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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0/01/24 03:43:23 |
Name |
Gallimard |
Subject |
2010년 1월 23일, 아프다. |
댓글만, 그것도 아주 가끔 흔적을 남기다 글을 씁니다.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라 몹시 망설여집니다.
하지만 뱉어내지 않고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돌아보니 꽉 찬 8년입니다.
삼십대가 되었고 할 일은 더 많아졌지만 이상하리만큼 애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애증, 네, 애증이란 단어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훨씬 컸습니다.
90년대 후반의 어느 때.
선배도 동기도 후배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은 학교 앞 술집도, 당구장에도 없었습니다. 그때의 pc방은 낯설었고, 멀쩡한 성인들이 pc앞에 앉아 이름 모를 게임에 넋이 나간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소통이 아닙니다. 그저 ‘대화’)하기 위해, 이상한 화면을 줄기차게 봤습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의 흥분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케이블TV를 통해 외계어를 습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와의 조촐한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임요환 선수와 박정석 선수의 결승을 봤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함에도 무작정 빨려들어갔습니다. 스스로 게임을 하지 못해도 보는 것만으로도 축구나 야구처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감동. 흥분. 활력. 아쉬움. 눈물. 희노애락이 거기 있었습니다.
생각납니다. 이 한참 어린 남자애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게임이 생계를 담보할 수 있을까. 내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 이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작 일개 시청자에 불과했던 제게도 들리고 보였던 얘기들, 어떤 선수의 팬클럽에서 반찬을 넣었다. 뭐 그런, 이제와 한줌 추억밖에는 되지 않는 얘기들.
내게, 우리에게 이런 재미와 감동과 눈물을 주는 저 어린 청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원했던 사람들. 그리고 현장에서 피고름을 쏟았을 수많은 사람들.
그렇게 ‘스타크래프트’는 자랐습니다.
강의를 버리고, 작업을 버려가며 배틀넷에 매달렸던 친구들도 이제는 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화려한 전적을 뽐내고, 방송을 보면 니가 뭘 아냐며 비아냥대던 선배들도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게 묻습니다.
요즘은 누가 잘해? 임요환보다? 홍진호보다? 박정석보다?
나보다 스타 방송을 많이 보던 애인, 스타에 관심 없던 애인, 내가 좋아하던 선수를 압살하던 최연성 선수를 좋아하던 애인, 무슨 여자가 스타냐며 무시하던 애인, 네, 제게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주 한참이나.
응원하고 좋아하고 최고의 자리에 서길 바랐던 그 선수들은 이제 은퇴했거나 공군에이스에 있습니다. 이미 들끓었던 청춘의 한 자락을 함께 했던 선수들은 정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스타크래프트를 보는 이유는... 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랜 시청자지만, 뉴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전 단축키조차 잘 모르는 걸요. 그래도 내 삶의 우울이 스타를 통해 용기와 즐거움으로 바뀌는데 이걸 어찌합니까. 내가 사랑했던 선수들의 전성기에 존재했던 그들이 사라져도... 스타는 지속되는 것을요.
그렇게 오래, 구경만 했습니다. 일개 시청자로서, 수년째 눈팅만 하던 피지알의 식구로서.
스타판은 그새 많이 달라지고 변했습니다.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무섭도록 빠르게. 협회와 방송국의 방침이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은 버겁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건들을 접하고 수많은 팬들의 의견을 지켜봅니다. 생각과 표현의 결은 다양해 그 조차도 숨을 헐떡대며 따라갑니다.
제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제 인생에 가장 힘겨웠던 어떤 시기에 웃음과 눈물, 희망을 주었던 아주 어린 청년들에 대한 소소한 보은이었습니다. 별다른 은퇴식도 없이 사라져간 선수가 어디서든 잘 살길 바라는 바람, 진로를 바꾸어 그 궤적을 팬들에게 보이는 前 선수들이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음 좋겠다는 희망, 많은 고민 끝에 이 길을 선택한 어린 소년들에게 후회 없을 미래가 되길 해버리는 기대. 무엇보다 이 희노애락의 깊고 길고 애꿎은 감각이 더 오래 가길 원하는 마음.
네, 저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창피했습니다. 안타깝고 속상했습니다.
할 말 많았던 이 리그의 과정이 그래도 ‘리쌍’이라 축제가 되길 원했습니다.
박정석, 홍진호. 지금까지 내게 최고인 그 선수들의 버퍼를 받아 무작정 안착한 이영호 선수의 팬이지만, 누가 이기든 최고의 경기로 다시 웃음과 눈물을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피지알을 비롯한 거의 모든 스타크래프트 커뮤니티의 접속이 원활하지 않아 들르게 된 모 사이트에서, 우승자 이제동 선수를 향해 환히 웃는 이영호 선수의 사진을 봤습니다. 그에 응대하는 이제동 선수의 미소도 말이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쌓이는 수많은 감각들을 가까스로 눌러 죽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동 선수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영호 선수의 포스와 맵의 불편에도 불구하고 이제동 선수의 매 경기는 빛났습니다.
어제 발생했던 어떠한 상황도 이제동 선수의 우승을 폄훼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은 우승자입니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라는 것을 알게 된 이래 처음으로 테란팬으로 만들어 준 이영호 선수.
어느덧 상대를 향해 그렇게 웃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군요.
아쉽고 안타깝지만, 당신의 빛나는 준우승도 축하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우세승, 재경기 어떤 것이 옳은 것이냐, 더 타당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유저분들의 말씀을 경청하겠습니다. 어떤 판정이어도 아픔과 분노와 아쉬움이 있겠지요.
하지만, 이 결승을 위해 달려온 두 선수. 누구의 팬(혹은 양 선수의 팬이 아니었어도)이건 느꼈을 어제의 그 엄청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 한 이 두 청년의 시간에 박수를 보냅니다.
사진에 잡힌 리쌍의 모습이 제게 희망을 줍니다.
아 맞아, 난 특정 방송사 때문에 스타를 사랑한 게 아니야, 특정 해설 때문에 이렇게 오래 봐 온 게 아니야. 결국 이 청년들인거야.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이 빛나는 사람들.
오프 관전도 손에 꼽고, 그저 편애하는 선수와 팀의 경기를 VOD로 챙겨보기도 바쁜 이름 없는 팬입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허탈함과 아쉬움과 분노가 모두 관심과 사랑 때문임을. 다소 수위가 높았던 오늘입니다만, 그것 역시 비할 데 없는 애정에 기인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두 아프고 힘드셨죠.
왠지 모두를 안아주고 싶고 안기고도 싶습니다.
어떻게 말로는, 몇 마디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이 감각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말주변도 글재주도 없어 낙서처럼 되었습니다만,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도.
그들과 함께했던 코칭 스탭과 구단 관계자들도, 방송사 및 관련 언론 관계자도.
무엇보다도 팬들, 저와 여러분들.
토닥토닥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반성과 사과는 참 중요합니다.
일개 ‘라이트’로 분류될 한 사람입니다만, 정말인지 슬프고 분노했더랬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두 선수에게 미안했습니다.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김구현 선수에게까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 문장의 사과로는, 한 페이지의 변명으로는 이미 이해의 수준을 뛰어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은 옳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어느 누구도 스타의 끝을 바라지 않습니다.
본좌 논쟁으로 전쟁에 다를 바 없는 난장판이 되어도 판의 종결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이, 혹은 그네들이 당신들의 동력입니다.
선수가 포기하지 않는 한 팬은 먼저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과 한 외국회사에서 만든 게임이 왜 지금을 만들어냈는지 잊지 마세요.
여기 오기까지 뿌려진 수많은 땀과 눈물을 쉽게 거둬가지 마세요.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지고... 칭얼대는 아이가 생겨도 지켜보고 있는 그 마음을 외면하지 마세요.
선수(코칭 스탭, 구단 및 관계자)와 방송사와 팬.
스타크래프트는 삼위일체입니다.
어제와 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새벽에도 이런 기분으로 잠 못 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영호-이제동, 이제동-이영호 두 선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리쌍록을 지켜본 스타팬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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