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6/02/14 08:13:21
Name OrBef
Subject 이공계의 길을 가려는 후배님들에게..3
3편의 내용은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공계열 연구 활동의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 저번 글에서는 '사회적 가치'라고 썼던 것 같습니다만, 머리속에서 글을 어떻게 써볼까 조금 생각해보니 '사회'라는 것에 대한 어느 수준의 정의가 없이는 '사회적 가치'라는 말을 쓸 수가 없겠더군요. 해서 좀 더 포괄적으로 '의미'라고 뭉뚱그렸습니다.

제 글을 이번 편까지 계속 봐주시는 분이시라면 일종의 '친구'관계가 수립되었다고 봅니다. ( 물론 친구라고 해서 의견에 일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써나가는 이런 저런 생각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 따라서 1,2편에 비해 훨씬 더 개인적인 글이 될 이번 3편에 대해서도 큰 무리없이 보아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_^

이공계열의 길을 자신의 인생으로 잡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수많은 요소들 - 남보다 잘할 수 있는가, 월화수목금금금이 크게 싫지 않은가, 개나소나 우리를 공돌이라고 부르는 현실을 웃어넘길 수 있는가 -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내 삶에 의미'를 주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건 비단 이공계열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농부는 농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술가는 창작 활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공계열이기때문에 특별히 발생할 수 있는 애로사항은 뭘까요? 그건 이공계열 학문 및 산업활동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러나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쉽게 느낄 수 없는,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이공학을 정의하자면
이학 - '물질계를 서술하려는 모든 활동'
공학 - '알고있는 이학적 지식을 통해, 인간에게 보다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활동'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게 다른 학문 및 예술과 뭐가 다를까요? 일천한 제 지식을 그나마 활용해서 생각해보자면,

문학 - '삶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문자를 통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한하는 활동'
사회학 -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활동'
신학 -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알아나가는 활동'

짧게 얘기하자면 저런 식이 될겁니다. 이런 식으로 이공학을 제외한 다른 학문들을 열거해나가다 보면,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학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떤 해답도 주지 않고, 공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로 행해진다는 점' 입니다. 즉, 인간이 인간이게 해주는 두가지 측면 - 문명 과 문화 - 중에서 이공학은 전자에만 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전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크게 상처가 됐었습니다. 완전히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죠.

'도대체 난 왜 태어난거지?'
'난 왜 공부를 하지?'
'이 활동을 통해 xx전자가 돈을 벌던 말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일까?'
'난 결국 월급만 받으면 땡인건가?'

같은 의문이 끊임없이 생기게 되고, 연구 활동을 통해서는 저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절대로' 구할 수 없습니다.

예술이나 인문학은 조금 다릅니다. 저런 끊임없이 생겨나는 질문들에 대한 성찰과 탐구가 바로 자기 직업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공학은 '삶에대한 본질적인 성찰'이라는 부분과 '살면서 실제로 행하는 일'의 사이에 어쩔수 없이 괴리가 존재합니다.

이 괴리에 대한 해답은 결국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해답은..

개인적으로, '나는 왜 사는가?' 같은 질문은 평생 자신에게 해봤자 쓸데없는 짓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애초에 틀린 전제를 깔고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해답이 나올 수 없다는 거죠.

왜 라는 질문은 당위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외부에서 찾는다면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이 외부 요인에 대한 노예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내심 인정하는 것이죠. 자기 영혼이 소중하고 자기 자유가 중요하다고 믿으면서 삶의 의미를 책이나 강연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알려주길 원한다면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은가..?? 이게 제 생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즉, 저 질문은 '저 돌멩이는 저기 있어야만 하는가?' 만큼이나 무의미한 질문인 겁니다. 그 돌멩이는 '거기 없어도 됩'니다. '나는 왜 사는가?'를 이젠 '나에게 꼭 이렇게 살아야 될 이유는 없었다'로 바꿀 수 있네요.

이 시점에서 수많은 순수 청년들이 자살도 하고, 온라인 게임에 빠져서 5년씩 날리기도 합니다. 애초에 '의미'라는게 없는 인생, 왜 지금까지 그렇게 아웅다웅했는지 억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나에게 꼭 이렇게 살아야 될 이유는 없었다' 라는 말은 '난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되는거다'라는 생각의 출발점이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겠죠.

제게 있어서 '원하는 것'은 제게 '재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뭐가 재미있었는가 하면, 개인적으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그중에서 제일 잘하는 것 - 을 최대한으로 발현해보는것.' 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인류라는 종이 가지고 있는 '문명'이라는 탑을 좀 더 쌓아올려보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게임'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이고, 후자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확인하는 행위였습니다.

생물은 물질계의 기본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위배하려고 투쟁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생물은 여러가지 해답을 찾아냈는데, 무생물과의 경계점을 모호하게 가짐으로써 생명력을 최대화한 바이러스부터, 물질계의 모든 것을 '알아냄'으로써 물질계의 한계를 돌파해보려는 인간까지가 그 모든 가능성이죠.

이러한 인간이 생물로서 가지고 있는 '멸망에 대한 끝없는 투쟁'이라는 속성, 그리고 '생물로서 가질 수 있는 진화의 한계속도를 넘어선 문명이라는 새로운 무기' 라는 인간 특유의 속성.... 생각만해도 피가 끓지 않습니까?

언젠가 인류라는 생물 집단이 '공간'이라는 실체를 정복하여 omnipresent 해지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시간'이라는 실체를 정복해서 eternal 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전자회로와의 접속을 통해 탄소베이스 생명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앎에 대한 끊없는 추구끝에 물질로서의 인간이라는 기본 전제를 넘어설 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저런 수많은 가능성을 향한 인간의 등정 ( 설령 그 끝이 종의 소멸이라고 할지라도 ) 에 모래알만큼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믿고있고, 그 신념이 저로하여금 이 분야의 연구가 '의미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원동력입니다.

다른 분들도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3편까지, 특히 매우 길고 난잡했던 3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 3편을 세배정도 길게 써야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 이상 길게쓰면 사정없이 '뒤로'버튼을 누르실 것 같아 여기에서 줄입니다. 추가적인 토의는 댓글에서 해보고 싶습니다.

뱀다리 :

오사마구라덴님께 드리는 대답은,

The ascent of man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브로노프스키씨가 TV 시리즈물로 제작했던 내용을 다시 엮은 것으로서, 불의 발견부터 언어, 농업의 시작등, 인간이 좀 더 다른 존재로 올라섰던 순간들을 하나씩 서술해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읽어보시고, 그 인간의 등정에 전율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이공학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러든지 말든지.' 라던가 '이게 꼭 인간이 ascend 한건가? 그건 누가 정하는건가?'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면, 뭔가 다른 길을 찾아야겠죠.
* 메딕아빠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6 08:02)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S&F]-Lions71
06/02/14 10:12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즐거운하루
06/02/14 10:26
수정 아이콘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 이걸 찾아서 그 일에 몸담고 그 일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면, 바랄 게 없을 거 같습니다.
06/02/14 10:37
수정 아이콘
3배가 아니라 10배가 되어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짜그마한 시인
06/02/14 10:38
수정 아이콘
멋진 글!
나루호도 류이
06/02/14 11:29
수정 아이콘
소개해주신 책 말인데요. 번역본은 없나요? 그리고 저런 종류의 책을 더 알고 계시다면 좀 더 소개해주시면 좋겠네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구요^^
06/02/14 12:05
수정 아이콘
(Dizzy님 의견)++; // Your articles are really excellent!
// I would recommend them to anyone.
06/02/14 12:24
수정 아이콘
나루호도 류이치님/으음.. 저는 86년 판본인가.. '인간 등고'라는 책으로 봤구요, 아마 요즘에는 '인간 등정의 발자취'라는 책으로 나올 거에요. 20년 가까이 된 책이기 때문에 사실은 조금 지루한 면도 있을것 같습니다. 으음.. 다른 책은.. 조금 생각해보고 다음 4편을 쓰게 된다면 거기 뱀다리에 쓰겠습니다 ^_^
나루호도 류이
06/02/14 12:2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저런 종류의 책이라면 좀 재미없게 씌여진 책이라도 재미있게 읽을수 있을듯 하네요. 저런 주제에 워낙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죠.
윤성민
06/02/14 18:01
수정 아이콘
글쓴이분의 이름검색해봤는데 어째 2편은 안보이네요.
06/02/15 00:01
수정 아이콘
김재훈
06/02/16 12:21
수정 아이콘
어떻게 무었을 위해 살것인가와 마찬가지로 정말 만족하는가도 중요한거 같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760 피의 적삼 - 완 [8] 눈시BBbr10209 13/01/25 10209
1759 피의 적삼 - 3 [11] 눈시BBbr9276 13/01/23 9276
1758 피의 적삼 - 2 [14] 눈시BBbr8482 13/01/23 8482
1757 피의 적삼 - 1 [10] 눈시BBbr9425 13/01/20 9425
1756 [LOL] 솔랭에서 애쉬로 살아남기 [26] 미됸13248 13/01/25 13248
1755 여고생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 Fin [48] par333k10290 13/01/20 10290
1754 여고생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5 [17] par333k8712 13/01/20 8712
1753 여고생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4 [18] par333k9597 13/01/19 9597
1752 여고생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3 [18] par333k9599 13/01/19 9599
1751 여고생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2 [20] par333k9659 13/01/18 9659
1750 여고생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1 [11] par333k10728 13/01/18 10728
1749 [기타] 의식의 틈새 [24] The xian10326 13/01/15 10326
1748 [야구] 역대 최고의 제구력, 팀을 위해 불사르다. 이상군 [12] 민머리요정11695 13/01/14 11695
1747 추억의 90년대 트렌디 드라마들 [98] Eternity40104 13/01/12 40104
1746 [기타] 길드워2 리뷰 [19] 저퀴11655 13/01/14 11655
1745 [스포유,스압]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는가? [17] Alan_Baxter10923 13/01/11 10923
1744 월드오브탱크 초보자의 간단한 소감. [43] 구구구구구13483 13/01/08 13483
1743 한국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 [55] 절름발이이리21033 13/01/09 21033
1742 [스타2] 자유의 날개 캠페인 공략 (2. 대피, 악마의 놀이터) [10] 이슬먹고살죠11364 13/01/08 11364
1741 [스타2] 자유의 날개 캠페인 공략 (1. 마 사라 임무) [25] 이슬먹고살죠12417 13/01/06 12417
1740 컴퓨터 부품 선택 가이드 [72] Pray4u16273 13/01/06 16273
1739 [스타2] 자유의 날개 캠페인 최후의 임무 공략 [11] 이슬먹고살죠10543 13/01/06 10543
1738 우리 아파트 물리학 고수님 [34] PoeticWolf12281 13/01/02 1228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