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7/08/19 13:16:14
Name CoMbI COLa
Subject 웃기는 놈이네
약 1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친구들과 놀다가 막차를 놓쳤고, 집에 전화해서 찜질방에서 자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0여분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사촌 형이었다. 나보다 20살 넘게 나이가 많고, 나보다 2살 어린 당조카를 아들로 두고 있는... 사실 형이라기 보다는 삼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솔직히 나는 얼굴도 기억 안 나고, 형도 내가 가까운 친척이라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아버지의 부탁으로 자기 집에서 재워줄테니 오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건 너무 민폐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거절했지만 계속 괜찮으니 오라는 형의 말에 자정이 넘은 시간에 형의 집에 갔다.

다행이었던건 형수님과 두 아이(조카)가 친정에 가 있었고, 형과 고등학생이었던 첫 째만 집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형은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었고,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싶지만 아침에 첫 째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근해야 한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아침은 대강 차려놓을테니 밥 먹고 학교에 가라고, 일어나면 형은 출근하고 없을거라는 말도 했다.

그 친절함이 너무도 미안해서 더 이상 민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고등학생이면 6시 반쯤에 일어날테니 알람을 5시 반에 맞추었고, 6시가 되기 전에 아무도 모르게 사촌 형네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6시 반이 조금 넘어서 형한테 전화가 왔다. 너 혹시 나갔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불편하실까봐 먼저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허 참, 이거 웃기는 놈이네]

라고 나의 행동이 어이없다는 투로 형은 말했다. 당시 나는 폐 끼치지 않으려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 행동에 대한 형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잊어버렸다.


현재로 돌아와서, 지난 주 토요일 밤 11시 44분에 외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이야기인 즉슨, 사촌동생이 근처로 놀러왔다가 차가 끊겼는데 잘 곳을 좀 알아봐달라는 거였다. 아무리 사촌이지만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이고, 무엇보다 여자애라 원룸인 우리 집에 같이 있기는 그래서 간단하게 물건 위치만 알려주고 내가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나는 밤에 일하고 있기 때문에 PC방에서 밤새 놀면 되니까.

아침 7시가 조금 넘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전화를 하니까 좀 전에 나와서 지하철 역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별 일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말도 없이 사라지면 걱정하지 않냐고 소리를 쳤더니 자기 때문에 집에 못 들어오는게 아닐까 해서 빨리 나왔다고 했다. 다음부터는 갈 때 말하고 가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고 나니 10년 전 경험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긴 세월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해결되었다. 그건 말 없이 사라진 나로 인한 놀람, 걱정과 안도, 어이없음이 함축된 표현이었던 것이다.




*편의상 반말로 작성하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당시 사촌 형은 저렇게 넘겼는데, 저는 동생한테 훈계질을 하는걸 보니 점점 꼰대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찝찝합니다. 흑흑...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1-10 15:1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페스티
17/08/19 13:18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크 인생이네요
17/08/19 13:20
수정 아이콘
성별의 차이 아닐까요?
운동화12
17/08/19 13:25
수정 아이콘
아유 글 잘쓰시네요 흡입력 있어요
Carrusel
17/08/19 13:32
수정 아이콘
이런 글 좋아요. 크크크
윌로우
17/08/19 13:36
수정 아이콘
함축된 표현, 그렇군요. 잘 읽었어요.
17/08/19 13:36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정말 교훈을 제대로 얻으셨군요
17/08/19 13:37
수정 아이콘
생활수필 좋네요.
유지애
17/08/19 13:37
수정 아이콘
글 구도가 너무 좋네요 크으
빠독이
17/08/19 13:38
수정 아이콘
음 사촌 형님께 당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는데 다른 이유라고 하시면 재밌을 것 같군요.
헥스밤
17/08/19 13:41
수정 아이콘
와.
발터벤야민
17/08/19 13:44
수정 아이콘
남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뜨곤 하죠. 그치만 재워준 사람들이 저런 생각을 하는건 또 몰랐네요. 앞으론 문자라도 남겨두고 집에 와야겠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하루사리
17/08/19 13:45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봤습니다. 크크
17/08/19 13:45
수정 아이콘
집안 내력이신듯요~
17/08/19 14:04
수정 아이콘
사촌형 : 숙박비 받으려고 했더니 사라져 놓고 이제와서 무슨소리야?
17/08/19 14:07
수정 아이콘
사촌형이 일어나서 화장실 변기뚜껑을 올렸더니...
무릎부상자
17/08/20 05:19
수정 아이콘
캬캬캬캬캬캬
지나가다...
17/08/19 14:36
수정 아이콘
왠지 이해의 선물의 현실 버전 같은 이야기네요. 크크
17/08/19 20:15
수정 아이콘
재밌으면서도 와닿는 글이네요, 잘봤습니다!
제랄드
17/08/19 21:32
수정 아이콘
[허 참, 이거 재밌는 글이네]
세츠나
17/11/10 20:58
수정 아이콘
Deja vu!
나제아오디
17/11/15 11:12
수정 아이콘
어릴땐 어떤 행동이 폐를 끼치는건지 아닌지 분별하기 힘든 경우가 많쵸.. 알고 있다 하더라도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행동]을 '폐를 끼치기 싫다'로 포장 하는 경우도 많구요
서낙도
17/11/16 16:29
수정 아이콘
어른 : 가깝던 멀던 친척 아랫 사람 챙기는 것이 번거롭거나 불편하지 않음.
아이 : 친척에게 가서 신세 지는 것 보다 스스로 해결하는 게 편함.
때로는 이렇다는 것을 잘 몰라서 생기는 일이겠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944 태조 왕건 알바 체험기 [24] Secundo12777 18/03/27 12777
2943 요즘 중학생들이란... [27] VrynsProgidy16760 18/03/26 16760
2942 부정적인 감정 다루기 [14] Right10718 18/03/25 10718
2941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28] 삭제됨16394 18/03/11 16394
2940 고기의 모든 것, 구이학개론 #13 [44] BibGourmand12758 18/03/10 12758
2939 일본은 왜 한반도 평화를 싫어할까? <재팬패싱>이란? [57] 키무도도19631 18/03/10 19631
2938 더 늦기 전에, 이미 늦어버린 은혜를 갚아야지. [10] 헥스밤12546 18/03/04 12546
2937 우울의 역사 [57] 삭제됨11794 18/03/02 11794
2936 억울할 때만 눈물을 흘리는 누나였다. [32] 현직백수19790 18/02/21 19790
2935 올림픽의 영향들 [50] 한종화16912 18/02/19 16912
2934 지금 갑니다, 당신의 주치의. (5) [22] 자몽쥬스8465 18/02/11 8465
2933 세상의 끝, 남극으로 떠나는 여정.01 [데이터 주의] [41] 로각좁9095 18/01/31 9095
2932 [알아둬도 쓸데없는 언어학 지식] 왜 미스터 '킴'이지? [43] 조이스틱11245 18/01/24 11245
2931 무쇠팬 vs 스테인레스팬 vs 코팅팬 [94] 육식매니아23534 18/01/22 23534
2930 역사를 보게 되는 내 자신의 관점 [38] 신불해15777 18/01/20 15777
2929 CPU 취약점 분석 - 멜트다운 [49] 나일레나일레14124 18/01/10 14124
2928 황금빛 내인생을 보다가 [14] 파란토마토10775 18/01/07 10775
2927 나는 왜 신파에도 불구하고 <1987>을 칭찬하는가? [76] 마스터충달10729 18/01/04 10729
2926 조기 축구회 포메이션 이야기 [93] 목화씨내놔17202 18/01/04 17202
2925 마지막 수업 [385] 쌀이없어요22659 17/12/18 22659
2924 삼국지 잊혀진 전쟁 - 하북 최강자전 [41] 신불해19233 17/12/15 19233
2923 [잡담] 피자 [29] 언뜻 유재석9602 17/12/14 9602
2922 군 장병은 왜 아픈가? [76] 여왕의심복12797 17/12/14 1279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