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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1/02 01:02:17
Name 신불해
Subject 당나라 태종이 교묘하게 역사를 왜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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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집권 세력이 등장하면 그 세력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역사 서술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있고 이런 역사 사료를 읽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하게 하는 부분이지만, 당태종의 역사 왜곡은 '집권세력의 은근한 프로파간다' 수준을 넘어 그냥 아예 황제가 대놓고 본래 읽으면 안되는 자료를 억지로 읽었다는 기록이 떡하니 남았을 정도라 '그 정권에 몸 담은 사관의 양심 문제' 차원을 넘어 '황제 본인이 직접 주도하는 역사 서술' 이 이루어져서, 여러모로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여겨 집니다.





 물론 당태종 본인이 뛰어난 군주였다는 것은 이런 왜곡을 고려해보더라도 분명하고, 수나라 말기의 대혼란과 더불어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돌궐 등의 대외 문제를 잘 추스린 점에서도 그런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부분은 적당히 왜곡이 가능하지만 이런 거대한 대외정세 같은 문제는 완벽한 왜곡이 불가능 하니까요.




 다만 당태종은 다름 아닌 '쿠데타' 로 집권하여 친형제를 죽이고 등장한 만큼 '정통성' 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정통성도 정통성이고, '친형제를 죽이고 아직 아버지가 살아서 황제로 있는데도 아들이 그 대신 황제 자리를 빼앗아서 자기가 한다' 는 건 여러모로 '폭군' 으로 보일 여지가 많습니다. 때문에 당태종은 이런 문제에 아주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저런 왜곡을 고려해본다 하더라도 당태종이 분명 어지로운 상태에서 (고구려가 수나라는 막고, 당나라엔 멸망했기에 당나라 >>> 수나라로 생각하기 쉬운데, 전성기 수나라는 굉장히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였고, 그런 수나라 말기의 대혼란 때문에 당나라는 당태종 시기는 고사하고 당고종 시기까지도 수나라 최전성기의 호구 숫자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당태종 시기는 수양제 시기의 3분의 1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남은 여력으로 여러 국난을 잘 헤쳐나간 뛰어난 군주라는 건 분명합니다. 




 다만, 성격적인 측면에서 당태종의 정치 시기, 소위 '정관의 치' 시기는 '정관정요' 라는 책도 있어서 일종의 정치의 이상향 같은 식으로 알려졌고, 당태종 본인도 자기 성깔을 앞세우기보다는 신하들의 간언을 깊이 헤아려 듣고 하는 '그릇이 크고 인자하고 화통한' 군주처럼 그려졌는데, 이런 부분은 왜곡이 많다고 여겨 집니다.




 당태종의 역사 왜곡 이야기는 제법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게 대략적으로 어떤 느낌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가장 확 와닿고 읽기 편하게 쓰여진게 개인적으로 진순신의 글이라고 보는데, 다음은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에서 해당 부분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인용한 건 역사저술가인 진순신 씨 글이지만, 케임브리지 중국사 같은 곳에서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도 통용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당태종의 역사 왜곡도 왜곡이지만, 여러모로 아예 모든 것을 완전히 뒤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역사 왜곡을 하는 주체들이 어떤 식으로 이를 비틀고 교묘하게 지우는지, 그리고 후대의 역사가들이 이를 '고증' 하며 어떤 식으로 그런 왜곡을 캐치하고 진상을 밝히는지 여러모로 재미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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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개국 군주이지만 기록에서는 묘하게 이세민의 바지사장으로 밖에 안 보이게 묘사된 당고조 이연




....(당나라의) 후계자가 문제가 미묘해진 것은 아마 무덕 4년(621년)에 당고조 이연이 '천책상장' 이라는 칭호를 (큰 전공을 세운) 이세민에게 내렸을 떄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세간이 그렇게 느꼈을 뿐, 고조에게 (이세민의 형이 맡고 있는)황태자 폐립 의사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는 고조가 아무래도 세민을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민이 이를 고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세력을 일으켰던) 태원 거병도 모두 이세민의 계략이며 고조가,



 "만일 일이 성사된다면, 천하는 모두 네가 이루어놓은 것이니, 마땅히 너를 태자로 삼겠다."



 고 말하자,



 "세민은 절을 하고 그리고 사양했다."



 라고 되어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태원 거병 떄 세민은 20세였고, 이세민의 형인 태자 이건성은 이미 29세였다. 계략이 모두 세민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물론 『구당서』, 『신당서』는 당이 멸망하고 나서 편찬되었는데, 각 시대에 기록된 『실록』을 바탕으로 했다. 당나라 고조 태종의 『실록』은 안타깝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당나라의 『실록』은 안록산의 난 때 훙경궁에서 불탄 것을 비롯해 몇 차례나 피해를 입어서 나중에 민간에 있는 것을 보충했다고 한다. 



... 『송사』 예문지를 보면 당나라 고조와 태종의 『실록』 이름이 남아 있어서, 적어도 『구당서』가 편찬된 무렵에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실록』을 편수한 사람이 허경종(許敬宗)이었다. 그렇다면 이 허경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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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사관 그 자체인 인물, 허경종


 


"경종은 손수 국사를 관할했는데, 기사를 아곡(阿曲)했다."



 아곡(阿曲)이란 아첨하고 굽히다라는 뜻이다.



 허경종의 아버지는 수나라 예부시랑으로서, 수양제가 살해될 떄 반역파에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허선심(許善心)이다. 허선심이 죽을 때, 아들 허경종은 자기의 목숨만을 생각해서 추태를 부렸다. 그때 봉덕이(封德彝)라는 인물이 그 현장을 소상히 목격하고, 그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다. 허경종은 그것에 앙심을 품고, 『실록』에 봉덕이의 전기를 쓸 때 좋지 않는 이야기를 보태 썼다고 한다.




 허경종은 호색한 데다 탐욕스러운 인물로, 뇌물을 받으면 그 사람을 잘 써 주었다. 고구려 원정 때 방효태(龐孝泰)라는 장군은 전투에서 번번히 지기만 했었는데, 허경종에게 뇌물을 준 덕분에 용장으로 기록되었다. 또 허경종의 아들은 울지(尉遲) 집안에서 아내를 맞았는데, 이 인척관계로 울지경덕(蔚遲敬德)의 과실을 모두 숨겨 주었고, 태종이 위봉부(威鳳賦)를 지어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준 것을 울지경덕에게 주었다고 바꿔치기까지 했다. 『구당서』는 허경종의 이와 같은 엉터리를 지적하며,



 "처음에 고조와 태종 양조의 『실록』은 '경파' 라는 인물이 편수했는데, 그 내용을 매우 상세히 직설적으로 기록했다. 허경종은 자신의 애증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여 고쳤다. 논자들은 이를 비난했다."



 라고 단정했다.



 다른 책도 아닌 『구당서』가 바로 허경종이 고친 『실록』을 많이 채용했기 때문에 당나라 초기 기사를 읽을 때는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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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른 기록을 교차검증 할 수 있게 해준 온대아





 다행이 이연의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서 문서를 담당했던 온대아(温大雅)라는 인물이 《대당창업기거주》(大唐創業起居注)라는 문헌을 남겼다. 온대아는 당나라 공부시랑(건설부 차관), 예부상서(교육부 장관)을 역임했고, 태종부터도 중히 썼던 인물이다. 적어도 허경종보다는 훨씬 믿을만하다.



 이 문헌은 이연의 태원 거병으로부터 즉위할 때까지 357일간의 일기다. 이연의 기록 담당으로서 자신의 그 소용돌이 안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쓴 것이므로 일급 근본사료라 할 수 있다. 이 《대당창업기거주》를 보면, 이연이 20세인 아들 세민의 계책에 따라 거병한 이야기는 한 줄도 쓰여져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연은 태원 유수로 임명 되었을때, 세민을 향해,



 "당은 본시 우리나라이고, 태원은 즉 그 땅이다. 지금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하늘이 내린 것이다. 준 것을 받지 않는다면, 장차 화가 이것에 미칠 것이다."



 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연에게 거병할 의사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더군다나 이 문헌에 태종 이세민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있는 것도 전혀 아니다. 온대아 자신이 태종에게 중용된 인물이다.



 이로써 정사에 기록된, 20세의 이세민이 아버지를 거병하게 만들었다는 기술은 허경종의 '곡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첨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했다는 의심이 매우 농후하다.



 그렇다고 태종의 정당한 공까지 의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무훈은 분명 혁혁했다. 하지만 다음에 기술한 '현무문의 반란' 을 정당화 하기 위한 분식(粉飾)이 사서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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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문의 변





 불안을 느낀 황태자 이건성이 제왕 이원길과 손잡고 진왕 이세민을 제거하려 했고, 그것을 사전에 알아차린 이세민이 기선을 제압하여 현무문에서 형(이건성)과 동생(이원길)을 습격하여 죽였다. 사서에는 이와 같이 쓰여 있다.



 허경종 같은 인간이 곡필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당나라 초기 역사를 좀 더 냉정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자치통감』은 수나라 공제 의녕 원년(617년) 6월 항에,



 "서하군(西河郡)은 이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갑신(甲申)에 이연이 건성과 세민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서하를 치게 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이 기사를 고증하며,



 "고조와 태종의 『실록』에는 단지 '태종에게 명하여 서하를 정복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당창업기거주》에는 대랑(大郞), 이랑(二郞)에게 명하여 모두를 이끌고 서하를 토벌케 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대랑(大郞)은 건성, 이랑(二郞)은 세민을 말한다.『실록』에는 세민만이 서하를 토벌하러 간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온대아의 문헌에는 건성, 세민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을 토벌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역사가로서 사마광은 이 두 사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 들었듯이 건성, 세민 두 사람으로 한 것이다.



 "생각건대, 사관이 건성의 이름을 없앴을 뿐이다."



 사마광은 두 사람의 설을 채용한 이유로 『실록』의 사관(저 악명 높은 허경종)이 고의로 건성의 이름을 누락한 것이라고 적었다.



 『구당서』고조본기에는,


 
 "6월 갑신일, 태종의 명령으로 군사를 이끌고 서하를 공격했다. 그리고 서하를 항복시켰다."



 라는 대목이 있고, 같은 책의 본기 에서도, 



 "의병이 일어남에 곧 군사를 이끌고 서하를 공략하여 승리했다."



 라고 태종 이세민 혼자 한 일처럼 썼다. 『구당서』를 편찬한 유구(劉昫) 등은 고친 『실록』에 따라 그렇게 기술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구당서』열전의 은교전에는,



 "(은교는) 은태자(이건성)을 따라 서하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기를 쓰고 건성의 이름을 지우려고 했으나, 그 이름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끝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개인의 전기에 건성의 이름이 나타나는 바람에 『실록』은 결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은교는 왕세충 토벌에도 종군했으며, 유흑달 토벌 도중에 병사한 장군인데 '개산' 이라는 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신당서』은개산(殷開山) 열전에서는,



 "고조가 군사를 일으키자, (은개산은) 대장군 연의 부름을 받아 종군하여 서하를 공격했다."



 라고 나온다. 누구를 따라갔는지는 명기하지 않았다.『신당서』를 편찬한 송나라 구양수 등은 아마 여기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감히 양자 택일을 하지 않고 모호한 표현을 남겨 둔 것 같다.



 이처럼 황태자 이건성에게 '군공'이 없었다는 것에는 의문이 남는다. 『실록』에서 삭제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동생인 진왕 이세민만큼 거창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진왕 이세민이 왕세충을 토벌할 나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황태자는 포주로 파견되어 돌궐에 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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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교체기의 군웅 중의 한 사람인 왕세충. 바로 이 왕세충을 이세민이 격파하여 당나라는 천하를 거머쥐게 된다.






 돌궐은 이때 왕세충과 연합하려는 중이었다. 둘 사이에 사자가 오갔을 것이고, 노주총관이었던 이습예가 돌궐 사절단을 격파했다. 이때 전리품인 소와 양이 만 단위를 헤아렸을 정도니 돌궐이 왕세충에게 군량을 원조하려던 것이 분명했다.



 사태는 심각했다. 표기대장군 가주혼정원이 보낸 보고로 낙양에서 싸움이 펼쳐지면, 돌궐과 결탁한 당나라 병주 총감 이중문이 돌궐 기병을 끌어들여 장안을 공격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포착되었다. 수도 장안이 공격당하면 당 왕조는 뒤집힐 우려가 있었다. 그야말로 위급존망의 떄였다. 돌궐을 막는 임무는 당시 정세에서 볼 때 당나라 최대의 과제였다.



 이세민은 왕세충을 공격하며 이건성은 돌궐을 막아야 했다. 공격이 방어보다 화려한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건성이 돌궐을 제대로 막지 못하면 세민의 공격도 승리를 걷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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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때는 어마어마한 대세력이었던 돌궐




 북쪽 출신인 양사도(梁師都)라는 도적떼는 원래 수나라를 섬겼으나, 대업 말년에는 도당을 결성해 종종 돌궐과 연합하여 수나라 장군을 공격했다. 이 인물도 자신을 양나라 황제라 칭하고 영륭(永隆)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황제족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양사도의 부대가 돌궐병사 1천 기와 함께 침공해 온 것을 당나라 행군총감 단덕조가 격파했다. 무덕 3년(620년) 7월 병술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황태자 이건성이 포주에 주둔한 것은 그해 7월 갑술일이라고 사서에 나오는데, 이는 13일이고 병술일은 25일이다. 단덕조는 분명히 황태자의 지휘하에 있었을 것이다. 이세민의 경우 휘하의 장군이 거둔 승리는 그의 전공으로 적혀 있지만, 황태자 이건성의 경우에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태원 거병 뒤에 당나라 군대가 일제히 장안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앞선 사람이 뇌영길이라는 인물이었다. 《대당창업기거주》에 따르면, 뇌영길은 동면군의 군두로 되어 있다. 이 책에는 당이 장안을 공격했을 때 이건성이 동면군, 이세민이 북면군을 이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덕조의 소속을 적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일이 장안 돌입 때도 되풀이 되었다. 이건성의 전공을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관이 곡필해도 큰 사실을 말소할 수는 없다. 쓰는 방법을 약간 손질 한 정도이므로, 그것을 알면 다른 줄거리로 고쳐 읽을 수 있다.




 황태자는 현재 그 지위에서 웬만한 죄를 짓지 않는 한 폐립되지 않는다. 『구당서』에는 건성이 잔인했다는 기술이 있지만, 어떻게 잔인했는지 그것을 증명할 일화는 싣지 않았다. 제왕 이원길이 이세민을 찌르려고 한 것을 이건성이 말렸다는 이야기가 『자치통감』에 나온다. 거기에는,



 건성은 성격이 매우 인후(仁厚) 했다. 얼른 이를 제지했다.



 라고 잔인과는 반대되는 표현이 보인다. 수나라 앙용(수양제의 형)처럼 남녀관계에 엄격한 어머니로 인해 호색 때문에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난 전례는 있었지만, 이건성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만일 있었다면 곡필 사관이 더 과장해서 썼을 것이다. 고조 이연은 많은 '비' 를 두었는데, 그녀들 중에서 아들을 낳은 자는 자신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장래를 보장받으려는 욕심에 다음 황제가 될 이건성에게 접근했다. 그것은 호의를 바라고 한 행동이지 몰래 정을 통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또 밖으로는 소인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과 결탁하여, 고조가 사랑하는 장첩여, 윤덕비는 모두 이들과 음란했다."



 이것이 『구당서』은태자전에 실린 내용이다. 이건성과 이원길을 나란히 적었는데, 음란한 상대가 어느 쪽인지 매우 모호하다. 아버지의 애비와 정을 통한 것은 중대한 죄악이나 그것을 소인과 결탁한 것으로 대구를 이른 것도 기묘하다고 할 수 있다. 몹시 자신 없는 문맥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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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 의식




 천하를 통일하고 뛰어난 정치로 천하태평을 이루어 백성을 행복하게 한 성천자는 봉선(封禪)이라는 중요한 의식을 올릴 자격이 있다고 한다. 태종도 봉선할 생각이었으나 위징이 반대했다.... 마침 하남지방에 수해가 일어나 봉선은 중지되었다.



 사실 이것은 위징의 언행록에 실려 있는데, 정사에는 조금 다르게 적혀 있다. 정사에는 군신이 봉선을 권했으나 태종이,



 "옛날 진시황은 봉선하고, 한무제는 봉선하지 않았다. 후세에 문제의 슬기로움이 어찌 시황제에 미치지 못한다 하겠는가?"



 라며 스스로 봉선에 반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쯤 되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서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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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시기의 명재상, 위징



 여기에서 위징이 죽었을때 묘비 문제가 참고가 될 것이다. 정관 17년(643년) 정월, 위징이 죽자 태종은 몸소 붓을 들어 비문을 썼다. 그런데 나중에 태종은 위징이 그때까지 자신에게 했던 간언을 모두 기록해 두었고, 게다가 그 내용을 사관 기거랑(실록 기록 담당)에게 보여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격노한 태종은 자신이 비문을 쓴 위징의 묘비를 쓰러뜨리라고 명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태종은 딸인 형산고주를 위장의 장남이 위숙옥과 결혼시키겠다던 약속도 취소해버렸다. 그밖에도 태종에게 불쾌감을 준 일이 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일단 세운 묘비를 넘어뜨린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태종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이로써 알 수 있다.



 태종은 왜 격노했을까? 이것은 추측이지만 위징이 상세한 간언 기록을 남겼다면 태종이 만들고자 했던 『실록』에 저촉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봉선에 관한 서로 다른 두 기술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군신이 청한 형태로 되어 있지만, 봉선은 태종의 의사였고 위징은 그것에 반대했다. 앞에서 인용한 반대론은 『문정공(위징)』 전록에서 『자치통감』이 인용한 문장이다. 태종은 이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봉선은 수해로 중지되었다. 어쨌든 봉선은 거행되지 않았으므로 태종은 자신의 의사로 봉선을 준지한 것처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태종의 뜻을 받은 허경종 같은 사관이 그럴듯하게 적은 것이 진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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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여러 왜곡을 세심하게 고찰한 사마광





 관에서 만든 『실록』은 이처럼 여기저기 손질을 했기 때문에 그런 공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챌 만한 다른 기록이 남아서는 곤란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주의를 거듭하여 정성들여 채색한 성천자의 '상' 을 위징은 아무 생각 없이 더럽히려 한 것이다. 이것 말고는 태종이 죽은 위징에게 믿을 수 없을만큼 화를 낸 이유를 생각하기 어렵다.



 『정관정요』에는 태종이 기거주(起居注)를 보고 싶어 했으나, 제왕은 그와 같은 것을 보면 안 된다는 간언을 들었다는 이야이가 실려 있다. 기거주란 황제의 일상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사관 기거랑이 작성했다.



 간언에 따라 기록을 보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태종은 기어이 그것을 보고 만다. 『자치통감』의 정관 17년(643년) 항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처음 상(태종)은 감수국사 방현령에게 묻기를, 전세에 사관이 기록한 것을 모두 군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이에 대답하기를, 사관은 아름다운 것을 거짓으로 적지 않고, 악한 것을 숨기지 않으므로, 만일 군주가 이를 본다면, 필시 노여워할 것이니, 감히 보여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상이 말하기를, 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제왕이 스스로 국사를 보고자 함은 전일의 악을 알고 훗날의 훈계로 삼고자 함이다."



 간의대부 주자사도 그런 일을 하면 사관이 형을 받거나 살해될 위협이 있으므로 제왕은 기록을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께서 따르지 않았다.



 라고 되어 있으며, 태종은 그것을 보고 현무문 사건 대목을 다시 쓰라고 명령했다. 태종은 현무문 사건에 무척 신경을 쓴 것이 틀림없다. 다시 쓴 것을 태종이 검열했을 터이니 그의 뜻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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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의 맹약




 양위를 거쳐 태종이 즉위한 것은 무덕 9년(626년) 8월 계해일인데, 같은 달 을해일에 돌궐의 돌리가한과 힐리가한이 장안 근처 무공까지 진격해 왔다. 태종이 즉위하고 겨우 12일 뒤였으며, 그 군사는 10여만이나 되었다.



 이세민의 즉위는 말할 것도 없이 이건성이 몰락한 결과였다. 이세민이 왕세충과 두건덕을 토벌하는 화려한 무대에서 활약한 것에 비해, 황태자 이건성은 변경 경비라는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당의 국경 경비군은 거의 이건성 직속 부대였다. 현무문의 변으로 이건성은 하루아침에 '반역자' 라는 낙인이 찍혔고, 국경경비군은 반역자 직속 군대가 되었다.



 태종이 은사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동요했고 사기가 떨어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돌궐은 국경의 당나라 군대가 의기소침해 있는 틈을 타서 단숨에 남하했다.



 무공은 장안에서 70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 있지 않았다. 국도 장안에는 계엄령이 선포 되었다.



 힐리가한은 위수의 편교라는 곳에 이르러 부장인 집실사력을 군사로서 장안에 보냈다. 집살사력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구당서』에는 정찰을 위해서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믿기 어렵다. 태종이 이 군사를 붙잡아 몸소 현무문을 나서 겨우 6기를 거느리고 위수로 달려가 강을 사이에 두고 힐리가한에게 협정 위반이라고 따졌다고 한다. 태종의 6기 뒤로 당나라 대군이 혹시나 늦을세라 속속 도착했기 때문에 힐리가한은 크게 겁을 집어먹고 마침내 강화를 청했고, 태종은 조칙으로서 그것을 허락하고 그날로 궁전으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8월 은유일, 태종은 또한 편교에 가서, 힐리와 함께 백마를 죽여 동맹을 맺으니, 돌궐은 물러갔다."


 "9월 병슬일, 힐리는 말 3천 마리, 양 1만 마리를 바쳤다. 황제는 받지 않았다. 힐리로 하여금 잡아간 중국 국민을 돌려보내게 했다."



 이는 『구당서』에 기록된 내용인데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할 것이다.



 돌궐은 전의를 잃은 당나라 군대의 저항도 받지 않고 당나라 국도에서 7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진군했다.


 그곳에서 태종이 기마병 6기를 거느리고 와서 협정위반이라고 따졌고, 이에 힐리가한은 황송해 했다는 것이다. 설득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태종 뒤로 대군이 따라왔다고 해 놓았다. 하지만 위수에 도착한 돌궐군은 10여 만이었다. 당의 대군이라 하지만 현무문 사건이라는 대동란을 겪은 직후여서 당나라 군대도 혼란 상태였을 것이다. 태종이 6기를 거느리고 달려왔다는 것은 당장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관의 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돌궐군 내습 보고를 받았을 때 장안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몇 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정은,



 "국고를 비워서 그것으로 강화를 청한다."



 라는 방책을 진언했다고 한다. 



 당은 국고를 비워서, 즉 전 재산을 다 털어서 이것을 돌궐에게 주고 물러나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돌궐도 재물을 바랬기 대문에 그 교섭을 위해 집실사력이라는 사자를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쪽이 훨씬 수긍이 간다. 돌궐군이 약속 위반이라는 질책을 당하고 맥없이 돌아간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돌궐은 10여 만의 군대를 동원했다. 유목제국이므로 '사냥감은 얼마든지 있다. 나중에 그것을 분배해 주겠다.' 며 군사를 모았을 것이다. 이렇게 모은 군대를 철퇴시키려면 그들이 부하들에게 약속한 '넉넉한 사냥감' 을 주는 수 밖에 없다.



 백마를 죽여서 그 피를 서로 마시는 것은 맹약의 최고 의식이다. 8월 을유일의 맹약은 틀림없이 당나라가 제공한 전 재산을 돌궐이 받고, 그 대신 군사를 물린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9월 병술일에 돌궐은 말과 양을 바쳤다. 국고를 비운 물품이 뇌물이 아니라 교역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일종의 형식으로 생각된다. 준 것에 비하면 말도 안될 만큼 조촐한 선물이다. 『구당서』에는 '받지 않았다' 고 되어 있으나 형식이므로 실제로는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받은 기분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위수 강변의 맹약이 얼마나 당에게 굴욕적인 일이었는지는 당 위주로 기록된 사서의 행간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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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초창기의 명장 이정




 훗날 당군은 이정을 장군으로 한 원정군을 보내 돌궐을 격파했다. 『구당서』의 이정전에서는 태종이 위정의 전공을 치하하며,



 "위세가 북적에 떨치기는 고금에 없던 일로, 왕년의 위수의 싸움을 갚기에 족하다."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갚는다는 것은 보복한다는 듯이니 '위수의 싸움' 을 갚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패전이거나 아니면 굴욕적인 강화였거나 둘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적어도 6기를 거느린 태종이 '협정위반이다!' 라고 호통 치자, 돌궐이 물러난 것이 아님은 이와 같은 기술로도 분명하다. 이것이 『신당서』에서는,



 "우리 위수의 치욕을 씻기에 족하다."



 라며 한층 더 분명하게 적혀 있다. 위수에서의 맹약은 당에게, 그리고 즉위한지 얼마 안된 태종에게 '치욕' 이었다.... 다만 3년 뒤인 정관 3년(629년)에 당은 이미 돌리가한을 항복시켜 그 치욕을 씻었으니 저력은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中







요약하면,



1. 사관이 보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록을 강제로 본 당태종


2. 현무문 사건 등의 민감한 부분은 아예 대놓고 직접적으로 지시하여 고쳐 씀


3. 당태종의 실록을 쓴 허경종 등의 사람들 역시 이에 적극 영합하는 어용사관 그 자체였던 인물


4. 이러한 의도 아래서 당나라 고조 이연과, 본래 황태자였던 이건성은 매우 축소된 인물로 기록에 묘사되었다.


5. 당태종은 여러 부분에서 자기가 '성천자' 로 보일 수 있게 하려고 이미지메이킹에 매우 큰 신경을 썼다.


6. 당태종이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아 즉위한 직후에 있었던 '위수사건' 은 매우 굴욕적인 사건이었으나, 당태종은 이 역시 역사 왜곡으로 사건을 고쳐썼다.


7. 현대 역사학에서는 물론이고, 이미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을 쓴 과거의 역사서술가들에게 조차 당태종의 이런 역사 왜곡은 많이 지적 받는 대상이었다.


8. 그런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당태종이 실제로 뛰어난 군주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위수사건도 불과 3년 후 돌궐을 격파하여 갚아주기도 하였다. 다만 '명군' 이었다고 해서 '성군' 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선 생략했지만 당태종의 '정관의 치' 라는 치세 역시 백성들이 편안한 너그롭고 태평성대였다기 보다는, 여러모로 혼란한 당시 상황에서 매우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비유하자면 '진시황 스타일' 의 내정이 펼쳐지기도 했었다고 보인다.




이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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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2 01:3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조홍감데스우웅
Hastalavista
19/01/02 01:47
수정 아이콘
럭키 수양대군!
홍승식
19/01/02 09:29
수정 아이콘
당시에도 비슷한 지적이 많았군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승자에게 유리한 것만 전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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