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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4/09 16:41:58 |
Name |
작고슬픈나무 |
Subject |
[소설 프로토스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supply 10/10) |
"자, 잠깐, 이봐. 어디 가는 거야? 성춘? 성제?"
"가림토. 그 놈이, 그 놈이 저그를 이 곳에 불러왔어.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겠지?"
"서, 설마. 왜? 무엇 때문에?" "설명하고 싶지 않아. 그르르. 이건 우리의 문제야. 넌, 이제 네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
"그런 섭섭한 말.... 음. 아무튼 일단 난 집으로 가보겠어. 이런 난리라 해도 뭐 아버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겠지만. 나중에 보자."
의외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르르가 같이 있든 없든, 가문의 원수, 부모의 원수를 자기 손으로 갚고자 하는 둘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방금까지 눈물로 질펀하던 얼굴은 이제 흥분으로 인해 달아올라 벌겋게 되어 살기로 충만해 있었다. 허파가 터져도 상관 없었다. 빨리, 녀석이 떠나버리기 전에 빨리 잡아야 했다. 마침내 신의 탑이 바라다보이는 마지막 골목이 다가왔다. 성춘이 먼저 발을 멈췄다. 지나쳐가려는 성제를 끌어안고 일단 벽에 바싹 붙었다.
침착해야 했다.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끓어오를수록, 행동은 침착하고 신속하게. 그렇지. 분노는 한 순간에 폭발시키라고 하셨지. 오직 마지막 순간, 검을 꽂을 때. 그때 모든 분노를 폭발시키라고 하셨었죠, 포유 아저씨. 살짝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아비터 570호기는 신의 탑에서 멀지감치 떨어져 떠 있었다. 신의 탑 주변은 부상당한 질럿과 드라군으로 시끄러웠는데, 움직일 수 있는 드라군들은 모두 아비터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들도 기리의 가림토가 이 모든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가림토는 어디 있는 것일까. 찾아야 된다. 내 손으로, 반드시 내 손으로.
"형. 들어가자."
"지금?"
"어차피 이렇게 시끄러운데 밖에 있어봤자 아무 소용 없어. 들어가서 소운 옆에만 숨어 있으면 가림토는 그 쪽으로 올 거야. 틀림 없이!"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성제의 눈은 닿기만 해도 얼어버릴 듯한 냉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마보이에다 항상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녀석이었는데. 성제는 성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신의 탑 쪽으로 다가갔다. 굳이 신의 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치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입구는 붐비지 않았다.
성춘은 들어가기 전에 성제와 자신의 차림새가 다른 이들과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도 현자의 탑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저그의 피는 묻어있었지만, 프로토스 족의 푸른 피는 성춘의 왼 쪽 어깨에서만 다 말라붙은 채 푸르스름하게 번질거리고 있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옆에서 한 다리를 잃고 기절해 있는 질럿에게서 떨어진 피를 가져다 성제의 어깨에 바른 뒤, 성춘은 벽 쪽으로 숨어서 조용히 접근해 들어갔다.
"자, 어서!"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여기 있겠어요."
"제발 소운. 가야 해. 이 아이우는 이제 곧 차원의 틈 속으로 숨게 돼. 그러면 아무도 다시 나올 수 없단 말이야!"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숱한 우리 종족이 모두 죽어도 좋다는 건가요? 당신이 이런 사람이었는 줄, 내가, 왜.. 왜 몰랐을까."
"소운. 당신이 없으면, 난 살 수 없어. 이 곳에서, 이 차가운 건물 안에서 왜 당신이 남은 인생을 보내야 하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렇게...."
가림토는 이미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틀림 없었다. 성춘은 숨을 가다듬었다. 냉정하게, 냉정하게. 자, 성춘 냉정해야 돼. 일단 사이언 검부터 소환하고. 오른 팔 감추고, 머리도. 한 숨에 죽일 수는 없어. 한 쪽 다리부터 자른 다음에, 천천히. 포유에게 무릎 꿇게 하겠어. 성춘은 자기도 모르게 이빨을 앙다물었다.
"성제야. 쉿! 고개로만 대답해. 사이오닉 볼 쓸 수 있겠지?"
끄덕.
"사이오닉 블래스트는 안 돼. 한 번에 죽일 수 없어. 알았지?"
끄덕.
"녀석이 도망치거나 마법을 쓸 지도 모르니까, 일단 얼굴에 사이오닉 볼을 쏴. 그 사이 내가 뛰어들어서 다리를 자를 테니까. 알았지?"
힘차게 서너번 끄덕거리는 성제의 두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성춘은 먼저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신의 탑 중심부, 사이오닉 퀸이 들어가 있는 '신의 수정' 바로 앞에 파일럿으로 보이는 자 한 명과 여자가 격렬하게 말다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네 번째에서 점프. 높이 뛰지 말고 앞으로 길게 뛰어서 오른 쪽 다리 무릎 바로 위. 좋아. 성춘. 침착해.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꽂을 그 순간까지.
"자, 성제야. 간다. 내가 나서자마자 사이오닉 볼을 쓰는 거야. 하나, 둘, 셋!"
둘은 동시에 뛰어들어갔다. 당황하는 가림토의 얼굴을 보며 성춘의 입가가 비죽 올라갔다.
"사이오닉 볼!"
정확했다. 가림토의 입 부분에서 스파크가 터져나왔다. 녀석이 뒤로 휘청 넘어가는 순간 성춘은 네 번째 걸음을 딛고 비스듬히 누우며 앞으로 크게 도약했다. 길게 호선을 그리며 가림토의 오른 다리를 베어가던 사이언 검이 불꽃을 튕겼다. 뭔가가 사이언 검을 가로막은 것이다.
"뭐, 뭐야? 헉!"
오른 쪽 다리에 불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허벅지가 길게 베어진 채 푸른 피가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는 소운의 얼굴과 간신히 일어서려 하는 가림토, 그리고 저 쪽에서 뛰어오고 있는 성제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거?
"형! 괜찮아?"
"괘.. 괜찮아. 어서, 녀석에게 한 방 더 날려. 이번엔 무릎, 무릎이야, 어서!"
"아, 알았어. 이익.. 사이오, 윽!"
이번엔 성제의 오른 허벅지가 길게 베어지고 말았다.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성제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가 성춘의 귀를 찢어놓았다. 봤어. 봤어. 틀림 없이, 뭔가 있어. 공간이 이지러진 흔적, 그렇다면!
"그만! 그만해요, 리치!"
소운이 내지른 높은 톤의 절규가 방 안을 울렸다. 간신히 일어선 가림토의 어처구니 없어는 눈빛이 쓰러진 둘에게 닿았다. 다크 템플러. 틀림 없어. 어딘가에 다크 템플러가 있다. 내 사이언 검을 막아낸 솜씨.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야. 성춘의 최대한 빠르게 눈을 돌려 공간 왜곡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해. 리치."
가림토의 기운 빠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 성춘과 성제는 질겁했다. 바로 뒤에서, 사이언 검을 빼어든 채 다크 템플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녀석인가. 돌아본 성춘은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이 녀석은 리치! 승려 학교에서 최초로 퇴학당한 사람. 그 뒤에도 20년 동안 온갖 범죄란 범죄는 다 저질러와서 승려 학교의 명예를 시궁창에 처박았다고 선생들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분개하게 만든 사람. 바로 그 자인가. 왜 이 자가 여기에..?
"호오. 고매하신 사이오닉 퀸께서 드디어 리치라고 불러주셨군요. 영광입니다."
"저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어요."
찬바람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어느새 둘에게 다가온 소운은 허벅지의 상처에 손을 댔다. 따뜻한 느낌인가 했는데, 어느새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성춘의 눈에 비친 소운의 표정은, 그 표정은 너무도 슬픈, 보는 사람이 누구든 같이 울어주고 싶게 만드는 슬픈 표정이었다.
"미,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렇게.. 흑."
"아 아니. 그런 건.."
"형. 정신 차려! 원수가 저기 있단 말야. 사이오닉 블래.. 헉!"
"어허. 꼬마야. 그건 안 되지. 사이오닉 볼이야 몇 번이고 맞아줄 수 있지만, 그건 많이 아플 것 같은데. 그렇지?"
어느새 다가온 리치의 사이언 검이 성제의 목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빙글거리는 말투. 성춘은 가림토고 뭐고간에 이 녀석부터 죽여버리고야 말겠다는 분노를 느꼈다.
"흥. 이익! 사이오닉 블래스트!"
"헉! 아, 안돼!"
가림토가 잽싸게 피한 덕분에 성제의 사이오닉 블래스트는 방 한 쪽 벽에서 파직거리다 꺼지고 말았다.
"서, 성제. 성제야! 이 바보 녀석!"
"흥, 독한 놈이군 더욱 살려줄 수 없겠는 걸."
성춘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재칼에 대한 분노를 씹고 있는 동안, 성제는 재칼의 사이언 검을 손으로 잡아 치워 버리고 뒤로 뛰어 피하면서 사이오닉 블래스트를 쏜 것이었다. 달려가 잡아본 성제의 손은 길게 난 상처에서 푸른 피가 낭자했고, 마지막 손가락은 잘려나가고 없었다. 뭐야. 이 멍청아! 이게 뭐야! 성춘은 오열했다. 포유 할아버지를 잃고, 이제 성제마저. 뭐야, 이게 대체 뭐냐구. 이런 빌어먹을!!
"자. 꼬마들아. 이제 얼마든지 울게 해주마."
"안돼! 리치. 더 이상 죽이진 마."
"흐음. 이봐 가림토.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된다구. 난 너같은 인격주의자하곤 달라서 말이야. 아니지. 여자를 위해서 동족을 살육했으니, 이젠 인격자라고 부를 수 없겠군. 뭐, 로맨티스트라고나 불러줄까? 배신의 로맨티스트?"
"리치. 네 녀석의 제안이었다. 네 녀석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더구나 네 녀석은 소운의 동생 소하까지 붙잡아놓고 날 협박했어!"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봐. 난 다크 템플러라구. 리콜 같은 거 내가 할 수 있었을 턱이 없잖아? 오늘 하루만 돌이켜봐. 누가 이 '신성한' 곳에 저그족을 불러왔지?"
그런 거였나. 결국 이 파괴를 불러온 건 리치? 재칼의 한과 비틀린 파괴욕구가 가림토를 부추겼나보군. 그런데.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제 와서, 이렇게 모두가 죽어가는 이제 와서...
"... 우주의 심원 그 깊은 곳에서 만물을 주관하는 힘이여. 이제 내게로 들어와 약속된 일을 이루라. 종속의 맹약, 수도의 맹약을 그대에게 드리니 모든 동족의 아픔을 달랠 수 있는 힘을 내 안에..."
"아, 안돼! 소운!"
"제, 제길! 이 여자 뭐 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제로스에게 할 말이 없는데.. "
어느 새 신의 수정 옆에 마련된 제단에 올라선 소운의 주위에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이 점점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가림토와 리치가 다급하게 뛰어갔지만 그녀를 감싼 푸른 빛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왔다.
"소, 소운! 안돼! 이걸 막기 위해서, 내가 무슨 일을 했는데!!! 다시 나와! 소운. 나에게 와! 제발... 으흐흑.."
".. 안녕. 사랑하는 사람. 당신의 죄는 누군가 갚아야 해요. 내가 갚아줄께요. 이제 당신은 나를 잊어요. 힘들겠지만, 잊어야 해요. 소운의 마지막 부탁이에요. 나를 잊어요. 다음에 만날 땐 흑... 다음엔 우리 이렇게는 만나지 말아요... "
"소운! 안 돼!!!"
"안녕.. 정말.. 안녕.. 사랑해요."
갑자기 푸른 빛이 새하얗게 변하며 성춘의 눈을 태울 듯이 터져나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 보니, 이미 소운은 신의 수정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표정이었다. 너무도 슬픈, 당장이라도 슬픔이 묻어나올 듯한, 통곡이 터져나올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젠 그 슬픔이 마무리된, 안으로 모두 갈무리된, 그런 쓸쓸한 표정이었다. 가림토는 온 몸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얼굴에선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이며 머리카락이며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눈동자마저.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눈을 감지 않았던 것일까. 저 얼굴. 저 얼굴, 역시 쓸쓸함.
에필로그
킹덤 아저씨의 워프 시작점에 도착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옆에 누운 성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말라붙은 눈물이 눈가에 까슬했다. 성춘도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하얀 빛을 보고 달려왔는지 킹덤 아저씨가 바로 도착했고, 셔틀에는 그르르와 소하, 퓨리가 타고 있었다. 소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와 무서우리만치 닮은 그녀에게 성춘 역시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다만 이 악몽이 빨리 깨기만을 기다렸다. 그르르가 미안하다고 얘기했지만, 그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포유 할아버지의 얼굴과 소운, 가림토의 마지막 표정만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런가, 사랑이란 그런 건가. 그렇게 쓸쓸한 것이 사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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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들께 감사 드리며 1부를 맺습니다.
총알이모자라님, 민아 열심이지님, 어버_재밥님, Style.blue님, Marine의 아들님, 이호산님, BK님, Holic님, 아케미님, lovehis님, 공고리님, 아로이나님, TheReds님, cli님, 그냥그렇게님, RedHawk님. 그리고 보잘것 없는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지난 열흘동안 PGR 자유게시판 최저 조회수를 기록하며 나름대로 분전했습니다만, 질 낮은 글로 '시간'을 지불하시고 이 곳에 들르신 분들의 눈을 어지럽혀드린 듯 해 죄송스럽습니다.
다시 감상 전문 댓글 유저로 돌아가서 좀 더 수양을 쌓아야겠네요.
즐겁고 행복한 날들 되소서.
덧글 : 힘을 내요 요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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