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70년을 살면서 눈 똥의 질감과 표정은 다양하다. 아침에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어떠한 표정의 똥이 나올는지를 미리 알 수 있다 창자 속의 풍경이 고압전류처럼 몸에 전달되므로, 이 예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다. 이런 똥 저런 똥을 일일이 다 들추어 보인다는 것은 못할 것은 없지만 비루하고 불결한 짓일 터이므로 가장 슬프고 괴로운 똥 한 가지만 말하려 한다.
생애가 다 거덜난 것이 확실해서 울분과 짜증, 미움과 피로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별수없이 술을 마시게 된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의 이야기다. 술 취한 자의 그 무책임하고 가엾은 정서를 마구 지껄여대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지껄이고 낄낄거리고 없는 사람 욕하고 악다구니하고 지지고 볶다가 돌아오는 새벽들은 허무하고 참혹했다. (나는 이제 이런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에 머리는 깨지고 속은 뒤집히고 몸속을 쓰레기로 가득찬다. 이런 날의 자기혐오는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완성된다.
뱃속이 끓어서, 똥은 다급한 신호를 보내오고 항문은 통제력을 잃고 저절로 열린다. 이런 똥은 힘을 주어서 짜내지 않아도 새어나온다. 똥은 대장을 가득히 밀고 내려오지 못하고 비실비실 기어나오는데, 그 굵기는 국숫가락 같다. 국숫가락은 툭툭 끊어진다. 슬픈 똥이다 간밤에 안주로 집어먹은 것들이 서로 엉기지 않고, 제가끔 반쯤 삭아서 따로따로 나온다. 소화되지 않는 김이 변기 물 위에서 시커멓게 뜬다. 가늘고 무기력하고 익지 않은 날똥인데, 이 무력한 똥의 악취는 극악무도하고 똥과 더불어 나오는 오줌은 뿌연 구정물같다. 이런 똥은 평화로운 구린내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덜 삭은 원료들이 제가끔의 악취를 뿜어낸다. 똥의 모양새는 남루한데 냄새는 맹렬하다. 사나운 냄새가 길길이 날뛰면서 사람을 찌르고 무서운 확산력으로 퍼져나간다. 간밤 술자리에서 줄곧 피워댔던 담배 냄새까지도 똥냄새에 배어있다 간밤에 마구 지껄였던 그 공허한 말들의 파편도 덜 썩은 채로 똥 속에 섞여서 나온다. 똥 속에 말의 쓰레기들이 구더기처럼 끓고 있다.
저것이 나로구나. 저것이 내 실존의 엑기스로구나. 저것이 내 밥이고 내 술이고 내 몸이고 내 시간이로구나. 저것이 최상의 포식자의 똥인가? 아니다. 저것은 먹이사슬에서 제외되지 않기 위하여 먹이사슬의 하층부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자의 똥이다. 밥이 삭아서 조화로운 똥으로 순조롭게 연결되면서 몸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밥과 똥의 관계는 생계를 도모하는 신산에 의해 차단되거나 왜곡된다. 이 똥은 사회경제적 모순과 갈등이 한 개인의 창자 속에서 먹이와 불화를 일으켜서 소화되지 않은 채 쏟아져 나온 고해의 배설물이다. 그 똥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김수영이 저걸 봤다면 뭐라고 썼을까, 김소월, 서정주, 윤동주, 청록파들은 뭐라고 썼을까를 생각했는데,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똥을 누는 아침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하였다. 아, 이런 썩어빠진 삶, 반성 없는 생활, 자기연민과 자기증오를 좌충우돌하는 비겁한 마음과 작별하고, 삶의 건강과 경건성을 회복하자고 나는 날뛰는 똥냄새 속에서 맹세했다. 맹세는 비통했고, 작심삼일이었지만 그 맹세에 의해 나는 나 자신을 응시하는 또다른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요즘에는 이런 똥을 거의 누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똥은 다소 안정되어갔다. 자아와 세계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져서 나는 멍청해졌다. 이 멍청함을 노혼이라고 하는데, 똥도 노흔이 왔는지 날뛰지 않는다.
똥이 편안해졌다는 것은 나이 먹은 나의 이야기일 뿐이고, 지금 동해에서 해가 뜨는 매일 아침마다 이 나라의 수많은 청장년들이 변기에 앉아서 내 젊은 날의 아침처럼 슬픔과 분노의 똥을 누고 있다. 밥에서 똥에 이르는 길은 어둡고 험하다