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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10/11 21:19:23
Name 윤여광
Subject [yoRR의 토막수필.#2]주변인, 그리고 껍데기.
  자리가 하나 비어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앉아있던 이는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 빈 자리에 앉아 있던 그대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이다. 그대가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과 내가 살아온 21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으며 방금 전 다른 의자지만 가깝게 나마 앉아있던 몇 초간의 시간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일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 의자에 남은 온기를 식히고 다시 냉랭한 한기만은 남겨두고 떠나자 나는 갑자기 엉덩이가 차가워짐을 느낀다. 그리고 당신이 걸어갔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 한참을 쳐다본다. 아른거리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다시 되돌아오는 당신을 상상한다. 또 다시 내 옆자리에 앉는다면 거침없이 물어보겠지.
“많이 춥지요?”
라고…

  꽤나 많은 껍데기를 걸치고 있는 듯 하다. 옷걸이에 걸린 그것들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대체 몇 겹이나 되는 껍데기를 걸치고 있는 것 일까. 나는 옷을 고르며 사람들 앞에 그려지는 내 이미지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나는 이들에 따라 옷이 달라지고. 껍데기가 달라진다. 솔직해지자던 옛 다짐은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제 남들 앞에서 나를 그려낼 줄 아는 꽤나 얍삽하고 능숙한 번데기이다. 껍데기를 벗어버리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으련다. 그것마저 나의 얍실한 움직임 중 하나일테니. 그러나 이렇게 내 속내를 뒤흔드는 것은.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섞이고픈 욕심이 너무나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리라. 나는 참 우스운 동물이다.

  겉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나 혼자 뿐일까. 그렇게 가깝고 서로 위해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것은 분위기에 취한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였을까. 그렇게 나에게 전부까진 아니지만 반은 기대올거라고...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는 내 모습은 한심한 머저리에 불과한 것일까. 혹은 그들의 약속이 거짓이었던가. 아픔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이라면 내 한심함은 언제까지든 스스로 용서할 수 있으련만 내 눈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은 그게 아니다. 젊은 시절 분명 겪을 아픔 고민 시련 고난, 선명히 보이건만 내게는 아무런 말이 없다. 유치한 사랑 장난처럼 감추고 할 성격의 문제가 아님은 그들이 분명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면서 치졸해지는 나는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기댈 때 그것에 질투를 느낀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대상이 내 또 다른...역시나 목숨만큼 절친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혼자 절절대며 간절했던 것일까. 다시 혼자였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일까. 혼자 집에 앉아 담배를 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갑갑한 마음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져만 간다.

  마음이 점점 닫혀져만 간다. 기다림에 지쳐서. 소심의 극치를 달리는 쪼다가 되는 것 보다 나는 내가 그들의 주변인으로 전락해버린 사실이 더욱 두렵고 가슴 아프다. 부디 혼자 내린 이 결론이...나의 어리석은 오류이기를 바란다. 혼자라는 사실은 죽어서도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보다 버거운 짐이니까. 동시에 내 고통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뿌리이니까.

  생각은 언제나 변한다. 전체적인 삶의 목표 혹은 장차 결혼하고 싶은 여성상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곁을 감싸주는 주변인들이 혹시나 나를 ‘주변인’이라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유치한 상상. 그러나 그것은 꼭 유치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확인하고자 하는 강한 욕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술이 뇌를 잠재울 때 즘 하여 너에게 나는 무어냐 라고 대뜸 물어 제끼는 충동적인 행동을 만들어낸다. ‘너는 내 친구다’라는 말보다는 ‘너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친구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고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 보다는 ‘너 말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결국에 상대방에게서 오직 단 한 사람.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그것이 비록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이라 할 지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상대방이 불쌍하게 보여 슬픈 미소가 감돈다. 결국에는 당신과 나는 이렇게나 한 가지 문제의 해답에 도달하는 방식이 다르구나 하는 사실이 온 몸을 오히려 편하게 만들어준다. 상대방을 가둘 필요도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끊을 필요도 없다. 그저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당신과 나 서로가 서로에게 주변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면 슬프지만 더는 파고 드려는 노력을 그만두게 된다. 체념과 방관. 가장 편하면서도 가장 슬픈 관계가 주변인이 되는 가장 큰 감정의 일부분이다.

  술자리에 내 친구가 데려온 모르는 이 한 명을 소개 받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러면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말이지만 그 때마다 기분이 묘해지는 말이 있다.

“인사해. 얘는 내 가장 친한 친구 ㅇㅇ야.”

  처음 보는 이와 악수를 나누면서도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치밀한 계산이 이루어진다. 나와 내 친구 그리고 손을 잡고 있는 눈 앞의 처음 보는 사내. 친구를 중심으로 두어 나와 사내를 각각 양 끝에 배치 한 채로 술자리 내내 관찰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자신이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왜 가장 친한 친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다음 문제로 넘어가고 반대의 경우엔 왜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무거운 책망이 이어진다. 가끔 나 자신에게서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에 후자쪽의 상황이 더 많았음을 기억하고 또 한 번 후회한다. 그냥 모임 자체를 즐기는 편이 오히려 나 자신에게 더 좋았을것을. 관계에 집착하고 관계에 지쳐가는 스스로를 볼 때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 집착을 버릴 수는 없으므로. 집착이 내 벗들과 혹은 주변인들과 나를 이어주는 가장 굵은 실타래라는 것은 오래 전에 깨우친 소중한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큰 부분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면서도 오히려 뒤로 물러나고 있다. 왜일까. 만족하지 말고 살자고 했던 애초의 순수했던 인생관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부정적 관념. 언제나 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과의 거리는 멀어지는데. 조바심만 늘어가고 숨만 거칠어지는 어리석은 몸뚱이를 이끌기가 이젠 지쳐버렸는데.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 것은 허무 지침 짜증. 매 초마다 바뀌는 감정 그 속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에. 나에게 정해진 미래는 아직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에. 오직 그것 하나가 궁금해 걸어가는 삶이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옹호해주는 벗들이 있기에. 텅 빈 껍데기라도 나는 아직 더 살아보려고 한다. 이 짧은 글이 얼마 못 가서 또 다시 지칠 내 자신에 한 모금 산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텅 빈 껍데기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살 만한 인생이고 살 만한 시간들이 남아있음을 약속 받는다.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만 움직이는 어리석은 집착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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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미
05/10/11 21:56
수정 아이콘
살다 보면 껍데기 안에 뭐라도 안 채워질까요? ^^; 잘 읽었습니다.
타조알
05/10/11 23:3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My name is J
05/10/11 23:43
수정 아이콘
찔리는 얘기네요.
넉넉한게 아니라 텅빈-거였을지도 모르는군요.
눈팅만일년
05/10/12 01:5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잘 쓰시네요.
05/10/12 14:14
수정 아이콘
집착하기 위해 사는건 너무 슬프다고 생각해요. 아니, 누군가를 바라고 사는 것 자체가 근거없는 희망일지도 몰라요.
항상 소중한 것이 되고 싶어해요. 누군가에게 있어서 가장, 그래서 그렇게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수도없이 사랑한다고 외치고, 그래도, 그래도,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랑해도, 그래도 아무것도 채워지지 못하는건 뭐일까요.
그랬어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그래도, 행복하지 않은 것은 output 만큼 input 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조금만 삐긋해도 중심에서 밀려나는, 아니, 중심일수가 없었던 내 자신을 미친듯이 증오하고 미워해도 변하진 않아요, 그럴수록 그 도는 점점 넘어가게 되죠.
남은게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단지, 내가 그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사람, 그것 뿐이면 충분해. 그럼 내 모든건 던질 수 있을태니까.
.... 그래서, 난 그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에에. 대충 이런 느낌이네요. 주변인, outsider. 절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전 그것보다는 minor 이지만;; 절대적인 소수죠) ... 마음에 와 닿아서 조금 울었네요 ^^;;
언제나 그런 글을 쓸수 있나 고민하고는 합니다, 마음에 들어있는건 많은데, 감정은 쉽사리 나오질 못하죠. 꽉 막혀 있어서...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05/10/12 14:19
수정 아이콘
아, 덧붙여서, 제 블로그에 퍼가도 되겠습니까? ^^;
http://blog.naver.com/spindispel 입니다- [아직 안 퍼갔습니다;;]
윤여광
05/10/12 22:07
수정 아이콘
spin님//예 출처와 원작자만 표기해주시면 괜찮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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