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존칭을 생략합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사진은 네이버, 모든 전적은 와이고수가 출처입니다.)
어렸을 때, 나는 투명인간이 되어보고 싶었다.
집 앞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치토스와 새콤달콤도 아저씨 몰래 가져오고,
구몬학습 선생님이 오실 때 슬쩍 없어져버릴 수도 있으며,
여탕에도(!) 들어가 보고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만약 다시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면?
아이고, 난 못할것 같다
라고 그 어릴 때도 난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과 형, 친구들에게 내가 안보인다면 그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허허, 지금 생각해보니 참 꼬마녀석이 별 걸 다 걱정했었다.
곧잘 깜빡하게 되는, 임팩트 없는, 금방 잊혀지는, 심지어 큰 일을 내면 다른 더 큰 일이 터져 묻혀버리는,
그러나 성실하고 뛰어나서 관심을 덜 가진 것이 뭔가 미안한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다.
1. 시작
★ 이재호
2006년 5월, 비스폰의 비애 속에서도 자발적 서포터즈 '포세이돈'의 사랑을 받으며 좋은 활약을 펼치던
POS팀은 드디어, MBC게임의 스폰을 받아 MBC게임 히어로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재호가 여러가지 대회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하는 해이기도 했다.
동년배인-심지어 생일이 하루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염보성이 이미 04년부터 출전을 하며 '앙팡테리블'이라는
별명을 얻고 활약하던 것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나는야 대기만성형!!! 이라고 외치기엔 성적 역시 평범했다. 16강에는 올라가지 못하지만 그 전 단계에서는 그럭저럭,
프로리그에서 1승 카드는 아니지만 엔트리에는 들 수 있는, 고만고만한 정도의 선수였다.
☆ 플레처
벡스는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벡스는 갔습니다.
뷹은 유니폼 깨치고 마드리드를 향하여 벡스는 축구화에 얻어맞고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이하 생략)
2003년 7월 1일, 맨유 팬들에게는 영원히 악몽으로 기억될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입단식이 열렸다.
세계에서 가장 우아하고 정확하게 킥을 차는 남자이자 잉글랜드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선수 중 하나였던
베컴이, 퍼거슨 감독과의 불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붉은 유니폼을 던져버린 것이다.
팬들은 너무나도 슬퍼했고, 퍼거슨 감독을 향해 그 슬픔을 분노로 바꿔 표출했다.
그러나 정작 퍼거슨 감독은 담담했다. 뭘 믿고 저렇게 말짱한거지? 좌긱스 우벡스로 대표되는
황금 날개의 한 쪽을 잃고도 전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 속에서 한 번은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베컴이 떠났지만 우리에게는 데런이 있다"
데...누규? 누규? 누규누규누규?
아~ 2001년에 입단했던 그 음침하고 비실비실한 애?
걔가 벡스의 대안이라고? 허허, 이것 참 퍼거슨도 이제 노망이 들었구만.
스무살의 나이로 100년이 넘는 스코틀랜드 축구 역사상 최연소 주장이 된 플레처에 대한 당시 평가였다.
2. 투명
★ 이재호
전반적으로다가 무난한 양산형 더블 테란으로 평가받던 이재호의 이미지가 단번에 정리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그 유명한 이재호 투명인간 사건이다.
2006년 7월 15일, MBC게임과 KTF의 준플레이오프 경기. KTF의 우세로 예상되던 준플에서 엠겜은
하태기 감독의 절묘한 용병술로 예상을 뒤엎고 완승을 거뒀다. 그 가운데도 백미는 마지막 게임이었던 서경종과 이병민의
경기였다. 신개척 시대에서 열린 4세트는, 팀이 3:0으로 지고 있는 상황이라 무난하게 2배럭 가스를 올리며 운영으로 풀어가려던
이병민에게 서경종은 9드론 오버 스포닝 후 원해처리 저글링 히드라 올인이라는 강수를 던졌고, 보기 좋게 들어맞으면서
거함 KTF를 셧아웃시켜버린다. 아, 잡설이 길었다. 중요한 것은 승리의 기쁨에 취해 부스를 박차고 나온 서경종이
팀원들에게 차례로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지나가다가 하이파이브를 위해 양 손을 내밀었던 이재호를 지나쳐렸다는 것이다.
기쁘긴 한데 뻘쭘하기도 한 이재호의 표정과 함께 이 동영상은 크게 이슈가 되었고, 이재호에게는 투명테란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홍진호가 2와 연관이 있는것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아니면 기어이 찾아내려고 억지로 만들어내는
장난꾸러기들 때문인지 알 수 없듯, 이후 이상하게 이재호와 존재감 없음은 궤를 같이 한다.
김택용이 하이파이브를 하다가 역시 이재호를 못보고(!) 지나치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방송에 나갈 때
로고나 자막 때문에 얼굴이 가려지는 경우도 있었고, 굉장히 멋진 게임을 하고 나면 잠시 후 희대의 명 경기가 벌어지고,
위너스리그에서 3킬을 하면 옆 동네에서 올킬이 터지는 등.....어느새 이재호의 별명은 투명테란, 들보흐가 되어갔다.
☆ 플레처
벡스의 빈자리를 채워줄거라던 플레처는 성장이 더디기만 하고, 긱스의 부상과 부진이 이어지자
퍼거슨 감독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박지성을 나란히 영입하며 미래의 날개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축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윙 중 한 명이었던 긱스와 축구 역사상 가장 특이한 스타일의 윙 중 한 명이었던 베컴을 대신해
영입된 두 날개는 폭발력과 활동량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스타일의 날개였다.
그렇게 되자 플레처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베컴과 비슷한 스타일의 스탠딩 윙어로써 성장을 꾀했던 퍼거슨과
플레처는 모두 플레처가 라이트 윙으로서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피구 때문에 중미로 자리를 옮겨야 했던 베컴의 전례처럼, 중앙 미드필더로의 보직 변경이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바뀐 보직이 몸에 맞을 리가 없었다.
혼자서 센터를 주름잡았던 로이킨은 이적했고, 미드라이커에서 롱패서로의 변신에 성공한 스콜스와 중원을 나눠갖기에는
그가 가진 능력이 적합하지 않았다. 중원이 강한 팀과 싸울 때 맨유는 항상 고전했으며(지금까지도!)
킹루드 전술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던 시절, 그라운드 어느 곳에서도 플레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천만 네티즌 모두가 카피라이터인 대한민국에서는 '다크 플레처'라는 기가 막힌 카피가 뽑혀나오기도 했다.
이후 중원보강은 맨유의 지상과제가 되었다. 식중독으로 인한 폭풍설사 크리로 아깝게 4위를 내어주었지만
시즌 내내 돌풍을 일으켰던 토트넘의 사령관, 마이클 캐릭에게 로이킨의 16번을 맡겼고,
뮌헨에서 피를로를 지워버렸던 전력을 가지고 있는 활동량 본좌 오웬 하그리브스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들이는데 성공했다. 결국 맨유는 다시 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다시금 정상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플레처에게는 여전히 아쉽기만 했다. 그가 주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콜스의 미사일 같은 전진 패스도,
캐릭의 안정적인 키핑 능력도, 하그리브스의 활동량도, 심지어 안델손의 혈기-_- 도 그에게는 없었다.
플레처는 언제나 조연이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이재호 (맙소사!! 농담이 아니고 방금 이 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제목을 보고 적고 있다!)
기본기가 좋고 안정감 있으며 운영능력이 좋은 이재호는 참 플레이 스타일을 정의하게 애매한 선수다.
뭐랄까, 주특기가 없다고나 할까. 주특기라는 것이, 보여주기 위한 쇼맨쉽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때, 이재호의 주특기하면 떠오르는 것어 없다.
흔히 '임요환의 드랍쉽'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특성이 부족하게 되면, 팬들도 해설진도 난감하기만 하다.
게다가, 이재호는 대 테란전 통산 59.7%, 대 토스전 53.3%, 대 저그전 65.1 %라는 무난하고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이성은이 경기에 나섰다 치자. 해설진들은 바쁘다.
상대가 저그나 테란이라면 우수한 능력을 칭찬해야 하고, 상대가 토스라면 취약한 토스전에 대해 한참을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 상대가 그와 굴곡있는(!) 선수라면, 이건 뭐 앞마당 앉힐 때까지 시간 끌기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세리머니 얘기를 하면 된다.
같은 팀의 염보성이라면?
얼마 전까지의 부진과 하태기 감독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 것이고,
스타리그라면 16강의 저주에 대해서도 껄껄대며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호가 나온다면?
이재호는 잘한다, 그리고 기세가 좋다. 또 음,..그러니까...음....
그러나, 특징이 없다는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재호는 단점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이재호는 단단하다. 빈틈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이영호처럼 압박감을 심어줄 정도로 완벽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막상 붙어보면 쉽게 들어갈 공간이 없다. 수비가 좋아 올인하기 껄끄럽고, 운영이 좋아 장기전으로 가기 싫다.
예전에 이제동과 김광현에 대한 글을 쓸 때,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김광현이 장점이 많은 투수라면 손민한은 단점이 없는 투수'
마찬가지로 염보성이 장점이 많은 선수라면, 이재호는 단점이 없는 선수다.
어떤 선수가 더 좋은 선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재호는 분명히 너무나도 좋은 선수다.
☆ 플레처
그러나 차례로 해가 지나면서, 맨유의 중원은 다시금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스콜스는 노쇠화가 역력했고, 하그리브스는 게임에서나 볼 수 있었으며, 캐릭은 토트넘에서의 포스를 재현하지 못했고,,
안델손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버렸다.
점점 플레처는 스타팅으로 뛰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엔 스콜스나 캐릭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점점 활동량이 증가하고 경기를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주전으로 자주 뛰게 되니 자신감이 붙었다.
자신감이 생기자 예전부터 재능이 있었던 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플레처는 그의 영원한 우상인 베컴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맨유의 적수 아스날의 선수였던 플라미니에 가깝다. 체격이 아주 건장하고 성격이 터프해서
거친 몸싸움과 테클로 상대 중원을 발라버리는 로이킨이나 비에라같은 유형이 아니라, 풍부한 활동량과 센스 있는 플레이로
중원을 책임지는 유형의 선수말이다. 게다가 꽤 고성능의 킥 옵션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팀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가 되어있고, 지능적이다.
맨날 보이지 않다가 가끔 의외의 활약을 보일 때, 흔히 '하이 플레처' 모드가 우연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었다는 것을 최근에 마구 보여주고 있다.
이럴 때 우리들은 흔히 말한다. "포텐이 터졌다" 라고.
4. 약점
★ 이재호
프로리그 우승경력도 있고, 최근 이영호를 제외하고는 프로리그에서 가장 쎈 테란인 이재호의 개인리그 커리어 하이는
8강이다. 읭? 이게 무슨 소리야? 맞다. 07에버와 곰 시즌4에서의 8강이 그의 최고 성적이다.
너무너무 아쉽다. 뭔가 잘 될만하면 막히고, 잘 될만하면 막히고 하니 답답하다.
염보성도 그렇고 엠겜은 굿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예전에 비해 너무나도 좋아진 기세를 바탕으로 신예플토와 대테란전이 조금 약한 김명운을 만나게 되는
천운을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의 혈투 끝에 다 잡았다고 생각된 경기를 놓쳐 스타리그도 탈락이다.
하아...
그러나 이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차례다. 프로리그에서만 활약하기엔 현재 그가 가진 능력과
기세가 너무 아깝다. 플레이 스타일에서 약점이 없는 그의 약점, 개인전 커리어다.
☆ 플레처
요즘 플레처는 깔 게 없....
세리머니 좀 하게 놔둬....
5. 미래
★ 이재호
결국 스타리그의 문을 두드리지 못하게 된 이재호.
그러나 이재호에게는 아직 MSL이 남아있다. 또한 웅진과의 위너스리그 플레이오프가 남아있다.
프로리그에서의 우승컵 혹은, MSL에서의 4강 이상 성적은 현재 치솟아오른 기세를 유지하고
더 높은 자리로 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또 지지부진한 결과를 낳게 될 경우,
염보성처럼 징크스로, 슬럼프로 이어질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전에서 우승하는 이재호의 모습을 올 해 꼭 보았으면 좋겠다.
가만, 이재호가 우승하는 대회가 월드컵과 겹치지는 않겠지?
★ 플레처
위에서 언급한대로 요즘 플레처는 깔 것이 없다.
반데살, 퍼디, 비딕, 국민브라, 발렌시아, 루니와 함께 거의 무조건 선발이다.
이번 시즌은 사실상 그가 풀타임 주전으로 평가받는 첫 시즌이 될 것이다.
리그 우승을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멋진 크로스로 어시스트를 했고
늘 발목을 잡혔던 밀란과의 경기에서는 치열하게 싸워 중원을 장악했다.
수백억을 들여서라도 영입하고 싶어했던 로이킨의 후계자로 가장 적합한 선수가 바로 베컴의 후계자였던 플레처라니,
퍼거슨 감독의 눈이 틀렸다고 해야 하나? 정확하다고 해야 하나?
이제야말로 전성기가 펼쳐진 스물 일곱살의 대런 플레처. 부상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의 밝은 미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