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06/03 19:53:37
Name 시드마이어
Link #1 https://brunch.co.kr/@skykamja24/147
Subject 패배의 즐거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재밌었던 일은 [1:1 대결에서 지는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농구를 잠깐 배웠다. 딱 1달. 농구를 1달 배우면 보통 레이업 슛을 할 수 있는데, 이 점은 엄청난 특권이 된다. 대부분의 농알못 친구들은 드리블도 배워본 적이 없기에 레이업 슛은 '무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키가 작은 나는, 고1때 165cm쯤 되었다. 처음엔 나보다 못하는 친구들과 농구를 했다. 나는 레이업 슛을 하고, 다른 친구들은 공 튕기기도 어려워했으니 매번 이겼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렇게 양민학살을 하던 중에 고1중에서 가장 잘하는 친구와 1:1 대결을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180cm가 넘었고, 팔이 길어서 긴팔원숭이라고 불(놀)리기도 했다. 그는 1학년 중 최강이었다. 나도 반에선 잘하는 편이었기에 반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붙었다. 반 친구들의 내심 기대어린 눈빛을 보았고, 전력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길 줄 알았는데, 처참했다. 1골도 넣지 못했고, 굴욕적인 블락을 맞으며, 7:0 패배. 그는 [언스톱퍼블]이었고, 나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안타까운 눈빛을 피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꾸준히 농구를 했다. 먹잇감을 발견한 그 녀석은 내가 친구들과 3:3을 하고 있으면 와서 1:1을 신청했고, 다시 붙었다. 결과는 7:0 패배.


그러나 두 번 지는건 한 번 지는 것보다 쉬웠다. 패배의 속쓰림은 적었고(편안함은 오래갈꺼야), 상대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상대의 페이크, 손동작, 발동작, 선호하는 돌파 방향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끝을 보기로 결심한 듯 매일 붙었다. 매일 점심 또는 청소시간이면 1:1을 했다. 물론 1:1이라기보단 학살에 가까웠다. 그의 입장에선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골밑 슛으로만 이겼고, 어떤 날은 투스탭(두 발자국 걸으면서 돌파하는 기술)만으로 이겼고, 어떤 날은 미들슛으로만 이겼다.


그러던 중 이상한 일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발리는 모습을 보고, 날 허접으로 보고 도전하는 친구이 있었다. 나는 이길 의도가 없었지만 대부분 나에게 박살났다. 제일 잘하는 상대랑 맨날 붙으니 당연히 2등이 된 것이다. 또 이상한 일은 7:0이던 스코어가 7:1, 7:2, 7:3으로 붙는 것이었다. 그리고 7:4까지 갔을 때부터 재미가 빠졌는지 그 친구는 축구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


반면 난 계속해서 농구했다. 고교 농구에서 새로운 강자들을 만나고, 동아리 형님들과 붙으면서 꾸준히 농구했다. 항상 대회에 나가고 싶었는데 고3때 꿈을 이룰 수 있었다. 3:3대회에서 우승하게 되었는데, 모든 경기를 수 십 점씩 차이내며 압살한 것이다.


지금도 나는 농구를 좋아하고, 매주마다 2시간 이상 슛 연습을 한다. 비록 키가 아침엔 170, 저녁엔 169이고, 나보다 잘하는 스트리트 고수들, 무한 체력의 고등학생들도 많지만 상관 없다. 농구가 즐겁고, 져도 즐겁다. 강한 상대와 싸워서 지면 나도 강해진다. 강한 상대랑 또 싸워서 지면 더 강해진다. 그러다보니 코트에서 무서운 상대가 된다.




나는 지난 몇 년간 강력한 상대와 싸우고 있다. 그의 이름은 [불확실한 미래]이다. 대학원을 때려치고 나와서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날부터 그는 최강의 적이 되었다. 만만해보였는데, 수 개월 동안 노력했던 모든 게 실패로 끝나자 상대의 힘을 알게 되었다. 고분고분 공부나 했으면 평타는 쳤을텐데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모님께 너무도 죄송했다. 뭐하나 이루지 못하고 늦은 나이에 군대로 끌려가는 모습은 패배 그 자체였다.


군대에서도 적은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육체적, 정신적, 환경적 제약들은 그 어느때보다 강력했다. 책 한 줄 보지 못하던 훈련소 시간들과 왜이리 긴 교육기간들, 여유 없는 막내 생활을 견디면서 버티고 버틴다. 매일 밤까지 책을 보고, 인강을 보면서 날 지킬 무기를 만든다. 불확실한 미래를 잘라낼 무기를 만든다.


적은 얄밉게도 항상 나를 이기고, 항상 나를 바보로 만든다. 그러나 알고 있다. 나는 내일도 지겠지만 이제는 7:0으로는 안 진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이긴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8-24 17:28)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나락의끝
18/06/03 20:0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8/06/03 20:30
수정 아이콘
패배를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참 멋있네요
아마존장인
18/06/03 20:36
수정 아이콘
마인드가 부럽네요. 전 요새 자꾸져서 짜증나고 자신에 대한 의심이 가는데 ㅜㅜ
Maiev Shadowsong
18/06/03 21:06
수정 아이콘
진짜 이런 마인드를 가진분들이 가장 존경스럽습니다

나이 먹어갈수록 패배와 실패가 무섭고 두렵네요 ㅠㅠ
larrabee
18/06/03 21:10
수정 아이콘
피마새의 한구절이 떠오르네요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라"
18/06/03 21:34
수정 아이콘
이런글을 수필이라고 하나요? 잘 봤습니다.
18/06/03 21:4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봤습니다.
공감되는 글이네요.
유자농원
18/06/03 21:53
수정 아이콘
'괄목상대'에 어울리는 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민들레
18/06/03 22:33
수정 아이콘
물론 점점 이기게 되겠지만... 시간과 돈이 기다려 줄지가 문제죠.
마스터충달
18/06/03 23:13
수정 아이콘
이런 분이 흔히 말하는 '뭘해도 할' 사람입니다!
지금뭐하고있니
18/06/03 23:25
수정 아이콘
멋지네요
농구를 잘할수있었던 것은 패배에도 불구 농구를 좋아했기 때문이죠. 지금의 패배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궁금증입니다
DJ전설
18/06/03 23:25
수정 아이콘
멋진 마인드입니다.
저역시 농구도 남들보다 늦게 대학때 동아리에서 배웠지만 몇배로 더 연습하고 몇발 더 뛴다는 생각으로 하니까 목표 달성 되더라고요.
5년이 조금 지났네요.
잘 다니던 화사 그만두고 전공도 아닌 춤으로 먹고 살겠다고 어머님께 말씀 드리는데 한번에 하고 싶은데로 해 보라고 하시는데 그 뒤로 한눈 팔 수가 없었습니다.
운이 좋아 성실하게 한 우물을 파고 지금은 회사 다니는 친구들이 하고 싶은 일 하며 산다고 부러워 합니다.
절실하게 성실하게 하시고자 하는 일에 정진 하시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겁니다. 힘내세요.
18/06/03 23:58
수정 아이콘
최근 재차, 새삼, 다시금, '싸우지 않고 지지 않는 것보다 싸워서 지는 것이 훨씬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되새기고 뻐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런 글을 읽게 되어서 무척 반갑고 힘이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글루타민산나룻터
18/06/04 00:17
수정 아이콘
부럽습니다.
전 모든 형태의 패배가 극도로 두려워요.
그 결과로 이젠 힘들지 않게 이겼던 적에게까지 탈탈 털리는 지경에 이르렀네요...
18/06/04 10:41
수정 아이콘
저와 같으시네요.
전 시드마이어님의 글이 너무 좋다는 건 알겠는데, 공감을 하지 못해서 슬퍼요.
지난 인생동안 저렇게 악바리처럼 따라붙어 뭔가를 이뤄본 적이 단 한번도 없는 것 같거든요.
모든 패배가 두렵지만, 그 패배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제 자신이 싫습니다.
말다했죠
18/06/04 01:25
수정 아이콘
이 글 보고 철권을 스팀 찜목록에 넣었습니다. 오와 쓰러 갑니다.
18/06/04 02:17
수정 아이콘
잊고있던 마음가짐이네요. 부럽기도 하고 멋지십니다.
저도 다시 한번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덕분에 자극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8/06/04 07:4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건승하시기 바라구요~
주위에 40넘어서 농구하는 친구들이나 후배들 보니 무릎이 나가기 시작하던데...
관리 잘하시며 하시기 바랍니다~~^^
18/06/04 12:3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살다 보면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내가 이길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힘내야죠
18/06/04 16:29
수정 아이콘
수많은 실패에 주저 않아 다시 시도하기 조차
겁이 나는 저에게 따끔한 회초리 같은 글이자
빛과 같은 글 입니다.

이 글을 보니 난 나를 너무 쉽게 놓아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아마 나이가 많은 저보다 훨씬 마음가짐이
좋으시네요. 그 마음 그대로면 꼭 성공하실것
같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잠만보
18/06/15 15:47
수정 아이콘
PGR 자게에 좋은 글이 많이 올라오지만

이글만큼 짧으면서 동기부여 되는 글은 못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프로그레시브
18/09/03 13:22
수정 아이콘
존경스러운 분이시군여
번취리
18/09/16 04:48
수정 아이콘
하... 저도 농구너무 좋아하는데
오래전에 양쪽 무릎 한번씩 돌아간 다음부터는 코트에 서는게 어렵네요
이젠 거의 완치 되었습니다만 그 사이 체중도 불고 감도 떨어지고
토요일마다 아침에 모이는 동호회도 발 끊은지 어케어케 반년 넘어갑니다
그래도 이번주엔 나가봐야겠어요
FreeSeason
18/09/17 21:27
수정 아이콘
글이 예술이다.
폰독수리
18/09/19 22:46
수정 아이콘
와 저도 실농 좋아해서 그런지 인터넷에서 봤던 수필 중에 제일 인상깊은 글입니다. 정말 잘 읽었어요. 추게 아니었으면 못읽었을뻔했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529 게임사이트에서 출산률을 높이기 위한 글 [36] 미네랄은행2659 22/06/22 2659
3528 (pic) 기억에 남는 영어가사 TOP 25 선정해봤습니다 [51] 요하네1108 22/06/22 1108
3527 (멘탈 관련) 짧은 주식 경험에서 우려내서 쓰는 글 [50] 김유라1339 22/06/20 1339
3526 [PC] 갓겜이라며? 최근 해본 스팀 게임들 플레이 후기 [94] 손금불산입1476 22/06/16 1476
3525 [기타] 한일 1세대 프로게이머의 마인드 [33] 인간흑인대머리남캐1580 22/06/15 1580
3524 글 쓰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31] 구텐베르크1326 22/06/14 1326
3523 [테크 히스토리] 생각보다 더 대단한 윌리스 캐리어 / 에어컨의 역사 [29] Fig.11183 22/06/13 1183
3522 개인적 경험, 그리고 개개인의 세계관 [66] 烏鳳1138 22/06/07 1138
3521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았어요 [12] 及時雨961 22/06/06 961
3520 몇 년 전 오늘 [18] 제3지대897 22/06/05 897
3519 [15] 아이의 어린시절은 부모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24] Restar2378 22/05/31 2378
3518 [15] 작은 항구도시에 살던 나의 어린시절 [7] noname111360 22/05/30 1360
3517 이중언어 아이와의 대화에서 느끼는 한국어의 미묘함 [83] 몽키.D.루피2055 22/05/28 2055
3516 [테크 히스토리] 한때 메시와 호날두가 뛰놀던 K-MP3 시장 / MP3의 역사 [49] Fig.11289 22/05/25 1289
3515 [15] 할머니와 분홍소세지 김밥 [8] Honestly1347 22/05/25 1347
3514 [15] 빈 낚싯바늘에도 의미가 있다면 [16] Vivims1719 22/05/24 1719
3513 [15] 호기심은 목숨을 위험하게 한다. [6] Story1750 22/05/20 1750
3512 [15] 신라호텔 케이크 (부제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9] Night Watch1780 22/05/18 1780
3511 [15] 1주기 [10] 민머리요정1406 22/05/18 1406
3510 나른한 오후에는 드뷔시 음악을 들어봅시다 [19] Ellun1353 22/05/17 1353
3509 [15] 다음 [3] 쎌라비2502 22/05/17 2502
3508 늬들은 애낳지마라.....진심이다... [280] 런펭5780 22/05/16 5780
3507 착한 사람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이 있는가 [27] 아빠는외계인2620 22/05/13 262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