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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3/19 06:24:15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단편] 초식남 월드
  면접 스터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박을 만났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그마저도 때려치우고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마지막으로 남은 세탁소 주인이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아니 별로. 아직 취업 못 했냐? 그게 그렇게 됐다. 나도 뭐 그냥 빌붙어 산다. 서른을 넘긴 늙은 소년들은 남자가 되지 못한 현실을 한탄했다. 그래도 이리 허심탄회하게 처지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둘 다 별 볼 일 없기 때문이리라.

  2차 면접을 앞두고 면접 스터디 중이라고 말하자 박이 눈썹을 치켜뜨며 반색했다.

  "야. 이 엉아가 기가 막힌 멘트 하나 알려주랴?"

  취업/공시 카페에서 다년간 활동한 경험 덕분인지 박은 면접관의 심리를 다 꿰뚫는 것처럼 굴었다. 그가 말하길 고스펙일수록 충성심을 어필해야 한단다. 잘난 놈들 데려와서 가르치고 경력 쌓아주면 돈 더 받겠다고 날름 이직해버려 회사가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럼 능력에 걸맞은 연봉을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걸 할 줄 알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겠냐며 핀잔을 주었다. 돈을 더 주기 싫으니까 충성심 높은 애들을 뽑아야 한다. 면접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반드시 묻는다. 박은 침을 튀겨가며 주장했다. 스터디에서도 뻔하게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기가 막힌 멘트가 무엇인지 궁금해 박의 지식자랑을 대단한 것으로 치켜세워주었다.

  "그래서 충성심을 어필하는 기가 막힌 멘트가 뭐야?"

  박은 씨익 웃더니 편의점을 가리켰다. 우리는 4캔에 만 원 하는 수입 맥주를 사 들고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 이젠 진짜 궁금해서 못 참겠다. 도대체 그 멘트가 뭔데?"

  박은 목젖을 크게 출렁이며 캔 하나를 거의 비우더니 크아아아 구수한 소리를 뱉었다.

  "아... 나 갈란다."

  내가 일어서자 박이 알았어 알았어 하며 나를 달랬다.

  "기가 막힌 멘트가 뭐냐면..."

  나는 박의 말을 듣고는 바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면접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들어가느냐'이다. 나와 함께 들어갈 녀석은 어벙해 보이는 놈이었다. 얼굴은 공대생 멸치처럼 못생겼고 코 위에는 안경을 쓰던 자국이 짙게 남아있었다. 나름대로 인상을 꾸미겠다고 쓰지도 않던 렌즈를 끼고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정장이 안 어울렸다. 중학생이 아르마니를 입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는 소심하고 매력 없는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녀석은 김 씨로 지거국 출신이었다. 스펙은 착실했으나 매번 떨어지다 보니 자신감이 바닥을 친 취업준비 1년생이었다. 역시 간판이 후달리는 걸까요? 김의 물음에 나는 솔직히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하지만 본심은 달랐다. 간판이나 스펙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애당초 사람을 뽑질 않는 게 문제지. 질문 몇 개로 제대로 된 사람을 가려낼 수는 있나? 어차피 면접은 운빨좆망겜이다. 단지 성공 확률이 양심 출타 수준으로 낮을 뿐. 그러나 이런 말을 굳이 해줄 필요는 없었다. 김은 그대로 간판을 신경 쓰며 주눅 들어 있으면 족했다. 잔인한 남자라 나를 욕하지 말아 주길. 밥그릇이 작으면 경쟁은 치열해지는 법이다.

  면접은 예상대로 순조로웠다. 김은 묻지도 않은 학교 얘기를 꺼내며 본인의 콤플렉스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나는 그걸 보며 한층 여유롭게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면접관이 그걸 물었다.

  "자네는 집이 서울인데 울산까지 올 수 있겠어요?"

  "기숙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숙사야 있죠. 그런데 근무하다가 힘들다고 서울 보내 달라고 그러는 건 아니죠?"

  "군대도 다녀왔는데 기숙사 생활이야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다른 회사가 서울에서 근무시켜준다고 경력자 구하면 이직해버리고... 그러면 안 됩니다?"

  박이 알려준 멘트를 써먹을 기회가 왔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여자를 사귀어왔지만, 한 번도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재치 만점. 의미 만점. 발성 만점. 이보다 완벽한 멘트는 없었다.





  그런데 면접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안경을 벗더니 눈을 비비고는 이미 많이 벗어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잠시 후 한숨을 푹 꺼지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래. 여자를 많이 사귀었다고?"

  "네?"

  "아... 아닐세."

  그게 마지막 질문이었다. 이후로 면접관은 나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찌그러졌던 김은 평정심을 찾고는 유창하게 답변하기 시작했다. 면접이 거의 끝날 무렵 면접관이 김에게 물었다.

  "그쪽은 대학 때 연애 안 해봤나요?"

  "네. 고백은 많이 해봤는데. 다 차였어요."

  김은 못생긴 얼굴로 멍청한 웃음을 헤실헤실 흘렸다. 이를 바라보는 면접관의 눈가가 어딘가 모르게 촉촉하게 느껴졌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2주가 지나고 문자가 도착했다.

  "당사의 사원 모집에 관련한 면접에 참석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귀하의 인상적인 면접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들로 인해 합격하지 못하였음을 통보 드립니다. 아쉽지만 귀하의 면접 참석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 드리며 앞으로의 귀하의 취업에 좋은 결과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박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그놈이 괜히 지 애비한테 빌붙어 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젠장. 여자랑 손 한 번 잡아본 적도 없는데.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 왜 바보같이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





Written by 충달 http://headbomb.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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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스
18/03/19 06:58
수정 아이콘
그 대답 때문이 아니라는 추측이.
솔로몬의악몽
18/03/19 07:08
수정 아이콘
으엌
Semifreddo
18/03/19 07:09
수정 아이콘
크크 재밌게 잘 봤습니다
솔로13년차
18/03/19 07:14
수정 아이콘
여자를 많이 사귄 건 문제가 아니다. 애당초 사람을 뽑질 않는게 문제지. 그러나 이런 말을 굳이 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이는 그대로 동정을 신경 쓰며 주눅들어 있으면 족했다. 잔인한 남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 잠시 너를 위해 댓글을 택한거야.
마스터충달
18/03/19 09:39
수정 아이콘
잊지는 마! 내 댓글을! 추천은 내 안에 있어~
포도씨
18/03/19 09:45
수정 아이콘
길진 않을거야 통장이 깡통되기까지 영원히~
목표는63kg
18/03/19 07:39
수정 아이콘
ㅠㅠ
우와왕
18/03/19 08:45
수정 아이콘
으악 스플뎀 무엇
최초의인간
18/03/19 09:18
수정 아이콘
사실 샌님처럼 보이던 지거국 김씨가 초인싸 바람둥이 새내기헌터 출신이라면..?!
마스터충달
18/03/19 09:38
수정 아이콘
?!!!
무가당
18/03/19 09:46
수정 아이콘
(수정됨) [면접은 운빨좆망겜이다. 단지 성공 확률이 양심 출타 수준으로 낮을 뿐.] 사이다 X 100입니다. 크크크.

면접관의 컴플렉스를 건드린 주인공과, 컴플렉스를 감싸준 김씨...

면접관이 그런 놈인줄 어찌 알았겠는가..? ㅠㅠ 역시 운빨좆망겜
감전주의
18/03/19 09:47
수정 아이콘
여자를 사귀어 본 적 없는 초식남의 거짓말을 꿰뚫어 본 걸까요.
약간의 오버는 필요하지만 면접은 솔직해야죠.
마스터충달
18/03/19 12:13
수정 아이콘
연애 못 해봐서 걍 심통난 거죠 뭐;;;
18/03/19 09:48
수정 아이콘
크크 웃프네여... 여자라도 많아봤다면야 ㅜㅜ
도롱롱롱롱롱이
18/03/19 09:54
수정 아이콘
"저는 지금까지 많은 여자를 사귀어왔지만, 한 번도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여자를 많이 사귀었다고?"

여자는 "많이" 사귀었는데, 여자가 항상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면 .. 인상과 외적인 부분은 좋을 지언 정 정작 실속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거 아닙니까?
친구 때리러 가야죠!
써니는순규순규해
18/03/19 12:53
수정 아이콘
이거죠
해어지자고 한적이 없는데 많이 사귄거면 하자가 있어서 여자쪽에서 해어지자고 한거 아닙니까?!!
치킨백만돌이
18/03/19 09:57
수정 아이콘
이거 소설 맞죠?
마스터충달
18/03/19 10:09
수정 아이콘
네. 소설 맞습니다. 진짜예요.
사랑기쁨평화
18/03/19 10:12
수정 아이콘
면접은 누구와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면접관이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했군요....
싸이유니
18/03/19 10:48
수정 아이콘
근대 저게 사실이여도 면접관 입장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제주변 친구들중 여수나 울산으로 회사때문에 간 친구들도 모두 결국 여친은 서울에 있을때 대부분 이직 또는 퇴사를 선택하더군요...
주말마다 올라오는것 도 힘들다면서요.
-안군-
18/03/19 11:11
수정 아이콘
면접관: 여자를 [많이] 사귀었다고? (부들부들)
인생은 운빨이죠. 하스스톤보다 더한 운빨존망겜입니다. 크크크크...
18/03/19 23:57
수정 아이콘
이미 많이 벗어진 이마라니..
라울리스타
18/03/20 21:00
수정 아이콘
서울출신이 울산까지 취업을 하려는데 연애를 많이하는 친구다... 지방회사가 싫어할만 했다고 나름 추측합니다. 연애 하기 좋아하는 지방근무 중인 제 친구들은 정말 초인적인 의지로 연애 중이거든요... 크크크

하지만 결론은 면접은 100% 운빨망겜...
마스터충달
18/03/20 21:08
수정 아이콘
공대라 지방 근무자가 많은데 선배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결혼하고 오라고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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