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회원들이 연재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연재를 원하시면 [건의 게시판]에 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Date 2008/06/06 21:18:23
Name kikira
Subject [소설] 6회 :『녀소 는리달 을간시』, 진리의 빛
  














※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따라서 순환론과 관련된 인명, 서적, 논문, 학파 등에 관련된
    모든 내용은 허구이며, 혹 그 관련이 의심된다면 그것은 순전한 우연임을 알려드립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 - 진리의 빛







  크리스틴 교수의 불쏘시개 역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한데, 당시 비틀비틀하던 크리스틴 교수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린 것은 소위 미네르바 학회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소장 순환론자였다. 곧 1993년 4월 3일, 북미 대륙 중심의 과격파 순환론자들의 모임이던 미네르바 학회가 자신들의 학회지에, 역시 학회 공동의 이름으로「시간을 달리는 소녀」란 소설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학계 추산으로만 3000여개를 넘어서기 시작한「시간을 달리는 소녀」완성본의 제 1호가 발표된 것이었고, 이른바 ‘창조론’의 첫번째 빛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창조론은 지금까지 순환론과 관련된 논의가 몇몇 천재들에 의해 주도된 것에 비하면, 공동의 노력으로 이뤄진 첫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미네르바 학회 특유의 공동 연구와 공동 저술은 퍽 참신한 것이었고 그들의 방법론은 더욱 그러했다.


  “지금 우리 눈앞엔 거대한 수원이 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한 일이란 고작 이 수원에 물을 쌓아두는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수원의 물꼬를 틀어야 한다.”

  완성본 제 1호와 함께 게재된 이 테제엔 여전히 순환론 고유의 강직함과 낙관이 묻어있었다.


  창조론은 아나끼의 말년의 저작을 인용함으로 시작한다. “텍스트는 작품 이후에 완성된다.” 이 유명한 강령은 발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다분히 작품에 대한 해석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90년도가 되자, 작품의 새로운 창조를 독려하는 말이 되었다. 창조론자들의「시간을 달리는 소녀」, 첫 페이지는 전학 온 가즈오가 클래스메이트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연히 작품 속 가츠코는 그전엔 가즈오를 몰랐고 이때 가즈오를 처음 만나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로써 라벤더에 대한 잠재 기억을 가지고 있고, 가즈오 또한 기억하는 초기 가츠코의 모순은 해결됐다. 몇 개의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시간을 달리는 소녀」완성본 제 1호는 별 무리 없이 페이지 처음과 끝을 순환했다.

  모순은 해결됐다. 모순이 해결된 것은 분명했으나, 초기 미네르바 학파는 진영에 상관없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물론 미네르바 학회의 학자들조차 완성본 1호가 진정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특히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던 종결론의 반발이 거셌다. 가든 교수는 가츠코 논의에 참여하는 여러 사람들은 “올바른 해석”을 위해 노력해야하며, “해석에 맞춘 창작”을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일갈했다. 그 말은 온당했으나 창조론자들은 이미 해석을 버린 자리에 있었음으로 그 비판이 가리키는 곳은 공허했다. 게다가 작품에 관련된 논의가 해석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교수의 근엄한 말은 퍽 고루하게 들렸다. 또한 설사 그러한 고루함이 옳을지라도 해석으로 할 수 있는 일의 비루함이 이미 드러났기에 그 말은 여전히 남루해 보였다.



   *   *   *   *   *



  진리가 이 땅에 내려왔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인지 헛갈려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94년 노벨문학상이 미네르바 학파를 대표하여 알버트 교수에게 주어졌다. 몇 년 동안 크리스틴 교수를 외면했던 노벨상이 미네르바 학파의 창조론에게 주어진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창조론을 위한 바울을 자처했고 또한 성공했다. 사실 대부분의 가츠코 월드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순환론자, 종결론자조차 이 때 처음 창조론의 존재를 접했다. 그리고 작품의 해석이란 이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함량 미달의 것이 되었다. 창조론은 그 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모순 없는 완전한 텍스트 만들었다. 다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톡홀롬에서 알버트 교수는 노벨상 수상 연설의 대부분을 자신이 미네르바 학파를 대표해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또한 자신이 미네르바 학파의 업적에 기여한 바가 얼마나 미미한지를 역설하는데 할애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학자의 정직성과 겸손함을 감탄하며 졸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버트 교수는 연설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고, 불행하게도 그로인해 지금까지 ‘미네르바 학파의 대표자’라 불리고 있다.

  “이제 텍스트의 완성에는 단 한 줄만이 남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지금 여기서 노벨상을 수상하기보다 제 책상 앞에 앉아 그 한 줄을 써 놓고 싶습니다.”



   *   *   *   *   *



  그 한 줄을 누가 완성시킬 것인가.

  노벨상 이후에, 가츠코 월드에는 70년대를 방불케 하는 가츠코 열기가 불었다. 그러나 논쟁은 점차 사라졌다. 90년대, 창조론의 시대는 논쟁보단 출판의 시대였다. 순환론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종결론자들 또한 모순이 해결된 새로운「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쓰고 출간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논쟁은 필요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신이 해석에 맞추어 새로운 완성본들을 창작했고 또한 출판했으며 그 완성본을 접한 다른 학자들은 그 내용에 대해 직접 비판하기 보단, 자신의 해석에 맞춘 새로운 완성본을 쓰고 출판하는 일에 주력했다. 훗날, 창조론의 부흥에 전 세계 출판업자들이 긴밀히 관여했다는 음모론이 나온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 출판 산업은 이 시기 가츠코월드의 주요 경제 동력이 되어 있었다. 특히 전 세계적 출판 시장의 형성은 각국의 시장 통합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저작권의 세계적 기준을 정한 프라하 협약도 이것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 그 수많은 창작 경향을 모두 설명하긴 어려우나, 대개 순환론 쪽에서는 텍스트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종결론 쪽에서는 텍스트의 일부 내용을 삭제함으로써 각각 모순 없는 텍스트를 만들고자 하였다.

  가령 순환론자들은 온갖 경우의 수를 사용해 가츠코가 온전히 텍스트를 순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모순 없는 수많은「시간을 달리는 소녀」들이 새롭게 창조되었음은 물론이다. 종결론자들의 경우는 좀 더 쉬웠는데, 가령 작품 초기의 가츠코가 라벤더 향을 맡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작품 몇몇 부분을 삭제해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하나의 갈래에도 조금씩 다른 수백 종의 ‘완성본’들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진정 이 시대는 출판의 시대였다.
  



  이렇게 수많은 진리들이 출판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모순 없는 텍스트는 분명 그 모순 없음으로 인해 스스로 진리의 빛을 영롱하게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엔 다른 수많은 진리의 별들이 또한 빛나고 있었다. 별들은 함께 빛남으로 더욱 아름답다는 누군가의 낙관론과는 반대로, 결국 그 진리들은 자신의 빛을 조금씩 잃어버렸다. 별자리가 결코 태양을 대신할 순 없었다. 물론 수많은 ‘완성본’들 중에서도 관객들의 선택을 받은 ‘베스트셀러’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러한 베스트셀러들 또한 100여종을 훌쩍 넘겼고, 진리가 단순히 다수결과 매출액에 의해 결정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   *   *   *   *



  창조론의 출판 열기가 한창 정점을 향해 달리던 96년, 다카시 교수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아나끼 교수와는 다르게 다카시 교수는 말년까지 생생한 정신을 유지했으며 또한 마지막 몇 달을 제외하곤 정력적으로 학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죽음에는 수많은 순환론자들의 애도가 뒤따랐지만 종결론자들의 경우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 또한 아나끼 교수와는 다른 점이었다. 일생동안 다카시 교수의 라이벌이자 콤비였던 가든 교수는 다카시 교수의 죽음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꽤 길고 또한 깊었다. NHK에서 새천년을 맞아 이뤄진 가든 교수와 노구치 교수의 대담에서도, 가든 교수는 ‘다카시’라는 고유명사의 언급을 피하며 겨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것은 위대했습니다. 허나 그것은 거짓이었지요.
  나는 이 위대한 거짓의 죽음 앞에 기뻐하지도 않지만 슬프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모든 것은 순환하니 슬퍼할 이유가 없지요.”










                                                                                                                                                                  7회에서 계속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천마도사
08/06/28 07:58
수정 아이콘
정말 대단한 글입니다.
무식한 공돌이라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지만, 늘 감탄하며 잘 읽고 있습니다!
08/06/28 12:58
수정 아이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공대생을 위한 글을 써보도록 하지요 ^^;
08/07/01 00:47
수정 아이콘
저에겐 좀 어렵긴 하지만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 회도 기대할게요.^^
Black_smokE
08/07/01 10:5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71 [번역괴담][2ch괴담]오두막의 여자 - VKRKO의 오늘의 괴담 [5] VKRKO 5466 11/10/31 5466
269 [번역괴담][2ch괴담]신문배달 - VKRKO의 오늘의 괴담 [3] VKRKO 5132 11/10/29 5132
268 [실화괴담]UFO - VKRKO의 오늘의 괴담 [11] VKRKO 5881 11/10/28 5881
267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도움 [8] VKRKO 5444 11/10/26 5444
266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이상한 약속 [4] VKRKO 5262 11/10/24 5262
265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흙더미 [4] VKRKO 4942 11/10/23 4942
264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nine words [3] VKRKO 5015 11/10/19 5015
263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레벨 50 [2] VKRKO 5948 11/10/17 5948
262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유키오 [4] VKRKO 5352 11/10/13 5352
261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산의 은인 VKRKO 4887 11/10/11 4887
260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등산 [3] VKRKO 5220 11/10/10 5220
259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후회 [1] VKRKO 5156 11/10/08 5156
258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무서운 벤치 [1] VKRKO 5196 11/10/07 5196
257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검은색 풀 [1] VKRKO 4895 11/10/06 4895
256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sinitai.com VKRKO 4491 11/10/05 4491
255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썩은 물의 저주 [2] VKRKO 5569 11/10/04 5569
254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산의 주민 VKRKO 5100 11/09/30 5100
253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자시키와라시 [1] VKRKO 5284 11/09/28 5284
252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숲 속의 사람 [2] VKRKO 5473 11/09/25 5473
251 VKRKO의 오늘의 괴담 - [실화괴담][한국괴담]현몽 VKRKO 5549 11/09/24 5549
248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미인도 [6] VKRKO 6383 11/09/21 6383
247 VKRKO의 오늘의 괴담 - [실화괴담][한국괴담]할아버지의 유령 [2] VKRKO 5275 11/09/20 5275
246 VKRKO의 오늘의 괴담 - [번역괴담][2ch괴담]동정 [2] VKRKO 5477 11/09/19 547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