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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0/08/29 16:47:50 |
Name |
Harq |
Subject |
나만의 Old Boy S2? - 어느 예비역의 커리지 도전기 |
'왜 이렇게 조용해... 설마 케리어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토스 진영에 스켄을 찍어본다.
'제발..'
하지만 화면에 잡히는 것은 3개의 스타게이트와 이미 나와있는 케리어.
그제서야 골리앗의 사정거리 업그레이드를 누르고 터렛을 지어보지만, 몰려오는 토스 병력에 쓸려나가는 골리앗들.
'GG'
(1)
커리지에 나가보자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날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상병쯤에 불침번 서다가 고참이 안 일어나서 시간 때우던 때였던가?
아니, 병장때 당직사관의 짜증을 받으면서 참 시간 안가는 불침번을 서던 때였던 것 같다.
근무란게 원래 그렇지만 시간도 안가는데 이런저런 망상이나 하던 때였고.. 그런 망상중에 하나가 바로..
'준프로 따보기' 였다.
(2)
누가 그랬던가,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간다고.
과연 그랬다. 오지 않을것만 같던 전역일은 결국 오고야 말았다. 그 많던 고참들은 죄다 틀렸다. 전쟁따위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부대 분위기야 천안함으로 좀 뒤숭숭했지만, 알게 뭐냐. 난 이제 아저씨인데.
고향이 같은 동기녀석이 버스 안에서 물었다.
"야, 이제 너는 뭐할거냐?"
"나? 공부나 해야지 뭐"
전역 당시의 나는, 그때의 망상 따위는 이미 머리 속에서 지워버린 후였던 것이다.
(3)
그러다가 '그 망상'이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전역하고도 4개월이 지난 후였다.
'아 맞다 나 커리지 한번 해보기로 했는데.. 이제 개학하면 못하는데?'
이게 시작이었다. KESPA 홈페이지를 들어가 일정을 보니, 8월 마지막주 주말에 커리지가 있었다.
시간은 2주가 남아있었는데, 문제는 당연히 '실력'이었다.
B 서버나 I 서버에 들어가서 게임을 해봤는데, 하는 족족 상대에게 그냥 '쳐 발렸던' 것이다.
그동안 스타를 가끔 하긴 했지만, 공방 초보들 상대로나 했지, 실력자들과는 게임을 거의 안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대책이 필요했다.
(4)
'고수란 놈들이 어떻게 하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아프리카 개인화면을 찾아봤다.
준프로 이름을 달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강의 파일도 있다고 했다.
그중에 하나를 구입도 했는데, 학원에 비하면 굉장히 쌌기 때문에, 밥 몇끼 굶고 몇번 걸어다니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사 버렸다.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2년간 TV로 멍하니 보기만 했던 프로게이머들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리플레이를 보고, 빌드를 배끼고...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5)
네XX나 다X 혹은 스타크래프트 커뮤니티에 '커리지'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름 많은 글들이 나온다.
뭐, 그중에서도 커리지의 수준을 다룬 글들을 대충 보면,
'신피지 A도 운이 좋아야 딴다' 부터 시작해서 '누구는 B 정도인데 운이 좋아서 땄다더라'는 둥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 나도 운이 좋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6)
그렇게 2주간, 하루에 5시간 정도씩은 투자했던 것 같다. 사실, 부족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험기간에 공부하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 5시간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역한 자식놈이 하루 내내 게임만 하고있는 것을 보고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5시간도 너무 길었다.
(7)
그렇게 커리지 당일이 왔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실력자들 다 지각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을 타고 용산으로 갔다.
등에 맨 가방에는 키보드, 마우스, 패드, 이어폰 등이 들어있었는데,
손가방에 넣으면 키보드가 보이는게 좀 아니다 싶어 안 보이게 들고갈 수 있는 가방에 넣었다.
(8)
'어리다....'
용산 보조경기장 앞에 있는 대기자들은, 전부 다 학생들 뿐인 것 같았다. 다들 초,중,고등학생들 인 것 같았다.
시간이 되자 등록을 받는 사람이 나왔고, 신분증을 통한 검사와 종족 확인을 했다. 그리고 조금 기다린 후 입장.
보조 경기장은 그동안 커뮤니티 싸이트 같은데서 사진만 봤지, 실제로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
멸종한 줄로만 알았던, 무려 19인치(17?) CRT 모니터들이 늘어서 있었다.
세팅을 하고, 경기를 할 준비를 했다.
(9)
그렇게 1경기는 더블 넥서스를 허용한 후 트리플을 하다가 상대의 패스트 케리어에 쓸려버렸다.
2경기 맵은 폴라리스 렙소디. 상대가 전진 게이트를 했는데, 막는게 좋지 못해서 피해를 입은 채로 앞마당을 가져갔다.
서로 2번째 멀티까지 먹었고, 벌쳐를 돌리며 견제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가 돌아서 오는데 왠지 못 막을것 같았다.
그래서 본진에 마인을 잔뜩 박은 다음 다른 길로 토스 본진까지 가서 본진 맞바꾸기를 했는데, 다행히 마인이 사기;;라서
이겨버렸습니다..? ...어라?
... 다르게 표현해 보고 싶은데, '이겨버렸다' 라는 말 이외에는 다른 표현이 사실 떠오르지 않는다. 상대한테 조금 미안할 정도였다.
(10)
58차 커리지 3경기 맵은 '투혼' 이었다.
여기서 두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준비해간 '업테란'을 한다 라는 것이 한가지였고, 또하나는
'아 썅 몰라 BBS' 라는 선택이 있었다.
(11)
게임 대회에 나가서 자기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천상 타고난 게이머이거나, 엄청난 강심장일 것이다.
'커리지를 통과할 실력을 갖춘다' 와 '대회장에서 나의 실력을 다 발휘한다' 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미니맵도 안보이고, 클릭은 헛나가고, 상황은 불리한데 유닛은 뱅뱅 돌기만 하는 그 기분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12)
센터에 두개의 베럭이 지어졌다. 과연 요행을 바라는 나의 바람을 하늘이 들어줄지?
'더블넥 더블넥 더블넥..'
물론, 신은 공평했다. 상대는 본진 플레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벙커링을 시도했지만, 질럿이 나왔다.
질럿 프로브 vs 마린 SCV의 싸움이 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길 것 같지가 않았다.
'아 진 것 같은데... 프로브만 어떻게 다 잡으면 비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몇기 안되는 프로브를 하나하나 찍어 잡아나갔는데, 상대가 실수했는지, 질럿들이 잠깐 따로 노는 바람에 성과가 있었다.
'어라? 이거 잘하면....?'
하지만, 마지막 남은 프로브가 빨간피인 상태에서 마지막 마린이 잡혀버렸고, 결국 경기는 거기서 끝났다.
.... 나가기 전에 리플레이를 보니까(사실 보면 안됨) 프로토스의 남은 미네랄은 44였다. 프로브를 잡았으면 무승부였던 것이다.
'아... 저거 잡고 재경기 했으면 이것도 나름 소재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13)
집에서 확인해 보니, 나를 이겼던 상대는 다음 상대에게 이미 진 후였다.
그 정도 수준이었던 것이다. 나는.
'하긴.. 2주 연습해서 준프로 따면 내가 이영호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14)
사실, 말도 안된다는 것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자명한 것이었다.
세상에 어느 분야가 프로 자격증을 반짝 연습한 일반인한테 주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하지 않는다.
물론, 위의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허접테란이 커리지 1차 찍은 이야기' 지만
길고 길었던 내 '스타크래프트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데 이만한 도전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 두번다시 최근의 2주만큼 게임을 열심히 연구하고 연습하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2년만에 다시 학교공부가 시작된다. 나의 길을 가야할 때가 온 것이다.
10여년간 내 컴퓨터에 깔려있던 스타크래프트를 지우면서 생각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 End -
ps. 혹시 주변에서 어떤 예비역 아저씨가 '나 커리지 나가봤어' 하면서 자랑하는 소리가 들리거든, 조용히 웃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놀리시면 안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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