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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7/27 00:16:11
Name zeros
Subject Mr.Waiting - 11
나는 그녀와 나의 위치에서 가장 가깝고 귀가하기도 용이한 그리고 그 파란 수첩에 적혀져 있던 한 술집을 말했고 그녀 역시 동의했다. 우린 주인아주머니가 얼마 전에 새로 마련했다고 소개하시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가 좀 안쪽에 있었기 때문인지 주변에 다른 손님은 별로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기엔 아주 좋았다. 잔잔한 두근거림이 내 안에서 울렸다.

“원래 오늘 약속 있어서 내일 만나자고 한 거 아니었어?”
“응. 근데 자버렸어. 나 밤샘했거든.”
“왜 밤을 샜어?”
“오늘 아침에 봐야 할 시험이 하나 있었어.”
“아… 그래서, 잘 봤어? 무슨 시험인데?”
“음… 얘기 안할래. 어차피 떨어질 거 같아.”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 둘 다 우리가 진짜로 나누려고 했던 주제를 잊은 듯 했다. 그러나 이후의 시간에서 나는 그녀에게서 과거와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되었다. 내가 알던 그녀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녀와 많이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그녀에게 천상병 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녀가 보였던 반응은 나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분은 어쩌면 굉장히 이기적인 삶은 산거야. 자기애가 굉장히 강했던 사람이었나보다.”

난 그녀가 시인을 이해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인 반응은 너무나 현실 쪽에 치우친 것이었다. 그 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이라기 보다는 자신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한 인생을 말했다. 그것이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순응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제 그것이 그녀가 살고 싶은 인생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말이 한 마디씩 들어올 때마다 내가 생각하던 분홍빛 꿈을 꾸던 소녀는 회색빛 어른이 되어갔다. 어긋남에서 생겨나는 단절감을 오늘 정말 나눠야 할 대화의 시작으로 외면했다.

“가끔씩 그냥 나 혼자 생각하는 건데, 나는 너를 나무 같은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내 가슴 명치 있는 곳에서 자라는 거야. 무슨 아저씨들이 난 같은 거 키우는 것처럼. 옛날 너랑 헤어질 때 그게 뽑혀버렸다고 보면 되겠다. 근데 묘목 같은 거 할 때 보면 알겠지만 나무가 연필통에서 연필 빠지듯 쏙 빠지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구멍이 생겼어. 그거 꽤 아팠는데 지금은 많이 나은 거 같아. 시간도 많이 지났고, 또 너도 다시 만났고.”

그녀는 한참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근데 너 거기 명치, 거기 아플 때 어떻게 아팠어?”

난 그녀에게 욱신거려 잠까지 설치게 하던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가 혹시나 나에게 미안해 할까봐 망설여지기도 했다.
“음…. 몰라. 느낌을 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맹장 걸린 사람들 무슨 콩벌레 마냥 몸을 돌돌 만다고 하잖아. 나도 약간 그랬던 것 같아.”
“그래…. 근데 너 그거 알아?”
“뭐?”
“난 매달 한 번씩 아파야 돼. 어쩌면 이게 더 아플지도 몰라.”

웃음이 터졌다. 난 말을 이어갔다.

“우리 그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 많이 만나 봤잖아. 그 때 헤어지고 나서.”
“응. 그랬지.”
“근데 나 같은 경우엔 그런 사람도 있었어. 우리가 말하는 어떤 ‘조건’이 뛰어난 사람들 말야. 뭐 예를 들면 외모나, 학벌 그런 것들.”
“응.”
“근데 감정이 없더라. 사람을 만날 땐 사람사이의 느낌 그런 게 중요한 거잖아. 그 사람들은 그런게 좀 없었어. 그래서 만날수록 허무하더라. 근데 널 만나면 말이야. 난 내가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야.”

어느 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통금시간이 걱정 되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이야기를 여기에서 멈출 순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넌 정말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난 잠자코 있었다.

“네가 날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고 그렇기 때문에 좀 무서운 거 같아. 만약 우리 옛날에 헤어지고, 네가 날 다시 찾아왔을 때 내가 만약 널 만났더라면 우리가 달라졌을까? 난 우리가 그냥 평범한 사람들처럼 헤어지는 게 싫어.”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만…. 집이야.”

짧은 통화가 끝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네가 물었었잖아. 네가 변한 것 같냐고. 난 그 때 아니라고 안 변했다고 얘기 했거든. 근데 그거 사실 내 마음이었어. 변하지 않은 것은 내 마음이라고. 조금 흐릿해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또 이렇게 되어버리잖아.”
그녀는 들어주었다.

“손 좀 줘봐.”

난 테이블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천장을 바라보는 내 오른 손바닥과 손가락들 사이로 그녀의 따뜻한 손이 엉켰다. 시간의 회귀를 경험하는 듯 했다. 내가 지은이에게 처음으로 고백했던 그 날, 그 공원, 그 벤치의 나로.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 생각했고 그 때 할 말도 생각했지만, 역시 그녀라면 굳이 말로 전달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 알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생겨 아무 말하지 않았다. 우린 잠시 동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말없이 일어나 가게를 나섰다. 난 결론이 보이지 않았다. 술집 입구에서 그녀가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우린 걷기 시작했다.

“그럼. 너 내일은 어떻게 되는거니?”
“나 아마 오늘 빵꾸낸 그 사람들 만나야 할 것 같아.”

그녀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말을 꺼내야 했다. 오늘 마저 이렇게 흐릿하게 할 순 없었다.

“야 그런데 나 또 이렇게 그냥 집에 가면 후회할 것 같아. 무슨 소양강 처녀도 아니고 맨날 애태우기 싫다고.”

작고 짧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난 그녀의 조그만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 발목을 다쳤다던 그녀는 평소 좋아하던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내 생각엔 내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과 네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좀 다른 것 같아.”

결론이 보였다. 어렴풋이 조금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어쩔 수 없는 충격이었다. 예전보다 내가 많이 약해졌음을 느꼈다. 그 때의 나처럼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매일 밤 찾아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상황이 된다 하더라도 그런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그녀의 집 앞 마지막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난 다시 한 번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너 앞으로 이렇게 널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 다시 만나기 어려운 거 알고있어?”
“응…. 그래서 말했잖아. 우리가 평범하거나 기억하기 싫은 추억으로 남는 것이 싫다고.”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의 무게 탓인지 우리가 단순히 고집쟁이이어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의 아파트 앞에 다다랐다. 우리는 멈춰 섰다. 돌아오기 힘든 선을 넘으려하는 듯 했다. 그녀가 물었다.

“야. 그럼 이제 우리 또 한참동안 못 보는거야?”

난 대답하였다.

“아니. 이젠 영영 안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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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티마로
10/07/29 00:20
수정 아이콘
..................후....
10/07/29 02:04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오늘분량 재밌네요!
하이퍼cc
10/07/29 16:39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이제 영영 안보지 싶다. 흑 ㅠ
DavidVilla
10/08/25 16:33
수정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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