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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7/05 15:35:51
Name OrBef
Subject 매너리즘과 관도대전
진부하지만, 들어가는 말이 우선 나갑니다.

삼국지를 워낙에 좋아하는 지라, 꽤 여러종류의 삼국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최고로 치는 것은 요시가와 에이지의 삼국지이고, 그 다음으로는 진순신의 제갈공명, 그 다음에는 창천항로와 고우영 삼국지정도가 있습니다. 독창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양산형 삼국지들은 논할 것도 없고, 특히 이문열 삼국지는 고우영 삼국지 무단 표절 소설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모든것의 위에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나관중의 삼국지가 있죠.

각 삼국지에서 제가 제일 인상깊게 보았던 대사는 이정도가 있습니다.
'현실이 불우해져 갈 수록, 원술은 점점 과대망상증에 빠져들었다' - 내러티브(요시가와 에이지)
'글쎄.. 사실은 나 자신도 그 이유를 뭐라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서주에서의 대학살이 잊혀지기 전에는, 내가 조조의 편에 가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제갈공명(진순신)
'그러니까 요는, 함락하기에 2년이 걸리는 저 요새를 2주만에 함락하고 당당하게 진군하면 되는거 아니오! 그것도 최대한 전쟁으로 보이지 않고, 군사훈련처럼 보이면 더 좋겠지! 내겐 아버님의 바램이 손에 잡힐듯이 보이는 것 같소.' - 원상(이학인의 창천항로)
'전쟁은 왕이 될 자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제부터 천하를 향해 원소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난다' - 원소(이학인의 창천항로)

이중에서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세번째와 네번째의 대사가 등장하는 관도대전입니다. 전 이 전투를 이미 모든것을 가졌기에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강자와, 아직 강적이 남아있기에 독기를 유지하고 있었던 약자의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누구도 모르는 역사의 진실은 덮어두고, 전투의 진행 과정에 한해서는 창천항로의 시각을 기본으로 하겠습니다.

관도대전을 앞둔 양 영웅 - 원소와 조조 - 는 극과 극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명문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30대에 반동탁 동맹군의 맹주가 되었던 원소. 환관의 양자였으며 평생을 원소의 그늘에서 살아야 했던 조조.

기주를 탈취했을 때의 단 한번의 기책을 제외하면 원소는 언제나 힘을 바탕으로한 정면 승부를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장연을 물리치고, 역경을 탈취하고 공손찬을 자결로 몰아넣으면서 그는 천하통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나이가 되죠.

반면에 조조는 출발점이 워낙에 뒤졌던 까닭에, 술수에 술수를 더해서 자신의 세력을 쌓아나갑니다. 조서를 위장해서 천하를 전란속에 빠뜨리고, 도적떼와 협상을 해서 군대를 보충하고, 자신이 타도하고자 했던 동탁을 본받아 천자를 볼모삼고, 칙서를 강요하여 군웅들을 이전투구로 내몹니다. 조조가 천자를 정치적으로 30년간 이용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아우구스투스급의 음험함이 보입니다. 하여 서기 200년을 전후해서 원소와 견줄만한 세력을 갖추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서로간에 가면을 벗어던지고 관도에서 맞붙죠.

'조조는 불안정을 좋아하고 불안정에 강하다. 그런 난세의 원흉같은 남자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패도에 왕도를 적당히 섞을 필요가 있다'

비록 작가의 시각입니다만, 조조에 대한 원소의 평가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실제로 이후 관도대전의 양상을 결정지었고, 원소의 패전으로 이어집니다.

40만의 병력으로 10만의 조조군을 압박하는 상황,
외교적 관계의 순조로운 진행(비록 실패했으나 손책/유비의 조조에 대한 적대행위, 유표와 유벽의 배후 위협),
황하를 도하하는데 성공해서 허도 이틀거리까지 진군한 상황,
벌판에서 벌어진 일대 회전에서의 완승,
상대는 한때 내 부하였던 조조,

이 모든것은 원소로 하여금 승리를 확신하게 했으며, 원소로 하여금 '이미 기정사실이 된 승리'니까 최대한 '멋지게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승리'가 시큰둥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매너리즘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은 왕이 될 자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제부터 천하를 향해 원소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난다'

사실 관도가 요충지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도는 중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백마-관도라인 말고도 연진-복양라인도 원소군이 이용할 수 있는 길이었으며, 대전중 유비군을 유벽에 대한 지원군으로 보냈던 것으로 보아 소규모의 군대는 얼마든지 관도를 우회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원소는 완전 무결한 승리를 원했고, 관도를 반드시 함락하고 싶어했습니다. 원소의 이런 성향을 빼다박은 세째아들 원상은 이를 그대로 실천해서 '대단히 화려한' 관도 함락 작전을 행하죠.

'그러니까 요는, 함락하기에 2년이 걸리는 저 요새를 2주만에 함락하고 당당하게 진군하면 되는거 아니오! 그것도 최대한 전쟁으로 보이지 않고, 군사훈련처럼 보이면 더 좋겠지! 내겐 아버님의 바램이 손에 잡힐듯이 보이는 것 같소.'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첫째아들 원담이 파악했던 대로, 관도는 함락하기 대단히 힘든 요새였고, 오히려 공격군의 군량보급소가 습격당함으로써 대전의 양상은 역전됩니다. 만화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오소의 군량소 습격당시 조조군의 군량은 완전히 떨어진 상황이었고 원소군은 아직 보급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관도에 대한 공세를 굳이 심하게 펼 이유도 없었고, 적절한 운영(?)을 통해 지구전으로 끌기만 하면 승리가 예정된 상황이었죠. 이 질래야 질 수 없었던 모든 조건은 '그냥 승리는 따분하다. 내 왕도를 천하에 펴기 위해서는 완전한 승리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했던 원소의 욕심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현재의 인간사회에서도 정말로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승기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좋게 말하면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며, 나쁘게 말하면 체면을 찾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승기를 외면하는 경우를 말하는거죠. 물론 원소의 방향에서는 '더럽게 승리하느니 멋지게 패하겠다' 라는 모토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정말로 승리할 것인지 여부에는 오히려 관심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먹고 살 만 해지면 먹고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실존적 고민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해서 전 이시점의 원소의 모습을 굳이 못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조조도 위왕이 되는 216년 이후로는 원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죠. 어떻게 보면 원소는 너무 빨리 최고의 자리에 올라버렸고, 그것이 오히려 그의 독기를 앗아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매너리즘의 시작이죠.

역사적으로는 관도대전 이후 창정에서의 대 전투가 한번 더 있었고, 창정에서 다시 패한 원소는 화병으로 죽죠. 하지만 창천항로에서는 상징적 화면을 구성하는데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관도에서 원소가 완전히 패한 것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이 장면의 조조와 원소의 만남이 또 매우 인상적입니다.

패전해서 구덩이에 숨어있던 원소를 조조가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 두 영웅은 그냥 서로 미소를 짓죠. 조조의 심정은 이어지는 내러티브에서 묘사가 되지만, 원소가 무슨 생각으로 미소를 지었는지는 끝내 나오지 않습니다. 전 원소가 이렇게 생각했을거라고 믿습니다.

'난 분명 이길 수 있었다. 너도 알지? 하긴 뭐 이제와서 그런 것은 흥미가 없어. 적어도 넌 나를 꺾은 만큼 이제 천하제일로 군림할것이 확실하구나. 축하한다. 내친구 조조여'

글을 통해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별볼일 없는 성취에 취해서 몇년을 매너리즘으로 날려버린 경험이 있는 분들은 공감하실 만한 내용이라 생각해서 끄적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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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05 15:45
수정 아이콘
갑자기 가슴이 뜨끔하네요.....
성취도 아얘 없지만 메너리즘에 빠져있는건 확실한 저로서는 ...에휴
Mlian_Sheva
05/07/05 15:53
수정 아이콘
우선은 저랑 삼국지 취향을 비슷한 분을 만나 반갑습니다..^^
일단 관도대전을 창천항로를 중심으로 설명하셨는데, 창천항로의 원소는 타도되어야 할 한제국 400년의 병폐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욱도 조조에게 비슷한 진언을 한 적 있죠.(원소를 괴물로 묘사 하면서) 조조도 황건 청주병에게 원소군 학살을 명하면서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대사를 합니다.(변화를 원치않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분노를 보여줘라 이런 대사였던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는군요..^^;;)
원소가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는 것은 정말 대공감 합니다. 그것이 관도대전의 패인으로 작용했다는 것도 상당히 근거있는 말입에는 분명합니다.
다만, 원소의 매너리즘이 관도대전의 중요한 패인중에 하나지만 이 매너리즘 하나만으로 관도대전의 패인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원소진영에서 가장 아쉽다고 느꼈던 점은 인화(人和)입니다. 중요시점에서 벌어지는 모사들의,장수들의,그리고 심지어 자식들의 다툼은 큰일을 함에 있어서 인화의 중요성을 말해주는듯 합니다. 심배, 봉기,곽도 같은 이들이 전풍,저수같은 사람들과 화합하여 대국을 이끌어 나갔다면 과연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를 그렇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또, 원소 사후에 아들들이 화합하여 조조를 막는데 힘썼더라면 조조가 과연 원씨를 박멸하고 하북평정을 그리 쉽게 달성할 수 있었을까요?
05/07/05 16:15
수정 아이콘
^^ 반갑습니다.
물론 원소진영의 내부 불화는 유명한 이야기죠. 하지만, 원소는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패했고, 진수의 삼국지나 각종 설화에서 분명 실제이상 부정적으로 다뤄진 면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원소의 우유부단함이나 조직내부의 불화가 좀 더 부풀려졌을 거구요.
물론 매너리즘이 유일한 이유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1 이었는지도 확실치는 않구요. 저 글은.. 그냥 매너리즘에 빠져살았던 지난 몇년간을 후회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쓴 글 정도로 이해해주세요 ^^
쥬뗌므~
05/07/05 16:28
수정 아이콘
예전에 1차 에버스타리그떄 최연성선수와 이윤열 선수의 8강 1차전에서 이윤열 선수가 그랬었죠.
Nada-in PQ
05/07/05 16:38
수정 아이콘
매너리즘이라...지금의 저랑 딱 비슷하군요...
머, 원소꼴이 될라고 그러나...ㅜ.ㅜ

매너리즘이 승기를 버리게 만든 게 아니라, 저는 매너리즘으로 인해서 승기를 보지 못했다 라고 말하고 싶군요..다시 말해, 원소가 그것을 승기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매너리즘이 판단력을 흐뜨러트린 것이죠. 요즘의 저도 원소, 이 내가 젤루 싫어하는 인간 군상과 닮아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답니다. 정신 차려야지.ㅜ.ㅜ
05/07/05 16:58
수정 아이콘
어떻게 보면 저번 스니커즈배 올스타리그에서 이윤열 선수와 임요환 선수의 경기도 매너리즘에 빠져 승리를 놓칠 뻔 했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경기 자체는 채팅러쉬로 재밌긴 했지만 ^^;;
제가 보기에는 자칫 잘못했으면 이윤열 선수 완전 대역전패 당할 뻔 했었다는 ...
05/07/05 16:59
수정 아이콘
예전 삼국지 게임할 때 원소로 많이 했었죠. 화려한 부하 장수들을 이끌고 통일을 못한다는게 말이 돼 ? 안돼 ! 하면서 말이죠. 조조 견제에 신경 쓰면서 유비 삼형제를 부하로.
요즘은 조조로 하는게 더 좋더군요. 매너리즘에 빠진 것인가. -_-; (본문과는 왠지 관계없는 리플인듯... 쿨럭)
05/07/05 17:00
수정 아이콘
삼국지 할때는 조조가 제일 쉽던데 - -;; 부하가 너무 능력치들이 좋아요~! 베이베
05/07/0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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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8이나 10에서 '가상모드'로 플레이하면서 원소나 조조의 '부하장수'로 플레이하면 두 세력간의 피말리는 혈전에 눈돌아가죠 ^^
낭만토스
05/07/05 17:51
수정 아이콘
이재훈의 50게이트 사건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관도대전이네요. 물론 이재훈선수가 매너리즘은 아니었겠죠. 판단미스 또는 불가사의한 이윤열선수의 괴력.... 진행과정과 결과자체만 살펴보면 비슷하네요.

저도 삼국지를 엄청 좋아한답니다. 삼국지 이야기 한번 꺼내면 끝도 없죠....
오케이컴퓨터
05/07/05 18:53
수정 아이콘
저도 어렸을땐 삼국지 소설&게임 둘다 좋아했었는데 커서보니깐 그게 아니더군요. 너무 중화사상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인지라 사대주의적 사상이 스며들더군요. 사실 징기스칸이 조조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칸이되고 그 당시의 대부분을 정복했지만 별로 알려지지도 않아서 잘 모르는 사람은 조조를 더 높게 평가하죠. 뭐 조조도 대단하긴 합니다만, 약간은 부풀려진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삼국지 내용의 대부분이 그렇긴 하지만...
쥐마왕
05/07/05 20:11
수정 아이콘
관도대전 약간 부풀려져있는 부분도 없지않아 있겠지만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은 우유부단한 원소와 과감한 결단성을 가진 조조의 그릇차이가 아닐련지요.. 삼국지와 스타 참 깊은 연관성이 있는것같습니다.
05/07/05 22:44
수정 아이콘
오케이컴퓨터님/징기스칸은 조조보다 열악하다기 보다는 좀 다른 경우죠. 당시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착안하지 못한 초고속 기병대를 활용해서 세계를 제패한 경우이니, 병참/외교/전술/정치 다 빼고 오로지 신전략 하나로 성공한 셈이죠. 물론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몽고인들은 아무도 하지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면에서 천재성이 보입니다. 반면에, 모두 대등한 조건에서 싸웠던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일직전까지 바로 위에서와 같은 병참/외교/전술/정치를 통해서 이룩해낸 조조는 또 다른 천재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오케이컴퓨터
05/07/05 22:49
수정 아이콘
징기스칸은 처음에 지지 기반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신 조조는 환관가문에 양자로 들어가서 그럭저럭 상류층에는 속해있었죠. 뭐 조조도 대단한 인물이긴 합니다. 조조의 실력은 군사적인 판단보다는(관도에서 이긴 후 패전이 잦아지요) 정치적인면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그 이전 한나라 시기와는 확연히 구분이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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