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모두가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유머글을 올려주세요.
- 유게에서는 정치/종교 관련 등 논란성 글 및 개인 비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Date 2019/04/23 02:31:55
Name 물맛이좋아요
File #1 Screenshot_20190423_023158_Chrome.jpg (68.5 KB), Download : 36
출처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Subject [텍스트] 고려대 대나무숲에 올라온 촉촉한 감성의 글


#42829번째포효

전역 축하해. 제대와 전역 둘 중 뭐가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에게 좋은 날이란건 변함 없으니 내게 익숙한 단어를 썼어. 연락이 끊긴지 한참이라 어떻게 알아볼까 고민하던 찰나 다행히도 네 인스타에 글이 하나 올라와있더라. Sns에 글을 올리는게 영 어색하다며 아무 글도 올리지 않던 너라 팔로우만 해놓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기념비적인 날이라 너도 글을 올렸나봐.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채로 활짝 웃는 너, 어머니와 꽃다발을 들고 어색하게 웃는 너, 군복사진, 휘황찬란한 모자까지. 그 사진들 중 내가 없는게 어쩌면 넌 더 익숙할 수 있겠지. 이제는 무슨무슨 병장님이 아니라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사람들, 축하한다는 너의 친구들, 그리고 나는 쓰지 못했던 댓글마저도.

참 이상하지, 아직까지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게. 사람들은 헤어지게 된 것에 여러가지 이유를 붙여 이별을 포장하곤 하지만, 좋아하게 된 것에는 굳이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잖아.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일거야. 미용실 갈 돈이 없어 늘 눈썹과 눈동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던 네 앞머리, 유독 닳아있던 컨버스화, 곧 찢어질 듯 아슬아슬했던 검은색 가방도 좋았어. 또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반짝 빛나던 눈동자, 바르고 예쁜 말들만 해주던 목소리, 가늘고 기다랗던 손가락도 좋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널 좋아했을거야. 그냥, 정말 그냥. 미팅이나 술집에서 만난 사람들이 주지 못했던 벅차오름, 널 보면 울컥한게 치밀어오르는걸 느끼고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지.

상대적으로 여유있었던 나와, 어려웠던 너와의 관계. 내 여유로움도 내 덕이 아니고, 네 어려움은 네 탓이 아닌데 왜 우리는 그것 때문에 헤어져야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너는 아려나 모르겠지만, 너와 데이트를 하고나서 집에 가는동안 참 많이 울었다. 식당에서 가격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표정에 이번달 생활비와 동생에게 줄 용돈 사이에서 고민하는게 훤히 드러나서, 내 생일선물을 위해 택배를 날랐다며 멋쩍게 웃던게 아파서, 어느날은 과외를 준비하느라 잠도 못 자서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 안절부절 못하던게 슬퍼서. 너와 여행을 간 날 많이 보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던 너와 또 같이 울던 나, 생활비를 아껴 립스틱을 사왔다던 너에게 차라리 그 돈으로 제대로 된 밥이나 먹었어야지 라며 울었던 나, 달래주던 너, 그 립스틱이 닳아없어질때까지 쓰던 나를 생각하면 참 널 많이 사랑했구나 싶다. 그 립스틱은 사실 나와는 맞지 않는 컬러였는데도 늘 먼저 손이 가더라.

또 참 많이 웃기도 했다. 단골 데이트 코스가 되어버린 한강변을 거닐면 친구들이 자랑했던 드라이브나, 호텔이나, 애인이랑 간 해외여행 따위는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한강이 보이는 식당에는 데려가주지 못하지만, 한강을 갈 땐 언제나 손을 잡아주고 집에 데려다주겠다던 너 덕분에 정말 많이 웃었다. 계속 줘도 남는건 마음밖에 없다며 사귀는 내내 빠지지 않고 써줬던 손편지들은 세기도 힘들 정도다. 알바하다가 틈이 나서 썼고, 과외학생이 문제를 푸는동안 한 단어라도 썼다던 너의 글씨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웃을 때는 살짝 패이는 보조개도, 내가 선물해준 옷은 날 만날 때만 입는다던 바보같은 말들도. 아무 때나 입어도 되고, 얼마든지 더 줄 수 있었는데 넌 한 번도 내게 뭘 사달라 한 적이 없었지.

그래도 너는 처음 사귈 때 말했던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다 가시지는 않았나 보더라. 커피 한 잔 제대로 못 사주는 자기의 처지가, 집에 돌아오면 내가 몰래 채워놨던 지갑을 보는게, 같이 여행을 가자며 여행지를 보여주는 내게 화를 냈던게 비참하다 소리치고 울었던걸 보면 말이다. 억울하다 싶었어. 너보다 멀리 보지 못하는 내가, 당장 네가 웃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해서 뭐든지 사다주고 싶었던 내가, 생일날 받았던 비싼 옷가지와 선물들 사이에서 가장 빛났던 네 편지를 보고 행복해하던 내가 뭘 잘못했는지 억울했어. 널 사랑했던게 잘못일까, 내가 부자인 집에서 태어난게 잘못일까, 내가 어설프게 배려했던걸까.. 아직도 모르겠어 사실. 도망치듯 군대로 떠난 네가 마지막으로 준 편지는 너무 많이 읽어서 이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죄다 암송할 수 있을 정도인데, 소포라도 보내면 또 널 아프게 할까봐 내가 할 수 있었던건 무사히 그곳에서 나오길 기도하는 것 뿐이더라.

2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동안 많은걸 했어. 너와 꼭 가고 싶었던 유럽도 다녀왔고, 면허를 딴 기념으로 차를 몰고 해안도로를 덜덜 떨며 달리고,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보았어. 그러면 널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지. 괘씸한 놈, 나같이 좋은 사람이 어딨다고 되뇌이며 말이야. 내 집안을, 외모를, 옷맵시를 칭찬하는 남자들과 밥을 먹은 적도 있어. 결국은 소용이 없었지만, 당장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인지라 버틸만 하더라. 휴가 때 혹시 네 친구들이 사진을 올리지는 않았을까 싶어 들락날락 하기도 했고, 그러다 발견한 사진 속 네가 더 마른 것 같아 혼자 울기도 하고. 주변 친구들이 바보같고 미련하고 멍청하다 했지만 민들레 씨앗을 불며 소원을 빌자던 너의 순수함이, 가을날 은행을 피하며 깔깔대던 천진난만함이, 그리고 나에게 키스해줄 때면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잊혀지지가 않아.

이제는 내가 연락을 해야할 것 같아. 네 착한 성격에 혹시라도 내게 짐이 될까봐 연락을 못할 수도 있으니. 아냐, 그 짐 따위 같이 들면 그만이고 사랑을 얹어주면 그만이야. 너와 내가 눈을 맞추고 있는데 그깟 돈은 아무 문제가 아냐. 날 이용해줘,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줘. 언젠가 그랬지. 민망한 말이지만 별처럼 빛나는걸 사주긴 힘들어도 널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난 빛날 준비가 되어있으니 이제 내게 와줘.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04/23 02:36
수정 아이콘
왜 반전 없는 것입니까?!?!
맥주귀신
19/04/23 02:37
수정 아이콘
이게 끝?????
무언가
19/04/23 02:39
수정 아이콘
리야.. 리건..
19/04/23 02:40
수정 아이콘
허허.... 이런 일도 있는 게 인생이죠.
칼라미티
19/04/23 02:46
수정 아이콘
국방부 바이럴이네요
사악군
19/04/23 02:47
수정 아이콘
오글거리는 심경만큼의 축복으로 두사람 행복하길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9/04/23 02:51
수정 아이콘
인증없으니 무효
minimandu
19/04/23 03:37
수정 아이콘
멋지네요. 글도 애정도.
시뻘건거북
19/04/23 05:55
수정 아이콘
마흔이 다된 제가 눈물이 다 나네요. 두사람의 인연이 잘이어지면 좋겠네요.
코코볼
19/04/23 05:57
수정 아이콘
두 친구 다 부럽네요. 이제 다른게 보일 나이라 그런지 말입니다...
블루워프
19/04/23 06:04
수정 아이콘
새벽에 일찍 깨서 읽다가 눈물 한바라지 쏟았네요.. 새벽이라 긍가..
스카이다이빙
19/04/23 06:57
수정 아이콘
헐 주작 아무튼주작
19/04/23 06:59
수정 아이콘
딴 여자 생긴거임. 무튼 그런거임
신승훈
19/04/23 07:09
수정 아이콘
글 내용이 마치 과거의 저를 보는것같네요..
귀여운호랑이
19/04/23 07:22
수정 아이콘
여자의 재산을 노린 남자의 큰그림이라면. . . .
트네르아
19/04/23 07:49
수정 아이콘
남자의견도 들어야
파핀폐인
19/04/23 07:55
수정 아이콘
???왜 '그' 엔딩이 아닌거지?
19/04/23 07:59
수정 아이콘
바이럴임 아무튼 바이럴임
19/04/23 08:25
수정 아이콘
하지만 김병장은 휴가때 헌팅포차에서 25세 연상 누님을 만나게 되는데....
마리아 호아키나
19/04/23 08:31
수정 아이콘
드라마 불새 생각나네요.
마음은 감동적이긴 하지만 저분은 남자친구의 기분과 입장을 아직도 잘 모르는듯..
카푸스틴
19/04/23 08:54
수정 아이콘
씨릴로 같은 심정인가요
마리아 호아키나
19/04/23 09:38
수정 아이콘
시릴로는 애초에 짝사랑인데다 나중에 복권 당첨되서 부자집이 되는지라 다릅니다. 흐흐흐
카푸스틴
19/04/23 18:04
수정 아이콘
정보 고맙습니다. 전 다 까먹었었네요. 크크
19/04/23 09:05
수정 아이콘
멋지다 진짜.... 와.. 여자분 필력이...
19/04/23 09:50
수정 아이콘
식당가격표를 보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은게 아니라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넘겨 짚은거 아닙니까??
아무튼 주작입니다ㅜㅜ
이혜리
19/04/23 09:58
수정 아이콘
아 이런 여자와 연애를 했어야 하는데,
이쥴레이
19/04/23 10:06
수정 아이콘
글 잘 쓰네요
19/04/23 10:19
수정 아이콘
멋지다.. 남자분 답장도 올려주세요 ㅠ_ ㅠ
19/04/23 11:38
수정 아이콘
주작이라도 이정도면 준작이네요 빛날 준비가 됏다라는 표현이 무언가 부러워요
콩탕망탕
19/04/23 13:43
수정 아이콘
"난 빛날 준비가 되어있으니 이제 내게 와줘."
남 일이지만 아름답네요.
셧더도어
19/04/23 19:39
수정 아이콘
립스틱 하나 사는데 벌벌 더는 신세에 유럽여행....... 여친이 돈이 아주 많나보네요.
Normal one
19/05/09 17:37
수정 아이콘
왠지 남자가 잘생겼을것 같음~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공지 수정잠금 댓글잠금 [기타] [공지] 유머게시판 게시글 및 댓글 처리 강화 안내 (23.04.19) 더스번 칼파랑 23/04/19 73560
공지 댓글잠금 [기타] 통합 규정(2019.11.8. 개정) jjohny=쿠마 19/11/08 520083
공지 [유머] [공지] 타 게시판 (겜게, 스연게) 대용 게시물 처리 안내 [23] 더스번 칼파랑 19/10/17 520896
공지 [기타] [공지] 유머게시판 공지사항(2017.05.11.) [2] 여자친구 17/05/11 899805
497242 [텍스트] 미국인의 멕시코 여행후기.x [26] 주말6440 24/03/21 6440
497018 [텍스트] 요즘 흔하다는 30대 남자의 삶.jpg [40] 궤변11055 24/03/17 11055
496921 [텍스트] 첫경험인터넷에쓴사람 [4] 주말5590 24/03/15 5590
496919 [텍스트] 4년 동안 살던 아파트 주민이 떠나면서 남긴 글 [16] 주말6330 24/03/15 6330
496720 [텍스트] P성향 강한 친구들끼리 여행 [88] 주말6074 24/03/12 6074
496314 [텍스트] 초전도체 발표가 실패로 끝나자 석학들 일어서서 항의하는데 갑자기 [28] 주말8075 24/03/05 8075
496246 [텍스트] 나이든 아버지의 제안 [13] 주말7947 24/03/04 7947
496211 [텍스트] 20대 여직원을 좋아한 40대 직장 상사.blind [98] 궤변12368 24/03/03 12368
496209 [텍스트] 와이프가 없으니까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22] 주말9303 24/03/03 9303
496184 [텍스트] 33살 과장님이랑 썸탄 썰 [27] 주말9779 24/03/02 9779
496120 [텍스트] 대리님이 술한잔 하쟤... [12] 주말6994 24/03/01 6994
496108 [텍스트] 천재들도 못 참는거 [20] 주말9347 24/03/01 9347
495960 [텍스트] 무협팬이 읽으면 발작하는 글.txt [55] lexicon8406 24/02/27 8406
495603 [텍스트] 중소기업 갤러리에 올라온 특이한 회식 [30] 주말10151 24/02/21 10151
495111 [텍스트] 의외로 촉한의 동탁, 조조였던 인물 [88] 사람되고싶다11234 24/02/12 11234
494602 [텍스트] 오늘 첫 출근 했는데 펑펑 울었어. [9] 주말9921 24/02/02 9921
494600 [텍스트] 공장 일 하다 본 모르는 형 [6] 주말8975 24/02/02 8975
494599 [텍스트] 결혼 6년차가 말하는 결혼의 장단점 [11] 주말10947 24/02/02 10947
494591 [텍스트] 중세 군대의 의사결정 과정 (feat.잔다르크) [19] Rober8571 24/02/02 857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