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시가 넘어간 시간이었다. 자취방에서 하릴없이 지뢰찾기나 하고 있던 나는 목이 말랐고,
어쩐지 캔맥주가 먹고 싶어졌다. 유월 셋째주였다. 모기향 냄새가 매캐했다. 등에 열선이 있는듯 후끈후끈했고 티셔츠가 끈적끈적했다. 그래서 캔맥주가 먹고싶어졌나 보다.
편의점은 자취방에서 3분만 걸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사실 가기가 귀찮았지만 맥주를 마시고 싶은생각이 더 컸다. 냉장고에 냉장 소시지가 있었기에 안주 걱정은 없었다. 그래서 편의점으로 가기로 했다.
편의점에 갔더니 두가지 변덕이 생겼다. 첫째는 캔맥주가 아니라 하이네켄 병맥주를 샀다는 것이고, 둘째는 냉장고에 냉장 소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스윙칩(감자 과자인데 짭짤하고 약간 매콤한 것)을 안주로 사기로 한 것이다.
스윙칩은 선반 아래쪽에 있었다. 그래서 쭈그려 앉아서 스윙칩을 집어야 했다. 쭈그려 앉았는데 찌직, 하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찢어진 것이었다. 찌직, 하는 소리는 분명 카운터를 보고 있던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에게도 들렸을 것이었다. 약간은 민망했지만,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하고 넘기면 될만한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찢어진 것일까? 청바지를 입었으므로 바지가 찢어질 일은 없었고, 그렇다면 팬티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그럴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뭐든지 아끼는 사람이므로, 오래된 팬티가 찢어지는 것은 사람이 수명을 다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태연한척을 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태연하게 카운터로 가서 하이네켄 병맥주와 스윙칩을 내밀었다.
지갑에 현금은 일주일째 없었으므로, 신용카드로 결제를 해야할 것이었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꺼내려고 하는데,
"저기, 아마 팬티가 찢어지셨나 봅니다?"
라고 당돌하게, 이 스물 일곱인지 여덟인지 아니면 그냥 삭아보이는 고등학생인지 모르게 생긴,
턱수염이 3mm정도 뾰족뾰족 나 있는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런지 얼굴은 묘하게 부끄럽게 웃는 얼굴에 홍조를 띄고 있었다.
인생은 이벤트로 가득 차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내 특유의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남자한테는 짓지 않는 표정인데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것이었다.
"네……"
당신이라면 달리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네……" 밖에는 할말이 없게 만드는 질문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다. 문답이 이렇게 진행되면 당연히 대화가 이어질 건덕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인데,
이 편의점 정직원인지 아르바이트생인지 하는 녀석은 대화에 목말라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반응에 재미를 느낀 것인지 또 한마디 더했다.
"팬티가 찢어지는건 심상치가 않은 일입니다. 좋지가 않다는 말이에요. 그건 말하자면 그러니까 암에 걸릴 징조 같은 거라구요."
여기까지 듣고 나자 기분이 좋지가 않아졌다. 맥주 한캔 사마시러 왔다가, 팬티가 찢어지고, 그 소리를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남자놈에게 걸리고, 그것도 모자라 팬티가 찢어지는 것은 암에 걸릴 징조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듣고 나니까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예의 애매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녀석은, 하이네켄 병맥주와 스윙칩을 바코더에 찍고 나서 얼마얼마입니다 라고 말하고 내가 내민 카드를 카드기에 긁고 "서명 부탁드립니다."라고 하기까지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제가 하는 말은 진짜라구요."
나는 드디어 썩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보는 사람까지 정색하게 만드는 정색을 지을 줄 아는 것이 내 장점이었다. 2초간 고민하다가 지금 쏘아붙이지 않으면 집에가서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요." 라고 내뱉었다.
아르바이트생은 태연하게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그 팬티 당장 집에 가서 벗은 다음 불에 태우세요. 저도…… 이런말 하기 조심스러운데.
그거 말하자면 귀신이 같이 입으니까 팬티가 터지는거란 말이에요. 아니면 지금 여기서 벗어서 저한테 주세요. 제가 불에 태워 드릴게."
…라고 했다. 나는 갑자기 판타지 세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되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그런 기분이 약 1초간 지속되었고, 당혹감과 약간의 모욕감과 아주 미량의 공포와 여하튼 그런 종류의 잡다한,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실로 다양한 기분들을 삼키면서, 혹은 그런 기분들에 휩싸여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정색하고 편의점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조심해서 가세요! 제 말 흘려듣지 마세요!" 라는 그새끼의 말이 복잡한 심정에 쐐기를 박았음은 굳이 보태서 적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아무래도 찝찝했던 나는
집에 와서 서둘러 팬티를 확인해봤는데, 아무것도 찢어져있지 않았다.
그녀석 팬티가 찢어진 것일까? 아니면 돌아다니는 귀신 팬티라도 찢어진건가?
산다는건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8-11 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