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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05 11:14:45
Name 눈시BBbr
Subject 휴전과 고지전 - 7. 최종 공세
1953년 3월, 전선에서는 전투가 다시 시작됩니다. 전초기지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전투의 지속이었습니다. 꽤나 지친 UN군의 태도도 조금씩 바뀝니다. 불모고지의 경우 콜롬비아 대대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지만 굳이 탈환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둡니다. 물론 베가스 고지에서 미 해병대가 많은 피해를 입고 지켜낸 것처럼 지켜낸 경우도 제법 있었지만요.

슬슬 고지전이 또 격화될까 했지만, 공산군은 곳 전략을 바꿉니다. 스탈린의 죽음으로 휴전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더 이상 고지전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죠. 이전의 전투들에서도 지도가 크게 바뀐 곳은 없었습니다. 서로의 주방어선은 굳건했고, 그걸 넘을 정도의 작전을 시도하지 않았으니까요.

대신 그들은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작전을 시도합니다. 그 때는 휴전이 거의 이루어져서 도저히 물릴 수 없을 때가 될 것이었죠. 그렇다고 아예 확전을 할 정도의 강력한 작전은 역시 안 됐습니다. 지도는 좀 바꾸더라도 UN군이 굳이 반격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는 아닌 작전이었습니다. 나름 도박이긴 했지만 계획대로 됐죠.

중공군 최종공세, 53년 하계공세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작은 5월, 3월의 고지전이 서부에 집중된 반면 이 작전은 중부에 집중됩니다. 특히 그들이 노린 곳은 바로 금성돌출부였습니다. 이 곳은 김화의 저격능선부터 수도고지 등으로 이어지면서 좌우의 전선에 비해 최대 10km 북으로 돌출돼 있었습니다. 이런 곳은 포위섬멸하기 딱 좋은 곳이죠. 이 남쪽에는 화천이 있었고, 여기에는 군사분계선 이남에서 하나뿐인 수력발전소가 있었습니다. 이 곳까지 치고 들어가서 먹거나 위협할 수 있는 곳까지 진격하면 한국에 꽤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죠.

거기다 이 곳을 맡은 것은 국군 2군단이었습니다. 계속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에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곳이었죠. 다만 아직까지는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5월의 1단계 작전은 이 곳의 전초기지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빼앗긴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지켜냈죠. 27일로 이 작전은 끝났고, 곧 대규모 공세에 착수합니다. 2단계 작전이었죠.

우선 공격 범위를 늘립니다. 서부의 네바다고지군(베가스고지 등)과 후크고지, 중동부의 854/812 쌍용 고지, 동해안의 351고지였죠. 금성 전투에 집중하기 위해 그 결과를 먼저 적자면, 미 해병대는 베가스 고지 등에서 중공군을 막아냈고, 백마고지 서쪽 화살머리고지에서는 국군 2사단이 막아냈으며, 쌍용고지에서는 812고지를 상실합니다. 마지막으로 동해안의 351고지는 적의 최종공세 때 결국 잃게 됐죠.

이런 가운데서 6월 1일 팽덕회는 확실한 방침을 정합니다. 포로송환 협정이 완료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원래 예정됐던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에 대한 공격방침을 한국군을 위주로 한 공격으로 바꾼다."

휴전에 반대하는 한국 정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준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주공은 60, 67군, 목표는 돌출부 동쪽의 8, 5사단이었습니다. 이 곳은 금성천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동쪽의 5사단은 배수진을 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습니다. UN군에게는 잃을 생각까진 없더라도 이런 게 계속 벌어질 바에야 빨리 휴전해야겠다는 생각을 강요할 수 있었고, 국군에게는 한 치라도 더 북쪽을 확보하기 위해 절대 잃으면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만큼 국군을 무력화시키면 한국 자체에 대한 강력한 공격이 될 수 있었죠.

거기다 중공군에게는 아주 좋은 기억들이 있었습니다. 참전 때부터 시작된, 국군의 붕괴였죠. 용문강 전투나 백마고지 전투로 어느 정도 다른 모습을 보여줬지만 붕괴에 대한 기억들은 피아 모두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국군을 더 잘 무너뜨릴수록 더 좋았죠.

이 때 국군은 여전히 고지전에 대비해 각 전초기지에 병력을 나눠놓고 있었습니다. 전 병력의 1/3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문제가 컸죠. 거기다 고지전으로 인해 작은 고지 하나라도 사수한다는 생각이 퍼져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았고, 후퇴를 최대한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고지전에서야 이게 효과가 좋지만 총공격에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죠.

+) 지금 국군도 고지전에 대한 경험과 데이터는 충분해서 이런 교리만 너무 강조합니다. 문제죠 -_-;

6월 10일, 중공군의 작전은 시작됩니다. 현리 전투처럼 국군 2군단이 붕괴되느냐 군단 단위로 잘 막을 수 있느냐의 결전이었습니다. 중공군 입장에서는 붕괴는 아니더라도 좀 밀어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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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해가 지면서 어마어마한 포격이 시작됩니다. 당시 국군은 참 무서운 전술을 쓰고 있었습니다. 방어하기 어려우면 미리 파 놓은 동굴에 숨어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게 되려면 통신선이 살아 있어야 했습니다. (백마고지 때를 기억해 봅시다) 이 때 중공군의 포격은 통신선을 앗아가 버립니다. 아군의 병력은 전초기지의 수만큼 나뉘어져 있었고,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 고립, 격파돼 갑니다. 전초기지 단위의 공격이라 생각해 지원군을 보냈지만 중공군은 후방까지 기습, 주방어선까지 공격해 왔죠. 국군도 급히 포병으로 열심히 공격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5사단은 10일 자정이 돼 가면서 전초기지를 모두 상실하고 주저항선까지 뚫립니다. 이에 급히 예비대인 35연대를 동원, 역습을 준비하지만 실패합니다.

11일이 되면서 군단장 정일권은 예비대인 3사단에서 22연대를 빼 급히 5사단을 지원합니다. 다행히 아직까지 사단 좌측의 36연대는 뚫리지 않은 상태였고, 해볼만하다 여겼죠. 이에 낮에 역습을 가해 고지를 탈환했지만, 저녁이 되면서 다시 적의 집중공격이 시작돼 후퇴하게 됩니다. 이미 피해를 입은 5사단도 힘들었지만, 이 때 22연대는 예비대인 상황이라 병력 중 1/3이 휴가나 외출 중이라 힘이 약했죠.

여기다 사단 방침부터가 지나치게 역습을 중시했습니다. 한 치라도 잃지 않겠다는 의지였지만 적이 얼마나 더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군의 혼란만 가속시켰죠. 어떻게든 병력을 모아 돌격하면 곧 적의 역공에 밀려나게 됐습니다. 이건 13일까지 계속됐고, 14일 새벽 다시 적의 야간 공격을 받으면서 사단이 무너져 버립니다. 14일 자정이 되면서 사단의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 후퇴해야 했죠.

정일권은 더 이상 5사단이 버틸 수 없다고 판단, 금성천과 북한강을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아이슬란드선)으로 철수를 명령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개전 초를 연상시키는 일도 벌어집니다. 아군이 채 후퇴하지 않았는데 미리 북한강의 다리를 폭파해서 남은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헤엄쳐서 강을 건너야 했고, 지원왔던 미 중박격포 대대도 박격포를 모두 파괴한 후 건넜죠.

한편 8사단이 맡은 수도고지에는 12일부터 공격이 시작됩니다. 적 포탄 800여발이 수도고지에 집중됐고, 22:00에 적이 돌격해오기 시작했죠. 여기에 주방어선까지 공격을 당했고, 수도고지의 병력은 동굴로 들어가 진내사격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 포격으로 적의 공격을 늦추긴 했지만 곧 다시 들이닥칩니다. 수도고지는 피탈, 고지를 지키던 11중대는 전멸합니다. 8사단 역시 바로 역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죠.

수도고지를 탈취한 적은 13일 저녁 바로 지형(손가락이요 -_-a)능선을 공격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일 새벽이 되면서 여러 전초기지들이 피탈됐고 주방어선까지 들이닥칩니다. 그 날 밤에는 사단의 우익이 붕괴되고 후방 방어선인 아이슬란드선까지 적이 진출하기도 했죠.

정일권은 이런 두 사단의 상황에 맞춰 모두 아이슬란드선으로 후퇴를 명령했고, UN군 사령부는 국군 2군단의 책임지역을 좁혀 10군단을 북한강 동쪽에 투입합니다. 5사단은 기존 36연대가 방어하던 지역만을 맡게 됐고 3사단이 5사단 지역에 투입됐으며 국군 1군단에서 11사단을 뽑아 2군단의 예비로 두게 됐죠. 또한 미 10군단 예비였던 국군 7사단을 투입합니다.

이렇게 각종 조치를 취해 돌파구의 확장을 막고 포병과 공군(2143회로 1일 최다 출격)의 활약이 계속됐으며, 아이슬란드선에서 방어를 계속하면서 적의 공격이 둔화되기 시작합니다. 18일부터는 전선은 완전히 안정됐죠.

이 때까지 중공군은 13km의 정면에서 4km를 남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들 의도에 비해선 영 성에 안 찼을 겁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휴전회담장에 앉을 생각이었겠죠.

국군은 고지전에서 다시 전면전으로 가는데 익숙하지 못 했고, 제법 많은 문제를 노출합니다. 그리고 적이 너무 많기도 했구요. 여기서 5, 8사단은 7300여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그렇다고 중공군의 피해가 적은 건 아니라서 확인된 사살만 6064명이었습니다.

국군은 잃은 땅을 다시 찾을 것이냐, 공산군은 더 밀고 나갈까 이쯤해서 우리가 이겼다 할까 했을 타이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물론 전세계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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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6월 공세가 끝나가던 18일, 전국의 포로수용소에서 대탈주가 시작됩니다.


반공 포로 석방 사건이었죠.

당시 수용소를 지킨 건 대부분 국군이었고, 명령계통은 군의 정식 체계를 떠나 이승만의 측근과 유일하게 미군이 관리하지 않는 헌병사령부를 통해 내려집니다. 이런 국군의 협조 속에 2만 7천명이나 되는 반공포로가 석방됩니다. 이들은 국민들의 협조 속에 곳곳에 숨었고, 미군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죠.

+) 이 때 웃긴 에피소드가 미군이 지원군을 요청했는데 딱 1명이 오더니 "내가 병력이다. 한 명도 병력은 맞지 않느냐?" 라고 한 것입니다. 모래 한 알로도 백사장이라는 논리도 아니고 (...) 그리고 처칠은 이 소식을 듣고 면도하다 칼에 베였다고 합니다. -_-;

이는 6월 공세로 승리를 자축하고 있던 공산측이 분위기를 눌러버립니다. 특히 중국이 입은 타격이 컸죠. 중국이 시간을 계속 끌었던 건 반공포로 중 많은 수가 대만행을 원했다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놀란 건 미국이었습니다. 이제 막 좀 될 것 같은데 이런 일이 터진 것이었죠.

이승만은 이 일을 모두 총지휘하고 당당히 앞으로 나섭니다. 자기 직속 헌병사령부 외에는 아무런 연관자가 없다는 것으로 국군 전체에 해가 되는 것도 피했죠. 미국은 이승만이 이런 일까지 저질렀으니 정말 따로 북진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게 됐고, 급히 상호방위조약을 위한 실무관리가 한국에 파견됐죠.

이걸로 휴전 이전에 한국과 정말 제대로 얘기를 해야 된다는 걸 말해준 게 됩니다. 이 때까지 한미간에 휴전을 얘기하는 공식적인 자리 자체가 없었다는 문제는 컸거든요. 그저 UN군 사령관이 달랠 뿐, 미국과 한국 사이의 공식적인 합의는 없었습니다. 그제야 급히 한미회담이 개최돼죠. 웃기죠. 다름아닌 적들을 인질로 삥 뜯는 거니까요 (...) 6월 25일 한미회담이 열린 후, 이승만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듯 휴전에 순순히 협조합니다.

중국의 6월 공세와 이 반공포로 석방사건은 모두 계산된 행위였습니다. 이쯤해서 터뜨리면 상대에 타격은 주지만 휴전을 멈출 순 없고, 더 이득을 뜯어내겠다는 계산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언제 북한, 중국으로 강제송환될지 몰라 떨던, 혹은 인민재판에 언제 죽을지 몰라 떨던 반공포로들에게는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마냥 좋게 보긴 힘듭니다. 6월 공세나 석방사건이나 결국 자존심 싸움이었고, 그 때문에 이 때까지도 살아남은 병사들이 더 죽어나갔으니까요. 정치적으로 본다면 어쩄든 서로에게 한 방 먹이긴 했습니다만...

공산측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며 한국이 휴전협정을 확실히 지키게 하라고 미국에 요구합니다. 그리고 한미회담으로 한미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후 미국은 다시 회담장으로 나오죠.

그리고 그 동안 공산군은 다시 공세를 준비합니다. 6월 공세로 인해 얻은 걸 모두 잃었다고 판단했고, 또 다시 얻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의지를 모두 짓밟으려고 했죠.

이렇게 공산군 최종공세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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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작전이 금성돌출부 동쪽만 노리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전체였습니다. 당시 국군은 좌부터 수도, 6, 8, 3, 5사단으로 배치돼 있었고, 중공군은 54, 60, 67, 68군 12개 사단을 투입합니다.

미군은 급히 일본으로 철수할 예정이던 2사단과 187연대를 한국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이건 전선이 더 밀릴 때를 위한 것이었고, 국군이 해결해야 될 문제였죠. 전투 자체는 6월 말부터 7월 10일까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탐색전일 뿐이었죠.

7월 13일, 그들이 옵니다.

시작은 역시 거대한 공격준비사격이었습니다. 특히 돌출부의 좌우를 맡은 수도사단과 3사단에 쏟아졌죠.

여기서 중공군은 아군의 패턴을 역이용합니다. 아군의 진내사격을 노려 그 곳에 화력을 집중하게 한 후 다른 곳을 공격한 것이죠. 수도사단의 경우 26연대를 공격하는 척 하며 1연대를 공격, 1연대는 제대로 맞서보기도 전에 적에게 포위됩니다. 1연대는 대대 하나만 남긴 채 모두 붕괴, 26연대 역시 많은 피해를 입은 채 철수합니다. 여기다 사단장은 여전히 26연대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26연대가 비교적 적은 피해로 후퇴하는 동안 1연대대는 큰 피해를 입게 됐죠. 13일 자정이 되면서 적은 기갑연대본부까지 공격했고, 부사단장이 포로가 됩니다. 기갑연대장 역시 포위망을 탈출하다가 전사했죠.

다행히 26연대가 적은 피해로 탈출했고 기갑연대 1대대가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혼란은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여기에 수도사단이 소속된 미 9군단에서 3사단 15연대(+그리스 대대)를 보내줘 방어할 수 있었고,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는 작전도 실행했죠.

한편 우측의 3사단 역시 집중포격과 함께 적의 공격을 맞습니다. 포위, 통신두절, 고립, 후퇴가 계속됩니다. 3사단의 방어선이 밀리기 시작하자 중공군은 맨 우측에 있던 5사단 역시 공격합니다. 3사단은 금성천 북쪽에 배수진을 쳐 버티려 했지만 이건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죠. 병사들은 금성천을 무작정 헤엄쳐 건넜고, 14일 낮에 정식으로 금성천 남쪽으로 후퇴했지만 혼란을 수습하긴 힘들었습니다. 조공이었던 5사단은 그래도 어느 정도 수습하긴 했지만 적은 금성천을 건너 공격해오면서 후퇴를 반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돌출부 좌우의 전선이 붕괴됐습니다. 중앙을 맡은 6, 8사단 전체가 포위당할 위기에 처했죠. 사실 포위 이전에 그들 역시 전면의 압력을 견디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6사단은 전방의 5, 6중대의 분투로 사단 주력이 지연전을 펼치며 철수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두 중대는 전멸했고, 9시간 동안 적을 막아낸 중대장 김교수 대위에게는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됩니다. 8사단 역시 큰 피해 없이 철수했죠.


15일, 적은 계속 공격해오고 있었습니다. 아군은 후퇴하고 있었고, 혼란에 빠져 있었죠. 서쪽은 상황이 나았습니다. 미 3사단, 187연대가 투입됐고 국군 9사단이 8사단을 대신해 전방에 투입되면서 주방어선을 어느 정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의 3, 5사단은 계속 밀리면서 백암산까지 피탈, 와이오밍선까지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는 (밴플리트와 3월에 교대) 참모총장 백선엽을 급히 불러 2군단을 맡게 합니다. 백선엽은 테일러의 전용기로 급히 현장에 도착, 군단장 정일권을 달래고 육본 참모부장 유재흥에게 모든 물자를 전선으로 수송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 생각해보면 원래 둘 다 백선엽보다 위였는데 (...)

그는 급히 후퇴한 새로운 방어선을 정해 각 사단에         명령을 내렸고, 전선은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구원투수로 오긴 했지만 그에 비해 안정은 꽤 빨리 찾아왔죠. 적의 압도적인 공격에 붕괴되긴 했지만 더 이상 현리 전투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후퇴하면서도 재편에 성공했고, 중공군은 여기까지 내려오는데도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습니다. 일주일은 가야 될 것 같던 중공군의 공세는 15일에서 16일이 되면서 완전히 멈춥니다. 이제 신병과 물자지원을 받은 국군이 밀고 올라갈 때였습니다.

"그 때문에 국군은 지상군만의 역량으로 중공군의 거대한 공세를 막아야 했다. (중략) 그러나 보란 듯이 국군은 중공군을 막아냈다. (중략) 국군은 더 이상 중공군의 먹잇감이 아니었다."

19일까지, 국군 2군단은 동쪽에서 금성천을 탈환합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습니다. 서쪽의 미 9군단은 방어선을 지킬 뿐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미군은 국군의 추가 공격도 막습니다. 19일에 공산군이 "휴전회담을 종결하자"는 제안을 해 왔거든요.

이렇게 중공군 최종공세는 끝납니다. 국군의 피해는 전사 1701을 포함 12154로, 중공군의 피해는 3만에서 6만 정도로 추정합니다.

미국으로서는 "자 이제 둘 다 할 거 다 했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공산군은 눈엣가시인 금성돌출부를 제거하고 전선을 남쪽으로 밀어서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고, 국군은 더 이상 밀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으니 역시 우리가 이겼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어쨌든 화천까지 밀리지 않았으니 할 말은 있고, 예전에 비하면 강해졌다는 것 역시 보여줬죠. 거기다 미군이 말려서 더 안 한 거라는 핑계도 얻었구요 (...)

하지만 역시 다 끝나가는 마당에 이렇게 해야 됐나 하는 생각은 드는군요. 이 때 밀린 전선은 평균 4km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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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판문점에서는 마지막 조율이 계속됩니다. 공산군은 휴전 조인 식장 건축을 재개했죠. 24일까지 송환될 포로의 수도 결정됩니다. 북한군 6만 9천여명, 중공군 5천여명이 북한으로 가게 됐고, 국군 8186명, 미군 3313명이 남으로 오게 됩니다. 그 외의 송환거부 포로 북한군 7800명과 중공군 14500명은 인도군이 관리, 공산측의 설득과정을 거쳐 54년 3월까지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대다수는 남으로 왔지만 일부는 설득돼 북으로 가거나 중립국으로 간 경우도 있었죠. (광장 기억나시죠?)

그렇게 모든 합의가 끝납니다. 이제 남은 건 조인 뿐이었죠. 1953년 7월 27일, 양측 대표는 판문점에서 만납니다.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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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으로... 한국전쟁 얘기를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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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가루인형형
12/12/05 13:30
수정 아이콘
윽..쓰느라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을 이 글이 아직 무플이라니! 크크
이제 거의 끝나가네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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