 고유명사이고, '천재'는 이윤열 선수의 고유명사이듯, 이영호 선수의 강함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는 '최종병기' 등이다"라는 것인데, 해당 언론사는 그것을 간과한 것인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인지 뜬금없이 '황제 논란' 운운하다가 욕만 들어먹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는 게임뉴스 게시판의
https://pgr21.com/?b=12&n=4300 게시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추가: 이 글에서 저는 문제의 언론들의 기사 일부를 인용한 대목을 제외하고 제가 쓴 대목에는 일부러 '전향'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단어를 놓고 보니 무슨 과거 우익, 좌익 있던 시절의 '사상전향'같은 느낌이 들어서 영 껄끄럽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