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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7/01 13:28:23
Name 윤여광
Subject Fallen Road. Part 1 -1장 11화- [-조우#2-]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1화.
[-조우#2-]

#
“그것 외엔 보고 할 일은 없는가?”
“예. 지시하신 진陣에 관한 것은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재수색 해보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이 어두운 밤에 수색 인원이 늘어난다고 한들 발견할 물건이 아니니. 그만두지. 수색대로 나가는 인원이 늘어나게 되면 그것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하지만 이곳은 라임턴의 레인저들이 안전을 보장하는 북서로의 진입로에 언덕 하나만 내려가면 당도할 지점이지 않습니까. 될 수 있으면 확실히 수색하는 것이 로즈전하도 납득하시지 않을…….”
“그 점이라면 내가 설득해두겠네. 모두들 며칠 사이 무리한 여정으로 힘들 텐데 푹 쉬어두게. 라임턴에 내일 당도할 것이라고 전령까지 보내뒀네. 쇼넬의 상징인 홍연의 기사단이 밤샘 수색으로 얼굴들이 굳어서야 곤란하지 않겠나. 걱정 말고 돌아가서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게. 아. 안됐지만 경계태세까지는 풀어선 안 되니 고생해야 할 이들에겐 수고하라고 좀 전해주겠나.”
“알겠습니다. 파벨경.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수색을 더 이어가겠다는 부하를 돌려보내고 파벨은 깊게 한 숨을 내쉬었다. 밤공기가 답답한 가슴을 풀어주지 않을까 하여 깊게 들이마신 숨은 결국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품은 채 다시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왕녀와 조우한 이래 가장 무거운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이번 원정은 꽤 큰 부담이었다. 단순한 사신단의 호위가 아닌 그가 섬기는 왕녀의 호위. 그리고 그 왕녀가 속에 품은 뜻을 알고 난 후엔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애써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아무 소용없어 보였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이제 곧 엔트릴 에서의 공식적인 첫 일정이 시작된다. 호위 병력도 증강될 것이고 지금보다는 훨씬 안전한 호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넘기면 된다. 괜찮을 것이다. 단 한 사람을 지키는 일이다. 30명의 쇼넬 최고의 정예기사들로 구성된 기사단이 호위하고 있고 기사단을 뒷받침하는 병력 또한 충분하다. 파벨 그 또한 그 무리에 속해있다. 설사 적과 조우하게 된다 한들 어느 누구 하나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기에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가요?”

  잠시 다짐 하는 사이 눈앞에 나타난 그녀 덕분에 파벨은 기겁을 하여 예를 갖추기 급급했다.

“저…….전하!”
“어머. 그렇게 놀랄 만큼 무서운 얼굴인가요. 나란 사람은.”
“아…….아닙니다! 당치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아 저어. 그게.”
“별 일이군요. 파벨경이 이렇게나 긴장하고 있다니.”
“소…….송구합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당황하게 만들고 있을까. 십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자신을 옆에서 보필해선 충신이다. 죽이 잘 맞는 동무와 같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고마운 신하. 그리고 그 이전에 메말라 부서질 것 같은 황폐한 가슴을 지탱해주는 왕녀가 아닌 한 사람의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유일한 벗이었다.

“지시했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예! 디텍터를 동원하여 2개조가 수색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집중적으로 살피라 명하신 진이나 시전자의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범위를 좀 더 넓혀 수색에 나서야 할 듯 합니다.”
“그래요. 이 부근에 진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정확한 위치를 감지할 정도로 강한 기운이 남아있지 않은 게 아쉽군요.”
“예 전하. 하여 내일 다시 재수색에 나서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만 밤이 깊었고 예상보다 일정을 앞당겨 원정을 진행해온 터라 병사들의 피로누적을 생각하여 추가 수색보다는 휴식을 명하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내일 라임턴에 당도하는 대로 그 곳의 레인저들과 다시 수색대를 편성하면 훨씬 효율적인 정찰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미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오시는 길 아니신가요.”
“예?”
“어떠하신가 라며 내 의중을 물으셨습니다. 이미 그렇게 명을 내리신 후 어떻게든 절 설득하시겠다고 마음먹고 있으신 게 아닌가 라고 묻는 겁니다. “
“저.전하!”

  사실 이런 식의 일처리가 처음이었던 적은 아니었다. 파벨은 될 수 있으면 병사들의 배려해주려 약간의 무리수가 있다면 될 수 있으면 그것을 피해가는 식의 병력 운영을 해왔다. 단 그것은 전장이 아닌 지금과 같은 단순 호위 원정에서나 가능한 일. 이것이 만일 전장이었다면 그것은 로즈 왕녀의 명령 체계를 뒤집는 하극상과 같은 조치였을 것이다. 그녀 역시 파벨이 그러한 처사를 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그를 풀어주기 위한 약한 농담이었으나 지금의 그에겐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다.

“지…….지금이라도 당장 수색대의 재편성을…….”
“오늘의 파벨경은 좀 이상하시군요.”
“예?”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는 듯 합니다. 홍연의 기사단답지 않군요.”
“아아…….”
“지금까지 나와 함께 기사단을 이끌며 수도 없이 전장을 헤쳐 나오지 않았습니까. 겨우 이런 가벼운 원정으로 긴장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군요. 파벨경이 그토록 신경 쓰는 군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치니 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파벨경.”
“예. 전하.”

  조용히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파벨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곧 그의 귀에 당도할 것 같았던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꽤 시간이 지난 후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따금씩 지면을 긁고 지나가는 바람의 거친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전하?”
“역시 불편하군요.”
“예?”
“둘만의 대화에선 편하게 대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
“이번 원정이 벌써 6일째입니다. 그 동안 단 하루도 그 약속을 지켜주신 날이 없군요.”
“하…….하지만 전하 그것은.”
“너무나 급하게 진행한 이번 원정이 파벨경이나 우리 군에게나 얼마나 부담이 될 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군사들을 너무나 잘 통솔해주시는 것은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사실 지금과 같은 규모의 군도 필요 없는데 오라버니께서 괜히 걱정만 앞서시는 바람에. 파벨경의 짐만 늘어난 거 같아 미안해요.”
“아닙니다. 전하.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인 것을.”
“이번 원정에 제 억지가 너무 컸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도저히 일국의 왕녀가 연합국 안건 회의로 향하는 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경로 그리고 단원의 구성. 이래서는 전장으로 향하는 커다란 용병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당치않으십니다! 전하께서는 지난 엔트릴 북방 국경에서의 분쟁 지원 때문에 지체된 일정을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재정비하셨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라임턴을 눈앞에 둔 이 시점에 오히려 원래의 일정보다 시간이 남아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야 고맙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에요.”

  로즈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아래로 보이는 넓은 어둠 한 가운데 빛나고 있는 작은 빛의 무리. 모든 갈등의 원흉이 된 메인 스트림을 앞에 두고 발전하고 있는 교역의 도시 라임턴. 내일 아침이면 그녀가 무리하면서 까지 구성한 경로가 아닌 쇼넬의 정식 사절단으로서의 경로에 접어든다. 그 첫 시발점이 될 북서로. 그리고 라임턴. 그녀는 내일부터 시작될 그리고 오늘로서 마무리되는 자신의 독단에 대한 성과를 반성하는 듯 했다.

“내일부터 우리는 내 멋대로 움직이는 엉터리 기사단이 아닌 쇼넬을 대표하는 사절단으로서의 일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금과 같은 여유 따윈 조금도 없겠지요.”
“전하…….”
“이상하게 파벨경은 쇼넬의 국내든 국외로의 원정이든 그 곳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나와의 약속은 안중에도 없더군요.”
“그…….그것은.”

  파벨은 곤란하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릴 적 자신의 그리고 그녀의 신분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었던 때 덜컥 걸어버린 약속이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짖궂은거다. 거의 20년 전의 약속인데다가 아무런 상식 없이 덜컥 걸어버린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라며 강요하다니. 적당히 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파벨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전하. 그것은 프로스트 궁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한정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당장 이것이 명령이라고 한다면 따를 텐가요.”
“그것만은!”

  그녀는 피식 웃음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신하로서의 그는 무슨 일을 맡겨도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생기지 않는 든든한 원군이지만 벗으로서는 평범한 친구와 다를 바 없었다. 쉽게 당황하고 덜렁대며 하지만 따스한 안식을 가져다주는 그런 벗. 왕녀로서의 외롭고 힘든 길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존재가 거대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다룰 수 있어서 재밌지만 그 만큼 쉽게 부서질까 무섭기도 한 그런 사람.

“너무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격하게 반응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저.전하.”
“미안합니다. 장난이 좀 심했지요.”

  파벨은 이제 살았다 하며 한숨을 내쉴까 하다 그것마저 놀림 당할까 급히 참았다. 참으로 대하기 어려운 상관이다.

“잠시 걸을까요.”
“예. 전하.”

  산책을 청하는 왕녀의 말에 파벨은 빠르게 그녀의 앞에 서 걸음을 이끌었다. 사실 산책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짧은 동선이긴 하지만 그들 곁을 스쳐지나가는 시원하고 조용한 바람과 아무런 자극도 전달하지 않는 어둠으로 덮힌 주변의 풍경. 그것이 그들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
“이번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아.”

  대륙 영토 전쟁이 휴전 협정 그리고 애매한 연합 형성으로 마무리 되고 난 후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것은 그 전까지 가장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던 쇼넬이었다. 말 뿐인 휴전. 전쟁의 불씨를 그대로 살려둔 채 연합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협상 결과를 안고 돌아온 사신단은 그대로 목이 날아가 버렸다. 사실 연합이라는 것은 다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기보다 그 전까지 자신들의 위에서 군림해 오던 강대국을 해체하여 그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렇게 짧은 대륙의 역사 상 가장 강한 국가로 기록되어 그 역사를 계속 이어오던 쇼넬은 그 찬란한 빛을 얼마 영위하지 못한 채 그대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대륙 내 영토의 위치 상 중앙에 넓게 자리한 엔트릴 그리고 엔트릴의 동쪽에 위치하여 남향으로 그 뿌리를 뻗고 있는 놀헨. 중앙의 영토를 엔트릴에 뺏겨버린 쇼넬은 그대로 석양의 나라로서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영토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그 강대한 군사력은 변함이 없었다. 허나 그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은 두 견제 세력을 의식하여 철저히 감춘 채 적절한 사냥의 기회만을 노려온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멈춘 지 9년. 10년으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먹잇감을 향해 맹수의 이빨이 다시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문제는 연합 회의에서 제출해야 할 증거입니다. 현재까지 수집한 자료로서는 코르사크의 만행을 증명하기에 아직은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이 이곳에서 반드시 진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 전하.”
“진은 반드시 있습니다. 혹은 만들어 졌었습니다. 이 곳 일대의 마나의 밸런스가 심하게 붕괴되어 있어요. 단순한 캐스팅만으로는 이 정도로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라임턴에 당도하기 전 북서로에 진입하기 전 레인저들과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수색은 그 시점에서 바로 이뤄져야 합니다.”
“예. 전하. 이미 그러한 내용을 담은 서찰을 헬릭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라임턴의 시장을 만나고 있을 테지요. 서찰은 레인저들에게만 보이도록 명했습니다.”
“예. 괜히 시장의 귀에 들어갔다간 이것저것 시간이나 끌면서 어떻게든 진을 없애려고 애를 쓰겠지요. 그들로서는 참 힘든 이이 될 것입니다. 단순히 진을 정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혹시나 피해를 입은 사항이 있다면 그것까지 완벽하게 복원해둬야 할 테니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하여 헬릭에게 시장과 레인저들과의 만남이 끝난 후 간단히 시내를 정찰해두도록 일러두었습니다.”
“네. 잘 하셨습니다.”

  북방의 작은 국가 코르사크. 그들의 마법史는 북방의 매서운 추위와 유난히 많이 밀집된 몬스터들의 덕분에 대륙 내 어느 국가보다 더 강하게 그리고 빠르게 발전해 왔다. 1년 내내 춥기만 한 기후 덕분에 그들은 체술 검술을 훈련하기보다 마나의 힘을 빌려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힘썼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훨씬 효율적인 방어책이 되어갔다. 그들이 주로 상대해야 할 것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였기에 그런 결과를 부추기기도 했다. 그렇게 경쟁국가보다 훨씬 월등한 마법력을 갖게 된 코르사크는 그것을 자각한 이후부터 교묘한 장난을 시작한다.

  진. 그것을 통해 자국 내의 특정 지역에 밀집한 몬스터를 이미 진이 그려진 장소로 이동시켜버리는 장난은 이웃 국가들에게 꽤나 큰 골칫거리였다. 서식 지역만 맞춰 몬스터를 이동시키게 되면 애초에 그 곳에서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과 구별할 수 가 없었으며 설치된 진은 간단한 캐스팅만으로도 그 흔적을 지워낼 수 있어 증거를 잡아내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단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진의 해체에 들어간 술사를 홍연의 기사단 일부가 우연히 발견했던 것. 그들은 볼 것 없이 공격해 들어갔고 비록 그 자를 잡지는 못했으나 진의 완전한 해체는 막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캐스팅을 모두 마치진 못했으니 어디엔가 진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로즈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처음 발견했을 당시보다 점점 더 약해지는 기운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잡아내지는 못한 채 병력을 이용해 수색을 펼치는 것이 방도의 전부였다.

“수색 범위는 될 수 있으면 북서로의 근방 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촘촘히 살펴보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증언 확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려내서 데려와야 할 것입니다.”
“예. 전하.”
“하다못해 피해자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내가 말이 너무 심한가요.”
“아닙니다. 전혀.”

  진의 흔적을 찾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코르사크에 대한 선전포고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해서는 단순한 항의에 가까운 싱거운 이야기만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진으로 소환된 몬스터에 피해를 본 사례가 필요한 것이다. 자국민의 명백한 상해피해를 눈앞에 두고도 그것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로즈의 판단이었다.

“가끔은 나도 내가 좀 무서울 때가 있어요.”
“…….”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오라버니께서 좀 더 확실히 해결하실 텐데 말입니다. 난 그저 궁 안에서 형편 좋게 조용히 지내서 승전보만 기다리면 되는 것을. “
“전하.”
“괜히 나서는 바람에 여러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든 길을 걷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괴롭다니요. 그런 과분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들 모두 전화를 모시게 된 것을 목숨보다 귀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파벨경.”

  달빛에 빛나는 로즈의 옅은 미소는 파벨의 얼굴을 붉게 물들게 만들었다.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운 미소의 여인이 당장 피가 난자할 전장으로 내몰리는 시간의 흐름이 원망스러웠다.

“후우.”
“왜 그러십니까? 전하.”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러나 그 음성은 일체의 떨림 없이 강한 힘을 담아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도 아직 멀었군요. 이제 겨우 당도했을 뿐인데. 찾아오기야 몇 번이고 찾아와봤던 잃어버린 옛 땅인데.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가슴이 뛰다니. 어쩔 수 없군요.”
“전하.”
“선대의 왕께서 잃어버린 우리의 이 땅. 반드시 찾아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이번 원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목숨을 다해 전하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지요. 혹시나 모르니 파벨경은 우리 사절단의 안전에 조금 더 힘써 주세요.”

  파벨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30명의 기사단이 쉬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 자국에 남아있는 대신들 혹은 그의 왕이 어떠한 말로 지금 그들의 행동을 역사에 기록하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자신이 모시는 단 한 사람의 뜻이 정의라 생각하며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이 길을 걷는 것만이 잃어버린 이 땅 위에서 숨을 쉬는 이유라 생각했다. 로즈 쇼넬 왕녀.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이 작은 무리가 머물고 있는 이 언덕이 패배와 굴욕으로 얼룩진 지난 10여년의 역사를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의 첫 시발점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앞날만을 생각하며 걷는 한 여인. 그리고 그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든든히 지키고 서 있는 한 남자. 그렇게 서로를 굳게 믿고 의지하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 마치 기대하겠다는 듯 윙윙 대는 소리 요란한 밤바람이 세차게 불어 얌전히 가라앉아 있는 지면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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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사역마
08/08/30 15:3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뭔가 스케일이 커지고 있군요!
08/09/01 02:08
수정 아이콘
대단하신 필력!
라벤더
08/09/01 10:00
수정 아이콘
잘 보고 있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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