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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1/28 05:52:31 |
Name |
DeaDBirD |
Subject |
오늘. 고해성사.. |
터놓고 이러저런 얘기 할 수 있는 몇몇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은 스타크래프트를 잘 모릅니다.. 때문에 그들에겐 말할 수 없는 얘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오늘 PGR님들에게 고해성사라도 해서 속이라도 풀어보길 원합니다..
스타크래프트를 알게 된 건 저 역시. 어떤 나쁜 놈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PC 게임이라면 화통한 [삼국지 시리즈]뿐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얼굴도 크고 명령도 확실하고 무엇보다도 한 번 명령 내리면 내가 다시 명령 내릴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턴 방식이 맘에 들었었던 듯 합니다.. 스타크래프트는 인기 있는 게임이라 느끼고 있었지만. 워포그 꼬물꼬물 벗겨내는 것과 쥐알만한 등장 캐릭터 크기 때문에 쪼잔한 게임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놈이 2:1로 해도 이기지 못할 거라 자존심을 긁는 바람에. 이렇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그 놈이 2:1로 해도. 로템이라면 이깁니다..
놈은 토스 유저였습니다.. 당시 전 온리 저그 유저였습니다. 맵은 언제나 김대휘님 제작의 하얀헌터.. 무한맵 유저면서도 연구연구해서. 놈의 언턱포톤과 저의 다크스웜럴커, 플레이그로 그 당시 무한 2:2 게이머들을 공방에서 장악하고 있었습니다(그 때까지만 해도 다크스웜럴커로 시즈 밭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신림동 모 피씨방 등지에서 "유한맵 한 번 해보시지요"라는 알바 분들의 꼬임을 받곤 했었지요..
예전 알게 된 한 선배가. 무언가 얻기 위해선 많은 걸 버려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뭐 그래 했었는데. 인생 더 살아온 분들의 말씀은 쉽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게 1-2년을 살았던가요.. 스타크래프트를 얻은 대신 많은 것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꼭 스타크래프트 때문만은 아니지만. 7년여 사귀어 오던 여친이 떠난 것. 그리고 그 친구에게 알게 모르게 의지해왔던 삶의 기반들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렸던 거지요.. 태어나 처음으로 주체 못할 내 눈물을 보면서. 차라리 시원하게 터져버리기나 하지 했던. 순간이었습니다(그 때의 한순간 한순간은 고이 상처가 되어 차마 말 못하고 있습니다)..
그 꼴을 저질렀는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뭐 그리 돈명예권력 추앙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 하나 최대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남들을 이겨야 한다거나 남들 눈치봐야 한다는 거. 별 의미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어찌 살아가면서. 그 어떤 나쁜 놈도 힘든 삶을 버티기 위해 멀리 가버리고. 혼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한맵 2:2 팀플 말고는 해본 적 없던 터에. 슬금슬금 로템 1:1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졌지요..
유한맵에서 다크스웜플레이그는 좀처럼 가스가 안되더군요.. 버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속절없이 지져지고 농락 당하면서. 게임큐 등등을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대체 어찌 해야 되는 거야. 하면서요.. 천리안 게임자료실에 올라온 빌드 보면서 이리저리 연구하던 때였습니다..
사실. 저는 10여년 전 사고로 왼손 3,4 손가락을 잃었습니다. 일종의 장애인인 터였지요.. sd가 왼손 검지로 타닥해야만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수없이 농락당하면서 이거저거 다 해보면서 곰곰히 고민해보니. 제 상태로 최선인 종족선택은 sd나 bp로 시작하는 가 아니라 bs인. 테란이었습니다.. 단축키가 bs, ta, wa 등등으로 이어졌으니까요..
그러면서 최대한은 1(마린), 2(메딕), 3(탱), 4(싸베)까지였습니다.. 1(마린), 2(마린), 3(마린), 4(메딕), 5(탱), 6(싸베)는 도저히 안되겠더군요.. 최근 물량전에선 그냥 gg 하고 맙니다만.. 그래도 당신엔 그것만해도 어지간한 공방 게임에서 밀리지는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대토스전은 죽을 쒔지요.. 단지 대저그스페셜리스트로 자부하면서. 공방 저그들과 반반 정도 맞짱 뜨고 있었습니다..
대저그 승률 반반. 대토스 승률 20%.. 거기서 그냥저냥 만족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나쁜 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박서놈(^^)이지요.. 난 한 번도 뽑아본 적 없던 드랍쉽을 통해 극강저그를 잡아내는 걸 보며. 전율. 그리고 엄청난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 실제로는 가능했던 거 아닌가. 하면서 말이지요..
그 이후. 온리테란 노력하자 노력하자 하면서. 케이블 달고 인터넷 동영상 보면서 즐기며 아파하며 노력해온지. 오늘입니다.. 중간중간 박서가 해온 일들. 그러니까 마린 한 기로 럴커 잡아내는 것. SCV 던져 상대 입구 시즈 뚫기. 배럭 날려 입구 막기. 몰래 팩 날려 벌쳐승부. 옵저버에 옵틱 걸어 캐리어 잡아내기 등등 다 해봤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그 선배의 말대로. 무언가 얻기 위해선 많은 걸 버려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어제까지 난. 스타크래프트 매니아일 뿐. 별 다른 것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술과 함께 이러저런 생각 굴리며. 결국 난 스타크래프트 매니아가 아니라. 임빠였음을 인정하며. 고해성사하고자 합니다..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온리테란 하겠다고 버벅거린 것. 게임큐 종족 최강전 이전이었지요.. 쌈장이 고민 끝에 토스로 돌고. 박서의 드랍쉽게릴라에 정통 비정통 논쟁이 붙던. 그 때.. 비정통론의 기수였던 가림토를 몰래 배럭 바이오닉으로 12시 입구를 뚫어내면서까지 최선을 다했던 박서의 그 때..
한 이성을 사랑하고 조금 지나.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내 머리 속에 그려놓았던 그런 스타일을 사랑했던 걸까. 돌아보게 되는 때가 있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순수하게 사랑했었던 걸까. 아니면 특정한 그 어떤 게이머 스타일을 사랑했던 걸까. 돌아보게 됩니다.. 다시 저는. 결국 난 스타크래프트 매니아가 아니라. 임빠였음을 인정하며. 고해성사합니다..
잠시 스타게이머들의 리그혈전장 구경꾼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들이 피를 흘려가고 있을 때 난 단지 자존심 강한 방관자였을 뿐이었던가요.. 그들을. 박서를 포함한 그 모든 젊은 게이머들의 자기 내버리며 얻은 투혼들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지금 스타크래프트 게이머 중에 가장 사랑하는 이는 박서입니다.. 그러나 박서를 뛰어넘는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노력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야겠습니다.. 그러할 수 있는 때를 기약하며. 내 현재 생활을 채찍질하기 위해 잠시 떠야야할 것 같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남의 고통보다 내 고통이 백배는 커보인달까요.. 저 스스로 우습습니다.. 그런 변변찮은 제게 이런 고민을 안겨주신 수많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내어드립니다..
그럼 잠시. 여러분들도 안녕히 건강하시길..
태지님 일곱번 째 다시 온 날.
DeaD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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