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8/21 21:24:25
Name FLUXUX
Subject 갑자기 센치해져서 끄적이는 어느 날의 기억.

 파랗게 밝아오는 새벽,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자동으로 씻으러가는 평범한 직장인의 하루의 시작.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을 열어보았을 때 본 평소에 장난 많은 동생에게서 온 딱딱한 문자. 부고. 죽은 친구는 적당히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었다. 그는 베트남으로 발령받은지 1년도 되지 않았었다. 복잡한 머리를 쥐어짜며 출근길에 부고를 보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이게 무슨말이야? 진짜야?
 형,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살인 것 같아요.

 누구보다도 생산적으로 살고 밝고 붙임성 좋던 친구였다. 나는 그 능글능글함이 마음에 들어서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기 일쑤였다. 내가 취직한 후에는 바쁜 마음에 보지 않은지 꽤 되었고, 그 친구의 취직 축하 술자리에 전화로만 축하를 건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자살이라니...
팀장님께 사유를 말씀드리고 일찍 퇴근해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동생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베트남 발령은 업무강도가 빡세기로 유명해 그 회사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곳이라고 했다. 거의 신입이었던 동생이 떠넘기듯 발령받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새벽두시까지 야근하고,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해 시리얼을 먹으며 일을 했다. 친구들에게도 내가 귀국을 하던지 귀천을 하던지 해야 될 것 같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결국 6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을 그만두면 되잖아. 그렇게 일이 힘들면. 왜 그런건데 대체?
 팀장이 여권을 뺏어서 돌려주지 않았대요.

 청천벽력이었다. 그게 지금 21세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그런 악마같은 인간이 있단 말인가? 새벽두시까지 일을 시키고 여권을 뺏고 자존감을 박살내는 낯선 타지에서 그는 하소연할 부모님도 친구도 없이 혼자 죽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회사는 당신 자식 때문에 회사일이 엉망이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 그래야지, 인간이 아닌 짐승에게 인간의 윤리를 들이대 본들 통할 리가 없다. 우리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술을 들이키며 밤을 새웠다.  

 오늘 퇴근길에 그 날 아침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나와서인지 그 날이 생각난다. 나에게 하는 작별인사 같았던 그 노랫말. 잘 가라. 이 술 한잔은 너를 생각하면서.  

시간은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지만
언젠간 풀려버릴 태엽이지
시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지만
찬란한 한순간의 별빛이지

그냥 날 기억해줘
내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꾸미고 싶지 않아
시간이 만든 대로 있던 모습 그대로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08/21 22:36
수정 아이콘
부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해외지사들이 얼마나 부려먹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네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공지]202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게시판을 오픈합니다 → 오픈완료 [53] jjohny=쿠마 24/03/09 26622 6
공지 [공지] 정치카테고리 운영 규칙을 변경합니다. [허들 적용 완료] [126] 오호 20/12/30 249429 0
공지 자유게시판 글 작성시의 표현 사용에 대해 다시 공지드립니다. [16] empty 19/02/25 325602 8
공지 [필독] 성인 정보를 포함하는 글에 대한 공지입니다 [51] OrBef 16/05/03 448550 28
공지 통합 규정(2019.11.8. 개정) [2] jjohny=쿠마 19/11/08 318735 3
101304 서울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탄 [25] kogang20011822 24/04/19 1822 8
101303 서울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탄 [8] kogang20011950 24/04/19 1950 4
101302 이스라엘이 이란을 또다시 공격했습니다. [140] Garnett2112290 24/04/19 12290 5
101301 웹소설 추천 - 이세계 TRPG 마스터 [21] 파고들어라3774 24/04/19 3774 2
101300 문제의 성인 페스티벌에 관하여 [142] 烏鳳10284 24/04/18 10284 61
101299 쿠팡 게섯거라! 네이버 당일배송이 온다 [41] 무딜링호흡머신7196 24/04/18 7196 5
101298 MSI AMD 600 시리즈 메인보드 차세대 CPU 지원 준비 완료 [2] SAS Tony Parker 2881 24/04/18 2881 0
101297 [팁] 피지알에 webp 움짤 파일을 올려보자 [10] VictoryFood2840 24/04/18 2840 9
101296 뉴욕타임스 3.11.일자 기사 번역(보험사로 흘러가는 운전기록) [9] 오후2시4870 24/04/17 4870 5
101295 추천게시판 운영위원 신규모집(~4/30) [3] jjohny=쿠마5660 24/04/17 5660 5
101290 기형적인 아파트 청약제도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부분 [80] VictoryFood10736 24/04/16 10736 0
101289 전마협 주관 대회 참석 후기 [19] pecotek5497 24/04/17 5497 4
101288 [역사] 기술 발전이 능사는 아니더라 / 질레트의 역사 [31] Fig.15473 24/04/17 5473 12
101287 7800X3D 46.5 딜 떴습니다 토스페이 [37] SAS Tony Parker 5524 24/04/16 5524 1
101285 마룬 5(Maroon 5) - Sunday Morning 불러보았습니다! [6] Neuromancer2905 24/04/16 2905 1
101284 남들 다가는 일본, 남들 안가는 목적으로 가다. (츠이키 기지 방문)(스압) [46] 한국화약주식회사7541 24/04/16 7541 46
101281 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31] Kaestro6915 24/04/15 6915 8
101280 이제 독일에서는 14세 이후 자신의 성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302] 라이언 덕후19220 24/04/15 19220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