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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8/26 17:35:38
Name 코세워다크
Subject [일반] 로버트 스콧 비긴즈: 버크와 윌스의 호주 대륙 종단기(縱斷記)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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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로버트 스콧

영국의 군인이자 탐험가인 로버트 스콧은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2인자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나무위키 최고의 항목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아문센 vs 스콧 문서로 인해 더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본디 스콧이 유명해진 이유는 비극적인 죽음때문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의 각종 뻘짓이 재발굴되어 무능한 상사의 표본으로 여겨지니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다. 적어도 원주민이나 동물을 학살했다거나 부하를 버리고 도망가는 등의 패악질을 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능력이 되지 않은 자가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집단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좋은 예로 길이 길이 전할 것이다.

스콧의 죽음이 있기 50여 년 전, 머나먼 남방의 호주 대륙에서도 이와 놀랄 정도로 유사한 일이 있었다. 최초로 호주 대륙을 종단(縱斷)한 로버트 오하라 버크와 윌리엄 존 윌스가 그 비극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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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호주 지도. 동남부의 빅토리아 주, 뉴 사우스 웨일즈 주를 눈여겨보자)

1. 미지의 대륙, 호주

17세기 초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서구에 처음으로 알려진 호주 대륙은 18세기 말 대영제국이 지배권을 행사한 이후부터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대륙의 동남부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그곳을 뉴 사우스 웨일즈라 지칭했다. 후에 멜버른, 질롱 일대의 영토가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걸고 자치 식민지로 독립했다.

1851년 빅토리아의 발라라트, 벤디고 일대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어 호주판 골드러쉬가 시작됐다. 1850년부터 1860년까지 10년간 빅토리아의 인구는 76,000명에서 540,000명으로 7배 이상 증가했고 동 기간 전 세계 금 채굴량의 1/3을 빅토리아에서 담당했다. 부를 거머쥔 빅토리아 정부는 그때까지 이주민들의 발길이 닿지 않던 호주 대륙의 내륙 탐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이주가 시작되고 약 70년 가량 그들의 정착지는 여전히 호주 대륙의 동남부에 머물렀고, 척박한 대륙의 중앙부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내륙의 내해(內海)나 큰 호수의 존재가 전설처럼 퍼져있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많은 탐험가들이 도전을 했지만 사막의 열기와 괴혈병, 원주민의 습격 등으로 인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1860년, 빅토리아 정부의 주도하에 하나의 탐험대가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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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와 윌스의 여정을 그린 지도. 편도로 따져도 서울 부산 간 거리의 8배에 가까운 긴 거리이다)

2. 대탐험시대

사실 골드러쉬로 풍요로워지기 이전까지 빅토리아 정부는 내륙 탐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웃의 뉴 사우스 웨일즈와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는 적극적으로 탐험가들을 지원하며 내륙 탐험에 열을 올렸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대륙 끝자락에 위치한 빅토리아 입장에서는 내륙 탐험에 힘을 쏟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이 전신망을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1858년 대서양을 횡단하는 해저케이블을 연결하는데 성공한 대영제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케이블을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거쳐 호주대륙 북부에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신망을 대륙 북부에서 동남부까지 연결하기 위해서는 대륙 내부의 지리 정보가 필요했다. 1857년 탐사위원회를 조직한 빅토리아 정부는 1860년 로버트 오하라 버크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대륙 종단을 목표로 한 탐험대를 조직했다. 이에 질세라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860년 최초로 대륙 종단을 한 이에게 2000파운드의 상금을 걸고 탐험을 독려했다. 바야흐로 대탐험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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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 코린스 스트리트에 서 있는 버크와 윌스의 동상)

3. 버크와 윌스

로버트 버크(이하 버크)는 1853년 멜버른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출신 전직 군인, 경찰관이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그는 탐험대 대장으로 임명되기 이전까지 극지 탐험에 대한 경력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1860년 2월 탐사위원회에 제출된 그의 지원서를 살펴보면 군인 및 경찰으로서의 경력, 프랑스어/이탈리아어/독일어에 능숙하다는 점 이외에 별다른 코멘트가 없다. 버크 이외에 대장으로 고려되었던 다른 인물들의 추천서나 지원서를 살펴보면 지질학, 기상학에 능통하다거나 원주민들과의 오랜 접촉, 여러 극지를 탐험한 것을 어필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버크는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는 후에 탐험대에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

윌리엄 윌스(이하 윌스)는 탐험대의 측량사 및 기상관측자 역할로 선발되었다. 흔히 부대장으로 알려져있지만 선발 당시에는 서열 3위였으며, 부대장이었던 조지 랜델스가 후에 탐험대에서 조기 탈퇴하기에 실질적으로 탐험기간 내내 부대장 역할을 맡는다.

탐험대의 목표는 멜버른에서 북쪽으로 향해 대륙 북동부의 카펜테리아 만(灣)까지 약 3250km 거리를 종단하여 지리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총 19명의 사람과 26마리의 낙타, 23필의 말, 6대의 마차로 구성된 탐험대는 1860년 8월 20일 멜버른을 출발했다. 그들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멜버른 로얄 파크에는 약 15,000명의 사람이 몰렸다. 환성을 뒤로 한 채 탐험대는 역사적인 첫 발을 떼었다.

....는 페이크고 공원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마차 한 대가 주저앉았다. 2년 간의 식량을 싣고 떠나다보니 짐은 너무나 많았고 최초에 세 대로 계획했던 마차는 점차 늘어 출발시엔 6대로 늘어났다. 그 와중에 짐 중에는 중국식 징, 오크나무로 만든 테이블 및 의자 2개(...) 등의 쓸데없는 것들이 잔뜩 있어 전체 무게가 20톤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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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쿠퍼 크릭)

4. 쿠퍼 크릭까지의 여정

첫 날 자정 탐험대는 멜버른 근교의 에센돈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두 개의 마차가 더 고장났다. 이후에도 탐험대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많은 양의 강우와 그로 인해 질척해진 길은 일행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약 2개월 뒤인 1860년 10월 12일 탐험대는 멜버른에서 약 750km 떨어진 메닌디(Menindee, 상기 지도 참조)에 도착하여 대형 공급 기지를 차린다. 당시 750km는 말을 탄 우편부가 약 1주일이면 이동하는 거리였기에 탐험대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도중에 부대장 조지 랜델스를 포함한 간부 2명이 탐험대를 이탈했으며, 일반 대원 13명이 해고되었고 8명을 새로 고용하는 대환장파티가 벌어졌다.

메닌디에서 채비를 가볍게 한 버크 일행은 7명으로 탐험대를 추린 후 쿠퍼 크릭(Cooper creek)을 향해 떠났다. 쿠퍼 크릭은 당시 이주민들이 탐험한 내륙 최심부의 장소였고, 쿠퍼 크릭 이후부터 카펜테리아만까지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1860년 11월 11일 쿠퍼 크릭에 도착한 버크 일행은 공급 기지를 세우고 메닌디에서 뒤이어 출발할 후발대를 기다렸다.

하지만 메닌디에서의 후발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1개월이 지나도 후발대가 도착하지 않자 미련을 버린 버크는 4명의 소수 인원만으로 북쪽으로 향하기로 결정한다. 본래 쿠퍼 크릭부터의 여정은 다음 해 가을(1861년 3월) 이후로 계획하고 있었으나 상남자 버크는 12월의 한여름에 과감하게 북쪽을 향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원을 받아 종단을 시작한 존 맥도웰 스튜어트를 앞세운 또다른 탐험대가 최초 종단 타이틀을 가져갈 것을 두려워한 것이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쿠퍼 크릭에 남은 대원들 중 윌리엄 브라헤(이하 브라헤)가 대장으로 임명됐고, 버크는 그에게 3개월 안에 돌아올 것이니 3개월이 지나도 자신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곳을 떠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카펜테리아 만까지의 여정이 훨씬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한 윌스는 몰래 브라헤에게 가서 4개월간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

버크와 윌스를 제외한 두 명은 존 킹과 찰스 그레이였고 이들은 낙타 6필, 말 1필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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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맹그로브 숲)

5. 최초 종단에 성공한 버크와 윌스

카펜테리아 만까지의 여정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날이 덥다는 점을 제외하면 큰 문제 없이 진행됐다. 여행 초반 그들을 괴롭혔던 많은 양의 비로 인해 물이 불어나 있어 식수 공급이 원활했으며 원주민들의 습격도 없었다. 1861년 2월 9일 그들은 카펜테리아 만 근처의 맹그로브 늪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늪으로 인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던 탐험대는 비록 해안선을 눈으로 관찰하지 못했으나 늪으로 밀려오는 염수 및 조수 간만의 차를 확인하고 그들이 해안가에 다달았음을 인지했다.

상남자답게 정말로 3개월간의 식량만 챙겨온 버크 일행은 카펜테리아 만까지 도달하는데 59일이 걸렸고 남은 식량은 27일치 밖에 없었다. 해안선을 앞에 두고 그들은 쿠퍼 크릭으로의 귀환을 결정했다. 돌아오는 길은 혹독했다. 식량이 모자란 그들은 낙타와 말을 쏘아죽였고 종내에는쇠비름 같은 길가의 풀을 뜯어먹고 비단뱀을 잡아먹기까지했다. 그 대가로 윌스와 그레이는 이질에 걸려 포풍설사에 시달렸다. 허나 버크는 그레이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했고, 1861년 3월 25일 그레이를 구타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결국 4월 8일부터 걸을 수 없게 된 그레이는 4월 17일 사망했다. 그레이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하루가 더 경과했고, 이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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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퍼 크릭으로 돌아온 버크 일행)

6. 운명의 9시간

한편 쿠퍼 크릭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브라헤 일행은 약속한 4개월이 지나도 버크 일행이 돌아오지 않아 점점 초조해졌다. 남겨진 대원들의 생활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식량을 갉아먹으러 오는 쥐를 매일 수십 마리씩 쏴죽여야 했고 괴혈병은 그들을 점점 힘들게 하였다. 당시 괴혈병의 대책으로 라임즙을 먹는 방법은 영국인들 사이에서 보편화되어있긴 했으나 라임즙은 장기 보관이 힘들어 완벽한 대책이 되지는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대원 중 한 명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브라헤는 쿠퍼 크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1861년 4월 21일 아침 버크 일행이 떠난지 4개월 하고도 5일이 지나서 브라헤 일행은 쿠퍼 크릭을 떠나 메닌디로 향했다. 그들은 약간의 식량과 물건들을 기지 주변에 묻어놓고 큰 나무에 '북서쪽으로 3피트 거리의 땅을 파보라'라는 문구를 남겼다.

4월 21일 저녁 세 명으로 줄어든 버크 일행이 쿠퍼 크릭에 도착했을 때 동료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무에 새겨진 메세지를 확인한 그들은 땅을 파보고 식량과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4월21일 아침에 이곳을 출발한다. 낙타 6필 말 12필을 끌고 가는데... 다 건강한 상태이다'라 쓰여있었다

불과 9시간을 사이에 두고 엇갈린 두 일행. 버크 일행의 앞날에는 먹구름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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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리스 산으로 향하는 버크 일행)

7. 가자! 호프리스 산으로!!

버크 일행은 차후 행선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윌스와 킹은 메닌디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버크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남서쪽으로 240km 떨어진 호프리스 산(Mount hopeless)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을 펄쳤다. 결국 버크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고 둘은 버크와 같이 호프리스 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향후 계획을 담은 편지를 큰 나무 근처에 묻고 남서쪽 방향으로 길을 떠났다.

한편 메닌디로 돌아가던 브라헤 일행은 뒤늦게 메닌디에서 북상하는 잔류대 일행과 만났다. 메닌디 잔류대 대장 윌리엄 라이트는 브라헤에게 다시 쿠퍼 크릭을 돌아가 그들의 생사를 확인해야한다고 설득하였고, 두 사람은 다시 쿠퍼 크릭으로 향했다. 1861년 5월 8일 둘은 쿠퍼 크릭에 도착했다. 하지만 버크 일행은 이미 떠난 뒤였고, 그들은 편지를 묻어놨지만 편지를 묻어놨다는 메세지를 어디에도 남겨놓지 않았다. 공급 기지를 살펴본 브라헤와 라이트는 버크 일행의 흔적이 없다고 판단, 불과 15분 뒤에 메닌디로 돌아가버린다;;;

브라헤가 라이트가 쿠퍼 크릭에 되돌아와있을 당시 버크 일행은 불과 50km 떨어진 곳에서 험난한 행군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그들은 마지막 남은 낙타 2마리까지 죽어버리는 바람에 맨몸과 다를 바 없이 되었고, 원주민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버크는 식량을 가져다주던 얀드루완다 부족 중 한 명을 총으로 쏴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옷감을 요구했는데 음식을 가져다줘서 쏘았다는 것이 정설). 버크의 행태에 질린 얀드루완다족은 그들을 피해 떠났고,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어진 그들은 점차 쇠약해져갔다.

당시 얀드루완다족을 비롯한 호주 원주민들은 나두(nardoo)라는 이름의 수상 양치식물의 씨를 빻아 빵처럼 먹었다. 원주민들이 사라지자 나두를 구할 수 없게 된 버크 일행은 숲을 샅샅이 뒤졌지만 나두를 발견할 수 없었고 상당 기간이 지나서야 물가에서 나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두는 비타민 B1 분해효소(Thiaminase)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적절한 가공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비타민 B1 결핍이 생겨 각기병에 걸리는 위험한 작물이었다. 이를 모르는 버크 일행은 나두를 생으로 먹었고 각기병은 그들의 죽음을 앞당기게 된다. (다만 각기병이 그들의 죽음에 결정적 요소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전부터 괴혈병, 이질 등에 고통받던 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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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nardoo) 호주에만 자생하는 수상 양치식물. 버크와 윌스 덕분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8. 버크와 윌스의 죽음

버크와 윌스가 죽은 날짜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1861년 6월 말로 추정하는데, 이는 멜버른에서의 출발로부터 10개월, 쿠퍼 크릭으로의 귀환으로부터 2개월 가량 경과한 후이다.

끝내 식량을 구하지 못하던 버크와 윌스는 차례로 쇠약해졌고, 호프리스 산으로의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쿠퍼 크릭 주변을 맴돌며 구조를 기다렸지만 끝끝내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그들의 편지에 적혀있던 행선지 hopeless mountain은 끝내 hopeless라는 단어로 돌아왔고 그 둘은 6월 말 사망했다. 끝까지 살아남은 킹은 그 둘과 달리 원주민에게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얀드루완다 부족을 찾아내 그들과 같이 생활하며 구조대를 기다렸다.

1861년 9월 15일 멜버른에서 파견된 구조대가 쿠퍼 크릭 근방에서 원주민과 같이 생활하던 킹을 발견했다. 킹은 무사히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비로소 버크와 윌스의 죽음이 대중에게 확실히 알려졌다. 버크와 윌스의 최후가 생생하게 전해질 수 있었는데는 존 킹의 지분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11년 뒤 33세로 단명했다.

1863년 1월 21일 멜버른에서 4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버크와 윌스의 주장(state funeral)이 거행됐다. 둘은 호주의 영웅으로 남았으며, 개척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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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엉망진창 버크와 윌스의 종단기

비극적인 죽음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은 그들이지만, 속을 살펴보면 그들의 탐험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경험 없는 대장과 합리적이지 못한 의사 결정, 원주민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및 야생에 대한 무지 등 비난할 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존 킹은 자서전에서 버크와 윌스가 원주민에게 보였던 편협함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원주민과의 친화였다고 당당히 밝혔다.(윌스 역시 죽기 전 일지에 얀드루완다 부족에 대해 경멸하는 글을 남겨놓았다.)

스콧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호주 대륙 중부가 고온의 혹독한 환경이라고 하나 남극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당대의 지식인들은 존 킹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버크 일행이 생존해있을 가능성을 더 높게 보았다. 원주민들이 살고, 지천에 동식물이 있는 환경이기에 일행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버크 일행은 내분을 일으키고, 원주민에게 버림받는 등 몇 가지 악재가 겹치며 끝내 킹을 제외한 모두가 죽음을 맞이했다.


남극점 경쟁과 달리 호주 종단은 국제적인 경쟁은 아니었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남극점 쟁탈전만큼의 유명세는 얻지 못했다. 호주에서는 영웅으로 남아 그들의 흔적이 관광지가 되고, 박물관이 세워졌으나 외국인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탐험대를 파멸로 몰고간 그들의 우행이 돋보였을 뿐이다.

물론 그들의 개척정신까지 폄하할 생각은 없다. 외국 여행 1~2개월 후 자기 소개서에 당당히 개척 정신을 밝히는 작금의 세태를 보자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야말로 진실된 '지도 밖 행군'을 했던 옛 사람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편하게 지도를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10. 사족

- 브라헤가 쿠퍼 크릭을 떠나는데 결정적으로 일조한 다리가 부러진 대원 패튼은 6주 뒤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 버크와 최초 종단을 두고 경쟁했던 존 맥두얼 스튜어트는 4차례에 걸친 원정 끝에 1862년 7월 24일 호주 북부의 포트 다윈 근처에 도달하며 대륙 종단의 위업을 달성한다. 그는 살아서 호주 대륙을 왕복 종단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나 괴혈병, 영양실조 등으로 심하게 건강을 해쳐 1867년 이른 죽음을 맞는다

- 1873년 대영제국의 전신망이 호주 북부의 포트 다윈에 도달하며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까지 연결된다

- 1873년 영국의 탐험가 윌리엄 고스가 울루루(에어즈 록)를 발견

- 1985년 [버크와 윌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비평 흥행 모두에서 대폭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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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두부
19/08/26 18:0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19/08/26 18:53
수정 아이콘
디카프리오 닮았네요.
김솔로_35년산
19/08/26 20:39
수정 아이콘
탐험도 폭망인데 영화마저 폭망이라니 ㅠ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19/08/26 21:01
수정 아이콘
1950년대도 아니고 1850년대 해저케이블는 무엇을 위한 케이블이었나요? 그 당시 세계를 잇는 케이블을 생각하고 실천하다니 진짜 대단하네요..
19/08/26 23:45
수정 아이콘
히야.. 잘 읽었습니다.
오히모히
19/08/27 04:11
수정 아이콘
저도 19세기 중반에 대서양과 인도양, 호주 대륙을 가로지른 해저케이블에 깜놀했네요
콩탕망탕
19/08/27 09:29
수정 아이콘
흥미진진하네요.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혹시 더 읽어볼만한 책이 있을까요?
코세워다크
19/08/27 09:44
수정 아이콘
“지도 위의 인문학” 추천합니다. 이 사건을 단편적으로만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행적을 지도로 그리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콩탕망탕
19/08/27 12:18
수정 아이콘
예.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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