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6/05/25 23:42:17
Name 스타슈터
Subject 이별, 그리고 늘 비워둔 자리.
사용한지 20년 쯤 된 샤프가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지게 된 샤프연필이였고, 다른 샤프를 안 써본건 아니지만, 이게 유독 내 손에 딱 맞았는지 신기하게도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한번은, 이사를 한 뒤 아무리 찾아도 그 샤프가 보이지 않았다. 이사를 하면서 흘렸겠거니 싶었고, 아쉽지만 결국 그 계기로 샤프보다는 볼펜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그리고 약 2년이 지나, 또 이사를 할 때 우연히 어느 오래된 가방 안에서 그 샤프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난 그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필통에 넣고 지금까지 쓰고 있다. 마치 한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는 듯이.

난 잃어버리는 것을 유독 싫어한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잠깐이든 오랜 시간이든. 그 누구와도 작별할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쉽게 허락하는 세상이 아니다. 사는 것은 원래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며, 내 것이 맞았다면 결국 다시 만날 테고, 내 것이 더 이상 아니라면 보내줘야 하는 것이다. 다만 필통속 그 사프의 빈자리는 늘 그대로인채 채워지지 않았고, 그 사이에 내가 샤프를 새로 사는 일은 없었다. 어찌 보면 참 웃긴 이야기지만, 뭔가 그 샤프가 아니면 굳이 샤프를 쓰고 싶은 그런 마음이 없었다. 이젠 연필보다는 볼펜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됐기도 하고, 그 샤프가 아닌 다른 샤프는 나에게 익숙한 그 느낌이 아니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볼펜을 썼다. 굳이 샤프여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별에 점차 익숙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 씁쓸함은 배가 된다. 이별에서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무언가가 떠나고 비워진 자리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이다. 과연 그 자리는 대체될 수 있을까? 만약 영영 대체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뇌리를 스쳐가며 안그래도 부담되는 이별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그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였다면, 그 자리는 늘 비워져 있을 것이다.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그 자리는 늘 그곳에,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다. 대학생 시절에 2년간 사라졌던 그 샤프는 어느새 내 필통 속으로 다시 돌아와 나의 직장 첫날을 함께하게 되었다. 회사 신입시절에 적은 노트도, 어느새 볼펜이 아닌 샤프로 기록되고 있었다.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함께했던 노트에도, 분명 이 녀석의 흔적이 가득했을 것이다. 만약 돌아오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내가 샤프로써 쓸 필기도구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였기 때문이다. 사물에 너무 많은 감정이입을 한게 아닐까 모르겠지만, 어렸을적 가족이 같이 해외로 이주했을때 아버지가 나에게 사준 첫 선물이였던 이 샤프는, 그 뒤로 늘 부적처럼 나의 성장 과정과 함께했다.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것이였다.

샤프는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다른 무언가로 그 빈자리를 메워 볼 생각을 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요새 들어서는, 그 빈자리가 굳이 채워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의미를 가질 사람은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던 것이다. 모든 마음의 구멍이 메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채워진 것은 채워진 대로, 구멍난 것은 구멍난 대로 소중했고, 굳이 그 자리와 맞지 않는 것을 끼워넣을 필요가 없었다.

어제는 아버지의 기일이였다. 이젠 더이상 생각할때 괴롭다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이 날은 내가 결정적으로 이별이란 것을 싫어하게 만들어버린 날이기도 했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과의 이별이 예정되어 있고, 내가 짧게나마 모두를 떠나있어야 할 시간도 맞이해야만 한다. 그들이 내 자리를 남겨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혹여나 나를 필요 이상으로 기다리지는 않았으면 하는 복잡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결국 나를 그만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기다릴테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더 나은 행복을 찾아서 더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내가 할 일은 기다리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찾아가서 약속을 지키는 것과, 떠나간 이들에게는 새 삶을 축복해 주는게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딱히 이별이 두렵지는 않아졌다. 언젠간 다시 만날테고, 만나지 못해도 내 마음속에서는 그대로일 테니. 그저 이 마음을 이별 전에 더욱 많이 전해주고 싶을 뿐이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7-12 18:5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05/25 23:45
수정 아이콘
항상 감수성 풍부한 글을 써주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인기있는여자애
16/05/25 23:55
수정 아이콘
가족의 빈자리만큼 크진 않겠지만 저도 얼마전에 마음을 많이 주었던 사람과 이별을 해서 늘 비워둔 자리라는 표현이 와닿네요.. 다른 무엇으로 채우는게 대수는 아니겠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스타슈터
16/05/26 00:04
수정 아이콘
늘 느끼지만 빈자리는 채우는게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고, 새로운 좋은 인연이 나타난다면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새로운 인연에게도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흐흐;
인기있는여자애
16/05/26 00:29
수정 아이콘
현답이네요. 새로운 자리를 만들 여유를 가져야겠어요 헿. 좋은 밤 되세요.
키스도사
16/05/26 00:45
수정 아이콘
이런글 너무 좋아요.
멸치무침
16/05/26 00:57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지니팅커벨여행
16/05/26 11:0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결혼 같은 경사보다 문상 같은 조사에 대한 연락을 더 많이 받게 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서글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요즘이네요.

좋은 글 감사드려요, 눈물도 찔끔 했습니다.
루체시
16/05/26 11:53
수정 아이콘
빈자리를 굳이 채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 참 좋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잠잘까
16/07/13 15:1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리아나스
16/07/16 16:1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곧미남
16/07/17 06:29
수정 아이콘
좋은글 뒤늦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작년에 할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전 아직도 그분과 함께한 공간, 길, 추억이 떠오르면 너무 힘드네요..
재미있지
16/08/03 10:42
수정 아이콘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빈 자리에 아련히 떠오르는 누군가를 위해, 오늘은 혼술 한잔 해야겠습니다. 흐흐.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91 소수의 규칙을 증명..하고 싶어!!! [64] 라덱3661 22/04/25 3661
3490 웹소설을 써봅시다! [55] kartagra3983 22/04/25 3983
3489 믿을 수 없는 이야기 [7] 초모완2437 22/04/24 2437
3488 어느 육군 상사의 귀환 [54] 일신2718 22/04/22 2718
3487 (스크롤 압박 주의) 이효리 헌정사 (부제 : 어쩌다보니 '서울 체크인' 감상평 쓰다가...) [76] 마음속의빛1887 22/04/19 1887
3486 [테크 히스토리] 커피 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 아내를 두면 생기는 일 / 캡슐커피의 역사 [38] Fig.11744 22/04/18 1744
3485 『창조하는 뇌』창조가 막연한 사람들을 위한 동기부여 [12] 라울리스타1682 22/04/17 1682
3484 코로나19 음압 병동 간호사의 소소한 이야기 [68] 청보랏빛 영혼 s2109 22/04/16 2109
3483 [기타] 잊혀지지 않는 철권 재능러 꼬마에 대한 기억 [27] 암드맨2054 22/04/15 2054
3482 [일상글] 게임을 못해도 괜찮아. 육아가 있으니까. [50] Hammuzzi1692 22/04/14 1692
3481 새벽녘의 어느 편의점 [15] 초모완1655 22/04/13 1655
3480 Hyena는 왜 혜나가 아니고 하이에나일까요? - 영어 y와 반모음 /j/ 이야기 [30] 계층방정1718 22/04/05 1718
3479 [LOL] 이순(耳順) [38] 쎌라비2893 22/04/11 2893
3478 [테크 히스토리] 기괴한 세탁기의 세계.. [56] Fig.12085 22/04/11 2085
3477 음식 사진과 전하는 최근의 안부 [37] 비싼치킨1665 22/04/07 1665
3476 꿈을 꾸었다. [21] 마이바흐1365 22/04/02 1365
3475 왜 미국에서 '류'는 '라이유', '리우', '루'가 될까요? - 음소배열론과 j [26] 계층방정1984 22/04/01 1984
3474 망글로 써 보는 게임회사 경험담(1) [34] 공염불2456 22/03/29 2456
3473 소소한 학부시절 미팅 이야기 [45] 피우피우1924 22/03/30 1924
3472 [테크 히스토리] 결국 애플이 다 이기는 이어폰의 역사 [42] Fig.11613 22/03/29 1613
3471 만두 [10] 녹용젤리999 22/03/29 999
3470 당신이 불러주는 나의 이름 [35] 사랑해 Ji969 22/03/28 969
3469 코로나시대 배달도시락 창업 알아보셨나요? [64] 소시2689 22/03/22 268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