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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0/01 18:13:18
Name 윌로우
Subject [일반] [이해] 성악 3년
정확히는 3년이 넘었네요. 세월호 사고 있을 무렵 동네 교회 문화센터 성악수업을 나갔으니까요. 그리고 성악적인 소리가 뭔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 게 된 지 일주일 됐습니다. 쓰고 보니 머리로 아는 것도 맞네요. 머리를 진동시키는 게 성악 발성이니까요. 알았다 해도 지난 일주일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둘째 날 셋째 날 매번 느낌을 어렵사리 다시 찾아야 했으니까요. 하루는 감각을 몸에 각인하려 몇 시간 연습했더니 다음 날 목이 갔습니다. 똑같이 성대가 상한 것이지만 노래방에서 악을 쓸 때와는 달리 성대의 마찰이 느껴지지 않아 다음날 말할 때까지 상한지도 몰랐습니다.

중1 음악수업 시간에 슈베르트 가곡 마왕과의 충격적인 만남 이후로 고전음악을 즐겨들었습니다만 성악과 인연이 닿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당시 헤어진 여자친구가 독일가곡을 좋아해서인지, 오페라 일트로바토레를 듣다 에토레 바스티아니니의 절창에 새삼 감탄해서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3년이 지났으나 꼭 불러보고 싶던 슈베르트 마왕이나 모차르트 베르디 아리아는 수업 발표시간에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금세 성악적인 소리가 날 줄 알았으나….

저 자신 음악 재능이 떨어지는 건 진작 알았고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죠. 클래식 기타 몇 년, 바이올린 몇 년, 하지만 솔직히 음반에서 흔히 듣는 소리를 만들 때까지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성악 또한 몇 번이나 포기할 뻔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배우며 얻은 교훈이 도움이 됐습니다. 거북이는 아무리 느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수업만이라도 빠지지 않으려 했어요.

성악은 신체 감각이 절대적이라 발성이론도 아직 완벽히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사람마다 신체구조가 다르므로 접근법도 제각기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설명하는 언어도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선생님을 만나봤지만 정말로 다 다른 얘기를 합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건 굉장한 운이라고 하는데 성악은 덧붙여 자신과 맞는 선생님이어야 하니 더더욱 쉽지 않겠죠. 이제 와 보면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 반복시키는 첫 선생님 가르침이 제일 와닿습니다. 머리만 잔뜩 큰 저는 꾸준히 의심과 회의를 했지만요.

어떤 선생님 말씀이 연세 드신 분들께는 억지로 교정을 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몸이 굳을 대로 굳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죠. 깨닫고 보니 저 또한 그랬습니다. 마치 러너즈하이처럼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만난 날 거울을 보니 눈을 한껏 치켜뜨고 잊더군요. 그동안 소리를 위로 보내려고만 했지 얼굴 근육을 만들 생각은 못 했습니다. 호흡을 마심과 동시에 광대뼈와 위턱 주변 근육이 치켜 올라간 자세가 노래할 준비가 된 모습이었던 거죠.

연습하다 보니 눈을 치켜뜨는 근육도 점차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재밌는 발견은, 눈이 어딘가 모르게 또렷해졌는데 이유인즉 광대뼈 주변 근육이 연습 후에도 계속 들려있었기 때문이죠. 아니 걸려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그것은 제 어릴 적 기억 속의 동그란 눈이었어요. 언제부턴가 표정 없이 사진을 찍으면 화 난 것처럼 나와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는 생각이 납니다. 근육이 광대뼈에 걸린 얼굴은 뭐랄까 자연스럽고 당당합니다.

항상 궁금했어요. 성악 하는 사람 목소리는 왜 특별할까. 전공생이든 입시생이든 만나는 대로 물어봤지만 시원스러운 대답은 들려주지 않더군요. 저도 모르게 달라졌다고. 이제 알았어요, 일단 자연스러운 복식호흡을 차치하고라도 연구개와 얼굴 근육이 열려있으면 소리는 열린 곳으로 갑니다. 마치 고양이가 고개를 좌로 틀면 몸은 좌로 움직이듯 소리는 문 열린 곳으로 나가죠. 엊그제 목이 상한 뒤로 평소처럼 말하기가 불편해서 광대뼈를 들고 조심스레 말해야만 했습니다. 문득 생각나 녹음해봤더니 훨씬 선명하고 부드러운 울림이 있는, 게다가 발음까지 분명해졌더군요. 평소 목소리가 쇠줄에 앰프를 연결하지 않은 일렉기타라면 열린 목소리는 나일론 줄에 울림통이 있는 클래식 기타로 비유할 수 있겠군요.

평소 말하는 습관조차 몸에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시끄러운 곳에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는 것처럼 누구나 자기 귀에 잘 들리도록 말하곤 하니까요. 그만큼 귀에 들리는 소리의 유혹은 아직도 아마 앞으로도 강력합니다.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수년간 들어온 오페라 가수의 진하고 굵은 그 느낌을 쫓아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고 맙니다. 선생님 지적만 해도 수십번 들었어요, 소리 가볍게 내라, 띄워야 한다, 앞으로 보내라, 하지만 어느새 턱에 힘 들어가고 배는 의미 없이 긴장하고 소리는 목에 갇힙니다.

제 언어로 성악 발성을 예로 들자면 사람이 깜짝 놀란 순간을 연상하면 되겠어요. 놀라면 자연스레 몸이 곧추세워지며 복식호흡이 되어 옆구리 등이 팽창하고 눈이 한껏 떠지며 얼굴 근육과 후두가 열립니다. 그러고 나서 풍선을 불듯 바람을 입천장으로 보내면 압력으로 코 위쪽이 진동합니다. 사실 아직도 신기한데, 소리가 제대로 올라타면 밖에는 쩌렁쩌렁 울리지만 내 귀에는 마치 구름을 지나는 듯 흐릿하고 뿌옇게 들립니다.

역시 제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만, 제일 중요한 건 소리가 떠서 흘러야 한다는 것이에요. 어느 순간 흐르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힘이 들어갔다던가 호흡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특히 고음에서 옆구리와 등에 들어찬 호흡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어느새 후두가 올라가 목 잡힌 소리가 납니다. 오래된 숙제이지요.

현재까지 제 발성 루틴은 이러합니다. 1 숨을 들이마심과 동시에 얼굴 조정 2 호흡이 원을 그리며 소리가 흐름 3 힘 들어가지 않는 한에서 적절히 모아줌 4 소리가 가라앉지 않도록 초성 중성 종성 삼단분리

이밖에도 그동안 산개된 단편적인 지식이 아귀가 척척 들어맞기 시작해 하루하루가 새롭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몸이라는 악기를 다룰 줄 알게 된 것에 불과해 고생길은 앞으로가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반복한 지난 삼 년이 별로 후회되지 않는 건 그래도 전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매순간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음악은 삶을 윤택하게 한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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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도사
17/10/01 20:38
수정 아이콘
성악가들의 독특한 목소리라던지, 마술사들의 마술 같은 것들은 사람들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신비함이 느껴지는거 같습니다.

언젠가 윌로우님이 pgr에 노래를 들려주시는 날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윌로우
17/10/01 21:20
수정 아이콘
(수정됨) 마술 좋은 비유네요. 알고나면 별거없지만 솜씨좋게 관객을 현혹시키려면 지난한 연구와 연습이 필요하겠죠. 훌륭한 연주자는 정말 마술사처럼 사람 마음을 뺏어가지요. 아마츄어 콩쿨에 입상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어요. 아마 그때쯤엔 이곳에 자랑해도 됨직하지않을까 싶어요. 생각만해도 부끄럽긴 하네요.
찬양자
17/10/01 22:47
수정 아이콘
바스티아니니를 말씀하시는거 보니 바리톤이신가 봅니다. 대략 생각하고 계신 발성을 보니 꽤 올바르고 건강한 방향으로 가고 계시네요. 좋은 선생님께 배우셨나봐요 크크
말하듯이 노래하라는건 모두 알고 있지만 평소에 본인이 말을 건강하고 올바른 발성으로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저 명제에는 어마어마한 함정이 숨겨져있죠 ㅠㅠ
불어준다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제 느낌을 공유하자면 저는 호흡이 에스컬레이터, 소리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한번 타면 소리가 할일은 없죠. 호흡님께서 다 해주시는건데.. 그 집중력을 잃지 않는게 관건입니다 :) 방금 콩쿨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반가운 글이 보여 댓글 남깁니다^^
윌로우
17/10/02 03:24
수정 아이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말하듯이.. 많이 들은 얘기에요. 선생님이 카푸칠리 흉내낸다고 하시더군요. 아닌데! 바스티아니니인데! 크크. 레가토를 오래 고민했어도 계속 오락가락 했는데 요며칠 호흡이 등에 딱 걸린 느낌이 오고부터 한결 쉬워지더라고요. 그 에스컬레이터 저도 꼭 좀 만들어 타고 싶네요. 콩쿨 다녀오셨다고요? 우와 좋은 결과 있으실 거에요!
친절한 메딕씨
17/10/01 23:00
수정 아이콘
클래식 발성에서 가장 중요한건 역시 호흡..
타고난 목소리야 어쩔수 없겠죠.
근데 이 호흡을 어떻게 해주느냐에 정말 많은게 달라집니다.

악보상의 모든 기교는 거의 모두 호흡으로 다 해결이 됩니다.
윌로우
17/10/02 03:31
수정 아이콘
호흡근육을 단련하는 스타카토 연습이 중요하다는 말은 여러번 들었지만 솔직히 재미 없고 힘들어 소홀했어요. 요며칠 몸으로 깨닫고부턴 가장 시급한 숙제인걸 알겠더군요. 걸으면서도 스타카토 하려고 맘 먹고 있습니다. 마지막 줄 말씀에 새로이 자극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운동화12
17/10/02 01:22
수정 아이콘
응원합니다 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해보는 작은꿈을 갖고있네요..
윌로우
17/10/02 03:37
수정 아이콘
멋진 꿈이네요. 학원에서 현악 배우는 사람끼리 앙상블 수업 받은 적 있어요. 화음이 어우러지는 느낌 정말 또 다르죠. 아마츄어 오케스트라 찾아보면 다양하게 있어요. 보통 써드포지션에 비브라토만 돼도 받아준다고 하니 적극 도전해보시길 바래요. 저도 운동화12님 응원합니다.
정신나간티모
17/10/02 01:42
수정 아이콘
노래 잘해보려고 온갖 삽질을 다 해보고 있는 입장에서 정말 가뭄의 단비같은 글이네요. 간혹 공명이
되기는 했으나 정확한 방법을 몰라 힘들었었는데 광대 얘기를 보고 따라해보니 뭔가 확실히 근육이 자리가 잡히는것같아요. 아! 이거 였구나 하는 느낌이라고해야할지..

밤이라 소리는 내볼수 없지만 앞으로 연습에 더 재미가 붙겠네요. 좋은글 정말 감사합니다!
윌로우
17/10/02 03:46
수정 아이콘
삽질로 치면 전 산 하나 옮겼을 거에요 하하. 제 가장 큰 문제는 여기저기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는 거 같아요. 편하게 노래해야 듣는 이도 편하기 마련인데 말이죠. 거기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생각만 많아 정작 노래는 뒷전으로 밀려나 버리곤 했죠. 아무튼 같은 길 가는 동지 만나 반갑습니다!
17/10/02 16:04
수정 아이콘
호흡이 원을 그리며... 이게 무슨 말이죠? 호흡이 어떻게 원을 그리죠?
윌로우
17/10/02 16:24
수정 아이콘
지라레 - 소리를 둥그렇게 앞으로 보내라 소리를 돌리라는 말을 많이 해요. 실제로 도는 지는 잘 모르겠고 단지 느낌이죠. 저한테는 소리보다 호흡을 돌리는 이미지가 맞더라고요. 목구멍 깊숙히 연구개를 통해 올라온 압력이 두상을 타고 돌아 앞으로 가는 이미지라고 할까요. 말그대로 개인적인 이미지 구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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