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7/10/19 16:37:15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자주 있는 일, 자주 없는 일. (수정됨)
술을 마셨다. 늘상 있는 일이다. 친구는 또 우리 집 앞에서 자지 말고 집으로 잘 들어가라고 하며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택시를 잡는다. 걷자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취했다. 늦은 시간의 택시는 언제나처럼 짧은 길을 이상하게 우회해가고, 나는 화를 낼 여력도 없이 카드를 찍고 내린다. 아 졸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적당한 곳에 앉는다. 집까지의 거리는 대략 20미터. 20미터만 더 걸어가면 편안하게 잘 수 있는데 굳이 또 길바닥에 앉아 잠든다. 멍청한 일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 사람은 멍청해진다. 애초에 멍청한 사람들이나 술을 그렇게 마신다. 하여 이는 자주 있는 일이다. 그렇게 잠든다. 일어난다. 누군가가 나를 깨우고 있다. 자주 있는 일이다. 술과 잠이 본드처럼 붙어 있는 눈꺼풀을 온 힘을 다해 밀어올린다. 모르는 여자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눈을 뜨자마자 모르는 여자의 얼굴을 본다는 건 역시 대체로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니. 머리를 흔들어 후두둑 술과 잠을 밤 거리에 털어본다. 죄송합니다. 길에 앉아 자는 건 모두에게 죄송할 일이다. 나를 깨운 여자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도 상대방을 빤히 바라본다. 역시, 전혀 모르는 여자다. 그녀는 씩 웃으며 '집에서 창 밖을 보다가 전 남자친구인 줄 알고 내려와봤는데, 그냥 취객이었네요. 아무튼, 일어나세요.'라고 말했다. 이런 일은 자주 없는 일이다. 아, 취객, 이라는 단어는 내가 기억을 재구성하며 선택한 단어다. 술과 잠은 이를테면 옛 사랑처럼 머리를 두어 번 흔든다고 털어내지지 않으니. 그렇군요. 고마워요. 죄송합니다. 나는 되는 대로 말을 늘어놓고 몸을 일으켰다. 뭐가 고맙고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맙고 죄송스러웠다. 우리는 빙긋 웃고 빙글 몸을 돌려 서로 갈 길을 갔다.

나를 깨운 사람은, 얼굴도 목소리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느낌이었는데. 그리고 집 근처 길바닥에 앉아 자고 있는 전 남자친구를 챙겨주려 할 정도로 상냥한 사람인데. 그러다가 결과적으로 모르는 취객을 깨워 집으로 보낸 훌륭한 선행을 하게 된 사람인데, 그런데 어찌저찌 사정이 있어서 누군가와 헤어지게 되었다. 다정함과 상냥함과 별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건 역시 자주 있는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20미터를 걸으며 핸드폰을 확인하니 친구에게 네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전화를 건다. 너 또 우리집 앞에서 잘거 같아서 아까 확인해봤는데 없더라. 잘 들어갔냐? 음. 어. 들어가고 있어. 우리 집 앞에서 잠깐 잤지만. 그렇게 집에 들어와 나는 맥주 한 캔을 까고 두 보금 정도 마시고 잠들었다. 아침에 어제의 일을 되새기면서, 주머니를 확인해보니 지갑이 없어졌다, 같은 뻔한 반전을 내심 기대했지만 다행히 지갑도 핸드폰도 멀쩡하게 잘 있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순해져라순두유
17/10/19 16:45
수정 아이콘
자주 없는 좋은 글이네요
롤링씬더킥
17/10/19 16:4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음란파괴왕
17/10/19 17:00
수정 아이콘
저도 취해서 길바닥에 잠든적이 있었습죠. 그때 절 깨운건 경찰이지만요.
[PS4]왕컵닭
17/10/19 17:02
수정 아이콘
아이디로 그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려다 말았습니다.
17/10/19 17:0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Philologist
17/10/19 17:30
수정 아이콘
제 친구(남성)는 어제 지하철에서 잠든 취객(여성)을 보았는데 성추행으로 몰릴까봐 직접 깨우진 못하고 서울교통공사에다가 카톡을....
17/10/19 17:3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헥스밤님 글은 항상 그 상황의 정서가 그려지는 것 같아 좋네요.
염력 천만
17/10/19 17:51
수정 아이콘
20미터라면 좋은 인연을 다시 만나기에 가까운 거리일까요 좋은 추억으로만 남겨두기에 위험한 거리일까요 크크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소린이
17/10/19 19:16
수정 아이콘
아이고 추운데 주무시다가 입돌아가십니다~
복 받을 여성분이시네요.
17/10/19 20:44
수정 아이콘
반전이 없는게 반전이군요...
윌모어
17/10/19 22:42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헥스밤님 글은 언제나 단어선택이 예사롭지 않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지니쏠
17/10/19 23:4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어요. 몸조심하세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300 [일반] 문제의 성인 페스티벌에 관하여 [166] 烏鳳12892 24/04/18 12892 64
101299 [일반] 쿠팡 게섯거라! 네이버 당일배송이 온다 [42] 무딜링호흡머신8739 24/04/18 8739 6
101298 [일반] MSI AMD 600 시리즈 메인보드 차세대 CPU 지원 준비 완료 [2] SAS Tony Parker 3288 24/04/18 3288 0
101297 [일반] [팁] 피지알에 webp 움짤 파일을 올려보자 [10] VictoryFood3251 24/04/18 3251 10
101296 [일반] 뉴욕타임스 3.11.일자 기사 번역(보험사로 흘러가는 운전기록) [9] 오후2시5252 24/04/17 5252 6
101290 [정치] 기형적인 아파트 청약제도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부분 [80] VictoryFood11473 24/04/16 11473 0
101289 [일반] 전마협 주관 대회 참석 후기 [19] pecotek5930 24/04/17 5930 4
101288 [일반] [역사] 기술 발전이 능사는 아니더라 / 질레트의 역사 [31] Fig.16102 24/04/17 6102 13
101287 [일반] 7800X3D 46.5 딜 떴습니다 토스페이 [37] SAS Tony Parker 5828 24/04/16 5828 1
101285 [일반] 마룬 5(Maroon 5) - Sunday Morning 불러보았습니다! [6] Neuromancer3117 24/04/16 3117 1
101284 [일반] 남들 다가는 일본, 남들 안가는 목적으로 가다. (츠이키 기지 방문)(스압) [46] 한국화약주식회사7925 24/04/16 7925 46
101281 [일반] 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31] Kaestro7240 24/04/15 7240 8
101280 [일반] 이제 독일에서는 14세 이후 자신의 성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303] 라이언 덕후19655 24/04/15 19655 2
101278 [일반] 전기차 1년 타고 난 후 누적 전비 [55] VictoryFood12419 24/04/14 12419 8
101277 [일반]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세계사 리뷰'를 빙자한 잡담. [38] 14년째도피중8586 24/04/14 8586 8
101276 [일반] 이란 이스라엘 공격 시작이 되었습니다.. [54] 키토15645 24/04/14 15645 3
101275 [일반] <쿵푸팬더4> - 만족스럽지만, 뻥튀기. [8] aDayInTheLife5942 24/04/14 5942 2
101274 [일반] [팝송] 리암 갤러거,존 스콰이어 새 앨범 "Liam Gallagher & John Squire" 김치찌개3084 24/04/14 3084 0
101273 [일반] 위대해지지 못해서 불행한 한국인 [24] 고무닦이7618 24/04/13 7618 8
101272 [일반] [강스포] 눈물을 마시는 새 고이(考異) - 카시다 암각문 채우기 meson2971 24/04/13 2971 4
101270 [일반] 사회경제적비용 : 음주 > 비만 > 흡연 [44] VictoryFood7615 24/04/12 7615 4
101268 [일반] 북한에서 욕먹는 보여주기식 선전 [49] 隱患10020 24/04/12 10020 3
101267 [일반] 웹툰 추천 이계 검왕 생존기입니다. [43] 바이바이배드맨7811 24/04/12 7811 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