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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5/16 15:14:39
Name The xian
Subject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팬으로서 남아있을지 아닐지를 결정할 기로에 서서
예. 제목 그대로입니다.

덧붙여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팬'이라고 명시한 이유는 이번 문제가 모든 e스포츠의 쓸모없음이나 타락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조작 사건이 워크래프트 III 종목의 문제이듯 이번 문제는 '스타크래프트 종목'의 타락이죠.


The xian이라는 사람도 기껏 팬 중 한 명일 뿐이고 PGR의 회원 중 한 명일 뿐인데 속된 말로 '팬질' 한다 만다에 뭐 이리 거창하느냐라고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왜 제가 이걸 공개된 커뮤니티에 글까지 쓰면서 이야기하는 것이냐면... 그것은 제가 e스포츠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이 단순한 팬심 뿐만 아니라 제 직업적인 신념과 연계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게임업계인이고, 또한 게임 칼럼을 쓰기도 합니다. 게임뉴스 게시판에 링크되었던 'e스포츠 10년, 새로운 시작인가 황혼의 그림자인가'라는 칼럼도 - 물론 편집 및 퇴고 등으로 저의 원래의 논조보다는 훨씬 완곡하게 수정되었지만 - 제가 PC사랑에 연재한 게임 테마섹션 칼럼들 중 하나입니다.

e스포츠에 대한 팬심이라는 '사심'은 게임에 대한 원천적인 흥미와 애정 등과 더불어, 제가 만 7년간 지금 해 오는 일들을 해 오게 만든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일 때문에라도 저는 게임 방송을 무슨 내용이든 봐야 합니다. 지금도요. 그런데 그 원동력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요즘 같이 게임 가지고 부당한 말을 하는 곳들이 한두 군데가 아닌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건이 터졌습니다. 그 이후, 허탈한 것은 둘째치고 제가 직접적으로 e스포츠와 연계된 일을 하는 게 아닌데도 정말 밥벌이 못해먹겠다 하는 생각을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다들 아시는 이번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건은 저의 개인적 원칙은 물론이고 직업적 원칙과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승부조작은 말할 것도 없이 이 판의 근간을 흔든 부정행위이고 리플레이 유출은 회사에서의 비밀유지 위반사항과 일맥상통합니다. 조작의 대가로 돈을 주고받은 것은 뇌물수수 및 공여에 해당하고(그 돈을 횡령한 것도 추가로 포함해야겠죠) 도박으로 부당이득을 취한 것도 엄연히 도박죄라는 현행법 위반에 해당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회사에서 업무와 관계되어 이 일 중 하나둘 정도라도 저질렀다면, 정상적인 회사라면 그 사람은 정직이나 해고 등의 중징계를 당하게 되고 심한 경우 내쫓긴 다음에 그 회사는 물론 동종업계의 다른 회사에서도 회사 생활을 상당 기간, 혹은 영원히 다시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더욱이 이번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건에 있어서 협회 및 게임단의 '지금까지의 대처'는 책임지려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문제가 크게 번지지 않기에만 급급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대처가 맘에 안 들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빙상연맹 예를 자꾸 들게 되는데 상벌위원회의 결과 및 그것이 성립되는 과정엔 분명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드러낼 사항은 드러내고 관련자들의 입장 표명도 있어서 그나마 겉치레일망정 공론화된 뒤 공개적인 과정을 거쳐 일이 처리되었던 쇼트트랙 선발전 승부조작건과는 달리 관련자는 물론이고 협회 및 게임단들도 사실상 침묵을 지키고, 문제가 되는 선수의 프로필을 삭제하거나 조용히 엔트리 제외시키는 방식으로 이번 일을 조용조용히 처리하려는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건에 대한 협회와 게임단의 처사는 의혹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혹을 더 키우고 있습니다.

말로는 일벌백계와 재발방지를 이야기하나 협회측에 브로커들이 접촉하고 버젓이 협상을 시도하는 일(데일리e스포츠 등의 언론에서 보도한 바에 의하면 말이죠)이 발생하고서도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지 않고 쉬쉬하다가 검찰의 손에 넘겨버린 뒤 상벌위원회도 재판이 끝나야 하겠다는 식으로 손을 놓고 있는 협회의 태도는 정말이지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조작과 관련된 부분은 민형사상 책임이기 이전에 협회가 책임관리하는 e스포츠에 위배되는 부분이니 사실로 인정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협회가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징계를 내릴 권한이 있다고 봅니다만, 협회는 재판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을 빌미로 상벌위원회를 통해 제재조치를 취하는 데에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물론 검찰수사를 받게 되는 피의자의 인권은 존중해줘야겠죠. 그러나 '재판결과에 따라 별도 상벌위원회를 개최하겠다'라면, 문제가 생깁니다. 검찰수사 결과 재판을 받고 거기에서 형사적으로 볼 때에는 대부분 초범이고 형사적 혐의가 경미한 편이라 혐의가 중한 선수를 제외하면 약식기소를 통해 기소유예나 소량의 벌금 등으로 끝날 공산도 있는데 그것으로 승부조작이나 리플레이 유출, 뇌물수수 및 공여, 도박죄, 횡령 등의 e스포츠의 뿌리를 뒤흔들려 한 행위 역시 경미하게 덮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 조치에 저는 동의할 수 없고, 안 될 말입니다.


이번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건과 관련되어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팬이자 게임업계인의 한 사람으로서 협회와 게임단측에 요구합니다.

1. 승부조작 및 리플레이 유출 등의 문제로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경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선수 및 관계자의 명단을 발표하고, 검찰의 형사재판과는 별도로 협회 조사 결과 혐의가 사실로 드러난 선수들에 대해 상벌위원회를 개최하여 징계 수위를 결정하고 이를 공표할 것. 재판이 끝난 다음에 결과에 따라 상벌위원회를 하겠다는 식의 안일한 시간끌기식 조치는 동의도 인정도 할 수 없음.

2. 협회와 게임단, 방송사는 물론 승부조작 관련 가담자들 중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관계자들은 모두 이번 일로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팬들에게 사과할 것.

3. 승부조작 재발방지 및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의 훼손된 공신력을 되찾기 위한 명시적인 사후대책을 발표하고 선수 처우 개선을 위해 KeSPA의 불공정 FA와 같은 독소 조항들의 전부 혹은 일부를 개정할 것.

이런 조치 요구가 전부 받아들여지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나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문제가 되는 선수 몇몇의 프로필을 삭제하고, 조용히 은퇴시키고, 그 존재를 기억되지 않도록 슬쩍 묻어버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저는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팬으로서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명시적인 조치가 발표될 때까지 이 시간부터 '모든 스타크래프트 방송경기'를 무기한 보이콧할 것입니다. MSL 방송경기를 보이콧했던 것처럼.

더불어 저는 스타크래프트 종목의 승부조작 하나로 다른 e스포츠까지 싸잡아 e스포츠 자체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PGR이 스타크래프트 외에 다른 종목의 e스포츠 커뮤니티 섹션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PGR 회원탈퇴까지는 고려하고 있지 않지만, 사후대책과 관련된 팬들의 목소리에 계속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차원에서 아예 회원탈퇴를 하는 것도 고려할 생각입니다. 이 커뮤니티는 저에게 있어 소중한 공간이고 유익한 곳이긴 하지만, 대의명분도 없는 종목의 팬으로서 커뮤니티에 있는다는 것은 이 커뮤니티에도 덕이 안 되는 일일 것입니다.


괜히 분위기 해치지 말고 떠나려면 빨리 떠나라고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볼 사람은 본다고 하실 분도 있으시겠죠. 물론 제가 가해자라면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피해자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팬으로서도 피해자이고 게임업계인의 처지에서도 직간접적 피해자 중 한 명입니다. 게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지금처럼 안 좋은 상황에서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건이 터진 것은 한마디로 엎친 데 덮친 격이고, 게임계는 e스포츠가 타격을 받을 경우 적든 크든 피해를 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관중이라든지 시청률이라든지 게임업계 매출 1조원이라든지 적극적인 인수합병이라든지 하는 것을 들어 게임사업이나 게임방송이 걱정 없다고 하시고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생명인 사업에서 신뢰를 잃은 사업만큼 하기 어려운 사업은 없고. 직간접적 고객인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나빠질 만한 일이 생기고, 실제로 인식이 나빠지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지 않거나 그런 것이 위기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위기의 징후가 보이고 그것으로 인해 위기를 겪고 있는데도 그것을 위기라 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안일한 시각이겠죠.


저는 지금까지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아온 것도 아니고 트러블 없이 둥글둥글하게 살아온 것도 아닙니다. 저는 모난 사람이고 치우친 사람이고 성격 까칠하게 살아왔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고 저에게 말한다면 저는 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제 이 시점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기 전까지 새로운 글로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볼 것입니다. 돌을 내려놓으라니 내려놔야죠.

그리고 만에 하나, 협회와 게임단과 방송사들이 이렇게 승부조작 문제가 사실로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우려하는 행동을 - 끝까지 덮고, 미적거리고, 책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어떤 것도 개선하지 않으면서 그저 선수들을 볼모로 팬들의 관심에 묻어가려는 행동 - 또 다시 하면서 저를 비롯한 팬들에게 열의와 애정을 다시 강요한다면, 저는 그런 강요에는 따를 수 없으니 그런 작자들에게 제 몫의 시청률을 보태주지 않을 것이고, 그 동안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에 가졌던 열의와 기억과 애정 역시 모두 내려놓고 그로 인해 태어난 저의 보잘것 없는 글줄도 모두 기억하지 않아야 하겠지요. 원망도 무엇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팬이 되기로 한 건 저의 선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끝끝내 덮고 끝끝내 온정만 강요한다면 저는 더 이상 스타크래프트 경기는 보지도 않고 기억도 하지 않겠습니다.


- The xian -

P.S. 적잖은 분들이 말하셔서 보이콧의 대상이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1. 기한은 무기한입니다. 그리고 목적은 '제 몫의 시청률을 보태주지 않는 것' 입니다.
2. 대상은 온게임넷 및 MBC게임에서 생방송 및 재방송 되는 스타크래프트 경기(스타리그, MSL, 프로리그) 입니다.
3. 왜 스타크래프트 경기로 한정했냐면, 이게 게임업계인이라는 직업을 유지하고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기 때문입니다. 고작 e스포츠 종목 하나 타락했다고 제가 이 길 아니면 안된다고 이제껏 달려온 길을 수정할 수 없고 직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4. 이 일은 순전히 제 개인의 선택이니 동조해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양심이 있으시다면 제 블로그나 쪽지로 '님도 1주일 뒤에 결승 보시겠지요'라는 조롱섞인 말은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에게는 그저 흥미거리가 사라지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직업적 원칙이 걸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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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나
10/05/16 15:22
수정 아이콘
군전역후 여자친구가 임요환선수 팬이라서.. 그때부터 이판에 관심둔지 10여년이 지났는데.. 이번일로
더이상 관심이 없어지네요.. 협회라든지 게임단이 사과를 하든 말든 그냥 관심이 없어지네요..
심란합니다..
10/05/16 15:25
수정 아이콘
가장 실망스러운건 그동안 조사기간동안 자수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실망스럽네요... 이 허탈감 어디서 치유해야 합니까... 이깟 것에 내 인생을 소비했었다니... 지못미...
안스브저그
10/05/16 15:38
수정 아이콘
Xian님의 본문에서 제안하신 조치에는 공감합니다. 특히 3번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때까지 판키우고 열심히 경기한 선수들이 안타까워서라도 계속 스타경기 계속 보려고 합니다.
스타판을 아끼시던 유저 한분이 떠나가려고 하는데 씁쓸합니다.
10/05/16 15:39
수정 아이콘
예전의 장조작 사태와는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군요....

장조작 사태는 그나마 리그의 희망이 되는 오크를 살리기 위해서 조작이 가해졌다지만은...(뭐 옹호하고자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만...)

하아. 군대에 있을때 이런게 터지니 씁쓸하군요.

이윤열,강민 시절의 향수나 기억하며 살아야 할것 같습니다.
10/05/16 15:46
수정 아이콘
오늘 기사 나오니까 프로리그의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E스포츠 역사상 최대의 위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장군보살
10/05/16 15:49
수정 아이콘
이제동의 MSL 우승까지만 보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가장 좋아하는 게이머가 마모씨였기에.. 계속 지켜보기에는 의미랄게 없어졌네요. 그래도 이제동의 이번 시즌 MSL 우승 달성까지만 응원해야겠습니다.
2월21일토요일
10/05/16 15:51
수정 아이콘
지금 끝난 박지수선수와 조병세선수의 경기를 보니까
더욱 관련된 범죄자들이 원망스럽네요.
저렇게 열심히 시합하는 선수들의 노력과 열정에 이렇게 찬 물을 끼얹어도 되는 겁니까.
제가 다 억울하고 분하네요.
하루빨리
10/05/16 15:52
수정 아이콘
고인물이였습니다. 제대로 이스포츠 문화가 정착되기 전에,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협회가 중계권에 손을 대서 블리자드와 틀어졌습니다.
그 이전에, 큰 틀을 짜기도 전에 세세한 규정 하나하나에만 목숨을 걸어서 결국 게임배팅이란 우습지도 않은 걸 들여와 버렸습니다.
선수들도 사람이기에, 유혹에 빠질 수 있기에, 더욱더 조심해야 했었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렸습니다.

보가 터졌습니다. 이제 물이 흐릅니다. 스타란 종목에만, 협회란 기득권이 이제 바위가 물을 만나듯 깍이고 깍이겠죠. 물길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스타2와 FPS, 콘솔등등 다양한 종목을 중심으로 한 세계 이스포츠란 바다와 연결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일을 통해 앞으로의 이스포츠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기대됩니다.
10/05/16 15:56
수정 아이콘
이제 판을 접을때가 된거같네요..
흥미고 뭐고 싹다 사라졌습니다..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을수가 없네요
10/05/16 16:03
수정 아이콘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떠날 것이고, 그럼에도 믿음을 다시 가져보는 사람들은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계권 사태 때도 그랬듯이 후자가
압도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판이 걸어온 10년의 역사란게 이딴 사건 하나에 무너질꺼였으면 싹도 못 틔웠을 것입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넘어갈 순 없습니다. 팬들은 끊임없이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에 대해 거론해야 되고 압박을 넣어야 합니다.
이필현
10/05/16 16:15
수정 아이콘
명단 발표와 관련하여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글쓴이 님께서 e스포츠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신 것, 그래서 작금의 사태에 누구보다 큰 분노를 느끼고 계시다는 것,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때로는 극단의 선택보다는 중용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중용이란, 뜨뜻미지근한 솜방망이 처벌이나, 쉬쉬하며 뒤로 감추는 식의 적당한 온정주의의 발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범행위가 입증된 모든 선수 및 관계자들은 그에 합당하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로 인해 처벌받았다는 사실 역시 숨김없이 공개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명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 예측되지 않는 심각한 부작용을 발생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그 부작용들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예상되지만, 몇가지만 언급하자면, 이중처벌의 논란과 사후 협회나 e스포츠 언론매체의 권력남용 등 입니다.

첫째, 이중처벌의 논란은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거지겠거니와 e스포츠의 경우 더 심화될 수 있습니다. 주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웹상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위주로 하는 e스포츠의 경우, 인격을 모독하는 원색적인 표현들이 전혀 걸러지지 않은 채 이미 법적인 처벌을 받고 갱생을 위해 노력하는 개개인들에게 향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는 분명한 이중처벌이며, 불특정 다수에 의한 마녀사냥, 공개처형의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습니다. 법이 정한 크기 이상의 처벌을 받게되어 좌절과 실의에 빠진 한 개인이 삶의 최후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되었을 때, 그 책임은 아무도 질 수 없으며, 그러한 비이성적인 사태는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그만큼 실명공개는 조심스러운 사안이며, 감정을 철저히 배제시키고, 득과 실을 냉정히 따져 결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xian 님께서는 가슴 속 뜨거운 분노가, 차가워야할 머리의 이성까지 뜨겁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둘째, 실명공개와 관련한 너무나 유명한 논란거리인, 대체 실명공개를 할 수 있는 그 막강한 권한을 누구에게 부여할 것인가 입니다. 협회입니까? 포모스 입니까? 블리자드 입니까? 어떤 단체가 되었든, '범죄자의 실명공개'라는 21세기 현인류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낙인성 처벌을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쥐는 단체는 분명히 그 무소불위의 힘을 남용할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번 그러한 힘을 쥐어주고 난 이후에 제도적인 방법을 통해 그것을 견제하는 것은 쉽지도 않으며,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저는 협회도, 그 어떤 e스포츠 언론매체도 본인들만의 정보망에서 얻어진 검증되지 않은 화제거리 이야기들을 실명을 거론하며 발표할 수 있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번 일은 사실상 그 진위여부가 확정되었다지만, 그렇다고 실명을 공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그 특정 단체로 하여금 첫단추를 풀게해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코카인은 중독성이 없는 향정신성약물입니다. 하지만, 코카인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대부분 그 다음 단계의 마약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저 약을 gating drug 라 명명하고, 법에서 금지합니다. 실명공개도 비슷한 맥락에서 고삐를 풀어주는 첫단추가 될 수 있습니다.
wonderswan
10/05/16 18:26
수정 아이콘
이번 승부조작 사건을 검찰에 수사의뢰한 것은 협회입니다.
그리고 검찰은 가지고 있는 수사권을 동원해서 현재까지 사건을 밝혀 냈고요.

현재까지 밝혀진 정황으로는 조폭까지 끼고 비공개 사이트에서 거액이 왔다갔다한 상황인데,
계좌추적이나 소환, 사이트 추적같은 검찰의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애초에 협회 차원에서 건드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으로 보이고요.

문제가 번지지 않기에 급급하려 했거나 쉬쉬하려 했다면 오히려 검찰에 사건을 맡기지 않았을 겁니다.
내부적으로 알아보고 적당히 하다 덮었겠죠.
하다가 능력이 안되서 검찰에 넘겼든 어쨌든간에 협회로선 의지가 없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미 협회가 검찰에 칼을 넘긴 시점에서, 수사 결과 확실한 증거와 자백을 통해 조작에 가담한 선수가 드러나기 이전에
검찰 수사와 별개로 명단을 공개하고 상벌위원회를 여는건 부적절한 처사가 될 공산이 높아 보입니다.
협회가 가진 능력으로는 검찰만큼 공모자나 조작 가담자를 명백하게 밝히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많은 분들이 사건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거나 쉬쉬하다 끝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현재 상황은 검찰을 통해 주요 조작 가담 선수들의 면면이 수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검찰 수사를 더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필현
10/05/16 18:35
수정 아이콘
wonderswan 님의 리플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협회는 수사기관이 아닙니다. 협회차원의 상벌위원회를 조직하는 것만큼이나 미숙하고, 어리석은 대응이 없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의 전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공개되고, 처벌의 무게 또한 사실 그대로 발표되어, 다른 모든 e스포츠 관계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e스포츠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몇몇 분들께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계신 '실명공개' 건은, 누누히 말씀드리듯이 엄연히 그 궤를 달리하는 영역이며, 득보다 실이 큰 (게다가 예측되지 않는 손실까지 감안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실이 큰) 악수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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