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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8/17 23:01:11
Name DEICIDE
Subject 스타크래프트소설 - '그들이 오다' 10~12화
2005년 5월 7일 아침 9시 반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학살은 끝났다. 그러나 너무나도 참혹하고 잔인했던 한 시간이었다. 외계인들은 그들이 말한 그대로, 한 시간 동안 지구상에 있는 4억의 인간을 학살했다. 이 재앙 속에서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이 있는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그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지난 5월 5일 대학살 이후로 죽은 사람의 수가 전 인류의 10분의 1에 육박했다.

  “정말로 4억이…… 4억이 죽은 걸까요?”

  윤열이 넋나간 얼굴로 물었다. 곤히 잠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숙소 안에 비상이 걸렸고, 모든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쥐죽은 듯 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외계인들은 프로게이머들을 보호하고 있었고, 그들의 숙소도 지키고 있었기에 대학살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굉음과 비명소리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4억이 아니라 전 인류를 몰살시킬수도 있는 놈들이야. 나쁜 XX들……”
  “쉿! 바로 바깥에 있어!”

  성제가 참다못해 욕설을 내뱉으며 이를 갈자, 정민이 그것을 제지했다. 아무리 프로게이머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지만, 그들에게 적대하는 지구인은 모두 죽여버리라는 명령도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저게 뭐지?”

  창밖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이재균 감독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러자 선수들이 하나 둘 창가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인데요.”
  “이 쪽으로 오고있어요.”
  “숫자가 꽤 많은데……”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리지어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수들은 그들을 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그런데,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사람들의 입에서는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헉……!”

  그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들, 커다란 피켓에 씌여 있는 글귀. 그리고 현수막에 붉은 글씨로 써 놓은 글. 그것들이 하나 하나 시야에 들어오게 되자, 숙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 둘 씩 그들 중에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2005년 5월 7일 아침 10시
서울특별시 삼성동의 한 골목


  민재는 손과 쇠파이프를 붕대로 단단하게 묶었다. 이렇게 해 두면 쇠파이프가 손에서 빠져나갈 염려가 없었다. 물론 팔이 부러져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재는 이빨로 붕대 매듭을 묶으면서 SKT T1 숙소를 노려보았다. 드디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임요환 이 XX 나와!!!”
  “이 개XX 야,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너만 살겠다고 처박혀있어? 당장 나와 이 XX 야!!!”

  광기어린 약 50여명의 사람들이 T1 숙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들의 난동은 시위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위의 간판이나 진열장 등을 쇠파이프나 각목, 야구방망이 등으로 마구 부수며 폭도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현수막에는 붉은 글씨로 <임요환 죽어라> 라고 씌여 있었고, ‘배신자’, ‘비겁한 XX’ 등의 문구들도 눈에 띄었다.

  “임요환, 이 XX야!! 지금 바깥에서는 사람이 죽어가는데, 너는 끝까지 잘난 네 몸만 사리면서 그 안에서 처박혀 있어? 그 안에 있는 다른 프로게이머 XX 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오늘 임요환 너 이 개XX 는 우리 손으로 죽여버리겠어! 당장 나와 이 XX야!!!”

  민재가 야구방망이로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주위에서 “옳소!” 하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이 쳐죽일놈아! 너는 인간이 항상 그랬어. 니가 잘난 줄 알고, 최고인 줄 알았지? 하지만 이게 진짜 네 모습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 자식아!!”

  ‘그들’ 이 오기 전, 인터넷상에서 민재는 소위 말하는 ‘임까’ 였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임요환 선수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쇼맨쉽있고 스타성있는 플레이는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고, 민재도 그런 임요환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몰상식하고 볼성사납게 그를 응원하는 광적인 팬들 때문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얼굴만 보고 쫓아다니는 여학생들, 다른 선수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팬들의 발언 같은 것 때문에 그만 정이 뚝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번 미운 털이 박히고 나자, 그가 하는 모든 경기와 말투,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고, 결국 지금의 민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태워라!”
  “죽여라!”

  흥분한 무리는 그들이 가져온 무엇인가를 들어올렸다. 짚으로 얼키설키 만들어서 십자가 모양의 틀에 묶은 인형이었다. 민재는 홰에 불을 붙였고. 인형의 가슴께에 횃불을 지져 불을 붙였다. 검은 연기를 내며 인형이 타올랐고, 타오르는 불길에 따라 폭도들의 기세도 더욱 달아올랐다.




2005년 5월 7일 아침 10시 10분
서울특별히 SKT T1 숙소


  “요환아, 보지마라.”

  주훈 감독이 요환을 불렀다. 하지만 요환은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요환이 형, 창가에서 떨어져라. 위험하다.”

  정석이 요환을 붙들고 창가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서는 비틀거리는 요환을 소파에 앉혔다. 충격이 꽤 큰 모양이었다. 그 때,

  “챙그랑!!”

  건물의 유리창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T1 의 숙소가 아닌 다른 곳이었지만, 누군가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모두 창가에서 떨어져!!”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 잠시후 돌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T1 숙소의 유리창들이 박살나고, 사방으로 유리파편이 튀는 가운데 돌멩이들이 들어왔다. 선수들과 감독들은 황급히 기둥 뒤로, 또는 안전한 방으로 숨어들어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요환은 넋나간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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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7일 아침 10시 15분
서울특별시 삼성동의 한 골목


  민재는 순간 돌을 던지던 손을 멈추었다. 건물 안에서 외계인이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군중이 던지던 돌이 외계인에게 맞은 모양이었다.

  “으, 으아악!!”

  대열에 있던 사람 몇 명이 겁에 질려 뒤돌아 도망가려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길의 앞뒤로, 그리고 양옆으로 대여섯의 외계인이 무리를 둘러쌌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도망갈 수 없다는 상황을 파악한 민재는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외계인이 시퍼런 날이 선 칼을 들고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겁에 질린 민재의 온몸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 묶어 놓지 않았다면 벌써 쇠파이프도 떨어뜨려 버렸을 것이다.

  “죽어라.”
  “흐아아악!”

  민재의 코앞까지 다가온 외계인이 칼날을 쳐들었다. 민재는 양 팔로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그 때,

  “안돼!!!!”
  “콰당!”

  민재는 칼에 베이는 대신 바닥에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외계인이 자신을 몸으로 밀어 넘어뜨린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외계인이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고, 그 뒤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하지마. 죽이지 마……”

  떨리고 있었지만 똑똑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민재의 눈은 둥글게 커졌다. 프로게이머 임요환이었던 것이다.

  “크르르륵!”

  외계인은 뒤돌아서서 요환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하늘로 들어올렸다. 요환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크윽, 으으윽, 으윽”
  “아무리 프로게이머라도 우리에게 적대하면 죽는다. 그걸 모르는가, 멍청한 인간.”
  “크윽, 크윽, 크으윽……”

  위협적으로 한번 요환을 공중에서 흔든 외계인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요환이 땅바닥에 쓰러지며, 목을 부여잡고 콜록거렸다. 그런 요환을 외계인이 경멸스럽게 내려다보았다. T1 숙소에서 이것을 내려다보고있는 프로게이머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냥 죽이는 건 지겹군.”
  “푹!”

  그렇게 내뱉으며, 외계인은 들고 있던 커다란 칼을 땅에 꽂았다. 그리고 여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민재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요환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지. 너희 둘 중 먼저 이 칼을 집어들고 상대를 죽이는 놈을 살려 주겠다.”

  이 빌어먹을 족속은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그들 최대의 유희인가? 인류 전체의 생명을 놓고 노닥거리고 있는 그들은 지금 당장도 두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외계인이 칼을 꽂아 놓고서는 멀찌감치 물러서자, 쓰러진 요환도, 서 있던 민재도 동시에 칼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셋 셀 때까지 칼을 집는 놈이 없으면 둘 다 죽는다. 하나.”

  외계인이 숫자를 세면서 요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아직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외계인이 또 입을 열었다.

  “둘.”
  “헉!”

  그러자 민재가 앞으로 뛰어나가며 칼을 손에 쥐었다. 민재가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요환도 순간 몸을 움찔 했으나, 쓰러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요환이 칼을 집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외계인이 기분나쁘게 킬킬대며 속내를 드러냈다.

  “크르르르.... 크큭. 우리는 명령으로 프로게이머를 죽일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손을 빌린다면 처단이 가능하지. 어서 죽여라.”

  민재는 서둘러 오른 손의 붕대를 풀어내고, 땅에 박혀 있는 칼을 두 손으로 뽑아들었다. 손잡이도 팔뚝만하고, 칼날 두께만 해도 어른 몸통만한 그런 커다란 칼이었다. 그리고 나서, 민재는 요환을 노려보았다.

  “다, 다, 이게 다 당신 잘못이야!!! 이 비겁한 XX야! 다 네 잘못이라고!!!”

  민재가 악에 받쳐 버럭 소리질렀다. 요환은 그런 민재의 욕설을 묵묵히 들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민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순간 민재가 멈칫했고, 요환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요환의 첫 마디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돌아가신 많은 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많이 고민했고, 정말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 손에, 제 자신의 목숨과, 모든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지요.”

  요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물 1호라는 자신의 손이 그 때만큼 원망스러워 보인 적이 또 있었을까. 요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제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리고, 요환은 민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 자신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

  민재는 그런 요환을 쳐다보았다. 요환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성적이 좋지 않을 때에도,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에도,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주목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고민했지요.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인가? 내가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제 자신에 대해 저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과연, 모든 프로게이머를 대표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가? 다른 사람이 인정하기 전에, 내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내가 내 자신과 인류를 이 손으로 구해낼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는가? 그것에 대해, 저는 끊임없이 고민했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알 듯 합니다.”

  그러면서 요환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저는 아니라는 것을요.”

  외계인이 슥 하고 민재를 쳐다보았다. 민재는 묵묵히 요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저보다 훨씬 강력한 다른 프로게이머가, 분명히 승리해 낼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가겠습니다.”

  요환은 고개 숙인 채 마지막 말을 읊조렸다. 요환 앞에 양 손으로 칼을 쳐들고 있던 민재의 팔이 덜덜덜 떨려왔다. 이를 너무 세게 악물어서, 민재의 이에서는 빠드득소리가 들려왔다.

  “죽여라.”

  외계인이 차갑게 명령했다. 그 말을 듣자, 민재는 칼을 내리치기 위해 등 뒤로 칼을 서서히 넘겼다. 요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민재가 요환에게 말했다.

  “임요환 선수.”
  “……예?”

  순간, 덜덜 떨리던 민재의 떨림이 멈추었다.

  “당신은 언제나 최고입니다. 항상 최고였고, 앞으로도. 그러니 힘내십시오.”

  그리고 민재는 칼을 들고 외계인에게 뛰어갔다.

  “이야아아아아아!!!!”
  “퍽!”

  그러나, 기세좋게 뛰어갔음에도 민재는 외계인의 팔에 맞아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분노한 외계인은 칼을 집어들고, 민재의 오른 손목을 집어 들어올렸다. 손목 뼈가 아그작 소리를 내며 바스라졌고, 민재의 몸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

  “끄아아아아악!!”
  “이 더러운 족속. 소원대로 죽여주겠다.”

  이제야 상황을 깨달은 요환은 고개를 들고 민재와 외계인을 쳐다보았다. 외계인은 칼로 민재의 겨드랑이 부분을 슥슥 잘라내고 있었다.

  “아악, 아악, 아아아아아악!!!!!”

  민재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마침내 오른팔이 잘려지고, 민재의 몸이 땅으로 떨어졌다. 외계인은 민재의 머리를 붙들고 다시 들어올렸다.

  “캬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처절하게 민재의 비명이 이어졌고, 외계인은 민재의 어깨에서부터 몸통을 대각선으로 슥슥 자르기 시작했다. 잔인한 광경이었다. 몸통을 절반 정도 자르자, 부들거리던 민재의 경련이 멈추었다. 외계인은 끝내 민재의 몸을 토막내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멀리 던져버리며 외쳤다.

  “죽여라!”
  “아아악!! 아악!!”
  “꺄악!”
  “아아아아아!”

  그 외계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붙들려 있던 50여명의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외계인은 각자 손에 든 무기로, 또는 맨손으로 사람들을 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크으읏……!”

  요환은 무릎을 꿇은 채, 그 모든 광경을 눈으로 보았다. 입술을 너무 꽉 깨문 나머지, 입술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부르르 떨면서 너무 세게 쥔 주먹에서도 피가 맺힐 지경이었다. 눈에 살기에 가까운 독기를 품으며, 요환은 그 참혹한 광경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아 두었다. 이전에, 그 어느때에도 볼 수 없었던 임요환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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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7일 11시 30분
서울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왜 그랬던 거죠?”

  여태껏 아무 말 없던 아가씨가 청년의 등에 업힌 채 질문했다. 아가씨가 발목을 다쳐서 거의 걸을 수가 없게 되어서, 지금 청년은 아가씨를 등에 업고 시청앞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응급 진료소에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학살이 끝나고 한 시간 뒤, 시청 앞 광장은 죽은 사람들을 수습하고, 다친 사람들을 후송하는 일로 무척이나 분주한 와중에 있었다. 그러나 말이 수습이지, 수없이 땅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을 트럭에다가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그나마 형체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시신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뭐가 말입니까?”

  청년이 질문했다. 청년은 그 여느때보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그 외계인이요. 왜 그랬던 거죠?”

  아가씨의 목소리에 전에 없이 약간의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다친 다리가 고통스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청년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어서였을까. 청년은 얼버무렸다.

  “글쎄요……”

  순간 청년이 멈칫 했다. 잘려져 뒹굴던 손 하나를 밟을 뻔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피해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광장 여기저기에 신체들이 널려 있었고, 비릿한 피비린내가 사람을 취하게 만들 정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멈춰봐요. 내려줘요. 대체 누구세요? 당신은 대체 누구죠?”

  아가씨가 그렇게 말하자, 청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섰다. 업고 있던 등을 조금 펴자, 아가씨가 등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더니 한 발로 비틀거리며 섰다. 청년은 뒤돌아서서 아가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는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어차피 서로를 모르잖아요.”
  “아니오, 틀려요. 분명히 그 외계인은 당신을 죽이지 않고 그냥 갔어요. 당신은 대체 누구죠? 대체 누구길래 그 외계인이 그렇게 그냥 지나간거죠?”

  그 때, 한 발로 서 있던 아가씨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했다.

  “아앗!”
  “조, 조심하세요.”

  청년이 넘어지려는 아가씨의 어깨를 간신히 두 팔로 잡았다. 그 바람에 잠시 그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는 빤히 청년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의구심과 의혹의 눈빛을 보고, 청년은 하소연했다.

  “당신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서로 지탱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 말이에요.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입니다.”
  “아니오, 당신은 힘이 있는 사람이에요.”
  “무슨 뜻이에요?”

  그러자 아가씨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청년에게 물었다.

  “당신, 프로게이머죠?”
  “……!”

  순간 청년은 당황한 나머지 아가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칠 뻔 했다. 그러나, 다시 두 손에 힘을 주고, 아가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나요?”

  그러자 아가씨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오. 하지만 역시 프로게이머가 맞군요. 뉴스에서 외계인들이 프로게이머들이 모인 숙소와, 그들 개인의 안전을 보호한다고 했잖아요. 또, 아무리 제가 스타를 모른다고 해도 터치패드로 스타를 가르쳐주시는 손놀림이 굉장하시던데요.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진짜 프로게이머이실 줄은 몰랐네요.”

  그러자 청년은 고개를 떨구었다.

  “……처음부터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숨긴 것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고 욕을 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저를 욕하십시오. 저만 살아남으려고 도망친 비겁한 놈이라고, 당장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서 제가 맞아죽더라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 어깨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이 청년을, 아가씨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

  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오간 후, 갑자기 싱긋 웃으며 오른손으로 살며시 청년의 턱을 들어올리게 했다. 붉어진 청년의 눈시울을 보며,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오, 오히려 당신이 더 이해가 안 가고, 대단하게 느껴지는데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으로 왔고, 여태 있는거죠? 당신에게는 훨씬 위험할 수 있는 이 곳에. 그것도 아직까지 말이죠.”
  “그건……”

  청년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눈을 한번 슥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약속 때문이에요.”
  “약속이오? 누구와 약속하셨는데요?”
  “다른 사람에게 한 약속은 아니에요. 바로 제 자신에게 한 약속이에요.”
  “예?”

  아가씨는 의아해했고, 청년은 말을 이었다.

  “도망친 건 맞아요. 두렵고 무섭고 떨려서 도망친 것 맞습니다. 그 숨막히는 부담감, 공포, 강박관념…… 하지만, 이대로 숨어버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어요.”
  “그게……”
  “예, 그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있겠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이렇게 모자를 쓰고 있고,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마치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 같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양심의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누가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심판을 달게 받을 각오도 하고 온 겁니다. 예,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해해요. 그 마음. 아니, 이해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고통, 분명 작은 것은 아니었을거에요. 그냥 도망쳤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함부로 손가락질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까지 했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청년은 다시 눈에 눈물이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감추어왔고 말하지 못했던 그 고통스러웠던 고민과 괴로움이 한순간에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간신히 심호흡을 하면서 그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청년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약속은……”

  순간,

  “우와와아아아아!!!”
  “빠아아아앙~~~~~!”
  “이야아아아아!!!!”

  떠나가버릴 듯한 함성소리, 박수소리, 자동차의 경적 소리 등이 시청앞 광장 안을 뒤흔들었다. 청년과 아가씨가 놀라 광장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일제히 두 주먹을 하늘에 번쩍 치켜올리며 엄청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떤 이는 박수치며 환호하고, 계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광장과 그 주위의 각종 차들도 일제히 경적을 울려댔다.

  “야아아아아아아아!!!”
  “빠아아아아아앙---”

  그제야 두 사람의 시선이 전광판 쪽으로 돌아갔다.

  “저, 저도 저 아이디는 들어본 것 같은데……”

  아가씨가 이렇게 말하자, 옆의 청년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전광판에는 이미 씌여져 있던 아이디인
  
  1. [ReD]NaDa,
  2. [Oops]Reach

  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다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이디가 반짝거리면서 빛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마치 빛이 나는 것만 같은 아이디였다.

  < 3. SlayerS_`Box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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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미
05/08/18 00:19
수정 아이콘
민재의 대사는 몇 번을 보아도 전율입니다. ^^
심술이
05/08/18 01:38
수정 아이콘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군요.
이런 소설은 경기내용보다 현제상황에 처한 등장인물의 갈등과 심리묘사.. 이런 부분이 더 좋더군요.(임요환선수의 팬이라서 더욱^^)
05/08/18 01:48
수정 아이콘
뜬금없는 소리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예전에 닥터 K 아르바 짤방을 만드신게 디사이드님인가요?
05/08/18 09:53
수정 아이콘
토성 // 맞습니다만... ㅡ_-a;;; 그냥 잠깐 재미로 만들어본 짜르방이었는데 그걸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줄은 몰랐네요
05/08/18 10:10
수정 아이콘
너무나 공감가는 짤방이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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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7 과연 국민을 위해 나라가 있는 것입니까 나라를 위해 국민이 있는 것 입니까? [29] kapH4392 05/09/10 4392 0
16157 [잡담] 질게에 요즘 올라오는 글을 보며..... 군대 사람 사는곳입니다. [68] 조자룡3863 05/09/02 3863 0
16100 리플없는 PGR, 너무 적막하군요. [24] 구름비5899 05/08/31 5899 0
16060 한번만 더 생각해보고 Write 버튼을. [6] 날아와머리위4509 05/08/29 4509 0
16009 지킬박사와 하이드 [16] 라구요3823 05/08/28 3823 0
15978 비타넷에서의 피지알'토성'공격-이후 신뢰파vs불신파간의 내전 등 토성 이중인격 사건 총정리. [53] legend9865 05/08/28 9865 0
15968 당신만은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4] 호수청년4411 05/08/28 4411 0
15784 [릴레이 소설]레드 팀 소설,미궁 [3] 퉤퉤우엑우엑3740 05/08/21 3740 0
15772 스타크래프트소설 - '그들이 오다' 40~42화 [10] DEICIDE4641 05/08/21 4641 0
15747 승부욕과 디스의 상관관계는? [14] 라라란4199 05/08/20 4199 0
15744 무엇이 그렇게 지기 싫어하게 만드는 겁니까? [28] 클레오빡돌아3989 05/08/20 3989 0
15702 [릴레이 소설]레드 팀 소설,제목미정 [5] 퉤퉤우엑우엑4639 05/08/18 4639 0
15698 스타크래프트소설 - '그들이 오다' 22~24화 [6] DEICIDE4666 05/08/18 4666 0
15681 스타크래프트소설 - '그들이 오다' 10~12화 [5] DEICIDE4814 05/08/17 4814 0
15387 [싸월 펌] 선수를 비난하는 것은 팬의 권리가 아니다 [23] beramode3933 05/08/08 3933 0
15289 당신이라면... 이런말을 할수 있겠습니까..? [37] 사탕발림꾼3850 05/08/05 3850 0
14771 아시아나 파업문제.. [46] 동네아는형아4186 05/07/20 4186 0
14720 개고기에 대해서... [51] 숨...4716 05/07/18 4716 0
14661 2005 Peace Cup Korea 대회 1일째 프리뷰.. [5] hyun52804170 05/07/16 4170 0
14200 제안합니다! 덧글을 없앱시다! [32] 우주의여왕쉬4094 05/07/02 4094 0
14004 [연재] Reconquista - 어린 질럿의 見問錄 [외전 Part II, III] [3] Port4325 05/06/25 4325 0
13963 군대가 아무리 좋아져도... [27] 오렌지나무3923 05/06/24 3923 0
13915 우리나라의 성우들.. 그리고.. 우리들의 프로게이머..? [68] 사탕발림꾼5396 05/06/22 539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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