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1/10 19:04:02
Name 복슬이남친동동이
Subject [일반] 20대에 암으로 떠나간 내 친구 녀석에 관한 글..
어제 늦은 밤에 급하게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밤을 식장에서 지새고, 직장의 배려로 반차 쓰듯 느지막이 출근한 뒤에 아직까지 잠을 한 숨도 못 잤네요

친구 녀석 상이었습니다. D라고, 고등학교 동창.

D의 페북을 가 보니 아직 닫혀있지 않았고, 지인 몇 분, 저도 아는 친구녀석들 몇 명이 한 문단씩 글을 써 놨더군요. 그걸 보고 저도 쓰다가 이것저것 주절이다 보니 글이 좀 길어져서.. 그리고 D는 모르실테지만 그래도 너무 좋은 친구라서 피지알에도 올려봅니다. 주접 떠는 것 같지만요.

D는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같은 패밀리로 어울려 놀던 친구 중 한 녀석이었습니다. 각자 불알친구야 따로 있었지만, 그래도 참 자주 어울려 놀았죠.

D로 말할 것 같으면, 굉장히 순박하고 악의가 없는 친구였습니다. 악의가 없다.,.. 정말 이 말이 그 친구를 가장 잘 표현합니다. 원래 사람들이 각자 악의를 가지는 부분과 대상이 다를 뿐, 조금의 악의도 없는 사람은 참 드물게 봤는데, 그 중 하나가 D였습니다.

저와 D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중학교 시절에 치맛바람을 많이 받았던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였습니다. 부모가 유난스러운 만큼 애들도 유난스러운 애들이 많았고, 이미 계산적이고 자신을 준거로 삼아 주변을 상과 하로 나누는 사고에 익숙한 아이들이 많았어요.  물론 그랬던 애들과 지금도 어울리는데, 머리가 굵어지니 그런 티는 좀 벗었지만요. 반면에 D는 특이하게도 그 당시에도 그런 면이 전혀 없었습니다. D는 웃음이 많고, 작은 일은 웃어넘기고, 큰 일도 웃어넘기는 친구였죠. 모두가 D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알기로 싫어하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만나보시면 알 겁니다. 싫어하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었죠.


갑자기 여러 가지 기억이 납니다. 저와 D는 고교 시절에 축구를 즐겨했습니다. 다른 학교 애들이랑 축구를 하다보면 미묘한 신경전이 생깁니다. 특히 A팀 공격수들과 B팀 수비수들 간에 말이죠. 그러나 D는 유독 그러한 신경전의 대상도, 주체도 되지 않았습니다. 싸우기가 힘든 녀석이거든요. 그 녀석은 상대가 옷깃을 잡거나 너무 붙어서 팔로 쳐도, 그것에 대해 적당히 어필하면서 필요 이상의 감정은 키우지 않을 줄 아는 친구였습니다. 당시의 고교생에게서 매우 보기 힘든 종류의재능..

그리고 게임도 같이 했었습니다. 게임은 지지리 못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는 워크래프트 3 유즈맵 중에 CHAOS라는 게임이 꽤 유행했는데, 그 친구는 정말 못해서 키보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것만 잔뜩 시켰죠. 나 같으면 재미 없어서 그냥 안할텐데, 그것도 그냥 털털 웃으면서 재밌게 하더군요.

그 친구는 아주 재밌는 유형의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둘 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 같이 미팅을 여러차례 나갔었는데, 그 친구는 주로 재미없음이나 갑분싸를 담당했습니다. 그거 겸해서 술 탱커의 역할까지. 그렇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안심시키는 재주가 있어서 소개해주고 싶은 친구였고, 그걸로 친구도 사랑도 쟁취한 친구였죠.


그 친구는 작년 즈음해서 인생의 중요한 성취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걸 코앞에 둔 그 시점에 암 진단을 받았어요. 처음부터 몸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 몸살이 자주 있다는 걸 느꼈고 병원도 갔지만, 큰 병원에 가 볼 생각은 전혀 못한 모양입니다. 사실 20대에 그런 중병까지 염두에 두기도 힘들고... 참고로 그 친구, 체격이 참 좋고 운동 잘하던 친구입니다. 그래서 더 그런 생각을 못했나 싶기도 해요.

암 진단 받고 나서 바로 입원한 직후에, 제게 연락을 했습니다. 친구들이 전부 모였죠. 면회 시간도 충분하지 않고 이미 치료 이후라 D의 체력도 바닥나가는 상태였기 때문에 재회답지 않은 재회였는데, 가장 슬픈건 D가 그 자리에서 허망하다고 말했던 점입니다. 그런 말을 가장 하지 않을 성 싶은 그 친구에게서도 그 말을 끌어낼만큼 암이 가혹했나 봅니다.

그 이후에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다가, 시간을 맞추기 힘든 관계로 저 혼자 면회를 다시 한 번 갔었는데, 훨씬 좋아져 있었습니다. 맨날 근심 걱정만 하던 의사분도 경과가 좋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퇴원을 생각보다 좀 이르게 할 수도 있겠다며 친구들을 전부 모으자고, 맛있는 거 먹자고 얘기했었죠. 그 맛있는 것들이란 거, 너가 먹으면 정확히 안 되는 것들 아니냐고 타박했었죠.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열흘 좀 더 지나서인가..? 업무시간에 제 카카오톡에 그 친구 계정으로 메세지 하나가 떴는데, 짤려 있어서 전부는 안 보이지만 살짝 보이는 한자의 의미로 보아.. 전 읽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일부러 안 읽었습니다. 일 끝나고 심호흡 할 때까지.


도착했더니 동생이 빈소를 지키고 있고, 어머니는 이미 눈가가 부어계시더군요. 도저히 올 수가 없는 사정을 가진 일부 제외하고는 친한 얼굴, 아는 얼굴 전부 만나서 소주로 밤을 지새는데, D에 대한 생각은 너무나 너무나 한 방향이었습니다. 하긴 얘들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더 자주 모이자고 다음 약속 다음 여행까지 잡는데, 이것도 D 덕분이라는 생각에 마냥 즐겁지는 않더군요.


제일 야속한 건 만약 D가 그렇게 떠나가게 되면 (저는 아직까지 가까운 사람의 부모상은 여러번 가 봤지만 본인의 상은 거의 당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엄청 슬프고 우울하고 맥빠져 지낼것만 같았는데 벌써 별로 그렇지는 않더라는 점입니다. 희노애락은 아직도 잘만 느끼고, 웃긴 걸 보면 엄청 웃기고, 꽁냥꽁냥도 잘합니다. 근데 약간 느낌이 뭐라고 해야하지?꽤작은 조각 하나가 비어있게 됐는데 앞으로 지금처럼 행복하게 계속 살아도 이 조각이 안 채워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을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두서가 없이 써서 읽으시는 분들의 노고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valewalker
19/01/10 19:07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복슬이남친동동이
19/01/10 20:16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howtolive
19/01/10 19:09
수정 아이콘
으아 너무 먹먹한 글 이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복슬이남친동동이
19/01/10 20:15
수정 아이콘
쩝 별로 기쁜 감정도 아닌데 괜히 전염을 시켰나 생각도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아유아유
19/01/10 19:10
수정 아이콘
이런거 보면 돈이든 경제든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이...ㅠ
foreign worker
19/01/10 19:11
수정 아이콘
정말 인생무상이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01/10 19:15
수정 아이콘
마음이 먹먹해지는 글이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QuickSohee
19/01/10 19:23
수정 아이콘
요즘들어 주변에서 이런 상황이 많이 생기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01/10 19:24
수정 아이콘
건강이 최곱니다 ㅡㅜ 친구분이 좋은곳 가셨길..
꿈과희망이가득
19/01/10 19:31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레펜하르트
19/01/10 19:32
수정 아이콘
정말 사람 생명이라는 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훅훅 떠나버리더라고요. 있을 때 잘하란 말이 날이 갈수록 사무칩니다.
페로몬아돌
19/01/10 19:32
수정 아이콘
돈 못 벌어도 역시 건강을 챙겨야..죽으면 다 무슨 소용
CastorPollux
19/01/10 19:32
수정 아이콘
나이들수록 진짜 돈 보다 건강입니다...
잔병치레 한 적 없었는데 최근에 응급실 2번 갔다오고 와서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송파사랑
19/01/10 20:15
수정 아이콘
인생은 허무 그자체죠
19/01/10 20:20
수정 아이콘
친구분의 명복을 빕니다. 너무 아까운 나이에 이르게 세상을 떠나셨네요. 부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큰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vanillabean
19/01/10 20:54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두부두부
19/01/10 20:57
수정 아이콘
20대 초중반쯤에.. 친구가 갑자기 죽었어요....

아직도 생각이 나요.. 장례식장 모습이...
집에서 가까운 삼성병원이었는데.. 다들 소식은 듣고 모였는데..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그리고 한명씩 '이제 어떡하냐'라는 말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오래전 일인데도..

제가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하기도 했지만..너무 급한 헤어짐이라.. 더더욱 그랬던거 같아요
발인하던 날은 어찌나 날씨가 좋던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좋았던 그 날씨가 절 위로해줬었는지 절 더 서럽게 만들었었는지..
19/01/10 21:02
수정 아이콘
힘내십시오..
오안오취온사성제
19/01/10 21:18
수정 아이콘
무상고무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01/10 21:20
수정 아이콘
20대에 암.. ㅠㅠ 친구분이 안타까우면서도 정말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에 더욱 신경써야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나플라
19/01/10 21:37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urplejay
19/01/10 21:38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너구리곰
19/01/10 21:56
수정 아이콘
이른 나이에 암이라니 안타깝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01/10 22:08
수정 아이콘
고등학교 이후에 멀어졌던 친구가 30초반에 갑자기 죽었습니다. 돌연사였어요.

근 10년을 소식만 전해듣고 있었서 장례식장 가는길엔 별 느낌이 없었어요. 장례식장에서 사진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된것 같다는 느낌이 왔던 기억이 나요. 왜 사진만 있는지 친구는 없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01/10 22:26
수정 아이콘
대체 무슨 암이길래 20대에.ㅠ
19/01/10 22:27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01/11 05:46
수정 아이콘
중딩 준태야 잘 지내냐 거기는 어때 난 벌써 30대 아재다 임마....
기다림
19/01/11 10:21
수정 아이콘
동주야 잘 지내냐
내가 추천해준 나폴레옹 다이나마이트 영화를 보고 술 한잔하며 정말 좋아했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그곳에서 아프지 말고 잘 지내라
-안군-
19/01/11 11:27
수정 아이콘
이젠 이름도 잘 생각 안나는... 중딩때 절친이었고, 고딩때 오토바이 타다 죽은 친구,
가끔 같이 농구하던 친구였는데, 목욕탕에서 미끄러져서 뇌진탕으로 저세상으로 간 친구... 들이 문득 생각나네요 ㅠㅠ
19/01/11 12:38
수정 아이콘
대학교때 한명, 나이 먹고 가족이 생겼을때 한명.
친했던 친구 두명을 보내고 나니 참 헛헛하더군요...
남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긴 하지만, 가끔 가슴 한켠이 저릿하긴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01/11 17:56
수정 아이콘
암이 진짜 무서워요. 좀 나아졌다 싶었는데 며칠뒤 부고가 왔던 게 생각나네요. 글쓴이처럼 저도, 그리고 주변 역시도 일상을 살아가게 되더라구요. 그렇게 펑펑 날 것 같던 눈물도 많이 흘리지 않고요.. 익숙해진다고 하지만 주변에서 누구 죽는 거 아직까지 좀 그러네요. 식장가면 내색은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래서 더 떠들고 그러는가봐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268 [일반] 북한에서 욕먹는 보여주기식 선전 [49] 隱患10030 24/04/12 10030 3
101267 [일반] 웹툰 추천 이계 검왕 생존기입니다. [43] 바이바이배드맨7814 24/04/12 7814 4
101266 [일반] 원인 불명의 고양이 신경·근육병증 다수 발생...동물보호자 관심 및 주의 필요 [62] Pikachu12022 24/04/12 12022 3
101265 [일반] [강스포] 눈물을 마시는 새 고이(考異) - 암각문을 고친 여행자는 누구인가 (2) [11] meson3531 24/04/11 3531 4
101264 [일반] [강스포] 눈물을 마시는 새 고이(考異) - 암각문을 고친 여행자는 누구인가 (1) [4] meson5564 24/04/11 5564 3
101263 [일반] 이제는 한반도 통일을 아예 포기해버린듯한 북한 [108] 보리야밥먹자15891 24/04/11 15891 4
101262 [일반] 창작과 시샘.(잡담) [4] aDayInTheLife3841 24/04/10 3841 1
101261 [일반] 읽을 신문과 기사를 정하는 기준 [10] 오후2시4078 24/04/10 4078 8
101260 [일반] 자동차 전용도로에 승객 내려준 택시기사 징역형 [46] VictoryFood7948 24/04/10 7948 5
101258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7) [5] 계층방정3230 24/04/10 3230 7
101256 [일반] [약스포] 기생수: 더 그레이 감상평 [21] Reignwolf3251 24/04/10 3251 2
101255 [일반] 저희 취미는 연기(더빙)입니다. [7] Neuromancer3042 24/04/10 3042 11
101254 [일반] 알리익스프레스발 CPU 대란. 여러분은 무사하십니까 [58] SAS Tony Parker 9628 24/04/10 9628 3
101253 [일반] [뻘소리] 언어에 대한 느낌? [40] 사람되고싶다4401 24/04/09 4401 13
101252 [일반] 삼성 갤럭시 One UI 음성인식 ( Speech to text ) 을 이용한 글쓰기 [44] 겨울삼각형5388 24/04/09 5388 5
101250 [일반] 일식이 진행중입니다.(종료) [11] Dowhatyoucan't7019 24/04/09 7019 0
101249 [일반] 동방프로젝트 오케스트라 콘서트가 한국에서 열립니다 [20] Regentag5138 24/04/08 5138 0
101248 [일반] 뉴욕타임스 2.25. 일자 기사 번역(화성탐사 모의 실험) [4] 오후2시3966 24/04/08 3966 5
101247 [일반] 루머: 갤럭시 Z 폴드 FE, 갤럭시 Z 플립 FE 스냅드래곤 7s Gen 2 탑재 [42] SAS Tony Parker 8822 24/04/08 8822 1
101246 [일반] 인류의 미래를 여는 PGR러! [30] 隱患7656 24/04/07 7656 3
101244 [일반] [강스포] 눈물을 마시는 새 고이(考異) - 나늬의 의미 [4] meson5260 24/04/07 5260 1
101243 [일반] 2000년대 이전의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 [54] Story7309 24/04/07 7309 16
101241 [일반] [스포]기생수 더 그레이 간단 후기 [31] Thirsha10162 24/04/06 10162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