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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6/16 18:38:52
Name SEIJI
Subject 한화, 그리고 장종훈과 함께한 프로야구
장종훈선수가 17년의 프로야구 인생을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 17년동안
프로야구에서 수많은 족적들을 남기며 통산 홈런(340개) 타점(1145점) 출전(1949경기)
안타(1771개) 타수(6290타수) 득점(1043점) 루타수(3172루타) 사사구(997사사구)등
공격 8개 부문에서 수위를 차지하는등 한국 프로야구의 기록들을 새로이 써나갔습니다.

이제 장종훈이 쉼없이 써나가던 기록들은 종지부를 찍었고 그는 이제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 17년간 장종훈선수는 수많은 기록들과 멋진 홈런들을 양산하며
많은 프로야구 팬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반면 그 17년간은 단지 장종훈선수에게만 의미있는 기간이 아닌 많은 한화팬들에게도
의미있는 기간이었습니다. 많은 한화팬들은 빙그레로 부터 프로야구의 팬이 되었으며
그 빙그레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는 다름아닌 장종훈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화
팬들이 장종훈때문에 당시 최강이었던 해태, 삼성을 제치고 신생팀이었던 빙그레를
좋아하게 되었고 저역시 그렇게 빙그레와 장종훈을 만나 프로야구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이제 17년의 세월을 거쳐 한화팬이 되었습니다.

(1) 빙그레의 전성기, 그리고 홈런왕 장종훈 (1986년~1992년)

1986년 빙그레는 7번째 팀으로 한국 프로야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프로야구의
최강팀은 국보급 투수 선동렬을 앞세운 기아의 전신 해태와 한국시리즈만 나가면 작아
져도 정규리그에선 항상 최강의 모습을 보이던 삼성이었습니다, 빙그레는 첫해 신생팀
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꼴찌에 머무릅니다. 하지만 1988년부터 빙그레는 신생팀답지않은
무서운 저력을 발휘합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가 빙그레의 전성기라고 할수있는데 이 때 빙그레는 한국시리즈
를 4번이나 나갔습니다. 정규리그에선 89년과 92년 1위를 차지했었구요. 이때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은 바로 장종훈을 비롯한 이정훈, 이강돈, 강석천등 소위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고 불렸던 공포의 타선이었죠.
이 공포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앞세워 빙그레는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강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빙그레도 삼성처럼 큰 경기에서 너무나 약해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죠. 당시 빙그레 감독이었던 김영덕감독은 덕분에 새가슴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구요. 빙그레는 해태와의 세번의 한국시리즈 맞대결에서 모두다 허무하게
패하고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특히 빙그레의 에이스 송진우선수가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경기에서 8회 2사까지 퍼펙트 투구를 하며 1-0으로 앞서가다 결국 역전패를 당한경기는
정말 빙그레팬들의 가슴을 치게 하는 경기였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 퍼펙트
경기를 이룰수 있던 경기인데 말이죠. 나중에 한화시절 정민철선수는 8회 1사까지 퍼펙트
경기를 하나 포수가 공을 뒤로 빠트려 정말 아쉽게도 또한번 퍼펙트게임을 눈앞에서
놓치게 되고 결국 한국 프로야구에는 퍼펙트게임의 기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퍼펙트
게임에 가장 근접했던 두 선수가 빙그레와 한화 선수였다니 한화팬으로선 정말로 아쉬운
순간들이죠.

빙그레가 해태와 붙어서 질때는 아직 어린 나이이고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이 그리 많지
않아 그렇게 마음아프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로야구를 보며 처음으로 절망했을때가
바로 92년이었습니다. 92년 빙그레는 무서운기세로 승리를 쌓아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송진우선수는 최다승과 최다구원을 거두었었고 장종훈선수는 90년부터
92년까지 28,35,42개의 홈런을 치며 3년연속 홈런왕에 올랐습니다. 당시 홈런기록 40개를
깬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죠. 이때까지가 장종훈선수의 최전성기 그리고 빙그레의 전성
기였습니다.
그렇게 타석에선 장종훈 투수에는 송진우가 확실한 버팀목이 되어 빙그레를 1위로
끌어올렸고 다시금 4번째로 한국시리즈를 맞아 상대팀을 기다리고 있던 빙그레는 당시
3위 였던 롯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빙그레팬들이 그 지긋지긋한 해태를 벗어나서
이번에는 우승할수있다라며 기대를 갖게 되었고 저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하지만 롯데는 19살의 어린 투수 염종석이 크레이지모드를 발동하며 선전하였고 빙그레
는 롯데에게 1승 4패로 무릎을 꿇으며 다시금 좌절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2) 빙그레에서 한화로, 하지만 강팀의 면모는 사라지고 (1993년~1998년)

그렇게 80년대말 90년대초 전성기를 아쉬움으로 마무리한 빙그레는 93년11월 한화로 팀이
바뀌게 되고 그때부터 한화는 그리고 장종훈선수는 점점 옛 전성기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92년 이전은 아주 오래전이라 기억이 생생하지 않아도 한화시절만큼은 정말 열렬히
응원했기에 더더욱 기억이 생생한데 빙그레에서 한화로 이름을 바꾼 한화는 예전의
강팀의 면모는 온데간데 없는 플레이오프도 번번이 탈락하는 그런 팀이 되어있었죠.
그래서 더더욱 수많은 좌절을 하고 눈물을 흘렸던 팀이 한화였습니다. 그당시 많은 한화
팬들이 빙그레의 옛 추억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건 그만큼 빙그레가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한국 프로야구의 강팀임을 알려주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한화가 이름을 바꾼후
부진했었다는것을 반증하는것이기도 합니다.
92년이후 한화의 에이스는 송진우에서 정민철 선수로 넘어옵니다. 하지만 정민철선수는
정말 뛰어난 투구와 낮은 방어율에도 불구하고 승리가 많지 않은데 이는 그만큼 한화의
타선의 지원이 빈약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1993 빙그레 2.24 13승 3패
1994 한화 2.15  14승 10패  
1995 한화 3.21  13승 7패  
1996 한화 3.03  13승 12패  
1997 한화 2.46  14승 11패  
1998 한화 3.16  10승 7패

정민철선수의 이런 기록은 당시 한화의 팀상태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좋은 지표로서
한화는 예전 빙그레시절의 다이너마이트타선은 온데간데없는 타력이 너무나 약한 팀으로
바뀌어 버린것이죠. 그나마 투수쪽에선 정민철, 송진우 그리고 구대성 선수가 받쳐주면서
투수력은 선발과 구원진은 강한팀으로 인정받았지만 중간계투진이 약하고 특히 타력이
약한것이 항상 한화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4번이나 자기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던 한국시리즈는 꿈도 못꾸고 94년과 96년 3위를 차지
한것이 고작이었습니다. 97년과 98년은 7위를 하며 최악의 부진을 보였고 한화는 많은
프로야구 팬들에게 쌍방울과 더불어 약팀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팀이었었죠.

그래도 한화시절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해는 96년으로 당시 구대성선수는 방어율 1.88에
18승 3패 24세이브로 방어율, 승리, 승률, 구원에서 수위를 차지 투수 4관왕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보여줍니다. 이때 구대성선수는 한국프로야구 MVP가 되었고 지금도 한화팬들
에게 잊지못할 대성불패라는 말은 이때 확실히 자리를 잡은 말이죠. 하지만 96년 한화는
아쉽게도 준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에게 덜미를 잡히게 됩니다.

빙그레의 에이스 장종훈선수는 한화시절에도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전 90~
92년에 보여주었던 홈런왕 장종훈의 이미지는 많이 희석되었죠. 40개 이상 쳤던 홈런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하지만 장종훈은 장종훈이라고 95년 장타율상과 출루율상을 거머
쥐며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에 오릅니다. 이 시기 골든글러브에 올랐던 한화 선수는
타자에는 장종훈 그리고 투수에는 96년 구대성선수 단 두명뿐이었죠.

이시절 당시 가장기억나는 경기가 있다면 해태와의 경기였는데 한화가 4-0으로 앞서고
9회말 마지막 수비를 남겨놓고 있어 다 이겼다고 생각했었고 또 마무리로 정민철선수가
등판하며 이제 승리는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했는데 1점실점하고 4-1된 상황에서 이종범
선수의 믿기지않는 만루홈런으로 4-5로 역전패 당한 경기였습니다. 이긴경기가 아닌
진경기가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는건 그 당시 이 경기가 저에게 준 임펙트가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종범선수가 그리고 해태라는 팀이 그렇게 미울수가 없었죠.

그렇게 90년대중반 한화는 옛 빙그레의 화려한 명성은 뒤로 하고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약팀의 이미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당시 한화의 특징이라면
1) 타선이 약하다.
2) 선발진과 구원진은 강하나 중간계투가 너무 약하다.
3) 실책이 많고 특히 내야진이 불안하다.
4) 초반엔 잘하나 중후반되면 급격히 부진해진다.
등이었습니다. 이런 특성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한화팬들은 좌절을 넘어서 절망하기에
이르렀고 빙그레를 따라 한화를 좋아하던 팬들도 점점 한화를 떠나버리곤 했죠. 특히
97년 98년 한화가 7위에 머물렀을땐 저역시 한화말고 다른팀을 응원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길고긴 한화의 부진의 터널은 그 예전 너무나 화려했던
빙그레 시절과 극명히 비교되어 더욱더 한화팬들을 가슴아프게 했었죠.

(3) 감격의 첫우승, 그 한가운데엔 장종훈이 있었다. (1999년)

1999년은 한화팬들로 하여금 정말 잊지 못할 해입니다. 2년연속 7위를 하며 최악의 부진
을 보인 한화는 1999년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당시 프로야구는 처음으로 매직리그 드림리그로 양리그로 나뉘어 경기를 하였는데
한화는 매직리그에 속하였습니다.
많은 한화팬들은 계속되는 한화의 부진때문에 이번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한화를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한화는 예전의 한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부진했던 타선진은 빙그레시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잇는 제2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고 불릴정도로 막강한 타력을 뽑냈습니다. 특히 외국에서 데려온 두용병
로마이어와 데이비스는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이 두 용병의 활약은 한화의 대약진
에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한화 타선의 중심에는 이제는 한화의 프랜차이츠
스타이자 이름이 된 장종훈선수가 있었습니다.
이영우, 데이비스, 로마이어, 장종훈, 송지만, 강석천등 당시 한화의 타자들은 1번 이영우
부터 9번 강석천까지 9명의 타자중 무려 7명이 3할이상을 쳤습니다.
투수도 타선과 마찬가지로 막강했는데요,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 이 1,2,3선발이 15승
이상을 해주었고 마무리는 구대성선수가 단단히 받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화는 매직리그 2위였지만 드림리그 3위인 현대보다 승률이 뒤져있었습니다. 규칙
으로는 승률이 뒤지면 현대와 준플레이오프를 해서 이긴팀이 플레이오프에 오르지만
한화는 후반기 무시무시한 포스를 발휘하며 10연승을 거두고 준플레이오프 없이 플레
이오프에 오르게 됩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는 두산을 맞아 가볍게 4연승을 거두며  
드디어 근 7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오르게 됩니다. 한편 롯데는 삼성과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쳤는데 특히 1승 3패로 뒤지다가 5,6,7차전 내리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에 오르게 되고 삼성과 롯데의 플레이오프는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최고의
명승부라는 찬사를 듣게 됩니다.
롯데역시 박정태, 호세, 임수혁, 마해영등 막강한 타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한화와 롯데의 한국시리즈는 긴장감이 넘치는 승부였습니다.
특히 한화팬들에겐 92년 우승을 롯데에게 내준 뼈아픈 기억이 있기에 더더욱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던 한판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죠.
한화의 최강 원,투,쓰리펀치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은 두산과의 플레이오프때처럼 롯데
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 구대성 이
네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한화는 먼저 3승을 거두게됩니다. 롯데는 플레이오프때 삼성과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여 피로가 많이 쌓인 상태였었죠. 그리고 4차전 저는 한화의
우승을 직접 눈앞에서 보기위해 야구장을 가고 싶었으나 지방에서 열린경기라 가는것을
포기했죠. 4차전 롯데는 한화에게 첫승을 거두고 저에게는 한화와 롯데의 한국시리즈를
직접 볼수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잠실에서 열리는 5,6,7차전 5차전 저는 한화의
우승을 기원하며 야구장을 찾았고 야구장에는 많은 한화팬들과 롯데팬들이 가득차 인산
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명승부가 펼쳐지며 8회까지 한화는 롯데에게 2-3으로 지고 있었고, 많은 한화팬들은
이제 힘들겠다라고 생각할 무렵 감격의 드라마는 시작되었습니다. 8회 3번 데이비스의
안타로 1루가 되었고 다음은 4번 로마이어의 차례였습니다. 그해 45개의 홈런을 치며
한화의 홈런 NO.1었던 로마이어가 등장했을때 저를 포함한 한화 팬들은 혹시? 하며
로마이어를 소리높여 외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로마이어가 친 공은 외야 펜스까지
날아가 펜스를 맞고 떨어졌고 그 사이 로마이어는 3루를 밟았습니다. 3루타!!! 3-3으로
동점인 상황에서 드디어 5번타자 장종훈 선수가 타석에 섭니다.

13년간의 프로야구생활, 그안에 벌써 4번이나 한국시리즈 문턱에 올라섰지만 번번이
좌절을 맛보며 눈물을 흘렸던 장종훈, 한국최고의 타자계보를 잇는 자신에 명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시리즈에선 그 명성에 맞는 활약을 못해줬던 장종훈선수가 다시금 5번째
한국시리즈에 서서 우승의 문턱에서 공을 맞이합니다.
경기스코어는 3-3 주자는 3루, 장종훈선수는 방망이를 고쳐잡았고 투수는 있는 힘껏
공을 뿌렸습니다.

"딱!"

모두들 공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고 장종훈 선수의 공은 외야에서 힘이 다한듯
외야수의 글러브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사이 3루에 있던 로마이어선수는 홈을 밟았고
스코어는 4-3이 되었습니다.
모든 한화팬들이 경기장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소리를 질렀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장종훈! 장종훈! 그 이름 세자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홈런은 아니었지만 장종훈선수의 희생플라이로 한화는 역전에 성공했고 결국
9회 구대성선수가 경기를 끝마치고 포수와 끌어안으며 한화는 창단 처음으로 우승을
달성하게 됩니다.

빙그레 시절 숱하게도 봐왔던 선동렬이 우승을 결정짓고 포수와 끌어앉으며 환호지르던
그모습, 그렇게 부럽기도 하고 얄밉게도 보였던 그 모습을 구대성선수가 재현하자 많은
한화팬들이 함성을 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화팬들은 빙그레에서 한화팬을
거치면서 수없이 좌절했고 수없이 절망했기에 그것이 한이 되엇습니다. 그렇기에 99년
의 우승은 더욱더 특별한 의미였었고 이는 2002년 드디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삼성의 팬들이 우승후 느꼈던 감격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는 감격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화팬들보다도 더욱더 한국시리즈에 한이 많았고 또 그래서 더욱더 감격했던
선수는 장종훈 선수였을 겁니다. 4번의 실패끝에 5번째에 성공했기에 더더욱 감격은
더했을 것이고 그 결승타점을 자신이 올렸기에 더욱더 의미가 각별했을 겁니다.

4번의 한국시리즈 좌절, 90년대중반 그 끝이없던 부진의 나날 이 모든 아픔과 한을
가지고 있던 한화선수들, 한화팬들에게 1999년은 정말 잊지못할 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승의 순간을 직접 지켜보던 저한테도 1999년은 정말 잊지못할 해가 될것입니다.

(4) 첫 우승을 뒤로하고 V2를 향해서...(2000년~ )

90년대가 지나고 2000년이 돌아오며 한국 프로야구는 다시 양대리그에서 단일리그로
돌아옵니다. 장종훈선수는 1999년 우승 이후 점차 부진해지기 시작합니다. 2000년 28개의
홈런을 치며 92년 이후로 최다 홈런을 치지만 그뒤 2001년에 데뷔한 최고의 루키 김태균
선수에게 밀리게 됩니다. 차세대 한화의 홈런왕이라고 불리는 김태균선수의 활약속에
장종훈선수는 점점 주전에서 밀려나더니 결국 나중에는 2군으로 떨어지기까지 했죠.

그 사이 한화는 또다시 상당히 들쭉날쭉한 성적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다시금 한국
시리즈를 밟지는 못했죠. 한화의 팬들은 V2를 기대하고 있고 2005년 한화는 9연승의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며 한화팬들의 꿈을 다시금 실현시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 2군에 있던 장종훈선수는 은퇴를 선언하고 17년 야구인생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한화팬으로서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다시금 장종훈선수가 일어서서
한화의 타선 한가운데서 한화의 타선을 이끌어주기를 그래서 V2를 이끌어주기를 바랬
는데 말이죠.


연습생 신화 장종훈, 다른 엘리트 선수들이 걸었던 화려한 시작에서 그는 멀직이 떨어진
채 눈물젖은 빵을 먹으며 오직 노력 하나만으로 힘들게 그 어려운 시절을 헤쳐내어
한국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한 그리고 그 덕분에 한화와
함께 한 17년간의 프로야구는 그래서 더더욱 감동적이었고 가슴에 와닿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제 장종훈 선수는 가고 언젠가는 다른 선수가 그의 빈자리를 메꾸겠
지만은 아마 제 마음속의 장종훈선수의 빈자리는 왠만하면 메꿔지기 힘들것 같습니다.



340개나 되는 그의 홈런 한방한방...
갓 국민학교에 입학한 어린 소년에게는 꿈이 되었고
막 세상에 뛰어든 청년에겐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 눈부신 궤적을 그렸던 홈런들은
단지 담장을 넘은 공 하나가 아닌
많은 야구팬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져다주었던
장종훈 선수의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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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워크하는데-_
05/06/16 18:47
수정 아이콘
장종훈 그는 절 프로야구의 세계로 이끌어준 사람이였습니다.
이제 비록 한화팬이 아니더라도
제가 아직도 한화의 성적에 관심을 갖는것도
다 장종훈선수 당신 때문이였습니다.
그런 당신이 이제 은퇴를 합니다.
다음에 부디 명 감독으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피플스_스터너
05/06/16 18:50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장종훈 선수같이 노력형의 선수를 좋아합니다. 또 순진하게 생겨서 더 좋구요^^

그러고보니 요즘 잘나가는 코리언들은 전부 순진하고 마냥 착하게 생겼군요. 최희섭, 박지성, 박주영 등등...

장종훈 선수, 당신은 이미 전설입니다.
05/06/16 18:56
수정 아이콘
빙그레 팬으로서 정말 그립습니다. ^^
당신은 레전드!
이제 김태균선수가 장종훈 선수의 뒤를 이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한화의 4번타자 계보로요~
천재여우
05/06/16 19:24
수정 아이콘
진짜 어느 누구 말대로 역대 최고의 은퇴경기를 치뤄주길........
FreeDom&JusTice
05/06/16 19:27
수정 아이콘
아 아직도 생각나는 99년 추석 3연전(vs현대전) 이때부터 10연승달리면서 현대 떨쳐냈죠 이때 고3임에도불구하고 서울가서 최종우승하는 장면 보고왔다는 (야자는 물론 땡땡이) ^^
05/06/16 19:52
수정 아이콘
장종훈선수....잊지 못할 겁니다. 35번 영구결번 되는건가요??
나르는닥
05/06/16 20:08
수정 아이콘
장종훈 선수이 일궈낸 수많은 신화들과 업적... 정말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근 3년간 자신의 은퇴할 때를 놓친 것, 그로인해 한화는 참 많은 부침을 겪어 왔다는 것 .. 장종훈이라는 팬이 아닌 한화의 팬으로 아쉬운 점입니다.
05/06/16 21:14
수정 아이콘
글 잘봤습니다.ㅠㅜ 눈물이 날려하네요.
05/06/16 21:18
수정 아이콘
송진우선수의 퍼펙트 게임은.하나씩 차례로 깨어졌죠.
실책으로 출루. 노히트노런 남음.
안타. 완봉승 남음.
실점. 승리 남음
역전. 패배
이때 저도 보면서 울었습니다.왜 그렇게 해태가 얄밉던지요.ㅠㅜ

그때선동렬 선수는 장난이 아니었죠.
한국시리즈 1차전은 양팀 에이스들의 대결이 되야되는데,김영덕감독은 당시 빙그레의 에이스 한용덕 선수를 2차전에 출전시킬정도였죠.

99년도는 제가 나라를 지키느라 못봤는데(우승한것만 알았습니다).
3할이 7명이라니 -.- 대단했었군요.거기에 10승3명에 확실한 마무리투수까지.
비갠후에
05/06/16 21:36
수정 아이콘
사랑이 듬뿍 묻어있는 글이네요. 한화에 대한...그리고 프로야구에 대한...부럽습니다. 진정한 팬이라는 것...
하늘높이
05/06/16 21:41
수정 아이콘
저도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ㅠㅠ글 정말 잘 봤습니다. 90년대 초반 에이스는 한용덕 선수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송진우 선수였나요? 원투에 한용덕 송진우 그리고, 한희민..ㅠ.ㅠ91년 한국시리즈 장채근한테 맞은 역전 중전 안타 아직도 기억합니다.
윤영식
05/06/16 21:57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때 장종훈 선수보러 진짜 많이 갔었는데
중학생 되고 고등학생 되니 야구장에서 멀어졌죠
친구들은 다 축구며 농구며 좋아하고.
야구장 가자고 해도 같이 가주는 놈 하나도 없고,
대전에서 장종훈 선수 은퇴식 하면 꼭 가야 겠네여...
장종훈 화이팅...
근데 4번타자 왕종훈 만화에서 왕종훈의 이름을
장종훈 선수한테서 따온 건가여?
원래 일본만환데..그 때의 장종훈 선수의 포스란.....
이윤열 최연성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저리가라 였죠..
윤영식
05/06/16 21:59
수정 아이콘
에이스가 송진우 선수 였나여?
그때는 송진우 선수 거의 신참 수준 아닌가여?
그때 이상군선수 한용덕선수 글고 한희민선수가 잘나가지 않았나여?
그 전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여
온리디스플러
05/06/16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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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네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구선수이면서 한사람이
자기에 길에서 떠난다는 말을듣고....
장종훈 이름 석자에실린 무게가..........

화려했지만 아쉽게 떠나가지만
화려했던만큼 멋진 지도자가되시길바랍니다...
05/06/1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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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전이라면 한용덕선수가 에이스였겠지만 92년의 에이스는 송진우선수 아닌가요? 그리고 송진우 선수는 89년에 데뷔했고 한용덕선수는 88년데뷔햇으니 그렇게 데뷔차가 많은 것도 아니죠.
☆소다☆
05/06/16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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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봤습니다..정말 예전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해태와의 경기에서 송진우선수//정말 아까웠죠
제 기억으로는 해태의 장채근선수같은데..맞나??
그분에게 크게 맞으면서 결국 한화가 졌던 기억이 나네요..가물가물하지만
장종훈선수..그 실력 그대로 아마 코치의 위치에서도 보여 주실거라 믿습니다..비록 종훈선수는 떠나시지만 그는 영원한 한화맨입니다..
그리고 우리 충청도의 영웅이고요^^
반바스텐
05/06/16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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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팬으로서 장종훈선수를 우상으로 여기던 제에게 이런 좋은 글은 정말 감사드리고 싶네요.
예전에 공부한다고 하면서 제방에서 라디오 틀어놓고 한화경기 듣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야구장처음갔던 경기가 빙그레와 LG경기였는데 그 경기에서 장종훈선수가 장외홈런을 쳤었죠. 정말 아련한 추억이네요. 장종훈선수가 42홈런쳤을때는 정말 아무도 못 깨는 불멸의 기록인줄 알았는데 세월이 참 많이 흘렀네요. 장종훈선수가 떠나서 아쉽지만 더 좋은 모습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실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장종훈선수 화이팅!
Spectrum..
05/06/16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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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한 기록..
기록의사나이입니다. 어렸을때 어린이회원 모자 쓰고 가서 경기보면서 즐거워하던게..
벌써 이렇게 지나서 은퇴소식까지 듣고..
종훈선수. 더더욱 멋지게 한화 이끌어주세요!
Ms. Anscombe
05/06/17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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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군과 한희민 선수는 80년대 후반을 이끌었던 선수들입니다.

90년대 초중반 빙그레의 에이스는 한용덕입니다. 그기간 송진우 선수 역시 뛰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에이스는 아니었죠. 실력이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선발투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시 한국 야구의 이상한 관습 덕에 선발이며, 마무리며 가리지 않았지만 말이죠.(에이스가 강력한 선발 투수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보면, 지금까지도 던져주는 송진우 투수가 참 대단해 보입니다.

어찌되었든, 장종훈 선수는 초창기 이만수 선수와 함께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타자입니다. 이승엽은 어느 정도 정착된 이후의 선수이기에 의미나 무게감에서 조금 차이가 날 것 같군요.(양적 차이라기 보다는 질적 차이. 아무래도 시대가 다르기에)

그런데 영구 결번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구단의 입장은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표현만 그런 식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장종훈 같은 선수의 영구 결번은 긍정적으로 검토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것이죠. 현재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타자를 결번시키지 않는다면 누굴 시켜야 할까요?

연습생 신화나, 좋은 이미지 같은 것들을 떠나서, 장종훈 선수가 보여준 능력과 기록만으로도 이미 모든 야구팬의 축복을 받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습니다. 기억에 남는 은퇴식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Ms. Anscombe
05/06/1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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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덧붙이면, 장종훈 선수의 위대함을 언급하는데 빠지지 않는 부분이 바로 '통산 기록'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죠. 예컨대, 에디 머레이(Eddie Murray)나 칼 립켄 주니어(Cal Ripken Jr.) 같은 선수들은 단 한 번도 35+ 홈런 시즌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립켄의 경우 단 한 번의 30+ 홈런 시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3000안타를 쳐냈고, 머레이는 500홈런, 립켄은 400홈런을 쳐냈습니다.

물론, 이들의 꾸준함은 존경받을만하고, 립켄의 경우엔 유격수이고,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존경의 제곱을 해 주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적어도 타격에서는) 리그를 압도하는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반면, 장종훈 선수는 통산 기록의 측면에서도 뛰어나지만, 전성기 동안 리그를 압도했습니다. 3년간 홈런 1위를 차지하는 동안 28, 35, 41 홈런을 쳐냈는데, 당시의 20홈런과 지금의 20홈런의 무게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일례로, 95시즌 김상호는 25홈런으로, 93시즌 김성래는 28홈런으로 홈런 1위를 차지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정민철 선수의 94시즌은 2.15의 평균 자책을 기록하고도 14승 10패, 97시즌은 2.46으로 14승 11패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타선의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는 지금에 비해 투고타저의 시대였음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약팀 태평양에서 뛰었던 최창호 선수의 경우 89시즌 2.22로 10승 14패, 93시즌 2.99로 7승 12패를 기록했었죠.

91, 92 시즌 연속 홈런 2위를 기록한 김기태 선수는 각각 27, 31개의 홈런을 쳐냈습니다. 장종훈 선수와는 각각 8, 10개 차이였죠. 그리고 3위와의 격차도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장종훈 선수는 통산 성적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점을 더 강조하고 싶은데) 상당 기간 리그를 완전히 압도했던 선수라는 점입니다. 꾸준함과 압도적인 모습이 결합되어 더 위대한 선수로서의 이미지가 형성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People's elbow
05/06/1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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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한화이글스 게시판에서 활동하시는 분인가요? 저도 만년 골수 한화팬인데.. 혹시 아이디가? 그리고 좋은 글 너무 잘봤습니다. ^^
05/06/17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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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90년도 초에 이상군 선수 싸인볼 있었는데 흑 ㅠㅠ

92년 여름에 그걸로 야구하다가 옆집 담장으로 넘어가서 젠장 -.-!!!
brownsugar322
05/06/17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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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존경하는 우리 학교 선배님,
99년 한국시리즈는 잊을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갓 국민학교에 입학한 어린 소년에게는 꿈이 되었고
막 세상에 뛰어든 청년에겐 희망이 되었습니다.

저의 이야기 같네요;;

덧:정민철선수 싸인볼은 너무나 소중한 보물입니다;;
~Checky입니다욧~
05/06/17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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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살짝 눈물이...
대전에서 자라서 자연스럽게 빙그레 팬이 되었고 정말 번번히 한국시리즈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99년, 이미 나이도 들었고 야구에 대한 관심도 떨어졌지만 한화는 다시금 저에게 감동의 눈물을 선사해주었지요..
저도 장종훈선수의 싸인볼은 정말 소중한 보물입니다...
덧, 팬 싸인회에서 한용덕 선수랑 악수도 해보았습니다. 10년도 더됐는데 기억이 생생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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