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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9/23 06:56:15
Name 윤여광
Subject Fallen Road. Part 1 -1장 18화- [-조우#9-]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8화.
[-조우#9-]

  프렌은 우리에게 바로 레인저 하우스로 동행하기를 권했다. 파벨이 먼저 떠난 후 그는 어차피 특별히 챙겨야 할 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여관에 더 이상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신세지게 된 것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이고자 하루 더 체류할 예정을 바꾸기로 하고 우리는 프렌과 동행했다. 단 방에서 나가기까지의 시간은 꽤 긴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먼저 떠난 파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홀에서 요란하게 맥주를 모두 마신 쥰은 주인장에게 숙박이 가능한지를 물었고 주인장은 남은 방이 없다고 다른 여관을 찾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쥰의 짜증 덕분에 우리는 한 숨만 내쉬며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파벨이 먼저 돌아가겠다며 과감히 문을 열고 나갔고 계속해서 일관적인 내용으로 짜증을 내는 쥰의 목소리로 보아 아마도 지나가는 그를 발견하진 못한 것 같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관을 빠져나가는 파벨의 발걸음은 분명 다급하고 긴장이 가득했을 것이다. 이건 그냥 내 추측이다.

  쥰이 다른 여관을 찾아 떠나는 동시에 우리는 갑갑한 방에서 나와 주인장에게 배려해주어 감사하다는 짧은 인사만 남겨둔 채 레인저 하우스로 향했다. 방 안에서 오래 기다린 덕에 초초해진 것은 파벨뿐만 아니라 프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우리와 함께 사절단에 합류하여 수도로 파견할 두 명의 대원에게 내릴 지시 사항 덕분에 우리가 제대로 대로의 모습을 구경할 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가는 그 시원시원한 걸음이 아크는 멋져 보였겠지만 켈모리안은 기억할 새도 없이 휙휙 지나가는 주변의 광경이 아쉬운지 가는 길 내내 뒤를 돌아보며 아아 하는 작은 감탄사만 내뱉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분명히 이것은 우리에게 잘된 일이다. 졸지에 무일푼의 거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수도까지 가기에는 무리였고 무엇보다 한 번 경험한 일에 대한 공포가 나는 아직 남아있었다. 그 때 아크 혼자 혹은 내가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면 이렇게 일이 틀어지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현실은 그게 아니니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된다. 결국 결론은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것이고 아크 역시 나라는 짐덩이를 하나 안고 수도까지 가기엔 또 다시 언제 찾아올지 모를 위험이나 변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쇼넬의 사절단과 동행한다. 그것도 왕녀께서 지휘하는 사절단에 말이다. 호위 병력에 대해선 말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국의 왕녀가 타국에 발을 들인 이상 비록 휴전중이라고는 하나 위험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당연히 강대할 것이다. 어쩌면 수 백 수천에 이르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연합회의에서의 증언이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3개국의 높으신 귀족들과 왕가의 사람들이 모일 그 곳에 나 같은 평민이 서기는 너무나 큰 자리가 아닌가. 거기다 대강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의 발언은 경우에 따라서 정말 코르사크 정벌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아크와 켈모리안은 이런 생각을 갖고 파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생각은 무슨 개뿔!! 그냥 공짜라 좋다 이거지!

“요르씨. 왜 그러시오.”
“아. 죄송합니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그들은 나와는 꽤 거리를 두고 앞서 가고 있었다. 빠르기도 해라. 프렌은 급한 마음에 나를 재촉하는 얼굴이었고 저것들은 그저 좋다고 시시덕대고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았나 그래. 나처럼 대충이라도 따져본다면 저렇게 마냥 좋지만은 않을 텐데. 이상하네. 뭐 사실 나 역시 안전과 공짜라는 두 가지 조건은 매우 좋긴 하다. 그래 나도 좋긴 좋은 거다.

“저어. 프렌씨. 저희와 함께 갈 대원 분은 어느 분이신가요.”
“어제도 만났겠지만 일단 란이 함께 할 거요. 그리고 크리스 맥코일이라는 친구가 가게 될 것이오. 아 그러고 보니 요르씨의 일행분들과 그 친구가 나이가 비슷하겠군. 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겠소.”

  죄송하지만 전 조용히 심심하게 가고 싶습니다만.

“히야아. 왕녀와 함께 수도로 가게 되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몸 좀 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있으니 그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안 그래?”
“그렇게 따지고 들긴 싫다만. 뭐 운이 좋긴 좋지.”
“괜한 참견하고 싶지는 않네만. 자네들이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으면 좋겠네. 참으로 얼떨결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네들은 중요한 짐을 지게 된 거라네. 말 한 마디에 전쟁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고 사절단 분들과 함께 이동하는 동안에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 조심해야 할 걸세.”
“예. 죄송합니다. 프렌. 이 바보들은 제가 잘…….아악!”

  그만 좀 때려. 머리 깨지겠네. 아크는 적절히 화내야 할 지점을 치고 들어오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프렌은 피식 웃을 뿐이었고 말동무를 잃은 켈모리안은 다시 길거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시끌벅적한 도시의 거리를 걷는 건 일단 끝이 되겠구나. 좀 더 여유 있게 둘러보고 싶었건만 지금 당장은 프렌의 급한 걸음에 맞춰 빠르게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거리 가득한 상인들과 그들이 내놓은 여러 신기한 물품들 그리고 그 와중에 필요로 하는 몇몇을 찾으려는 모험가들이 만드는 모습은 돌아오는 길에 꼭 한 번 더 들러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란! 크리스! 있는가? “
“여어. 대장.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오셨어요.”

  프렌이 하우스의 문을 열며 두 사람의 이름을 크게 외친 것을 무안하게 만들려 작정이라도 한 듯이 그들은 바로 앞으로 나서며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보아하니 이미 시장으로부터의 지시가 떨어진 모양이다.

“따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네만.”
“뭐. 그렇다네. 프렌 자네가 가고 난 뒤에 곧바로 지시 사항이 내려왔지. 자네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뭘 그리 오래 걸린 것인가. 뒤에 서 계신 저 분들이 앙탈이라도 부린 건가? 으하하!!”

  어쩌면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건 차라리 죽도록 패서 조용히 만들면 될 테니까. 쥰에게는 그딴 무식한 방법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

“하하. 아니네. 그것보다 크리스.”
“예. 대장.”
“뒤에 서 계신 이 분들의 채비를 도와주게. 사정은 이미 알고 있겠지.”
“예. 대장.”

  사정? 오크 한 마리도 똑바로 처리 못해서 죽을 지경까지 몰린 뒤에 그것도 모자라 내려둔 짐마저 몽땅 잃어버린 처량하다 못해 불쌍한 세 남자의 사정? 들었어? 에라이.

“란과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자네가 신경 좀 써주지. 자. 저 친구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크리스.”
“예. 대장. 안녕하십니까. 라임턴 레인저 하우스의 일원 크리스 맥코일이라고 합니다.”
“아아. 네. 요르라고 합니다. 이쪽은 아크 단 그리고 저 멍청이는 켈모리안이라고…….”
“거 참. 실례구만! 사람을 소개하는데 멍청이라니!”
“하하. 사이가 좋으신가 보군요. 부럽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일단은 복장부터 다시 점검해야 겠습니다.”
“복장이요?”
“예. 앞으로 여러분은 저와 란과 함께 공식적으로는 라임턴 레인저의 일행으로서 행동하시게 됩니다. 연합회의에 나서셔야 할 분들이 차림새가 이래서야 곤란하시겠죠.”

  우리 차림새가 뭐 어떻다는 거야 하며 스윽 쳐다보니 어디 얼룩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만 흰색 셔츠 한 장에 그리고 바지. 끝이다. 이래서야 곤란하지. 거기다 우린 의복을 살만한 돈 따윈 일절 없다. 그냥 얌전히 받는 게 낫다. 어차피 신세 질 모양새라면 아무 생각 없이 받기만 하는 게 서로 편한 길이 될 것이다.

“맞는 옷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크씨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크리스는 우리를 2층의 의복실로 데려가더니 그들에 비해 작은 덩치인 나와 켈모리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그렇다고 나와 켈모리안이 난쟁이 땅딸보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사람들에 비하면 야 왜소하다고까지 보일만하니. 의복실은 방어구나 무기가 아닌 주로 예를 갖추며 지루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까딱까딱 고개를 흔들거리며 졸 것 같은 그런 곳에나 어울리는 화려하거나 깔끔한 예복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원수에 맞춰 준비되어 있다 보니 수가 많지는 않았고 죄다 커보였다. 크리스가 그리 고민하는 게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어디보자. 음. 일단은 화려한 것 보단 얌전한 게 낫겠죠? 이쪽에 걸린 옷들이 좀 더 낫겠군요.”

  크리스는 벽에 가로로 길게 박힌 봉에 걸린 옷들을 이리 저리 헤집으며 우리에게 맞는 옷을 찾으나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우리에게 맞는 옷을 찾지 못하자 그는 실망한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사실 우리의 행색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가 어느 잘나가는 높으신 귀족 양반의 자제들도 아니었고 그거 엔트릴 국경 근방의 시골 마을 오즈의 촌놈들인데 옷차림이 어떤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만 우릴 데려다 써먹으실 양반들은 그게 또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음. 예복은 힘들겠군요.”
“저. 그냥 평상복이나 간단한 방어구를 갖추는 게.”
“안됩니다.”
“어째서죠?”
“이제 곧 베니자크 궁으로 바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들과 합류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떠한 무장도 장비할 수 없습니다. 아마 어느 정도 행동에서 제한을 받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그건가. 무장을 갖출 수 없다는 크리스의 얼굴에는 약간의 불쾌함이 서려있었다. 그 역시 납득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산뜻한 기분으로 그들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처럼 그들은 자긍심 높은 레인저로서 타국의 사절단에 의해 무장을 해제 당한다는 사실이 자존심에 상처를 낸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소리를 높여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대는 타국의 왕녀 로즈 쇼넬.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기 이전에 어떻게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것이 분명하다. 아마 그런 계산 덕에 그와 란은 이 기분 나쁜 임무를 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타국에 넘어와서 그 나라의 군 병력에 동행을 요청하면서 무장은 해제하라니.”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크는 오랜만에 맞는 지적을 하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크리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싱긋 웃는 얼굴이 왠지 대답을 피하는 모습이었지만 아크는 그만두지 않고 오히려 더욱 눈에 힘을 주며 그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뭐. 별 수 있겠습니까. 상쾌한 기분으로 받아들일 요청은 아니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요. 시장님을 거쳐 명령으로서 내려온 지시 사항이니 지킬 수밖에.”
“그런가요. 저희야 뭐 편하게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니 불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흠? 뭔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아. 하하. 아닙니다. 별 일 아니에요. 그냥 좀 신경 쓰여서.”
“네. 신경 쓰지 마세요. 이 녀석. 자존심만 쎄서는 좋은걸 좋다고 못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랄까요.”

  만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네 녀석이 나에 대해 그렇게 정확한 분석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히 그 말을 듣고 심히 불쾌하여 네 놈의 머리통을 쥐어박는 것을 보아하니 나는 솔직하지 못한 놈이 맞는 모양이다. 지적은 고맙다만 네 머리통을 쥐어박는 내 주먹에 구태여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다. 언제든 날려주마. 우리가 헤어지게 되는 그 날까지. 이 망할 녀석.

“아! 좀 그만 때려!”
“그럼 그 입 좀 닫아. 넌 다 싫은데 그게 제일 싫어.”
“하하. 두 분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이는군요. 마치 형제처럼 말입니다.”
“에엑?!”
“에엑?!”

  아마 같은 이유에서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내지른 우리 둘은 한 번 더 얼굴을 마주하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다.

“켈모리안 저 친구는 여행 도중 만난 이입니다. 긴 시간을 같이 보낸 것은 아닙니다만 둘이서 죽이 잘 맞는 것 같네요.”

  아크의 터무니없는 설명.

“아아. 그러시군요. 모르는 사람이 봐서는 형제이시거나 정말 친한 친구 사이 같습니다. 아크씨 말 대로 두 분이서 잘 맞는 것 같군요.”

  그 따위로 납득하면 크리스 당신도 때릴 테다.

“부럽습니다. 저는 여태 형제나 친구와 같이 요르씨와 켈모리안씨처럼 그렇게 다투거나 잘 지내본 적이 없거든요.”
“아아. 가족 분들과 떨어져서 지내시나요.”
“아뇨. 없습니다.”
“네?”

  없다고 말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크리스를 보며 대강 눈치나 좀 챘으면 좋았을 켈모리안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에게 되물었고 아크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펀치 타임. 으랏차!

“죄송합니다. 괜한 일을 물어서.”
“하하. 아닙니다. 사실은 기억에 없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이곳에 살고 있었고 어느 순간 레인저가 되어 있더군요. 사실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저는 계속 이 레인저 하우스에서 생활해왔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레인저가 된 것이 말입니다.”

  크리스는 잠시 고민을 접고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릴 적 기억이 없는 그는 지금은 물러난 어느 레인저의 집에 맡겨져 자라왔다고 한다. 자식이 없는 집안에 양자로 지내게 된 그는 딱히 놀아줄 형제도 친구도 없는 따분한 집보다는 아버지라는 자를 따라 레인저 하우스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은 그 곳에서 그는 처음 검을 만지게 되었고 몰두할 일이 필요했던 참에 배우게 된 검술이 결국 그를 이곳의 대원이 되는 길로 인도했다. 몇 년 전 사고로 양부모를 잃게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은 것이 지금에 와서야 죄스럽다는 그는 그 사고가 무엇인가에 대해 묻기 전에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웃어보였다.

“뭐. 지금 제가 레인저로서 소임을 다 하는 것이 그 분들에게 보답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임무 역시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아무 것도 없이 혼자 남겨진 어린 그를 길러준 대가로 짊어지게 된 짐이 그를 지탱하는 동시에 누르고 있었다.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는 자존심을 앞세우기 이전에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듯 했다. 더 이상 관여할 일은 아니기에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내 일 챙기기도 바쁜데 왜 계속 남의 사정에 관심이 더해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참견을 재촉당하는 것 마냥.

“아. 또 떨어졌네.”

  크리스는 바닥에 웅크려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찾기 힘들 정도로 작거나 잘 보이지 않는 물건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이내 일어나서 바닥에 떨어지면서 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그것을 다시 목에 걸린 줄에 매달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펜던트였다. 목에 메고 있는 줄은 빛나는 그것과는 달리 허술해 보이는 낡은 금속 줄이어서 왠지 그 품위를 깎아내리는 것 같아 새 것을 사서 달라고 권하게끔 오히려 내 속을 재촉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장사치들이 봤다면 꽤나 달려들었을 모양새다.

“뭔가요? 꽤 값이 나가보이는데.”
“아아. 선배께…….아. 아니지.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유품입니다.”
“그 줄도 같이 물려받으신 건가요?”

  줄마저 유품이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나는 새 것을 사라며 권유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예. 그렇습니다. 줄이 코어에 비해선 많이 빈약하지요?”

  좋아. 그만두자.

“그냥 풀어두고 다니는 게 낫지 않겠어요? 거 험하게 움직이고 하면 금방 없어지겠구만. 아니면 줄이라도 좀 바꿔서 달고 다니시지.”

  켈모리안의 말처럼 움직임이 커지는 도중에 저런 허술한 줄에 매달고 다닌다면 정말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풀어두거나 혹은 줄을 바꾸거나. 이 놈.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선수를 치다니.

“하하. 이상하죠. 검을 다루거나 말을 탈 때는 멀쩡히 잘 붙어있는 녀석이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는 가끔씩 떨어져서는 사람 골치 아프게 만든답니다.”
“신기하군요. 조금만 크게 움직여도 금방 떨어질 텐데.”
“네. 선…….아니 아버지께서도 항상 근무 중이나 임무 수행 중에 메고 다니셨던 물건인지라 저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메고 계실 때도 이랬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저는 그런 액세서리 같은 건 잘 안 맞더라고요. 가뜩이나 검 다루는 게 서툰데 가슴팍에서 짤랑짤랑 거리고 하면 골치 아파서.”
“그거랑 네가 약한 거랑은 별 관련 없어 보이는데. 소질 문제야. 소질 문제.”
“누군 소질이 대륙 한 가득 충만해서 오크 한 마리 처리 못하고 실신 당한 모양이네.”
“나쁜 놈.”
“때리지 마.”

  크리스는 나와 아크의 대화를 들으며 또 뭐가 재밌는지 피식 웃었고 켈모리안은 내가 한 대라도 맞길 바라는지 꽉 진 아크의 주먹을 보며 어서 치라며 재촉하는 듯 갈망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질의 문제는 모르겠다.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지 소질의 문제라고 해서 그 동안의 내 노력을 다 필요 없는 부질없는 것으로 몰아세우고 싶진 않다. 다만 어째서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지 뭘 믿고 검 하나 달랑 들고 개죽음이나 당할지 모르는 험한 세상으로 나와 보려고 했는지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객기일까? 아니면 그냥 이제 와서 그만두기는 아까우니 햄이라도 하나 베어보고 관두자는 심보?

“두 분께서 어떤 실력을 갖추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처음으로 여행길에 오르신 것이라면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크 한 마리 정도에 위기를 맞으시기엔 남은 여행길이 너무 길지 않겠습니까.”

  아크는 부끄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지만 내내 생각하던 객기가 또 다시 발휘된 나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대련 한 번 부탁드립니다.”
"네?“
“남은 여행길에 얼마나 더 많은 위기를 맞이하게 될 지 예상이나 해 볼 겸 짧게 한 번 부탁드린다는 겁니다.”

  그의 조롱 섞인 농담에 나는 불쾌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대련을 청했다. 사실 이 곳 라임턴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해서 듣게 되는 그들의 농담에 쌓인 불쾌함이 사실은 창피한 마음에 그러나 겉으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 하는 허세로 포장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아. 요르여. 어쩔 것이냐. 북서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대 레인저의 일원에 이렇게나 쉽게 선전포고를 내던지다니. 객기 하나 만큼은 오크 몇 마리 때려잡고도 남겠구나.

“지금은 베니자크 궁으로 합류해야 하는 준비 때문에 시간이 여의치 않습니다만.”

  그래요. 그래요. 시간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책임과 의무를 잊어버린 본인의 모자란 인내심에서 무심코 던져진 말이니 크리스 맥코일 그대께서는 넓은 마음으로 내 말을 잊어버리고 어서 우리에게 깔끔한 입을 거리를 내주시는 것이…….

“정 원하신다면 3합 승부 정도는 응해드릴 수 있습니다. 가시지요.”.

  어우. 소심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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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23 07:08
수정 아이콘
잘 읽고있어요~
08/09/24 17:36
수정 아이콘
이상하네...
오타 지적을 한 것 같은데 덧글이 사라진 것 같네요.

오타 자체도 바뀌지 않았고요.
어떻게 된 걸까요. 쪽지가 오지도 않았고...

다시 한 번.
"줄마저 유품이라는 대답이 나온다[는]"
는->면으로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abrasax_:Respect
08/09/27 12:54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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