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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6/19 23:18:49
Name 신불해
Subject 일진일퇴의 승부, 이성계 vs 나하추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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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총관부



1362년, 원나라의 행성승상(行省丞相)을 자처하며 요동 지역에 웅크리고 있던 몽골계 군벌 나하추는, 과거 원나라가 화주(和州)에 설치했던 쌍성 총관부의 쌍성 총관으로 있던 조소생, 탁도경 등의 부추김을 받고 삼살(三撒), 홀면(忽面) 등 고려의 북변을 유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고려의 동북면 도지휘사 정휘는 수 차례 이들과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월 28일 조정에 이성계의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싸워서 지는건 둘째치더라도, 왜 정휘는 하필 이성계를 콕 찝어서 파견 요청을 했던 걸까요?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은 과거 고려의 영토였는데, 워낙 변방이기도 하고 고려인과는 다른 여진족들도 많은 지역이라 여러모로 행정적 요건이 좋지 않아서 원래 잘 관리가 안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략 100여년 전, 조휘와 탁청이라는 사람이 고려 관리를 죽이고 이 지역을 접수 한 후, 원나라에 항복하여 고려 땅에 있던 원나라 '직속령' 이 된 지역입니다.




흔히 원 간섭기 시절 고려를 몽골의 영토로 보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논란이 나오는데, 적어도 쌍성총관부 지역은 명확하게 몽골의 영토로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거의 100여년 동안 고려의 지배가 미치지 않았고, 원나라에 항복한 군벌이 독립적으로 자치를 누리고 있었던 지역이니까요. 이후 공민왕이 이 지역을 회복하는 군사적 행동을 펼치는데, 여러 매체에서 이것을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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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래 이 지역에서 천호를 하면서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가, 당시의 쌍성 총관과 분쟁이 생긴 참에 공민왕이 협조를 요청하자 쳐들어온 고려군에 힘을 도와주며 안에서 내응, 쌍성 총관부 함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기서 도망친 잔당이 바로 조소생, 탁도경 등이었구요. 즉, 조소생과 탁도경은 나하추의 힘을 빌려 다시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되살리고 싶었던 겁니다.



여기까지 보면 왜 적의 세력에 애를 먹던 정휘가 이성계를 파견해 달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본래 이 지역을 아주 잘 알고 있는데다, 이성계 집안 역시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아주 큰 집안이었습니다. 지형 등에 밝은 전술적인 면에서건, 조소생 - 탁도경 등이 아직 이 지역에 남겨두고 있는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적인 면에서건, 이성계는 여기에 대처하기에 알맞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4월 21일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파견했습니다. 이윽고 7월 경, 잠시 소강 상태를 유지하며 군세를 정비하던 나하추는, 무려 수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이끌고 다시금 군사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이성계와 나하추는 격돌하게 됩니다.



이 나하추와 이성계의 전투는 어느정도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이성계가 나하추라는 놈을 때려잡았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요. 익히 알려져 있다 시피 이 싸움에서 나하추는 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그 이후로는 고려에 대해 무력 행사를 사용하는 대신 외교적 수단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나하추 본인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그는 고려보다는 명나라의 요동 전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전투의 '과정' 은 잘 알려져 있는 편은 아닙니다. 



이는 이 전투를 다룬 1차 사료가 이성계를 태조로 모신 조선 왕조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이기 때문에, 전투를 다룬 기록들이 전략, 전술을 조명하는 대신 말 그대로 영웅 일대기에 가깝게 쓰여져 있는 탓도 있습니다.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언급되는 이성계와 나하추의 전투를 다룬 기록의 90%는 대부분 이성계의 개인적인 용맹을 묘사하는데 할해되어 있습니다. "우리 태조님이 이렇게 짱 쎄셨어!" "우리 태조님이 화살을 쏘자 나하추가 겁에 질려 달아났어!" "우리 태조님이 말 위에서 점프해서 가랑이 사이로 화살을 피하셨어!" "캬~ 우리 멋진 태조님 활약을 보고 나하추 누이도 뻑가서 헤롱헤롱했어!" 등등...








...태조가 윗층에서 이를 보니, 은갑옷[銀甲]을 입은 두 적장(賊將)이 파라실을 쫓아 창을 겨누어 거의 미치게 되었는지라 태조는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모두 죽이고, 즉시 20여 인을 연달아 죽이고는, 이에 다시 군사를 돌려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였다.


한 적병이 태조를 쫓아 창을 들어 찌르려고 하므로, 태조는 갑자기 몸을 한쪽으로 돌려 떨어지는 것처럼 하면서 그 겨드랑을 쳐다보고 쏘고는 즉시 다시 말을 탔다. 또 한 적병이 앞으로 나와서 태조를 보고 쏘므로, 태조는 즉시 말 위에서 일어나 서니, 화살이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 나가는지라, 태조는 이에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적병을 쏘아 그 무릎을 맞혔다. 또 내[川] 가운데서 한 적장(賊將)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둘러싼 갑옷이며, 또 별도로 턱의 갑[頤甲]을 만들어 입을 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두루 감싼 것이 매우 튼튼하여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는 짐짓 그 말을 쏘니, 말이 기운을 내어 뛰게 되므로, 적장이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매, 입이 이에 열리는지라, 태조가 그 입을 쏘아 맞혔다....



나하추의 누이[妹]가 군중(軍中)에 있다가 태조의 뛰어난 무용[神武]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또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

- 조선왕조실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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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본 본 이성계 vs 나하추의 대결 요약.jpg





이성계 본인이 신체적으로 강골이고 여진족 사이에서도 보스로서 위신이 설만큼 걸출한 무인이었음은 분명하겠지만, 다분히 미화적인 이런 서술을 완전히 순도 100% 받아들이는 것도 좀 무리일 겁니다. 여하튼 이성계가 나하추를 물리친 건 '역사적 사실' 임에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미료가 너무 쳐지기도 했고, '자기 가족이 적에게 대패했는데 패배시킨 적장이 너무 멋쟁이라 뿅가서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이런 낯간지러운 미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일 겁니다. 이런 기록이 쓰인 500여년 전은 몰라도, 현대에 이르러선 이런 너무 지나친 과장 때문에 오히려 실제를 조명하기 힘들고, 이런 과한 msg 때문에 되려 우습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의 기록 구석 구석을 살펴서 당시 사관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한 기록들을 찾아본다면, 어느정도 전투의 전개를 파악 하는 게 불가능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파악한 면모를 통해 어떻게 이성계가 나하추를 상대로 승리했는가, 역시 알 수 있고, 또한 이 전투에서 이성계가 상당히 독특한 면모를 보였다는 것 역시 알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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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vs 나하추 전투의 전체적인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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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vs 나하추 1차전의 주요 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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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어스로 살펴본 지형





이성계의 무용에 관한 장황한 설명으로 가득차서, 정확한 전개 과정조차 딱딱 끊어져서 나뉘지 않은 실록의 기록을 그래도 잘 살펴보면, 이성계와 나하추의 전투는 크게 나눠서 2번의 싸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차유령과 함관령이라는 해발 400 ~ 500미터를 헤아리는 고개들 부근에서의 전투고, 두번째는 함흥 평양에서의 일대 회전입니다.




이성계의 군대가 오자, 나하추는 현재 함경남도 홍원 지역의 근처인 달단동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주둔했습니다. 전투의 시작은 나하추가 보낸 1천여명의 선봉 부대로부터 시작됩니다. 달단동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나하추는 휘하 장수인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에게 1천여명의 병력을 맡겨 이성계를 급습하게 했습니다.



나하추의 선봉 부대는 함관령 - 차유령 고개를 넘어서, 덕산동 원평 부근에서 이성계의 군단과 맞딱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선봉 부대는 이성계의 군대와 맞선 후 대패했고, 함관령과 차유령 고개를 다시 넘어 퇴각하려 했지만 추격해온 이성계 군단 때문에 거진 전멸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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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 선봉부대의 전멸 과정.



이 과정이 기록 상으로는 '우리 태조님이 아주 그냥 쳐발라 버렸다' 는 식으로 간략하게 써져 있을 뿐이라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가' 는 묘사 되지 않았지만, 이 지역의 지형을 보면서 분석해본다면 상황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달단동 지역에서부터 서쪽으로 몰려온 나하추의 선봉 군단은, 이 과정에서 함관령과 차유령이라는 두 고개를 넘어야만 진군이 가능합니다. 이 두 고개는 대략 400~500m 사이로 엄청난 높이까지는 아니지만 그대로 평지보다는 만만찮은 고개며, 500년 전 옛날 고갯 길은 지금 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길일겁니다. 


고개를 건너서 이성계 군을 급습한 선봉 부대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고, 이후 후퇴하려고 했지만 후퇴 할때도 역시 건너왔던 함관령 - 차유령 고개를 건너야 합니다. 이미 한 차례 고개를 건너고, 거기서 전투를 치룬 상황인데, 여기서 다시 또 고개를 건너서 도주하는 길이란 여간 지치고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물며 쌍성총관부의 길잡이가 있다고 해도 몽골 군벌 세력이 고려 땅의 지리에 밝지도 못했을 테구요.





이렇게 초전을 완승으로 끝낸 이성계에겐, 기세를 몰아 함관령 - 차유령을 건너서 나하추를 공격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움직이는 대신 근처의 골짜기 지역을 찾아 주둔하고 기다리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이 날에 태조는 답상곡(答相谷)에 물러와서 둔치니, 나하추가 노하여 덕산동(德山洞)으로 옮겨서 둔쳤다. 태조가 밤을 이용하여 이를 습격하여 패퇴시키니 나하추가 달단동으로 돌아감으로... - 조선왕조실록



이렇게 되자 먼저 움직인 것은 선봉 부대의 패배로 약이 오른 나하추였습니다. 나하추는 본진을 움직여 함관령 - 차유령을 넘어 이성계가 머물고 있던 덕산동 지역으로 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후 '밤' 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과정에서 날이 거의 저물었던듯 한데, 거의 밤이 다 되서야 고개를 건너온 나하추의 군단은 이 시점에서 이성계 군단에게 야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나하추는 여기서 별다른 결전을 크게 벌이지 않고, 곧바로 다시 왔던 함관령 - 차유령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택합니다. 이 과정에서 '패퇴' 라고 적혀 있지만 딱히 나하추가 대패했다는 식의 묘사도 없고, 장황할 정도로 이어지는 이성계의 무용에 대한 묘사도 없는것으로 봐선 이때의 전투는 비교적 큰 싸움 까지는 아니었던듯 합니다. 아마도 나하추가 위험해지기 전에 서둘러 후퇴해버린 게 원인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선봉 부대의 패퇴 과정을 볼 수 있었던 나하추로선, 야습도 당해 전황이 흔들린 상태에서 만약 싸움이 크게 번져 패배하기라도 하면, 고개를 넘어 퇴각하는 것조차 힘들어져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을 우려했던듯 합니다. 때문에 후퇴조차 힘겨워지기 전에 서둘러 퇴각 작전을 개시한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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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건너와 전투를 펼치다, 다시 서둘러 고개를 넘어 되돌아간 나하추.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나하추 군이 고개를 넘어 펼친 군사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나하추는 어느정도 장기전을 감수할 생각이었는지 많은 병사들을 내보내 나무를 쪼개 장작을 구해오게 했습니다. 이러자 이번에는 이성계가 먼저 움직이게 됩니다. 정찰을 통해 적군이 나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적이 약할때 공격하는게 병법 아니냐" 는 말과 함께 600명의 기병대를 위주로 편제하여 차유령 - 함관령을 건너 나하추 군단을 습격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반 기습으로 나무하던 적을 쉽사리 물리치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전과를 크게 올렸다는 말 없이 밤이 되자 이성계가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실록에서는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창을 잘 쏘는 적의 용장 한 명을 신묘한 무력과 활쏨씨로 잡아 죽였다는 장황한 묘사가 있지만, 이것을 딱히 의미있는 성과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이때의 묘사를 보면,




여러 장수들은 말하기를, "매양 싸움이 한창일 때에 적의 장수 한 사람이 쇠갑옷[鐵甲]에 붉은 기꼬리[朱旄尾]로써 장식하고 창을 휘두르면서 갑자기 뛰어나오니, 여러 사람이 무서워 쓰러져서 감히 당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태조는 그 사람을 물색(物色)하여 혼자 이를 당적하기로 하고,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니, 그 사람이 과연 앞으로 뛰어와서 창을 겨누어 대기를 심히 급하게 하는지라, 태조는 몸을 뒤쳐 말다래에 붙으니, 적의 장수가 헛찌르[失中]고 창을 따라 거꾸러지는지라, 태조는 즉시 안장에 걸터앉아 쏘아서 또 이를 죽이니, 이에 적이 낭패(狼狽)하여 도망하였다. 태조는 이를 추격하여 적의 둔친 곳에 이르렀으나, 해가 저물어서 그만 돌아왔다. - 조선왕조실록




이성계가 적의 용장을 만나서 거짓으로 패하는 척 도망치다가 삽시간에 반격해서 무찔렀다고 하는데, 어쩌면 고개를 건넌 이성계 군단은 적의 강한 저항을 맡아 되려 적에게 쫒기던 상황까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적어도 확실한 건 이때의 작전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이성계는 다시 고개를 건너 되돌아왔다는 것으로, 나하추의 본대에 '패퇴' 라는 표현을 쓴다면 이때의 이성계도 '패퇴' 에 가까운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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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움직였다 나하추와 똑같이 되돌아온 이성계 군단.



일단 첫번째 선공 작전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며칠동안 군사를 휴식 시킨 이성계는 다시 한번 부대를 동쪽으로 이동 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처럼 기병대 위주의 소수 편제가 아닌, 본대 전체를 이끈 진군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달단동에서 이성계 군단과 나하추의 군단이 모두 마주치자, 양 쪽의 대장이 모두 10명 정도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와 회담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 양쪽의 최고 지휘관이 불과 군사 20여명만을 두고 만나는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때 나하추가 했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처음 올 적에는 본디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이고, 귀국(貴國)의 경계를 침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하여 군사 만여 명을 죽이고 비장(裨將) 몇 사람을 죽였으므로, 형세가 매우 궁지(窮地)에 몰렸으니,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합니다.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나하추가 말한 사유, 관선생 등은 모두 고려에 침입했던 홍건적의 무리입니다. 나하추의 말 대로라면, 그의 고려 침입은 그저 홍건적을 쫒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으로, 원나라 세력인 나하추가 원나라의 반란군인 홍건적을 적대하는것은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게 좋게 말을 하는 나하추의 뒤를 힐끗 본 이성계는, '1만명이 죽었다.' 고 하는 나하추의 군대 형세가 되려 강력해 보이는 것을 목격합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이성계로서는 나하추의 말에 장단을 맞추거나 혹은 이를 추궁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했 테지만, 그런데 이성계는 장단을 맞추지도, 이를 추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다짜고짜 요구했을 뿐입니다.


"항복해라."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한다는 상대에게 다짜고짜 항복이나 하라는 식의 이야기도 당혹스럽겠지만, 이성계의 행동은 이에 한술 더 떴습니다. 이성계는 항복을 요구하면서, 나하추의 부장에게 곧바로 화살을 쏘아버린 겁니다.



싸움을 그만두자고 말하러 왔는데, 되려 갑자기 화살 세례를 맞고 항복하라는 말을 들은 나하추로서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휴전을 제의한 나하추의 제안이 사실일 가능성보다는 일종의 술수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보통 일반적이라면 이를 꾸짖고 추궁하는것이 먼저일테지만, 그런 말도 전혀 없이 일단 화살부터 쏘고 보는 겁니다. 난장판 속에 심지어 나하추의 말 마저 화살에 맞아 나하추는 말을 2번이나 갈아 타야 했고, 이성계는 그런 나하추를 습격했다. 실록에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於是大戰良久, 互有勝負。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승부(勝負)가 있었다.


대전(大戰)이라는 표현을 보자면, 이 회담은 곧바로 전투로 돌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이성계는 집요하게 나하추를 쫒고 있었는데, 이로 보자면 이성계와 나하추가 직접 대결을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성계는 나하추를 계속해서 쫒았고, 나하추는 급하게 소리쳐야 했습니다.


“이 만호여, 우리 두 장수끼리 어찌 서로 핍박할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하추는 급기야 도주를 했고, 이성계는 급히 활을 쏘았으나 이는 나하추를 맞추는 대신 나하추를 맞췄을 뿐입니다. 나하추는 주위 병사가 말을 내주자 이를 타고 간신히 사지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합니다. 이성계는 기병을 이용해서 이미 자기들끼리 서로 짓밞으며 완전히 규율이 무너진 나하추의 군대를 공격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물러났습니다. 


이 과정의 첫 시작은 그저 나하추가 "서로 휴전하자." 는 의사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패전으로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나하추의 제안에 대해 별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고 공격을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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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기록을 100% 받아들인다면 딱 이런 상황.






다만 역시 이것도 그저 100%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이야기 입니다. 뭔가 이 과정만 보면 이성계가 나하추를 아주 요절을 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묘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하추가 속여 말하기를,

"내가 처음 올 적에는 본디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이고, 귀국(貴國)의 경계를 침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하여 군사 만여 명을 죽이고 비장(裨將) 몇 사람을 죽였으므로, 형세가 매우 궁지(窮地)에 몰렸으니,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합니다.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적의 병세(兵勢)가 매우 강성하므로, 태조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그들로 하여금 항복하도록 하였다. 한 장수가 나하추의 곁에 서 있으므로, 태조가 이를 쏘니,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또 나하추의 말을 쏘아서 죽이니 바꾸어 타므로, 또 쏘아서 죽였다.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승부(勝負)가 있었다. 태조가 나하추를 몰아 쫓으니, 나하추가 급히 말하기를,

"이 만호(李萬戶)여, 두 장수끼리 어찌 서로 핍박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면서 이에 말을 돌리니,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였다. 나하추의 휘하(麾下) 군사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드디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해가 또한 저물었으므로, 태조는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는데, 자신이 맨 뒤에 서서 적의 추격을 막았다. -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승부가 있었다' 는 표현에서 전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가 맹렬한 추격과 활솜씨로 나하추의 혼을 빼버렸다는 식의 장황한 묘사가 있지만, '적을 대패 시켰다' 는 표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한참 이성계가 나하추를 추격하다가 밤이 되자 '군사를 지휘해서 물러났다' 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총사령관인 이성계 본인이 직접 맨 뒤에 서서 적의 추격을 저지' 하면서 말입니다.




이성계와 나하추 사이의 회담 자체가 온전히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최소한 전투에 앞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상황 자체는 있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이후 펼쳐진 전투는 이성계 군단이 오히려 패배했거나, 최소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입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실록에서조차 '이겼다' 는 말이 없으니까요.




태조의 업적을 높이 칭찬하는 실록에서조차도 '승리' 했다는 표현이 보이지 않고, 대신 이성계가 나하추를 일대일로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장황한 묘사만 나와 있을 뿐입니다. 만약 여기서 대승을 거둬버렸으면 당연하게도 '승리했다' 표현을 썼을텐데 쓰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건 교묘한 서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서를 쓰면서 아예 없는 사실을 새로 만들어 버리는 건 후세에게 비난 받을 일이고, 역사서를 작성하는 입장에서도 꺼림찍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왕조의 태조 씩이나 되는 인물의 기록을 작성하면서 '패전했다' 라거나 '전세가 크게 불리했다' 라고 쓰는 것도 민감천만한 일입니다. 이 경우에는 사관은 아예 승패를 언급 안하고, 대신 아무래도 좋을, 쓰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다들 "'익스큐즈" 하는 부분을 장황하게 서술해서 마치 시원스레 이겨버린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일단 기록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부분만 찾자면, 이성계 군단과 나하추 군단이 전투를 펼쳤고, 밤이 되자 이성계 군단이 물러났으며, 이성계는 적의 추격을 매우 우려하여 직접 위험한 후미를 맡았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이 이렇고, 이 열거된 사실 사이를 추론으로 채워 보자면 이성계는 이 싸움에서 패배했거나, 최소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후퇴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나하추가 패퇴하고 물러난 것과 똑같은 상황이 적용 가능합니다. 함관령 - 차유령 고개를 건너며 힘을 뺴고 싸우는 것이니, 공격 측이 불리했을 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불리한 상태에서 물러났을때, 나하추의 선봉 부대가 후퇴 하다가 전멸 당했던 것처럼 퇴각전이 매우 어렵고 위험했을 거라는 점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日且暮 太祖 麾軍以退 自爲殿 날이 저물자, 태조는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나면서 스스로 후군이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고개(嶺)의 길이 몇 층으로 꼬불꼬불한데, 환자(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맨 아랫층에 있다가 급히 부르기를, "영공(令公), 사람을 구원해 주시오. 영공, 사람을 구원해 주시오." - 조선왕조실록





실제로 후퇴 하는 고갯길은 평평한 길이 아니라, 꼬불꼬불하게 좁은 길이 층층이 이어진 길이었기 때문에, 후퇴하는 이성계 군단은 종대로 길게 늘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고, 때문에 적이 추격해 오면 처참하게 도륙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미에 서서 적의 추격을 차단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실제로 이때 부대에 종군 중이던 '이파라실' 이라는 인물이 적에게 급습 당해, 이성계에게 "제발 지원을 해달라, 사람 살려 달라." 고 소리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후미의 고려군은 나하추의 추격군에게 따라잡혀 어떻게 저항 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도륙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미에 머물고 있던 이성계가 움직인 것은 바로 이때 입니다.







...태조가 윗층에서 이를 보니, 은갑옷[銀甲]을 입은 두 적장(賊將)이 파라실을 쫓아 창을 겨누어 거의 미치게 되었는지라 태조는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모두 죽이고, 즉시 20여 인을 연달아 죽이고는, 이에 다시 군사를 돌려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였다. 한 적병이 태조를 쫓아 창을 들어 찌르려고 하므로, 태조는 갑자기 몸을 한쪽으로 돌려 떨어지는 것처럼 하면서 그 겨드랑을 쳐다보고 쏘고는 즉시 다시 말을 탔다. 또 한 적병이 앞으로 나와서 태조를 보고 쏘므로, 태조는 즉시 말 위에서 일어나 서니, 화살이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 나가는지라, 태조는 이에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적병을 쏘아 그 무릎을 맞혔다. 또 내[川] 가운데서 한 적장(賊將)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둘러싼 갑옷이며, 또 별도로 턱의 갑[頤甲]을 만들어 입을 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두루 감싼 것이 매우 튼튼하여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는 짐짓 그 말을 쏘니, 말이 기운을 내어 뛰게 되므로, 적장이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매, 입이 이에 열리는지라, 태조가 그 입을 쏘아 맞혔다. 이미 세 사람을 죽이니 이에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태조는 용감한 기병[鐵騎]으로써 이를 짓밟으니, 적병이 저희들끼리 서로 밟았으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 조선왕조실록






고갯길 위쪽에서 아랫쪽의 병력이 학살 당하던 것을 지켜본 이성계는 기병대와 함께 고개 아래로 쳐 내려가며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실록에서는 다시 이 부분에서 '이성계 vs 나하추' 전투의 모든 기록 중에서도 최고조의 열렬한 찬양과 함께 이성계가 혼자서 적을 다 때려잡은것 마냥 서술하고 있지만, 기록의 처음과 끝을 잘 살펴보면 이성계가 (당연하게도) 휘하 부대, 특히 기병 부대와 함께 적에게 역습을 가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퇴각하던 고려군을 정신없이 뒤쫒던 나하추 군은 이성계가 이끼는 기병대의 습격을 받자 우왕좌왕 하며 무너졌습니다. 고려군이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종대로 위험천만하게 걸어가야 했던것과 마찬가지로, 공격해오던 나하추 군 역시 고갯길에서 제대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달려와야 했을것은 마찬가자니 여기서 다시 제대로 된 역습을 당하면 미처 반격을 하지 못하고, 퇴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결국 이 시점에서 나하추의 추격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실록은 이쯤에서야 '적을 대패 시켰다'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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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사 네트(함관령 - 차유령)을 두고 탁구를 하듯 전진했다 튕겨져 나오기를 반복했던 이성계와 나하추.




해발 400~500미터의 고갯길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일진일퇴의 승부를 펼쳤습니다. 처음에는 나하추가 공격을 해봤으나 소용이 없었고, 나중에는 이성계 쪽에서 공격을 날려봤지만 역시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서로의 군단이 전력이 크게 약한 편도 아닌만큼, 고갯길을 건너 준비하고 있는 적에 싸움을 걸어 완승을 거둘 수 있을 만큼의 전력적 우세가 서로에게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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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투, 함흥 평야 회전(지도에서는 마치 나하추 군이 함관령 쪽을 우회해서 진군한것처럼 나와 있지만 실제 진군로는 불명. 아마도 고개를 건너서 진군했을거라 추측.)





이렇게 양군이 서로 진군하지 못하고 버티기만 하던 상황에서, 이성계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고개를 다시 건너 생사결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방인 정주, 즉 지금의 정평 방향으로 퇴각해서 군사를 며칠 동안 푹 쉬게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비록 함관령 - 차유령을 건너 나하추를 물리치는게 어렵다고 해도, 반대로 버티고 있으면 나하추를 막기에는 쉬운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두 고개길의 길목을 포기하고 적에게 길을 열어주고는 후방으로 물러났던 셈이니 말입니다.



과연 나하추는 그동안 머뭇거렸던 것과는 달리, 방해물이 사라지자 어렵지 않고 함관령 - 차유령 지역을 지나 함흥 평야까지 남하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곳이라면 나하추를 그동안 괴롭혔던 좁은 지역의 방해도 없고, 몽골군의 기병 전력을 사용하기에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설사 물러난 이성계가 교전을 회피 한다고 한들, 그렇다면 굳이 이성계의 군대에 목매달 필요 없이 함흥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뿐이었습니다. 하물며 이 지역의 이성계 집안의 세력지이기도 하고, 이곳이 날라간다면 지역의 기반과 인망은 모조리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함관령 - 차유령을 포기한 이성계의 선택은 자살 행위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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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후 펼쳐진 평양에서의 일대 회전에서 나하추는 이성계를 거세게 몰아붙혔고, 이성계는 패퇴하여 달아났습니다. 실록에서는 마치 '이성계가 단기 필마로 개인적으로 싸움을 걸고 후퇴하는 척' 하는 식으로 묘사를 했지만, 실제로는 이 부분은 이성계 개인 보다는 이성계 군단의 움직임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겁니다.




태조가 단기(單騎)로 용기를 내어 돌진(突進)하면서 적을 시험해 보니, 적의 날랜 장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 곧바로 전진하는지라, 태조는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면서 그 고삐를 당겨 그 말을 채찍질하여 말을 재촉하는 형상을 하니, 세 장수가 다투어 뒤쫓아 가까이 왔다. 태조가 갑자기 또 나가니, 세 장수의 말이 노(怒)하여, 미처 고삐를 당기기 전에 바로 앞으로 나오는지라, 태조는 뒤에서 그들을 쏘니, 모두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유인하여 요충지(要衝地)에 이르러... - 조선왕조실록





이성계가 초반에 단기 필마로 적의 장수를 상대로 싸워서 패하는 척 유인하여 없앴다는 식으로 전개 하다가, 중반부에는 적군 전체를 유인하는 기록으로 바뀝니다. 당연하지만 이성계 혼자 말타고 적군 전체를 유인할 수는 없을테고 이성계 군단의 움직임이 그랬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성계 개인의 무용에 대한 찬양과 실제 전투 과정이 의식의 흐름 기법 마냥 섞인 게,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 이성계의 전투를 다른 기록의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그런데, 위에 올린 사료 막판의 '유인하였다' 는 기록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이 회전은 막판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轉戰引至要衝, 左右伏俱發, 合擊大破之。여러 곳으로 옮겨 싸우면서 유인하여 요충지에 이르러, 좌우의 복병이 함께 일어나 협력해 이를 쳐서 크게 부수었고, 나하추는 당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도망해 갔다. 




전투의 막판에 이르러, 갑자기 좌우에서 고려군이 새롭게 등장해 복병으로서 합류했고, 본래 상대하고 있던 이성계 군단까지 합쳐 3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자 아무러한 나하추라도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어, 겨우 남은 군사만 추스려 도망치게 됩니다. 실상인 즉, 이성계는 정주로 후퇴하며 나하추를 상대로 맞서 싸울 준비를 하면서 이미 군대를 분산, 복병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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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정주(定州)에 둔치고 수일(數日) 동안 머물면서 사졸을 휴식시켰다. 먼저 요충지(要衝地)에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서 이에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左軍)은 성곶(城串)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군(右軍)은 도련포(都連浦)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송두(松豆) 등에 나아가서 나하추와 함흥(咸興) 들판에서 만났다. - 조선왕조실록







이성계는 전투에 앞서 군대를 3군으로 나눠, 우군은 도련포에 근처에 머물게 했습니다. 도련포는 현재 광포호로 불리는 곳으로, 정평(정주) 근처에 있는 호수 입니다. 그리고 좌군은 성곶(城串)이라는 곳으로 가게 했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 함길도 / 함흥부에 따르면,



성관산(城串山) 【부(府) 북쪽에 있는데, 부(府)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고 칭하며, 산허리에 작은 샘이 있다. 구름이 일면 비가 내린다. 】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串은 관이라는 발음도, 곶이라는 발음도 있습니다. 국역 실록에서는 기록에 따라 관, 곶으로 통일되지 않고 번역 되어 있습니다) 함흥부 기록에서 '성관산은 부의 북쪽에 있다' 고 하니, 아마도 함흥 북쪽에 있는 산 중에 하나를 가리키는 듯 합니다. 즉 북쪽과 남쪽에 군대를 나뉘어 배치한 셈입니다.




남은 부대, 즉 나하추와 정면 대결을 펼친 이성계의 중군은, 말할 것도 없이 이성계 본인의 직속 정예 사병 - 대략 2,000여명까지 이르는 자신의 사병 집단이 중심으로 된 군대였을 거라고 추측 가능합니다.




아마도, 여태까지의 전투를 보면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의 전체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두 고개를 거쳐서 상대를 습격하는 전투였으니 한번의 싸움에 대군이 전부 동원되기도 힘들고, 주로 이성계의 직속 사병이 중심이 된 정예 병력을 상대 했을텐데, 이성계는 그런 상대를 맞이해 결전을 앞두고 오히려 군대를 분산 시키는 과감한 지휘를 보였고, 이 승부수가 먹혔습니다. 이성계의 군대에 유인 된 나하추 군단은 요충지에서 복병을 맞아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獲銀牌銅印等物以獻, 其餘所獲之物, 不可勝數。 於是東北鄙悉平。은패(銀牌)와 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얻어서 왕에게 바치고, 그 나머지 얻은 물건들은 이루 다 셀 수도 없었다. 이에 동북 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성계의 입장에서 함흥을 기점으로 펼쳐지는 전투는 일이 잘못되면 기반이 다 날아갈 수도 있었던 싸움이지만, 반대로 따지면 자신의 '나와바리' 에서 싸우는 셈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끌어들여서, 자신이 파악한 대로 복병을 배치하여 적을 물리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을 수 있습니다.



이 승리가 있고 난 후 바로 그해, 나하추의 패배와 함께 달아난 옛 쌍성 총관부의 조소생과 탁도경은 더 이상 끌어들여올 수 있는 세력도 없어졌고, 여진족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로써 공민왕이 수복한 쌍성총관부에 대한 물리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세력은 없어졌고, 아직 세력이 남아 있던 나하추 역시 고려에 대해서 군사적 위협 보다는 외교적 수단을 강구하게 됩니다. 이성계가 나하추에게 거둔 이 승리는 100여년 만에 고려에 막 넘어와, 아직 안정화 되지 않았던 동북면이 원나라의 군사적 침탈의 위협에서 확고하게 벗어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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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조 골로미
18/06/19 23:21
수정 아이콘
신불해님글 정말 오랜만이네요 선추천후 감상하겠습니다
뽀롱뽀롱
18/06/19 23:41
수정 아이콘
중간에 이는 나하추를 맞추는 대신 나하추를

이렇게 되어있는데 말이 빠진것 같습니다
뽀롱뽀롱
18/06/19 23:41
수정 아이콘
항상 대단한 글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18/06/20 00:00
수정 아이콘
이성계님께서 등장하셨다!

국뽕 최대로!
도도갓
18/06/20 00:37
수정 아이콘
나가추 이 간나새끼!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8/06/20 03:50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감상
18/06/20 04:34
수정 아이콘
와 신불해님 글 정말 오랜만이네요
선추천 선댓글 후 정독하겠습니다~
뻐꾸기둘
18/06/20 08:46
수정 아이콘
매번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불굴의토스
18/06/20 09:00
수정 아이콘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18/06/20 09:06
수정 아이콘
선추천후 감상하겠습니다(2)
18/06/20 09:48
수정 아이콘
읽다보니 고려말에 이성계가 없었으면 나라가 망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랬을 거 같기도 하고...
닭장군
18/06/20 10:03
수정 아이콘
드라군: 나가추
에이레나
18/06/20 10:07
수정 아이콘
대체로 이성계의 전투는 속전속결로 빨리 끝났는데,
나하추와의 전투는 상대적으로 오래 걸렸군요
Thursday
18/06/20 10:20
수정 아이콘
넘나 재밌어요...
노스윈드
18/06/20 10:32
수정 아이콘
나하추를 맞추는 대신 나하추를 맞췄다.. 옛날 김성모짤방중 '나를 돼지라고 놀리는 건 괜찮지만 돼지라고 놀리는건 참을수없다' 가 생각나서 괜히 피식했네요. 그리고 그와중에 팀킬당한 장비..
글은 너무 잘 읽었습니다.
Zoya Yaschenko
18/06/20 10:53
수정 아이콘
부흥에서 보고 여기서 보고 헤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18/06/20 12:18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감상!!
메가트롤
18/06/20 12:27
수정 아이콘
꿀잼꿀잼꿀잼꿀잼꿀잼
Lord Be Goja
18/06/20 12:35
수정 아이콘
이성계가 고려 날먹한거 처럼 그리는 문화컨텐츠가 많은데 (얼마전 바다로간 산적인가 하는 영화도 그렇고)
고려는 이성계가 여진이나 명나라 원나라등으로 붙었으면 진작에 망했을 나라죠.
18/06/20 14:52
수정 아이콘
역시 무너져가는 나라의 절반을 홀로 떠받치던 명장,
그리고 결국 그 나라를 공중분해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왕.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는 게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송 태조도 그랬었지요 아마?
오히모히
18/06/21 07:23
수정 아이콘
"나하추를 맞추는 대신 나하추를 맞췄을 뿐입니다" 요부분 살짝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오히모히
18/06/21 07:30
수정 아이콘
앗, 이미 몇분이 댓글 남겨주셨네요 흐헤
먼치킨
18/06/21 20:11
수정 아이콘
나하추도 당연히 매복을 예상하고 있었을텐데 당하고 말 수 밖에 없었을만큼 이성계의 운용이 좋았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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