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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5/09 17:35:32
Name Farce
Subject [8] 페르시아의 왕자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니?
                            아아... 너는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느낀다는 말이냐?"

                             -아민 말루프의 소설 "사마르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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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반, 니샤푸르.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아직 니샤푸르를 '페르시아' 땅이라고 불렀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에서, 땅의 경계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전, 사막에서 살던 아랍 사람들이 페르시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더 이상 페르시아는 없었다.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왕은 계속해서 머나먼 변방으로 목숨을 부지해 도망쳤지만, 아랍인 정복자들은 말을 타고 그를 쫓았다.
처음에 성문을 굳게 닫고 외적이 물러나기를 기도하던 페르시아 사람들은 마침내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랍인들은 더 이상 외적이 아니었다. 왕조가 바뀌었고, 이민족 왕조란 페르시아의 역사에서 흔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칼에서 페르시아 왕의 목에서 흐른 피를 닦아내고 있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거대한 땅덩어리를 대충 부르기에는 지난 제국의 이름만큼이나 간편한 것이 없었으리.
'페르시아'.

니샤푸르는 페르시아라고 불리는 땅덩어리 중에서도, 가장 동쪽 변방 끄트머리에 있었다.

'세상의 끝!' '문명 세계의 종착점!' '성 밖은 사막뿐!' '자기 목숨은 알아서 책임질 것!'
망국의 페르시아 문자가 딱딱한 돌표면 위에 새겨있는 경고문 위에,
아랍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붓글씨를 휘갈겨서 종이 쪼가리로 덮어두었다.
경고문의 뜻은 토씨하나 바뀌지 않았다.

니샤푸르는 거대한 성벽과 날카로운 돌산이 함께 어울려저 둘러싸고 있는 '도시'였다.
중세 시대에서 도시란 곧 무장한 장터를 의미했다.
오직 장터를 유치하기 위하여, 페르시아 사람들이 니샤푸르의 성벽을 쌓았고,
농부들이 농사를 지었으며, 상인들이 다양한 동전과 금속을 모아두었고,
시인과 대장장이가 자신의 작품을 거리에 걸어두었다.

오직 아랍 군인 중에서 밤새 깨어있어야 하는 불운한 몇 명만이,
자신들이 낚아챈 도시의 황홀하게 복잡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채,
돌성벽 위에서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머리를 긁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랍 지배자들이 단 하루, 아주 잘 알고 있는 날이 있었다면,
니샤푸르를 둘러싼 사막 비단길의 원리에 따라서 열리는 니샤푸르의 장날, 바로 오늘이었다.
동이 터 오르면 니샤푸르는 성벽이 흔들릴 만큼 시끌벅적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달조차 서서히 밤의 끝으로 꺼져가는 여명이야말로,
니샤푸르가 한낮보다도 더욱더 소란스러워지는 시간대였다.
도시의 주민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조차 각자 일거리를 찾아서 분주히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소리를 묻히게 할 장터의 소란도 없기에, 도시는 가장 작은 소리조차 모든 사람에게 시끄럽게 떠들었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리가 성안에서만 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발굽이 없는 낙타 발바닥 소리가 들렸다. 사뿐거릴 낙타 소리조차도,
서른 마리가 넘는 상단이 된다면 천둥처럼 땅을 울릴 것이었다.

저 멀리 사막 너머에서 왔을 어떤 상인 무리가 일정이 지체되었는지,
해가 뜨기 고작 몇 시간 전에 니샤푸르에 도착했다.

'정지! 정지!'
성벽 위에서 힘주어 말한 아랍어가 이들을 반겨주었다.

사막에서는 무엇이 나와 도시를 덮쳐도 신기하지 않았다. 사람처럼 보인다고 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도시 경비대는 닫힌 문 앞에 사람을 세워놓고, 겁을 주는 시늉이라도 했다.

지금 이 시간대에 성문을 열어줄 수 있는, 깨어있는 아랍인 군인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여행자가 도시를 찾기 쉽게 만들려고 성벽에 횃불을 걸어두었기에,
성벽 밑에 있는 무리가 악의를 품고 경비병을 향해서 다 같이 활을 쏘기라도 한다면,
어설프게 몸을 숨기고 있는 불쌍한 경비들은 몸에 화살을 맞고 떨어질 것이었다.

다행히도, 상인들은 아랍인들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낙타 위에서, 흰 두건 한 무리가 이리저리 기울어지며 속삭이는 소리를 내더니,
등에서 내려와 땅을 딛고는, 파란 두건을 쓴 나이 지긋한 인물을 향해 가죽물통을 내어주며 깨웠다.
파란 두건은 한참 입술에 물을 묻히며 우물거리다가, 소매에서 양피지를 꺼내 떠뜸떠뜸 페르시아어로 무어라 읊었다.

두 명의 아랍인 군인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열어주었다. 아니면 오직 둘밖에 없었기에, 그리 오래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성문을 속치마를 휘날리며 빠르게 열어주지는 않았다.

낙타를 이용하는 상인은, 말이나 사람의 발을 이용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시간대를 살았다.
해가 뜨면 눈을 뜨고, 해가 지면 눈을 감는다는 전근대의 상식은 사막을 횡단하는 상인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니샤푸르와 같은 비단길의 도시는 이들에게 도시의 시계를 맞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낙타라는 짐승은 짐을 실으면 본능적으로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짐승이다.
그래서 등에 무엇인가 얹혀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려면 계속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낙타를 원하는 곳에 멈추고 짐을 내리고 다시 실으면 모두 합쳐서 한나절이 걸렸다.
그래서, 노련한 낙타몰이꾼과 물건 정리에 도가 튼 상인이 한 몸으로 달라붙어,
하루에 남은 한나절을 그나마 최대한 많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당시 상인이 사막에서 성공하기 위한 기본 소양은,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만으로도 시간을 정확하게 짐작하는 것이었다.
배가 꼬르륵거리는 것, 화장실을 주기적으로 다녀오는 것, 경전 구절을 속으로 외우는 것,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시간을 끊어서 셈할 수 있는 시계를 몸 안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당시 상인이었다.
이들의 낙타가 멈추면 일단 손해였다. 오직 철저한 사전계획에 따라서, 더 이상 갈 수 없어 쉬기 위해 멈춘다면 멈추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전에 합의된 몇몇 불침번을 빼고는 움직이기 시작한 낙타에 탄 사람은 항상 잠에 취해 있었다.
당연히 지난 밤사이, 등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발길질을 하고 침을 뱉으며,
끙끙 앓으면서 꾀병도 부리고 진짜 병도 걸리는 낙타들과 씨름하면서 짐을 내리고 얹은 뒤였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불침번'들은 대부분 싸움에 능한 사막 오아시스 부족 청년이었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면 더욱더 좋았다.
자신이 호송하는 물건의 가치를 잘 안다면 상인들이 그사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정도로 푼돈을 받고 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업계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아랍인들의 권력은 페르시아 상인들의 피 같은 시간을 모욕하는 것으로 작동했다.
움직이는 낙타를 바로 성문 코앞에서 멈추게 만드는 것이었다.

고작 두 놈이, 우리에게 무서울 것도 하나 없는,
무섭다면 자기네들이 겁에 질렸을 두 놈의 아랍 경비가,
강도도 아닌 주제에 불침번을 깨우고 있었다.
상인의 입장에서는 깊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생각을 한다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오를 처사였다.

다행히도 상인이 이미 예상한 일정의 일부였다. 물건값에 이미 포함될 일이었다.
천천히, 단호하게 낙타를 힘으로 끌어서 숙소까지만 데려가면 되었다. 화를 낸다고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일그러졌을 얼굴을 장터에서 보인다면, 물건을 사줄 손님조차 설명 못 할 찝찝함을 느끼며 다가오지 않았으리.

어차피 상인에게 별도리가 없는 것처럼, 소가 코에 줄이 꿰인 것처럼, 낙타 또한 주둥이가 줄로 당겨져 줄줄이 끌려오는 것이었다.
힘으로 끌려간 낙타가 토라져 짐을 내릴 때 성내는 일이 생기지 않게, 몰이꾼이 선두 낙타를 조심스럽게 달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세금을 올려 내라면 내는 것이지, 이렇게 오는 사람을 방해해서, 생돈을 빠트리는 것으로 기분을 잡치게 했다.

해 뜬 사이 타죽지 않고, 해 떨어진 사이 얼어죽지 않으려고, 온갖 색깔을 먹인 천으로 꽁꽁 싸맨 상인들이,
사막의 소금기 가득한 모래를 입구멍과 콧구멍에 가득 채운 상태로 낙타 등에 실려,
설렁설렁 아랍인들이 지키는 성문 안으로 들어온다면,
짐덩어리가 등에서 사라진 것에 기분 좋아진 낙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면 지정된 상인 숙소 안에서 머물고 있던 다른 상인, 일꾼, 주인장이 이미 오래전에 깨어난 눈을 부라리며 몰려들었다.
이번에는 어디서 온 괴상한 족속이 어떤 괴상한 물건을 들고 문명세계의 품 안으로 들어왔나,
흥미를 느끼고서는 조심스럽게 살피는 것이었다.

어차피 마지막 상인무리가 성안으로 들어왔다면, 자고로 물건을 팔고 싶은 사람이라면 잠자리를 개고 일어나,
선금을 치러둔 점포 자리로 달려가서, 아침에 열릴 성문에서 쏟아질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쳐야 했다.
니샤푸르에서 낙타의 소리란 장이 열리기 전날에는 도시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자명종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큰 방으로 이루어진 상인 숙소에서 (방을 따로 얻을 정도로 높으신 어르신이라면 새벽에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잠시 눈을 붙이던 다른 상인은 이런 말을 중얼거리면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어이쿠, 이번 장에는 비단이 많이 들어왔구나.'

커피가 중동의 특산품이며, 이슬람교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율법이 술을 금지한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풍습을 주고받는다고 해도, 도시의 정복자, 아랍인들은 다른 모든 족속을 믿지 못하고 다만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믿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풍습이 특이하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랍인들의 칼리프 제국 또한 시작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의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아랍인 군인, 즉 아랍인 상인이 아닌 아랍인 군인이라면, 성벽 아래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은 무서운 일이었다.

사막의 상인은 항상 거의 페르시아인이었으며, 도시를 차지한 아랍 정복자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며 살았다.
물어보면 자신들이 아랍 종교인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주장했으나, 그게 무슨 신을 믿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페르시아 족속 가운데 소그드인, 아랍어보다 중국어에 능했고 불교를 믿던 무리조차 아직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은 시대였다.

방금 아랍인 병사는 성문을 열어주면서 목구멍을 움직여 페르시아인들이 이미 익숙해졌을 욕을 나직하게 뱉었다.
대놓고 남이 들으라고 한 욕설은 아니었고,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졌다.
일종의 작은 반항심이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반복하는 어떤 의례였다. "빌어먹을".

아랍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평범한 아랍인이라면 사막에서는 온갖 종류의 괴물이 튀어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니샤푸르를 두르고 있는 사막은, 잠들기 전 어머니가 해주던 동화 속의 사막보다 더 무서운 사막이었다.

털도 안 벗긴 양가죽으로 모자를 두르고 옷을 해입는 튀르크인 양치기 무리는 아무리 양을 끌고 다녀도, 말 도둑이면서 도적 떼였고,
휘어진 칼을 차고, 색 입힌 천을 머리에 두른 다른 아랍 병사들은 보충병이나 교대 근무자이겠지만, 탈영병이나 반란군일 수도 있었다,
동물 가죽으로 된 허리띠로 바지춤을 단단히 묶고, 단단한 모자에 두건을 둘러쓰는 페르시아인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나면,
지독한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아랍 군인들은 부들거리는 손을 치마 위에 묶어놓은 검 위에 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알라시여 맙소사! 아직도 이 도시에는 페르시아의 옛 신을 믿는 다신교도가 넘쳐납니다. 참으로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저렇게 나풀거리는 바지를 입는다면, 신에게 하루에 다섯 번 엎드리는 예배를 바른 마음으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처음 니샤푸르에 주둔하게 되었던 날에 어떤 병사는 이렇게 한탄했다.

거기에 가끔은 예수쟁이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두르고, 또는 중들이 민머리로 석장 지팡이를 끌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보통 이들은 아랍어를 하지도, '정상적인' 페르시아어를 하지도 못했다. 멀리에서는 인도와 중국,
그보다 가까이에서는 이집트, 동로마, 아시리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은 너무 흔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이방인과 아랍인들이 소통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최대한 겁을 주는 것이었다.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정복자 아랍인들의 문화가 이 근방 지역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었지만,
아직 이 시대의 '아랍제국'은 이제 막 정복의 한계점에 도달했으며, 패배시킨 제국들의 수많은 '현지인'을 품고 있었다.
당장 팔 세기 니샤푸르의 성벽 위에서 칼을 반짝이게 닦고 근무를 서는 일개 아랍인 병사의 입장이 되어보자면,
그건 전혀 알 수 없는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오히려 다가올 것으로 보이는 미래는, '오해'와 '원한'의 것이었다.
단 한 번도, 니샤푸르에서 '말'로 원한을 풀어본 적이 아랍 군인들에게는 없었다. 이 업보는 언젠가 원치 않더라도 돌아올 것이었다.

'우리 인생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아직까지도 근무시간이 끝나지 못한 두 명의 아랍 군인은 이 탄식을 시작으로 서로 대화를 시작했다.
장날을 준비하는 도시의 소란은 점점 더 커지어, 경비대장이 그들의 잡담을 듣지 못하게 만들어준 것이 다행이었다.

당장 월급날이 된다면 튼튼한 가죽 모자에 색먹인 천을 감아서 멋을 낸 페르시아인 아전이,
또 동성애자 같은 바짓자락을 나풀거리며, 단단한 디나르 은화 조각을 미리 잘라둔 것을 내줄 것이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딱딱한 탁자 위에, 딱딱한 막칼로 잘라서 올려둘 것이었다.
그리고는 월급 전표를 투박한 옛 페르시아 문자로 각지게 적어서 같이 내어주겠지.

그러면 아랍 병사들은 의자에 앉는 법조차도 몰라 엉거주춤 줄을 서서, 좋다고 한 명씩 받아갔다.
아랍인에게 '앉는 의자'란 고대 페르시아인들이 남긴, 용도를 알 수 없는 고대 유물 같은 물건이었다.
페르시아인이 웃으며 내어줄 딱딱한 의자가 도저히 익숙지가 않아서 한동안 째려보다가,
(그래도 그 위에 양반다리로 멍청하게 앉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건 너무 불편한 자세였다)
돈주머니를 소매에 집어넣고 숙소로 돌아가, 흙바닥에 카펫을 하나 깔고, 쿠션 몇개 위에 형편이 되는대로 드러누워,
'역시 사람은 삶이 푹신해야 살맛이 난다.'고 아랍어로 중얼거릴 것이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고 일어나면 또다시 '살맛이 나지 않는다' 툴툴거릴 것이었다. 매일 아침.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빌어먹을 페르시아놈들. 부드러운 것을 멀리하고, 딱딱한 것만 좋아하는 외국인들.

니샤푸르에 있는 아랍인은 자신의 삶이 불행한 이유를 니샤푸르에서 찾았다.
달콤 쌉싸름한 대추야자를, 아침 겸 점심 겸 저녁 겸 새벽 근무 식사 겸 씹으며,
부드러운 속살만 빨다가 한가운데 박혀있는 딱딱한 씨앗은 혀로 골라 뱉는 억센 아랍 군인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건 다 돈 때문에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니샤푸르는 돈이 많았고, 돈이 궁한 사람을 아시아 만방에서 모두 끌어당기고 있었다.

애초에 사백 명도 안되게 외부 아랍 군인을 초대했다는 것부터,
니샤푸르는 이미 '평화협정'에서 기존 페르시아 귀족의 '몫'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정치놀음이었다. 더 많은 콩고물을 위해서라도 페르시아인들의 반란이 일어난다면,
바그다드에서 토벌군이 움직일 것이었다. 그래도 변방의 반란에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겠지.
물론 지금 주둔하고 있는 아랍인들의 모가지는, 이미 칼로 쳐서 성벽 밑으로 굴러간 뒤일 것이었다.

하. 누군가에게 세상은 자신이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장기판이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세상은 하나의 장기말에 불과했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아랍인들이 가득한 아라비아도 아니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이집트나 이라크는 더더욱 아니오.
사막이 많지만 바다의 항구에서부터 무역기지가 내륙으로 뻗어있는 시리아조차 아니오,
수많은 이민족이 (끝내 아랍인들조차 그랬듯이) 칼을 들고 페르시아 제국을 선언했던 페르시아, 페르시아!

그중에서도 레이, 이스파한, 시라즈 같은 '고대 페르시아' 도시가 있는 서부 근무지도 아니오,
사람이 살라고 만들어진 선선한 기후와 맛있는 과일이 가득한 서부에서 뺑뺑이가 밀리고 또 밀려서,
악명 높은 소금 사막을 지나, 튀르크 유목민 칸들의 이름이 몇 년에 한 번씩 바뀌고,
덕분에 툭하면 휴가가 잘리고 비상이 걸리는, 피에 굶주린 유목제국과 하루하루 근무를 서면서 눈싸움하는,
동쪽 끄트머리, 그래 빌어먹을 니샤푸르, 니샤푸르에서 개고생을 하는 아랍 군인이 된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빽이 없어서.
그나마 한 푼이 아쉬워서.
이력서 한 줄 추가하면 다음 파견지는 좀 나아질 것이라는 같잖은 자기최면.
자신이 섬기는 장군님에 대한 미련한 충성심, 그런데 그 양반은 내 얼굴을 기억하기나 할까?

여우 같은 아내, 토끼 같은 자식을 모실 수 있는 작은 집을 하나 얻어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고통스럽고도 필연적인 여정. 그래 니샤푸르 근처에서라도, 돌산에 하나까진 바라지 않고, 반 마지기라도 얻을 수 있다면.

두 명의 병사 중에서,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똑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열심히 살아온 인생인데도 말이다. 아니, 열심히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분명 다른 기회. 놓친 기회들은 도대체 몇 개나 있었던 것일까? 알면 그걸 다 놓치기나 했을까?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혈기왕성한 군인, 젊은 청년, 특히 멀리 고향을 두고 온 이방인은,
이래서 항상 피지배민들에게 최악의 존재였다.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었고,
정답을 알 수도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며,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만들었다.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다가 이런 존재와 어깨라도 부딪히는 날에는 하루가 아니라 며칠이 피곤했다.

하지만 인간의 성정이 가장 감수성으로 충만해진다는 기나긴 새벽이 마침내 끝나가고, 해가 떠오르자,
우리의 불쌍한 두 경비병이 하고 있었던,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엄중한 역사에 대한 통찰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눈이 녹듯이', 라는 생각을 하고는 경비병 중 한 명은 혀를 찼다. 니샤푸르는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가 아니었다.
사막과 사막 사이 산기슭이 살만해서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당연히 '눈'은 높이 올라가기만 한다면 충분하게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인이란 자고로 이런 지역에서 서식하는 것을 즐겼다.)

하나의 보람찬 임무가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참았던 피곤이 몰려들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월급을 쌍륙판에 주사위와 함께 날리는 일 없이, 커피콩 자루와 바꿔야지...'

날이 밝았으니, 성문이 열릴 것이었다.
다른 한 무리의 병사가 동이 텄다는 것을 몸으로 알리려는 듯이,
성문을 열고, 길가에 내려와 장터로 들어오는 민간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장날만 되면 온갖 허황된 소문이 돌건만, 이해할 수 있게도 이번에는 아랍 군인들 사이에서,
두꺼운 옷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몸매의 아랍 무희가 겉옷만 두르고 니샤푸르에 도착한다는 헛소문이 돌았던 모양이었다.
헝클어진 수염과 떼어지지 않은 눈곱을 달고 있는 아랍 경비병들은,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엉큼한 '신원확인'을 하려고 들었다.

나이 지긋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미칠 젊은 병사의 해코지가 두려워 대추야자를 쭈글쭈글한 손으로 한 움큼씩 집어서 내어주었다.
경건하지 못한 언어의 투덜거림과 아쉬운 탄식 끝에, 마침내 한 병사가 모욕감으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인상적인 아랍어로
굳이 교대자만을 기다리고 있는 성벽 위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 물어보지 않은 정보를 올려 보내주었다.
'허탕이야!'

'아침부터 재수가 옴 붙었다'. 교대자가 다가올 방향을 쳐다보고 있던 두 명의 경비병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좋은 상징'을 보지 못한 것은, 거꾸로 말해서, 오늘 하루의 시작부터 더럽게 재수가 없을 것이라는 '나쁜 상징'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재수 없는 추측이란 언제나 틀리지 않는 법이다.

지금 즈음이라면 교대할 인원이 막사에서 출발했을 것이었지만, 아직은 도착하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때,
불쌍한 아랍인들은 저어기 멀리서 한 명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거리가 하나 생겨버렸다.
제발 이런 것은 다음 차례에 오는 근무자가 가져갔으면 좋겠다만, 오늘은 정말 날이 아니었다.

한 명이었다. 낙타는 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사람의 형태였을 뿐이며, 살갗에 햇빛이 닿아 번득여 하얀 귀신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낙타 소리가 나지 않는 불청객은 최악의 사태를 의미했다. 제대로 차려입은 중국인 이방인보다 더 골칫덩이였다.

'어이! 이쪽 문으로 동남쪽에서 벌거숭이가 하나 온다.' 성벽 위에서 아래로 외치는 소리가 전달되었다.
사막은 진정한 무법지대였다. 사막의 쉼터, 오아시스마저도 '부족의 규율'이 무력으로 집행되었을 뿐,
아무도 글로 적혀진 종이 법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법'이라는 것은 도시에 있는 개념이지, 사막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어느 시대나 율법이 똑같이 명령하고 있었다. '죽인 자를 죽여라'.
따라서 사막에서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면, 보통 벌거숭이로 도시에 목숨만 부지해서 올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속옷까지 벗기기 전에, 자비로움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줄 수 있다면, 물까지 한 모금 내어주곤 했다.
그래야 다음에 도적과 피해자가 다른 입장에서 같은 무역로에서 만난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지 않겠냐는 사막의 의리였다.

물론 더욱 잔인하고 약은 부류의 도적 떼는 그 규칙을 어기기도 하였다.
입을 열지 못하는 시체만 남기고, 자신들은 평생 선량한 염소 농부인 척, 양치기인 척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건이었다면, 도망쳐오는 생존자는 칼부림을 당한 상처를 두르고 누더기가 된 차림으로 와야만 했다.
깨끗하게 벌거숭이라면, 그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간편한 일이었다.
귀찮게도 병사들이 도적을 니샤푸르 주변에서 쫓아내려고 말을 타고 주변을 돌아야 하는 수고가 아껴질 것이었다.

노련한 아랍인 군인이라면 두 가지 종류의 사건을 혼동하지 않고 정확한 보고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익숙한 형태의 사람 모습은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사건으로 조금씩 바뀌어갔다.
곱슬거리면서 두 번째 피부라도 되는 듯이 마구잡이로 살 위를 뒤덮는 털, 괴상망측한 파란색의 얼룩덜룩한 피부.

이것은 사막 너머 저 건너편에서 찾아온 특이한 이방인 따위가 아니었다.
말마따나 오늘은 참으로 재수가 없었다.
사람이 아니었다.

사막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최악의 존재.
'진' (또는 표기에 따라서 '지니')에 씌인 야인.
원한이 썩어가는 시체를 붙들고 있는 걸어 다니는 파란 시체.
전설과 허풍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믿고 싶은 그런 존재.

'진', 그러니까 사막 속에 사는 악령이며 사막의 원주민이자 세상의 선주민들은,
사람이 가끔 준비를 해서 사막을 횡단하듯이, 진 역시 가끔 사막에서 기어 나와 사람이 사는 동네를 횡단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각오를 갖춘 진에게 필요한 것은 가죽으로 된 물통이 아니라,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가죽이었다.

사막에서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비극이었다.
하물며 무덤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바람과 함께 모래언덕이 바뀌는 땅 아래,
기억되지 못할 구덩이에서 곱게 잠드는 이는 드물었다.

'신께서 목숨을 걷어가시거든, 감사하며 신의 낙원에 머물러라'.
집안의 어르신은 아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가르쳤다. 모든 종교의 사원에서 설교자들은 신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이교도', '젊은이', '사악한 자', '아둔한 자', '불경스러운 자', 그 밖 몇몇 부류는 이 가르침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면 사막에서 사라져야 했을 육신을, 썩히지도 못하고, 부셔 트리 지도 못하고 떠돌게 되는 것이었다.
'진'이 사람 사체에 들러붙어서 싸재끼는 끔찍한 물질, 마법의 가루, 일명 '배설물'의 힘이었다.  

눈두덩 안의 노란색으로 빛나는 짐승 눈이 꿈틀거리며 그 가운데 세로로 길게 박힌 검은 색 동공을 아랍인 경비병들에게 겨누었다.
병사들은 부디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이 다만 지난밤의 피로 때문에 생긴 헛것이기를 알라께 빌어야만 했다.

옷을 입지도 않았고, 바람을 타고 괴상하게도 잘못된 조준법을 사용한 뒷간을 퍼서 청소하는 듯한 냄새가 났다.
맨몸 곳곳에 검은 보석이 달린 팔찌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으나, 움직이는 어떤 각도에서도 햇빛이 반사되어 번득이지 않았다.
짙은 회색 털이 마구잡이로 자라서 속옷처럼 필요한 곳곳에 억세게 몸에 들러붙어 있었고,
피부는 썩기 시작한 몸뚱이가 묘혈에서 밖으로 기어 나온 상태로 멈췄는지 푸르딩딩하며,
뭘 먹은 것이 흘려서 묻었는지 입가의 갈색 흔적이 입안을 들어갔다 나오며,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열린 성문 안으로 '진'은 계속해서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걸어 들어갔다.
성벽 위와 밑에서 지키던 병사 무리도, 지나가던 장날의 사람들도,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으나,
함부로 사막의 '악령'을 자극할 소리를 지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의 향기에, 경솔한 구경꾼까지 몰려들어, 장날에 걸맞은 구경거리라고 말로 된 소리 없이,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상인과 군인 다음으로, 니샤푸르에서 중요한 집단이 구경꾼을 밀치고, 길을 다시 만들어 장터로 걸어가려고 했다.
이들은 '진'을 보면서도 눈길이 오래 머무는 일 없이, 이따금 구경꾼들에게 '비키시오'라고 할 뿐이었다.

니샤푸르에는 '수피'라고 불리는 이슬람교의 수도사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사람이 많은 곳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이 과묵한 수도승들은,
도시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높은 산 속에 동굴을 파고 수련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오직 장날에만,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 산에서 내려왔다.
그 밖에 날에는 혹여나 산에서 땔감을 줍다 마주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남이 말을 걸어도 대꾸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노란빛이 담긴 진의 눈동자는 수피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중에서 한 사람을
아랍어로, 그러니까 사람과 귀신의 공용어로, 한껏 위엄을 담은 말투로 멈춰 세웠다고 한다.

"발흐의 왕자여. 그대가 도둑이 아니라면 당신이 보관하고 있던 나의 것을 돌려주시오."

'수피'들의 지도자는 '이브라힘 아드함'이라는 '현자'로서, 니샤푸르의 토박이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박트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후대에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알려질 지방에 존재했던,
도시국가 '발흐'의 왕자로 태어났던 인물이었다.

불교도였던 '아드함'*왕은 무슬림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부처에게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염불을 바쳤다고 전해진다.
(*'아드함'은 '이브라힘'의 성이긴 하지만, 아랍 이름이 다 그렇듯이 여기서는 '아드함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덕분에 '이브라힘'이 태어났을 때는 머리가 지나치게 좋아, 그 어떤 물질과 깨달음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고,
부처가 그랬듯이 왕자의 도리를 포기하고 방황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니샤푸르의 이슬람교도들은 손가락질했다.

귀신들린 시체가 이브라힘을 단번에 알아본 것은 정말로 놀라운 신통력이었다.
그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서 볼품없는 이브라힘을 놓치고는 했다.
이제 사십 불혹을 조금 넘긴 나이였지만, 이브라힘은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도저히 '현자'라고는 알 수 없을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키는 그때 기준으로도 조금 작은 편이었음에도, 거기에다가 허리가 왼쪽으로 자세히 보면 보일 정도로 휘었고,
뼈에 거죽이 들러붙은 듯이 말랐으며, 온몸에 햇빛을 많이 받아 얼룩덜룩한 검버섯이 수묵화를 그리고 있었으며,
사막 모래언덕 같은 살갗이 빽빽하게 깊게 접혀 있었다. 거기에, 두 개의 도토리만 한 검은 눈동자는 주름과 함께 눈가에 묻혀서
앞의 사람을 보고는 있구나 알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슬람교도답게 정갈하게 길이를 지켜 기른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정신없이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는 덕분에, 무참하게 상한 외모에 비하여,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성한 수염이 달린 턱은 자신의 물건을 돌려달라는 사막 악귀의 말에, 도토리 눈동자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굴러갔다.
이브라힘이 가던 길을 일단 멈추어보니, 자신을 불러본 그 귀신 들린 시체가 키가 머리 한 개 정도 더 컸다.

진의 노랗게 빛나는 괴물 눈동자와 이브라힘의 단춧구멍 눈이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멈추었다.
"비키시오". 이브라힘은 다른 수도사들이 하던 말을 짧게 반복했다. 그를 알아보게 된 구경꾼들은,
혹여나 자신도 모르게 그를 만지게 되거나, 그가 자신을 만질까, 하나둘씩 알아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밀치면서 옮겼다.

니샤푸르의 구경꾼이 '진'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는 까닭은 '악령'의 말이란, 사람을 홀릴 정도로 달콤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정령이 만년 동안 응어리진 말주변을 뽐내기 시작하면, 일개 필멸자는 결코 입으로 이길 수가 없었다.
무쇠로 갑주를 만들어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찬다고 해도, 그 어떤 용맹한 병사도 진을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진의 말을 한번 혹여나 들어주게 되면, 혼이 빠진 듯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홀려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고,
마침내 스스로 제 발로 나서서 재앙과 액운을 한 아름 껴안으면서도 모든 것을 귀신에게 자기 손으로 내주었다.
그리고는 수년이 지나고 인생이 아주 끔찍하게 꼬인 다음에야 무엇이 지나갔었는지 스스로 조금 의심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사 중의 수도사, 이브라힘은 달랐다.

"수도사는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오. 혹시나 공의 이름이라도 안다면 생각해보기 쉬울 것 같소이다."
이것이 이브라힘의 대답이었다.

"내 이름은. '자하크'이오. 내가 묻힌 무덤에서 그대가 사는 니샤푸르까지 삼백이십삼 파라상*하고도 절반이 되기에,
내 발로 직접 걸어서 왔소. 하루에 한 파라상씩 잡아, 일 년이면 족한 줄 알았거늘, 길을 일러주는 이가 없어 십년이 걸렸소."
(*파라상: Parasang, 페르시아의 '리(里)'에 해당하는 거리 단위. 시대마다 다르나, 미터법 이전에는 주로 5.7km이었다.)

"아아... 진 중의 진, '자하크'를 몰라보았소. 알라께서 그대의 붉은 용을 나에게 넘겨주셨다오.
그리고는 언젠가 용의 주인이 나를 찾아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오.
그대의 애완 짐승을 기르고 지키면서 지난 십 년 동안 나의 동굴에서 기다렸다오.
니샤푸르에 온 것을 환영하오."

이브라힘이 목을 가볍게 튕기자, 자하크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주었다.
수도사는 잠시 입술을 윗니로 깨물다가 놓아준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하크라는 것은, 한 나라의 왕자에게 씌이는 괴물이거늘.
어느 머나먼 나라에 또 이런 원통함이 찾아왔는고?"

'하.' 기가 막힌 질문이라는 듯한 소리였다.
"니샤푸르에서 칠백삼십 파라상 떨어진, 백년 전에 망한 고구려라는 나라의 핏줄이오.
발흐의 왕자 이브라힘, 그대는 삼백 파라상 떨어진 내 무덤이 있는 탈라스 강에서, 십 년 전에 고구려 사람의 피가 흐른 것을 모르오?
망국의 볼모들이 당나라 정복자가 베풀 명예를 위해서 변방에서 스러진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오.
그리고 내 손에는 내 피뿐만이 아니라 아랍의 볼모, 페르시아인들의 피도 아직 냄새를 흘리고 있건만."

"붉은 용 '아지다하카'의 주인 '자하크'여. 그대가 온 곳에서는 '악마'를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이블리스', '사탄', '아브리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가 감히 신께 내기를 하나 걸었던 적이 있소.
'신께서 만드신 세상은 너무나도 불공정합니다. 단 한 명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천하의 염치없이 사악한 악마인 저에게조차도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만듭니다.'"

"그 뒷부분은 나도 잘 알고 있소. '당신이 만든 세상에서 증오에 타오르는 사람 자하카를 단 한 명 점지하는 것을 허락해주소서,
그러면 제가 그런 불쌍한 인물이 손으로 세상을 눌러 꺼버릴 수 있는 장치, 아지다하카를 만들어두겠습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자비로우신 신이시여. 위대하신 알라이시여'".

이브라힘은 자하크가 기가 막힌 예언의 내용을 한 글자도 틀림없이 알고 있는 것을 깨닫고, 수염을 어루만졌다.
성하지 않은 이빨과 이빨 없이 빈 곳이 뒤섞인 공간이 벌려졌다가 다시 오므라졌다.

"허...

고구려의 '자하크' 왕자여. 이미 알겠지만, 나는 신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고. 주인이 찾아올 것이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돌려주라는 말씀은 듣지 못한 사람이오.
아니, 신께서는 정확히는 내어주지 말라고 당부하셨소."

"알고 있다마다.

이브라힘, 나는 거래를 하러 왔소."

이브라힘은 '자하크'의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신이 '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진이라는 존재는 본래 달궈진 바람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통, 사람에게 큰 영향을 직접 미치기 힘들며, 사람의 거죽을 쓰고 있지 않으면 보이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고향인 사막에서는 간혹 어떤 강력한 진은 시체 가죽 없이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고, 진과 사람이 대화를 시작 하기 전,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던 태고의 형태라는 모래폭풍.
그리고 자하크는 그 형상을 하여, 이브라힘은 그 속으로 빨려들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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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고집은 인간의 고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을 원하기 시작했다면, 절대로 마음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알라께서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에, 바람과 불이 움직이더니 스스로 먼저 만들어진 것이 '진'이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세상을 망치지 않는다면 기회를 주려고 하셨다.
이들이 잘못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인간은 창조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시작이란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게 진의 존재는 하나의 거대한 '가정법'이었다. 수많은 회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 아둔한 요괴 무리는 회개할 줄 몰랐다.

진들은 계속해서 '필연'을 믿었다. 진은 변명을 하며, 세상에 불을 질렀고, 바람으로 세상을 어지럽혔으며,
결코 자신들이 망가트린 것을 스스로 치우는 일이 없었다. 만년의 시간이 지나도, 그들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신에게 그들은 말대답을 하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위대하신 신이시여. 우리가 할 줄 아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알라께서는 미련 없이 '천사'를 내려보내, 진의 세계를 끝장내시고,
다시 '인간'을 위한 천지창조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진이란 그런 족속이다.

'인간'은 수명이 스스로 달아나는 존재이며, '진'은 파괴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영생한다.
그래서 오직 사람만이 선한 일을 할 수 있으며, 회개를 할 수 있으며, 복종할 수 있다고 성서는 기록한다.

따라서 옛 영광, 이전의 총애를 신 앞에서 구하기 위해, '진'은 본능적으로 사람의 가죽을 벗겨 입으려고 한다.
살아있으나 살 생각이 없는 사람, 이미 미련을 가지고 죽은 사람은, 훌륭한 진의 가죽이 되어준다.

'진'은 자신이 뒤집어쓴 살가죽에게 속삭인다.
'어차피 삶이란 천만번을 반복하고, 나유타를 반복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너는 딱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고'. '비극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청승맞게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이브라힘은 자신이 도착할 곳을 알았다.
흙을 씹는 냄새가 입구멍에 가득했다. 코는 이미 막히어 바깥 세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20년 전. 발흐.  
'아드함' 왕의 치세.

"왕자님, 국왕 폐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아 불쌍하고 정말 아름다운 기억 속의 얼굴이었다.
저 멀리 알렉산드리아에서 발흐까지 팔려온 나의 시종아.
고향이 체르케스라고 했던가? 이국적인 얼굴, 벽옥 같은 붉은 피부.
그리고 그 위에 사정없이 그어진 갈대 자국, 굳은 피, 파여진 살.

"곧 가겠다고 전해드려라. 아니, 지금 내가 직접 가마."
아드함왕은 잔인해질 수 있는 기회, 모욕을 줄 기회는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브라힘은 자신의 '왕'이자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했다.

'아버지'는 당신을 뺀 그 누구도 당신의 아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갈고닦으려는 노력이 부족하구나! 이해를 잘못했으나 적용에서 궁금해질 점을 찾아내지 못했구나!
모자라고도 모자라도다!

율령, 행정, 율법, 병법, 무술, 산술, 역학, 예절, 규범...
임금의 도리를 임금에게서 배우지 않는다면, 과연 어디에서 필요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아드함왕은 동시에 다른 사람, 특히 왕족이 아닌 일개 시종이 이브라힘의 흠을 말할 수 없도록 단속하는 것에도,
철저하게 집착했다. 체르케스인 시종이 대신 매를 맞았다. 써서 낸 답안이 마땅치 않으면,
혹여나 어떤 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당당하게 잘못 답했다면, 비밀은 철저히 감춰졌고, 시종의 상처는 눈에 띄는 곳에 만들어졌다.
'보아라.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똑똑히 보아라!'

하지만 그것이 아드함왕이 자신의 자식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옷은 몸 대부분을 손쉽게 가렸다. 아드함왕은 하인을 무르고 아들을 꾸짖는 것을 즐겼다. 옷 밖으로는 생채기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이브라힘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아마 표정이 조금이라도 바뀌었다면 왕이 그 어떤 종도 다시 방에 돌아올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하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그럴싸한 가설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수밖에.

욕탕에 몸을 담가야 하는 날이면, 아드함왕은 이브라힘을 갑자기 발로 차버리고는 했다.
하인들은 누가 빠지는 물소리를 들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달궈진 물에서 혹여나 조금이라도 꿈틀거렸다간,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무서워졌다. 물을 먹고 죽겠다고 해도 머리끄덩이가 당겨졌다.
차라리 삶아 뒤지는 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 다시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되잖아.

어떤 날은 아드함왕이 이브라힘의 뺨을 주먹으로 치게 되는 날이 있었다. 이브라힘이 꽤나 어릴 적의 일이었다.
아직 '정신머리가 바짝 서지 않은' 꼬마 이브라힘은 움찔거렸고, 입술에 크게 상처가 벌어졌다.
주먹이 낸 상처는 다만 아니었고, 입을 우물거리는 바람에 자기 이빨로 입술을 그어버린 것이었다.
실로 꿰맨 입술에서 부기가 빠지고, 헝겊으로 덮어 가릴 수 있을 때까지 몇 주간 이브라힘은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브라힘은 아직까지도 아버지와 같은 방에 갇혀있어야 했던 그 무서운 날들을 기억했다.
왜 자신이 혼자 남아있던 그 시간대에 목에 붕대를 감을지언정 실수로나마 스스로 목을 매달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니, 죽는 것은 이브라힘의 목표가 아니었다.
이브라힘은 원한에 가득한 젊은이가 되었고, 아드함은 왕좌에 기대어 숨을 힘겹게 색색 흘리는 목소리로 자기 아들에게
미래의 왕위를 부탁했다. 물론 왕자는 아드함왕을 울화병으로 죽이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얼씨구. 더 열심히 해보십시오. 돌아가시기야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발흐를 무작정 떠났다.
계획을 세우고 떠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마치 지도를 쳐다본다면,
떠나는 길과 돌아오는 길이 같은 길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화가 날까 봐. 이브라힘은 지도를 챙기지도 않았다.
아니 손에 집히는 지도가 하나 있기에 일단 홧김에 찢어버리고 말았다.

니샤푸르에 수도사들이 속세에서 벗어나 산에서 산다고 하여 거기로 얼떨결에 향하기로 정했다.
이브라힘이 아직 불교의 수행방법이 영향을 미치고 있던 니샤푸르에 정착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길목에서 사람을 볼 때마다 찣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웃으면 웃는다고, 울면 운다고, 두 발이 달리면 두 발이라고,
두 팔이 달리면 양팔이 멀쩡하다고 이를 갈고, 어떤 것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자하크'보다 훨씬 사악한 목소리를 지닌 자하크의 '진'은 이때 이브라힘을 비웃었다. "이브라힘아 이브라힘아.
너는 교만하여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줄 알지만, 너는 사람에 불과하고 신이 아니로구나."

진은 무한한 시간을 살며, 결코 한 가지 방법 이외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가정을 하는 법을 모른다.

이브라힘은 계속해서 이야기의 끝에서 자하크를 만났고, 다시 발흐의 젊은 자신으로 돌아왔다.
시작과 끝부분에서, 그리고 몇몇 순간에서 이브라힘은 자신이 이미 이런 삶을 살아본 적이 있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정해진 삶은 단 한 가지였다. 발흐의 집안은 이브라힘에게 유일한 세계였다.

매번 새로운 시작점에서, 어린 수도사는 자신의 삶이 무한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였다.
오늘은 팽이를 가지고 놀까, 매를 가지고 놀까? 아니면 신하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까?
하지만 사건의 앙금이 쌓이고 쌓일수록, 커다란 줄기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브라힘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아드함이 말해준 것 중에서 자신 또한 굳게 믿기로 한 것,
아드함이 말해준 것 중에서 자신은 반드시 거꾸로 믿기로 한 것,
그 이외의 것은 이브라힘의 귀에 들리지도, 이브라힘을 기쁘게 만들지도, 슬프게 만들지도 못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아드함이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종교에 깊게 빠졌단 이유는 아버지가 모든 신을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동작이 느린 사람이 싫은 이유는 아버지가 목을 조르며 가르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이 거칠고 욱하는 성질을 가진 이유는 배운 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브라힘은 편리한 변명을 길게 하는 습관을 들였다. 누가 혹여 물어보지 않아도 굳이 대답해주었다.
그 이외의 것은 이브라힘의 귀에 들리지도, 이브라힘을 기쁘게 만들지도, 슬프게 만들지도 못하였다.

반항 아니면 순응, 이브라힘은 세상 만물을 그렇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아드함왕이 해준 것에 대해 반발했고,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갈망했다.
삶은 곧 원한이었고, 원한은 곧 삶이었다.

그리고 원한은 이브라힘의 세계를 집어삼켰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사람이란 살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란 주어진 맥락에 내던져질 것이었고,
복종을 배울때까지 두들겨 맞는 존재였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어딘가에서 얻어맞아 누런 고름을 밖에 질질 싸고,
안의 내용물이 곤죽이 되어 이미 뒤진 시체들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용기, 명예심, 두려움, 활발함, 조심스러움, 모두 남에게 배운 것, 주입된 것을 자랑하고 팔아먹기 위해 침을 튀겨가며 아는 척을 했다.
혐오스러웠다. 가난한 자는 가난하기에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부유한 사람은 부유하기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사람은 제 각자 다른 지점에서 시작하여 모혈에 파묻혀 죽을 때까지 한 줄로 구멍을 파고 들어갔다.
점차 누가 말을 걸어도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답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오? 내 아들은 분명 살아 있을 텐데.'
살아있는 애인의 배 속에서, 시체가 나왔다.
썩은 냄새, 아름다운 아내의 내장이라도 쏟아지는 줄 알았다.
내 여자친구의 대장이 이렇게 생겼을까? 이런 냄새가 날까?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괴상한 생각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니, 이브라힘은 자신의 이름 없는 아들을 기억했다.
한 아름다운 아랍 이주민 여자가 있었다. 발흐의 왕자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다.
아드함왕이 완벽한 왕자에게 집착하게 된 것에는, 너무 빠른 아내와의 사별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브라힘은 '아내감'이 아니라, '어머니감'을 발흐의 골목골목을 뒤져 찾아냈다.
그리고 밤마다 밀회를 즐겼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품 안에 안기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이 무섭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에게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어느 날 이브라힘은 발흐를 떠나버렸다. 그러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니샤푸르에서 다시 동굴 벽을 마주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입구에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였다. 그리고는 하나의 핏덩이를 끌고 왔다. "왕자님. 왕자님의 자식이에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음식구멍, 바람구멍에서 동시에 게거품이 올라왔다. 숨을 도저히 쉴 수가 없었고 헛토악질이 올라왔다. 딸도 아니고 아들이었다.
가만히 보니 똑 닮았다.
"뒤져버려! 네까짓 게 뭔데. 나에게 이딴 걸 줘. 이딴 걸 주냐고! 나한테 왜 그래! 왜!"

지랄발광을 했다. 물건을 던졌다. 몸을 던졌다. 울었는지 코피인지 콧물을 처마셨는지 그조차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마음에서 지금껏 다쳐있던 어떤 부위가 덧나버렸다. 두 살배기 아이는 자기 아비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는 없고,
다만 상황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그만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그래서 이브라힘이 얼떨결에 애를 안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이딴 걸 만드는 게, 이딴 짓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저주를 반복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인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비로운 알라이시여! 사람의 핏덩이가 당신을 향한 기도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둘 중 더 귀한 것만을 남겨주시옵소서.'
그러니 아이의 숨통이 끊겼다고 한다.

'이브라힘의 손에 닿는 것은 뭐든지 죽는다'. 그 이후로 소문이 니샤푸르에 퍼졌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번 영겁회귀는 무엇인가 이상했다. 매번 반복되는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다른 경험이었다. 이브라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인의 분만일에 그녀를 떠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태반까지 쏟아졌건만, 아이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미 죽은 아이였다. 아니, 언젠간 죽을 아이였다.
그래,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보다 축약된 판본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아이는 죽어있을 것이다. 항상. 언제나.

이브라힘은 '자하크' 만난 순간에서 이어질 미래에는 무덤이 하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눈에 흙이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무엇인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착각과 함께 살아갈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은 정해져 있었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하크를 조종하는 진이 다시 한번 그를 비웃을 것이었다.
'그래. 그래. 천사백만 개의 우주를 너에게 보여주마, 단 하나도 바뀌는 것이 없을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반응에 자극하는 장치일 뿐이다. 구더기가 물면, 뜯어먹히는 송장만큼 자유롭구나.'

목이 졸려 죽은 것 같은 아기의 얼굴이 아는 누군가를 닮았다.
자하크인가? 그 시체도 살아있는 시절이 있었던가.

"고구려는 나약한 왕족들이 장군 나부랭이들의 전횡을 방치하면서 멸망하였다."
멀리 떨어진 동양에서의 일이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역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였다.

"그런 나라가 망한 것은 어찌보면 잘된 일이야. 삶에도, 역사에도 두 번째 기회라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나이가 더 많은 존재가,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얻으며 말했을 것이다.

"감숙성에서 평생 망국을 그리워하는 유민으로 지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당나라 사람이라고 너무 미워하지 말고, 성공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잡아라.
너는 중국 땅에서 우리 가족만의 고구려를 다시 하나 만들어낼 것이다.
서역에서 고선지 장군이 원정을 준비하고 있으니, 내가 편지를 써주면 훌륭한 병사를 모으는 그가 너를 써줄 것이다."

"넵." 체념이 담긴 대답.

국경이 모호한 변방에서의 전투. 아랍과 당이라는 두 개의 패권제국이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기 위해 맞붙었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대부분의 전투는 이권을 저울질하던 현지세력이 얼마나 협조하냐에 따라서 승패가 갈렸고,
당나라 군 진영에 속해있던 카를룩 튀르크 부족은 중간에 아랍 군대에게 투항했다.
이들이 당나라가 동원한 병력의 2/3이었다. 당연히 그 순간 탈라스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하크는 포로로 끌려가던 중 사막에서 죽었다.
부끄러움을 피하기 위한 결말로서는 그나마 썩 나쁘지 않은 경우의 수였다.
사람도 죽여봤고, 이제 죽어도 볼 것이었다.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주십시오.
마지막 순간, 그는 어쩌다가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자신이 바꿀 수 있던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천만번 같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면, 과연 한 번이나마 다른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런 정답을 알 수도 없을 질문을 하던 왕자의 시체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에서 곱게 썩어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발흐의 왕자여. 이제 '아지다하카'를 내어줄 생각이 조금 드오?"
자하크가 물었다.

니샤푸르의 장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니면 전혀 흐르지 않았을까.

이브라힘의 얼굴에는 두 개의 작은 검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마도 눈이었다.
하지만 더 깊어진 주름 때문인지, 이미 작던 그의 눈은 거의 바깥에서 보이지 않게 된 상태였다. 피곤했다.
그 밖의 모습은 그나마 그대로 였을지 모른다. 다시 이브라힘은 주변을 한번 천천히 훑어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분명 자하크를 처음 보았을 때는 해가 막 떠오른 아침이었다. 구경꾼들도, 다른 수도사들마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간개념이 인간과 다른 존재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구경꾼에게조차도 말이다.
이브라힘은 더 이상 그의 수염에서 검은 털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도 그 용을 봐야겠소."

수도원에 이브라힘이 진에 씌인 왕자를 데리고 돌아오니, 다른 어떤 수피 수도사도 감히 말을 걸지 못하였다.
성문에서 꽤나 멀리 걸어야 했지만, 걸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수피들의 돌산은 그리 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브라힘의 수도사들은 구걸하지 않았다. 자신이 손으로 만들어서 팔아, 다른 쓸만한 물건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했다.
장에 다녀온 날에는 이들은 특히나 관광객 같았다. 손에 집히는 대로 자기 옷을 사 왔기에,
똑같은 옷을 한 무리가 한동안 사 입는 일도 있었고, 오히려 단 한 명도 같은 방식으로 생긴 옷을 입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그런 수도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장터의 소란스러움까지는 몸에 지니지 않고 돌아와, 각자 동굴의 깊은 '방'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결코 방을 크게 쓰지 않았으며, 다만 몸을 하나 집어넣을 구멍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서로 아주 중요한 깨달음이 있지 않다면 서로 부르지 않았으며, 이름이 혹여나 불려도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다 같이 창고로 쓰거나 부엌으로 쓰는 방이 존재하기도 했다. 다만 안으로 들어갈 수록,
한 명씩 조용히 조용히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브라힘을 포함한 몇몇 수도사만이,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에 도달하는 길을 알았다.

'아지다하카'
페르시아의 배화교의 악마, '아흐리만'이 만들었다는 용이자 세상에 종말을 가져다줄 수 있는 하나의 장치.
중국 황제의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샤한샤의 왕관과 솔로몬의 보석을 두르고 있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용이다.
빛나는 붉은 비늘과 주황색 털을 바라보는 이는, 남자가 되었던, 여자가 되었던, 심지어 거세한 환관일지라도 넋을 놓게 된다고 한다.

니샤푸르를 둘러싸고 있는 비나루드 산맥에서 가장 오래된 돌산 밑에 그 거대한 몸체를 뉘고 잠들어있던 괴수는,
그때는 이브라힘 아드함이,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깨어나 소란을 부리지 않도록 지키고 있었다.

이브라힘이 길을 안내하자, 두 명의 왕자는 손쉽게 용이 잠들어 있는 방을 발견하였다.
발흐의 왕자는 이 장소에 돌아올 때마다 언제나 아지다하카 그 자체보다 그 용을 가두고 있는 동굴의 벽을 더 두려워했다.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벽돌을 안에서부터 깎아낸 듯한 반들반들한 표면의 직사각형 방이었다.
알라께서 이브라힘에게 용을 맡길 때, 함께 하사하신 방이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장소가 아니었다.

저기 멀리서 붉은 용이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같은 바닥 위에서 잠들어있었다.
만일 자하크가 조급하게 뛰어가기라도 한다면, 세상의 종말은 오 분도 안돼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구려의 왕자마저도, 아지다하카의 위엄에, 그리고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완벽한 방의 구조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이브라힘은 용기를 내어 자하크의 털투성이 손목을 잡아챘다.
놀라서 반대방향으로 튀어 올라오는 귀신 씌인 힘에, 그는 지금 자신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하지만 자하크는 이브라힘을 낚아채 쓰러트리거나, 힘으로 밀어버리는 등의 다른 해코지를 하려 들지 않았다.
단순히 잡힌 손목을 풀어냈을 뿐이었고, 용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썩어가나 완전히 썩지 못하는 푸른 시체,
방금 자신이 준 힘을 육신이 견디지 못하여, 검은 피가 몰려 손가락 끝과 손바닥이 혹처럼 부풀어 오르고,
그 살갗이 체액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찢어 흐르는 몸. 장터에서만 해도, 자하크의 겉모습이 이리 처량하지 않았다.
거사를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듯이, 시간이 눈에 보이는 개념이라면 다 흘러나가고 있을 그런 몸이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온전한 반대편 손을 용의 몸뚱이에 걸어가 올리고,
고구려의 왕자는 넋두리일지, 아지다하카를 깨우기 위한 일종의 주문일지 모를 이야기를 읊조렸다.

"악마가 모든 것을 잃은 '욥'에게 말했다. '사람이 신을 경배하는 것은, 신께서 멋있지만 촌스럽지 않은 옷,
맛있지만 질리지 않는 끼니, 평화롭지만 즐거운 가정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혹여나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면, 그 어떤 겸허함도 남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본래 실오라기 하나 없는 몸뚱아리로는 신을 경배할 줄 모르는 원숭이옵니다.
신께서 불가사의 종류의 일을 이루셔도, 불가사의 분의 하나 만의 이유로 거역하는 종자입니다."

이윽고 동면에 들었던 파충류의 눈이 떠졌다. 붉은 용의 우아한 곡선의 끄트머리에는 두 개의 이글거리는 붉은 눈,
세상의 그 어떤 원한도 감히 원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분노가 도사리고 있나니.  

시체의 손이 용을 쓰다듬었다.
"나의 반쪽, 항상 화가 나 있는 용아. 세상을 불태우고 잿더미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꾸나.
두 번째 시대의 사람은 기록될 역사를 읽고 이보다는 잘하리. 헛되고 헛되도다.
태양 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의 모든 수고가 도대체 어디에 유익할꼬."

이브라힘이 자하크의 말에 대답하였다. 그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어쩌겠다고 하는 노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지간한 이야기라면 잠자코 들어주려고 했지만, 정말 진이라는 존재는 어리석기가 끝이 없구나!
왕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지금 세상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소?
발흐를 떠나 니샤푸르에 도착한 나는 사람을 아무도 보지 않고, 다만 나물을 캐고, 장작을 때우다가 죽으면 죽으려고 했소.

나는 내 어린 아들을 죽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이미 발흐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소.
물론 나는 그들의 부탁을 거절했다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차례라고 생각했지,
그사이 왕국은 다른 왕의 핏줄을 어떻게든 찾아내었으니, 이제야말로 내 저주받은 피가 저주받은 가정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가 마침내 질긴 모가지를 비틀고 세상에서 사라질 시기가 온 것이었소.

더럽게 추웠지. 그날은 몽니를 부린답시고 나뭇가지를 하나도 주워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사람이란 정말로 간사한 것이, 그때 막상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말이오, 모닥불은 안된다고 했으니까 하다못해 털이불을 끼고 잠들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소.
그리고 그게 이루어졌지, 무언가 따끈한 게 날 덮고 있었으니까.

그때 신께서 나에게 용을 내려주신 것이오. 보기만 해도, 세상의 모든 사람이 탐날 형태를 한 무언가.
하지만 그때도 이놈의 용대가리는 이런 역정이 나서, 그래 그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지.
나를 씹어먹겠다고 눈깔을 부라리고 용이 달려드니 나는 엎드려서 죄를 빌 수밖에 없었소

신이시여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세상을 신께 구하려고 하니, 신께서 이렇게 잔인한 모습으로 세상을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나이다.
저는 세상을 저주하며, 모든 것을 더럽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나약하고 나약하여 계속해서 세상을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저에게 깨달음을 주셨으니 이제 더러운 세상에서 머물며 믿음을 구하고, 말씀을 전하되
다시는 함부로 기적을 함부로 구하지 않듯이 세상도 함부로 구하지 않겠습니다.
먹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일해서 먹겠으며, 입어야 하는 것은 벌어서 입으며, 구할 수 없는 것을 함부로 더럽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때는 용의 이름도 알지 못하여, 이렇게 불렀소. "빌어먹을 세상"이라고.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니겠는소?
알라께서 나를 꾸짖으시길:

'나는 아라비아 사막의 잔인한 신이오.
달궈진 강철과 젖은 진흙을 구분하지 않고 불태우는 존재이며,
악숨의 금강석 덩어리와 팔미라의 대리석같이 무른 것을 산산이 부수는 존재이다.
어찌 그런 전능하신 신에게 더 높은 지혜는 묻지 못할지언정 고작 낮은 세상을 구하며,
그중에서도 네가 무엇을 안다고
어느 것은 주십사, 어느 것은 주지 마십사,
이것이 나를 살리는 달콤한 생명의 물이오,
이것이 나를 죽이는 쓰디쓴 저주의 약뿌리라고, 감히 지껄이느냐.

기분이라니!
너는 나 알라가 기분을 통해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고정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줄 가늠이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감히 기분 따위를 내가 만들어, 모든 삼라만상을 기르는 세상을 무너트릴 이유로 쓸 수 있다고 보느냐?

천지창조 이전에 내가 앞으로 창조될 모든 것을 미리 불러모아 너희에게 맹세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여태까지 있었으며, 앞으로 있을 모든 아담의 자손들은 대답할지어다, '내가 너희의 창조주가 아니더냐'라고?

내가 앞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약속하였나니. 그들이 태어나는 세상은 불타오르지도 않을 것이며, 얼어붙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자비로우신 알라이시다. 너희가 존재하지도 못할 세상을 나는 능히 견딜 수 있으니라. 사람 이전에 진이 있었음을 명심하라.
그러나 나는 지금 세상을 이대로 자비를 통해 너희에게 주었나니. 너희가 좋아할 것이라고 내가 새로운 세상을 내어주며,
너희가 싫어할 것이라고 내가 지금 세상을 거둘 것으로 보이느냐?'
그래, 그리 말씀을 하셨소.

그러니, 고구려의 왕자, '자하크'여. 나는 나의 삶을 천사백만 번을 고쳐 살아도 좋소.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원하고 일어난 일을 저주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오.
이런 가정도 썩 나쁜 것이 아니오. 이게 바로 삶이오. 이게 바로 세상이고, 이게 나라이오.
자기 자신을 기분이 지배하는 짐승으로 낮추지 마시오.

고난이 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지도 말고,
행복이 미래의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지도 마시오.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사람이란 거창할 것도 없이 고작 그런 존재니까.

나의 삶도 돌이켜보면 정말 미련투성이지,
특히 아버지를 오직 기분으로만, 그를 기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기쁘지 못하게 하고, 그를 기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만 지난 세월을 보낸 것이 너무나 아쉽다오.
이제 놓아줄 때가 된 것이지, 나의 삶도, 썩 괜찮은 인생인 것이야. 끝나려면 아직 갈 길도 멀고,
앞으로 무엇이 올 줄 알고, 감히 이것을 주십시오, 이것을 주지 마십시오. 내가 감히 말하겠소?

아 아름다워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아니하여. 모든 종류의 삶을 담을 수 있나니.
그러고서도 세상이 뒤집어지지 아니하는구나.
이 얼마나 잘 만든 세상인가!
만 개의 이야기가 꽉 막힌 사람을 만 번 삶을 살게 만들어 서로를 잇는구나.
어찌 기분 따위에 휩쓸려서 세상을 가르고, 이것은 더럽다, 이것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 사랑이시여!
무한하신 신의 사랑이시여!

그대 또한 아름답다.
페르시아까지 온 왕자여.
원한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왕자여.
자신에게 그 어떤 증오의 대상보다 가혹했던 나의 왕자여.

그대의 기나긴 악몽이 이제 막을 내리려고 하고 있소.
이제 잠시 화를 누그러트리고,
나와 한번 지난날의 회포를 털어놓지 않겠소이까?

이번에 이브라힘이 자하크의 손목을 잡자.
귀신은 그 팔을 빼려고 했으나, 그 밑에 있는 사람이 움직이길 원하지 않았다.
시체가 심장이 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자하크'와 '아지다하카'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세상은 다음 '자하크' 왕자까지 종말을 미루었다.

이브라힘 아드함은 20년 뒤 환갑의 몸을 이끌고 니샤푸르를 떠나,
성스러운 전쟁이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며 시리아에서 동로마 제국으로 향하는 아랍 군선을 탔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떠난 시리아의 항구에 그의 무덤을 세워주었다.

니샤푸르는 이브라힘이 사망한 지 500년이 되지 못하여, 몽골군에게 함락당하였다.
몽골군은 도시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맹렬히 수비군이 저항하던 니샤푸르는 다른 도시가 저항 없이 항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생존자 한 명 없이 철저히 도륙되었고 건물이 전부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학살은 도시 자체에 한정되었으며, 주변 지역의 피난민이 몰려와 도시는 금세 재건되었다.
덕분에 지금도 니샤푸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이란에 존재하고 있다.

그 후로도 아직,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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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9 19:39
수정 아이콘
잘 읽었다는 코멘트는 남기기 어렵군요. 제가 보기에는 글이 심각하게 불친절한 부분이 있습니다. 글을 이브라힘이 등장하기 전과 후로 나눈다면 우연찮게도 각 부분에 각각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브라힘 등장 전의 부분은 나레이터가 계속 바뀌는 문제가 있습니다. 1인칭으로 이야기하다가 3인칭으로 이야기하다가를 독자에게 힌트 없이 왔다갔다하는데, 이렇게 하시면 읽는 입장에서는 1인칭의 캐릭터의 시점에서 글을 읽어야 할 지, 아니면 3인칭의 나레이터의 시점에서 글을 이해해야 할지 계속 생각을 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글과의 교감이 깨지기 쉽죠.

두 번째의 문제점은 이브라힘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이브라힘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많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브라힘에 대한 이야기는 전조가 없이 갑자기 등장해서 캐릭터에 대한 어떤 교감을 느낄 새 없이 순식간에 진행되버립니다. 그 와중에 제가 느낀 건 내가 이 캐릭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그 어떤 단서도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버려 왜 이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에 실패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이번 이벤트의 주제와 연결되는지도 파악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farce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완전히 놓쳤는 지 모르겠습니다.
19/05/10 02: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esotere님 부족한 글에 풍부한 답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스로 글을 쓰면서 느꼈던 부족함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정리되는 아름다운 피드백입니다.

이 사이트에서 esotere님에게만 여러번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 글을 갈고 닦아 오겠습니다.
맹세를 드리고, 또 저 자신에게도 스스로 느끼는 바가 있어 맹세를 합니다만, 어째 제자리걸음 같다는 슬픈 생각이 드는군요.
그나마 오리걸음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아가고 있기를 소망합니다만, 소망은 보다는 노력의 문제겠지요.

가장 먼저 말씀하신, 나레이션의 지리멸렬함은 정말 저 스스로도 통감하는 바입니다. 아무리 소설을 써본적이 없다고 해도,
인터넷에 글을 한두번 올려본 것도 아니고, 소설책 읽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저이기에 그나마 글 같은게 나올 줄 알았는데,
~이다. ~었다. 가 무한반복되는 것을 보고, 글쓰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또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이브라힘의 보면 볼수록 얕은 캐릭터에 대해서 비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은 드는데,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이 표류한 결과가 이런 글이었거든요. 앞부분의 다른 인물을 다루는 파트가 괴상해진 이유조차도.
주인공 (이브라힘)은 정해져 있는데, 그래도 워낙 배경과 소재가 낯선 곳이다보니, 빨리 '설명용'으로 소모시키고 넘어가자는,
조급함에 글이 차분하지 못한 감이 있었는데, 막상 이브라힘에 도착해버리니, '종교인'이나 '현자'를 어떻게 구구절절 설명할까,
아주 자비로움이 넘쳐 흘려서 퉁쳐버리더군요. 거기에, 앞선 이름 없는 등장인물들처럼 다시 한번, 이브라힘에게는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다라고 에피소드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고 하면, 지나치게 지루해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고요.

'얼만큼 이국적인 소재를 소개해야하는가'라는 부분이 저에게 이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 가장 골치가 아픈 부분이었습니다.
옳은 기준이 무엇인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더군요. 지나치게 와! 샌즈! 하면서 구구절절 쓰는 것을 피하고 싶어,
삭제한 문단도 꽤나 되는데, 지금 이 덧글을 보면서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자면 오히려 길이가 여기서 조금 길어진다고 해서,
읽으실 분이 마구 바뀌지도 않았을 것을, 그분들에 대한 배려가 오히려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운 생각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며칠간 넣고 빼고 고민을 한 덕분에 유난히 기억이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실크로드에 대해서 길게 소개하는 부분과,
기독교의 '사탄', 이슬람교의 '이블리스', 조로아스터교의 '아흐리만'에 대해서 소개하고 차이를 말하는 부분이었는데요.
이야기의 진행에 별 영향도 없으면서 혓바닥만 길어진다는 생각에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결말은 전형적인 신의 훈계이니. 옛날 그리스에서조차도 비판받던, 전형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고,
아주 수준 낮은 교훈극에 머물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고, 보다 인간중심의 시대극적인 면모나,
환상소설에 가깝게 썼다면 사극체의 말투와 훈계로 가득한, 가독성이 떨어진 글은 안됬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자신감 넘치게, 이국적인 소재를 전부 끌여들어 쓰자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재료를 손질할 능력이 부족했으니,
글이 완성된 것이 용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앞으로 이런 글을 골백번은 고쳐써서,
사람이 읽을 만한 글로 만들자고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진부한 다짐입니다.
필력. 정말 필력이라는 것은 쉬이 구해지는 것이 아니군요.

이 정도 긴 호흡의 글은 (어떤 분들은 소설연재도 하시지만), 저에게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래서 온갖 조급함과 욕심이 그대로 반영된 아주 부족한 글이 나와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급함은 오히려 스스로의 직감을 믿지 않고, 기분에 휘둘려 글의 구조를 자꾸 자르고 붙였던 것이며,
욕심은 다루고 싶은 것은 다 써보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보는 그런 배려없는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개는 합쳐져서 역시너지가 났습니다. 다른 글은 농담도 하고, 재미를 우선해서 쓰다보니,
눈에 그나마 덜 거슬리던 단점인데, 진지한 티를 다 내고 글을 써보니 이게 너무 불거졌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하지 않으려 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꾼입니다.
이야기를 끝맺으며, 저는 제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심하게 짜증이 난 상태였습니다.

저만의 것이 아닌 가정사를 함부로 픽션이라고 옮겨서 지껄이고,
삶에 허무해야할지 허무하지 말아야할지 방황하는 평소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하는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인터넷에나 올리고,
태어난 가정-끌려간 군대-구도자에 대한 탐구-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인연 찾기로 이어지는 폐소공포증이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삶, 가정법 따위는 없는 것 같은 삶, 아무런 통제력이 없는 것 같아서 모든 것에 짜증이 나있는 삶,
매번 지겹게 떠드는 이야기고, 했던 말을 매번 또하는 주제이고, 별로 달가운 주제도 아니고, 반사적으로 발악하며 지르는 소리이고,

아니죠. 사실 저는 이 이야기를 '똑바로' 똑띠 해본적이 없습니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으면서도, 스스로 정리하지도 않고 막연하게 지껄이던 말을,
또 한번 불친절하고 막연하게 떠드는 글을 싸질렀으니, 이게 개인적인 낙서이지 사람이 보라고 만든 글이겠습니까?
esotere님께서는 제가 의도한 것을 완전히 잡아주셨습니다. 도망치지말고 맞서싸워야겠군요.
아니면 분명히 말할 수 없을 것이라면 줄줄 편리한 버젼만 흘리면서 돌아다니지 말고 아주 입을 다물던가요.

지금 덧글을 쓰고보니, 픽션을 써야하는데, 지나치게 과몰입을 했군요.
다음에는 픽션을 쓰거나, 논픽션을 쓰거나 하나만 골라서 마음을 바르게 하겠습니다.
Hammuzzi
19/05/10 19:52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읽으면서 살짝 길을 몇번 잃기도 했지만 조금 더 다듬으면 매력적인 이야기가될것 같습니다.
19/05/13 12:3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일단 제출기한(?)이 있는 공모전에 제출한 느낌이라, 다시 보면 볼 수록 뒷부분은 진짜 날림이네요.
이런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마도 계속 개정판(?)을 종종 여기에 올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때는 길이 일자로 뻗어있는 글이길...
-안군-
19/05/10 21:25
수정 아이콘
저는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을때와 비슷한 긴장감과 지적 쾌감이 느껴지더군요. 장문의 글을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19/05/13 12:42
수정 아이콘
이문열 작가의 "사람의 아들"은 이상하게 제가 글을 쓰면 따라다니는 일종의 꼬리표 같더군요.
그래서 반항심(?)으로 단 한번도 읽지 않았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그 글을 읽게 되면 평생 그 글을 베끼게 될 것 같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매번 똑같아서요.

전능하다는 신은 왜이리 모자란 세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이리 힘들게 사는가,
사람이 자신이 처한 삶에서 벗어날 수는 있는가,
왜 어떤 종교는 다른 종교에 잊혀 사라졌는가.

보다 긴 글을 연재하시는 분들도 계시던데, 제가 고작 이정도 길이의 글을 쓰고 헥헥거리니, 부끄럽습니다.
다음에는 보다 칼을 갈고 찾아뵈겠습니다. 재미가 있으셨다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안군-
19/05/13 13:19
수정 아이콘
차라리 읽어보시는 쪽이 극복(?)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내용도 짧은 편이니...
세인트
19/06/28 10:30
수정 아이콘
아 이 재밌는 글을 이제서야 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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