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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0/05/16 12:44:27 |
Name |
방물장수 |
Subject |
낭만시대는 가고.. |
편의상 존칭은 생략합니다.
예전에 타 사이트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수정하고 각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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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초,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친구의 손에 이끌려 피씨방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나는 스덕후가 되었다.
그 전까지 컴퓨터 게임이라곤 페르시아 왕자밖에 몰랐던 나에게 스타크래프트는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종아리에 진한 멍자국이 생길 각오를 하고 야자를 제끼게 되었으며, 오락실에서라면 20시간은 버틸 2000원을 한 시간에 쓰고도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점점 피씨방에 동행하는 친구들은 늘어났으며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나는 누군가가 프린트 해 온 스타크 빌드오더를 외우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나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을 자다가 스타크래프트 꿈을 꾸기도 했고 이기석의 싸인을 받기 위해 보충수업을 제끼고 미친듯이 자전거 페달을 밟기도 했다.
그 전까지 나는 열혈 아케이드 키드였다. 매일 저녁 오락실 주인 아주머니 대신 가게 셔터를 내리고 갈 정도였다. 그러던 내가 피씨방에 빠졌고, 대세는 대세인지라 대부분의 친구들도 흐름에 편승했다. 그 당시 같이 청춘을 아케이드 레버에 불태우던 친구가 우리를 보며 매우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에게 그런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간은 흘러 세기가 바뀔 무렵..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스타의 인기는 황제 임요환에 의해 더욱 증폭되어 있었다. 스타에 잠깐 질려 있던 시기였던 어느 한가한 날 오후에 나는 오락실에 가게 되었다.그런데 그 곳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항상 모니터 한 쪽 구석엔 동전이 쌓여 있었고 늘 전자음의 합주가 울려퍼지고 있던 그 곳엔 경품 빙고 게임의 우스꽝스러운 효과음과 드문드문 앉아서 게임을 하는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들만이 남아 있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건 이기건 늘 상기된 얼굴로 스틱에 매달리던 이들은 다 어디 갔는가? 스트리트 파이터 시절에 자리를 사고 팔던 오락실의 영광은 어디에 갔는가? 이름도 모르는 동네 오락실 내 라이벌이지만 서로를 이기기 위해 출근 도장을 매일 찍었고, 친구와 파이날 파이트 와리가리 연습에 매진하던 그 시기의 낭만은 사라진 것 처럼 느껴졌다.
피씨방으로 달려가는 나를 섭섭해 하던 고교시절 친구놈 얼굴이 떠올랐다.
슬펐다. 그것들이 마치 나를 지나쳐간 화살마냥.. 멀어져 가고 또 힘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사실 90년대 후반은 많은 것들이 바뀐 시기였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남아 있던 마지막 시대였다고 할까. 주머니 가득 동전을 채우고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차가워진 손을 입으로 호호 불던 기억들.. 서태지 앨범 발매일에 주머니에 워크맨을 넣고 학교 담을 뛰어넘어 달려가던 기억들.. 모뎀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 방문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기억들..
그것들이 모두 내 곁에서 사라졌음을 실감했던 그 때, 나는 스타와 피씨방의 전성시대가 끝나는 날을 떠올렸다. [당구장을 오락실이 밀어냈고 오락실을 스타가 밀어냈듯 스타도 무언가에 의해 밀려날 날이 올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난 그 당시 포트리스에 빠져 있었으니까.
사실 나는 스타크래프트가 지금처럼 롱런하며 거대화, 체계화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점점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임요환, 강민, 이윤열, 홍진호 등의 전설들이 스타를 게임 그 이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들의 임팩트는 엄청났고, 나는 스타 방송 보면서 캔맥주를 홀짝거리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고 생각했다. 명경기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것.. 그 이상의 신선놀음은 없었다.
난 질레트배를 지켜보며 스타판엔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스타의 바둑화를 부정하는 친구들을 고리타분한 녀석들이라며 비웃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났다.
많은 이들이 떠났다. 그리고 나 역시도 스타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 텅 빈 자취방에 돌아와 TV를 켜면 바로 온겜이나 엠겜이 나오던 시절은 지났다. 요즘은 디스커버리나 엑스티엠이 나오더군.
오락실처럼 스타판이 급격히 식어간 것은 아니다. 천천히..아주 천천히 식어갔다. 그나마 비틀대는 스타판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낭만시대로 표현되는 올드에 대한 열정과 시들해지는 본좌론 뿐이었다. 그 지지대가 하나씩 부러지고 있다.
강민이 떠나던 날 이 글의 원문 글을 썼었다.
낭만시대란 말에 가장 걸맞는 게이머가 사라졌다.
할루시 리콜과 히드라 위로 뿌려지던 웹의 바다에 열광하던 이들 중 몇몇은 또 덩달아 스타를 떠났다.
그리고 그 지지대가 하나하나 무너지면서 점점 스타판은 추억속으로 잊혀져 가고 있었다.
강민이 다시 꿈에 도전하는 지금, 그 꿈이 사실상 불가능한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낭만시대의 흔적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워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지막 지지대가 무너져 버렸다.
본좌론을 만들어 낸 사나이가 추악한 모습으로 무너져 버렸다.
우리는 안티와 팬을 가릴 것 없이 한 남자를 잠시나마 사랑하게 되었던 기적의 순간을 기억한다.
혹자의 표현대로 그는 그 순간만은 물위를 걸었으며 그 모습은 차라리 슬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스타판의 역사 속에서 가장 찬연히 빛나는 영광의 순간을 만든 마재윤이 파렴치한이 되고, 그의 이름이 세간을 뒤흔들고 있다.
변두리 술집 작부로 변해버린 어릴 적 첫사랑을 마주친 느낌이랄까.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충격과 상실감에 나는 떨고 있다.
사랑을 잃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지만 이번 일은 현실에서의 내 사랑을 잃었던 순간만큼이나 날 아프게 한다.
나는 요즘 오락실의 전성시대가 그리워질 때면 노량진으로 가서 오락을 하곤 한다. 아직 아케이드 전성시대의 로망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우울하다.
시간이 흐른 훗날 내가 10대 시절을 회상하게 되면 오락실을 떠올리게 될 거다. 그와 마찬가지로 20대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스타와 임요환, 이윤열, 괴물, 강민, 투신 등을 떠올리게 되겠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마재윤도 떠올리게 되겠지.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말라가는 낙엽처럼 색이 바래다가 부스러져 버리는 건 싫다.
이미 부스러져 버린 오락실은 추억으로 남겠지만 스타는, 스타판은 다시 빛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슬프다.
낭만시대가 사라져 버린 건, 그 낭만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사나이가 추악하게 자멸했다는 건 슬프지만 꼭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순수의 시대, 낭만시대를 만들어준 올드들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올드들이여, 진심으로 당신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청춘들의 또다른 낭만시대가 도래하겠죠.
하지만 저는 당신들과 함께 꿈꾸고 열광했던 20대의 기억을 잊지 않을 겁니다.
열혈 청춘들의 새로운 낭만시대가 몇 번을 찾아온다 해도.
굿바이 순수의 시대. 굿바이 스타크 낭만시대.
굿바이, 아니..바이 마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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